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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58화 (258/258)

#258화. 새로운 시작 (2)

주어진 시간이라는 말에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한 결말로 향하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듯 섬뜩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난 원장님을 믿었고, 또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 박하사탕을 하나 꺼내 물고 원장님의 말을 경청했다.

원장님의 말은 이러했다. 드래곤 로드와 그를 따르는 드래곤들이 기를 쓰고 자신을 압제한 건 드래곤은 동면에 들면 제 의지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면에 든 드래곤들은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는 이상, 주어진 시기를 모두 채워야만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원장님은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며, 보다 비밀스럽게 행동할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 될 거라고 했다.

드래곤 로드에게조차 발각되지 않도록 더욱 은밀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정도 남았나요?”

난 구체적인 시간을 물었다.

그러자 원장님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시간의 유동성을 고려하더라도, 일백 년 이상.”

예상외의 시간에 난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충분한 시간이네요.”

“로드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용성이 아닌 ‘흐르는 시간이 불규칙한’ 세계에 둥지를 틀었어요. 이제 내 결계의 보호도 받지 않으니 그들은 꼼짝없이 백 년 이상 잠에 빠져 있겠죠. 어리석은 자들. 백 년이란 시간은 그사이 대전이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긴 시간이니 당분간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면 될 거예요. 드래곤에게 대처할 방법조차 우주가 합해진다면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원장님은 일단 대전이의 대비에 집중한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길, 우주는 무한해서 드래곤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며, 대전이로 인해 합해지는 차원들을 지켜보다 보면 100년 안에 드래곤 로드마저 대처하는 방법 또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느긋한 전제였다. 너무 느긋해서, 끽해야 30년을 산 나로선 꽤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백 년이라니, 깊게 생각할수록 황당하다. 어떤 사람의 무병장수가 내겐 위협을 대처하는 기간에 불과하다니. 인간으로서 정말 허무하다.

물론 내가 인간을 벗어난 지 한참 지났어도 말이다. 아직 느끼진 못하고 있으나 어차피 천계에서 섭취한 ‘반도’로 인해 내 수명은 평범한 인간의 수십 배가 되었다.

어쩌면 백 년의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백 년은 원장님과 같이 지내야 하겠지.

그사이 비명횡사할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원장님은 내 삶에서 가장 오래 안 존재가 될 것이다. 문득 이전에 엘프 카르네에게 내가 드래곤의 가디언임을 밝혔을 때, 무척 놀라워하며 날 동정하던 시선이 기억난다. 그리고 용성에서 마주했던 수백 년, 수천 년을 드래곤의 가디언으로 살아왔던 자들이 생각났다.

드래곤의 가디언이란 게 주어진 임무와 책임이 무지막지한 것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단지 드래곤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무척 벅찬 일이다. 난 과연 드래곤과 장단 맞추며 백 년을 살아간 자신이 있을까?

용성에서 있었던 판단은 옳았다. 같은 공간에서 백 년 이상 지내야 할 대상과 껄끄러운 관계였다면 드래곤 로드가 깨어나기도 전에 숨 막혀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뺨에 하길 다행이다.

“백 년이나 남았는데 며칠 동안은 놀아도 되죠?”

“이번 일은… 비슷한 상황이 오면 절대 다시는 이런 무모하고 멍청한 짓 하지 말라고 하고 싶으나, 솔직히 말할게요. 잘하셨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덕분에 난 또다시 기회를 잡게 되었어요.”

보통 원장님은 감사를 표할 때 두둑한 돈 봉투나 마도구 혹은 기타 물질적인 보상과 휴가 따위를 줬으나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우선 허리를 숙여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난 드래곤이 아니지만, 그들 종족과도 엮이며 얼마나 자긍심이 강한 생물인지 알았다.

드래곤이 고개 숙여 인사한 건 가치로 따지면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이다. 난 내색하지 않았으나 무척 뿌듯했다.

마물원 입사 초기, 어리바리 떨다가 겪은 수모를 생각하면 대단히 발전했다. 이제 나는 당당하고 믿음직한 가디언으로서 내 인격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원장님은 더불어 한 달의 휴가를 줬다.

“복귀하시면 바빠질 거예요. 밀린 일이 산더미야, 한 달 뒤쯤이면 삼혼三魂호수 청어들의 산란기이니 다정 씨 도움이 필요해요.”

“왜 유령청어들의 산란기에 제 도움이 필요하죠?”

“저번 일을 교훈 삼아 이번엔 개체 모두 살려 보려고 하거든요.”

“어떤 방법으로요?”

“저조차 어떤 방법으로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유령청어만이 가지는 기이한 특성. 우주에서 유일하게 다정 씨만이 만들어 낼 수 있었잖아요. 유령청어의 모유.”

“아, 젠장.”

난 굉장한 불길함에 휩쓸린 나머지 심지어 젖꼭지가 마비되는 듯 아파졌다.

어쩌면 백 년 동안 난.

그 오랜 시간 동안 난.

숭고하지만.

내 자아의 존엄성이 붕괴하는 행위.

마물들의 ‘출산 도우미’가 되어야 할지도 몰라.

*

다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길을 걸었다.

그는 지금, 모든 게 즐거웠다.

무모하기만 했던 계획이 성공하여 원장을 구하고, 사소하지만 떨리는 보상도 받았다.

그동안 밀린 쇼프로그램과 만화책을 보며 혀를 즐겁게 할 음식들을 먹고자 했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도 사기로 했다. 그는 특정 브랜드의 맥주를 즐겨 마셨다. 누군가는 밍밍하다며 폄하하지만 가벼운 목 넘김이 좋았다.

그는 평범하게 돌려진 삶이 즐거웠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동안 이 평범한 즐거움이 지속할 거라는 게 행복했다.

다정은 광대한 존재력으로 초월자의 반열에 올랐고.

힘을 드러낸다면 인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지녔으며.

사악한 벌레의 파고듦과 타락한 속삭임에도 자아를 잃지 않는 굳건한 정신을 지녔으나 결국 그는 인간로서의 부족함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교감의 힘으로 많은 감정이 과도하게 주입되어, 오히려 결핍된 그의 감정은 많은 걸 갈구했다.

겉으론 평범한 사회적 관계를 지닌 다정이었으나, 그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사적인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남을 원한 건 필요에 의해서, 타의에 의해서 등 어떤 목적을 둔 접촉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순수하게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서 연락처를 찾아보지 않는다.

“챔스 우승에 실패했군. 위로라도 해 줄 겸 놀러나 갈까.”

편의점에서 그는 진열대에 놓인 스포츠 신문을 봤다.

잉글랜드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축구 팀이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에 그쳤다는 기사가 일면에 있었다. 다정은 기사를 보고 유럽식 주점에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원탁의 기사들이 생각났다.

그때 이후로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었으나 다정은 왠지 그들과 술잔을 나누고 싶어졌다. 스포츠신문과 맥주를 산 다정은 편의점에서 나왔다.

그는 항상 홀로 보내던 휴가를 이번엔 다르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정은 그런 생각을 하자 뜻밖에 만날 자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알게 모르게 자신과 엮였던 인연들을 생각하자 다정은 왠지 마음이 꽉 차는 것 같았다.

그를 바꾼 계기는 많다.

‘두 개의 본질’을 찾았던, 그가 모르는 계기도 있었으며.

마물원 일을 하면서 다양한 의지를 갖춘 자들과 엮이며 가지고 있던 생각이 달라진 것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큰 계기는 하나였다. 용성에서의 일들로 확실해진 자기 마음.

유치하고, 감정적이며,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인어공주’처럼 동화 속에서도 물거품처럼 덧없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 하나로.

*

다정은 편의점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까지 행복했던 기분이 늪에 집어삼켜진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손에 쥔 편의점 비닐봉지를 떨군다. 맥주가 터져 거품을 쏟아내지만, 다정의 신경은 오로지 다른 곳에 있다.

다정은 원망스러웠다. 사소한 행복이 곧 앞에 있었다.

장난감과 피규어로 꾸며 놓은 방의 침대에 누워 맥주를 마시며 밀린 드라마를 보면서 휴가 계획을 짜기로 했는데. 어쩌다가, 빌어먹게도 몸을 휘감는 끈적한 불길함이 갑작스레 덮쳐 온다는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괜찮으냐고 묻지만, 다정에겐 작은 소음으로 들렸다. 그는 이내 용기를 내어 천천히 편의점 바깥으로 나갔다.

방금까지 기분 좋게 와 닿던 선선한 저녁 공기는 없었다. 풍경은 그대로지만, 다정은 늪에 빠지고 있었다.

그는 일상에서 격렬한 공포를 느꼈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었으나 다정은 알았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악랄한 비극이 곧 자신을 찾아 오림을.

몸이 떨렸다. 두 눈이 따갑다. 그는 공포에 오염된 자들이 으레 그렇듯,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아 냈다.

본능이 경고한다. 당장, 바람조차 닿지 못하는 먼 곳으로 도망치라고. 그러나 다정은 애써 경고를 무시했다.

그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는 반드시 제 목숨을 앗아 갈 불길함의 근원을 향해, 필사의 의지를 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걸음은 다정이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용기를 발휘했던 순간이었다. 첫걸음을 시작으로 다정은 곧 속도를 높여 불길함의 근본으로 뛰어갔다.

그곳은 마물원이다.

마물원에서 믿을 수 없는 악랄한 악의가 느껴졌다. 우주의 모든 사악함이 집결된 것 같은, 상식과 이지를 벗어난 악의는 다정에게 깊은 절망의 수렁을 선사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항상 비극으로 끝날 게 분명하였다.

위태롭다.

다정은 자신의 모든 신체기관과 더불어 ‘힘’들이 두려워하며 떨고 있음을 느꼈다.

눈은 붉게 충혈되고, 귀는 먹먹하다. 손끝은 떨리고 식은땀이 몸을 적신다.

목구멍은 메말라 가고, 피부는 갈라진다. 또한, 자신의 힘이 되어 줬던 마물들의 힘들이 이번에는 거부한다. 그것들이 어떤 의지가 있는 건 아니나, 아득한 존재력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근원적인 현상이었다.

다정은 무엇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속삭이는 소리가 무서웠다. 어떤 상황이 와도 검은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로 남았다.

다정에게 있어 야옹이는 무외無畏의 존재였다. 그러나 이번엔 야옹이조차 말하고 있었다. 그곳은 죽음이니, 가선 안 돼.

아직 초월자의 그릇에 불과한 그가 불길함의 근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 자체가 순리에 어긋난 기적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무모한 용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정은 곧 보게 되었다.

마물원이 있던 자리, 밤이 되어 서울의 하늘은 검었으나 유독 그곳만은 낮보다 더 밝은 태양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 뜬 태양만큼 기괴한 무언가가 상공에 존재했다.

다정은 자신이 느낀 불길함이 무엇인지 깨닫고 전력을 다해 마물원으로 뛰쳐 가지만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걸.

서울의 하늘에 나타난 존재들은 드래곤이었다.

빛나는 날개를 가진 황금의 용을 필두로.

날개를 가진 자들이 수십이나 나타났다.

그로 인해 ‘그림자’와 ‘식욕’을 되찾은 짐승마저 전의를 잃었으나.

오로지 ‘정다정’만은 그곳을 향했다.

다정이 마물원에 가까워질 때, 서울은 점점 변해 갔다.

수십의 드래곤들이 단지 지구에 나타났을 뿐인데, 아직 여물지 않은 차원인 지구는 드래곤들의 기운들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지구에 터를 잡은 드래곤들은 이율배반자였다.

그들의 존재력은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명백한 악의를 지닌 채 대전이의 위험조차 신경 쓰지 않고 강제로 벽을 부수고 들어온 드래곤들의 존재력은 아직 지구가 담기엔 너무나 강대한 힘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용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

파르바티는 슬픈 눈으로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오만한 동족들을 지켜봤다.

드래곤 로드와 그를 따르는 수십 드래곤들. 감히 인과율을 조율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자들이 어긋남을 무시하고, 단지 복수를 위해 지구로 내려오고 있다. 파르바티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예견된 자신의 죽음과 남겨질 자에 대한 걱정보다도 더, 결국 그들이 초래할 대전이의 예측불허한 결말에.

[어리석은 것. 감히 날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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