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1권] 1회-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1/188)



〈 1화 〉[1권] 1회-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남루한 옷차림의 꾀죄죄한 소년은 홀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싼 지저분한 성벽에 흰색 선을 그려 커다란 네모를 만들고 공을 그 한가운데에 계속 맞췄다. 성벽이라고 부르기에는 높이가 10m밖에 안 되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주위에는 같이 놀아줄 또래의 동무 대신 냄새나는 거지와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는 부랑배가 뒹굴었다. 그리고 의욕 없는 얼굴에서 표정이 절대로 안 바뀌는 경비병들이 종종 순찰 때문에 규칙적으로 나타났는데 그들의 발걸음에 맞춰서 헐거이 매여진 소총이 들썩거렸다.

자세를 바꿔가며 공차는 솜씨를 늘려가던 소년은 실수로 공을 성벽 너머로 날리고 말았다. 소년은 당황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개구멍으로 찾아가서 바깥으로 기어나갔다.


오늘 하늘은 맑았다.

바깥으로 나온 소년은 근처에서 진동하는 시궁창의 악취에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잡초조차 살아남지 못한 거친 땅을 헤매는 소년은 오늘따라 공이 보이질 않아 답답했다. 아무래도 떨어진 공이 경사진 곳에 닿아서 굴러간 모양이다.


짐작되는 곳으로 향하던 길에 그는 들개를 만났다. 덩치가 소년하고 맞먹었는데 아마 집 지키는 용도로 길러지다가 버려졌는지 목걸이는 있었지만, 눈은 초점이 혼탁하고 털도 여기저기 빠진 데다 입가에 거품까지 이는 것이 미친개가 분명했다. 소년은 겁에 질렸어도 들개를 자극하지 않도록 침착하게 뒷걸음질을 치면서 말을 걸었다.


“괜찮아 괜찮아.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해.”

“크르르르르르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가 어설프게 말을  탓에 들개의 성질을 돋우고 말았다. 그것이 처음에는 걷더니 갑자기 펄쩍 뛰었다.


“우와아악!”

엉덩방아를 찧은 소년은 머리를 감싸고 눈도 질끈 감아서 일어날 일을 각오했다. 마른 평원 위로 총성이 메아리 없이 멀리 퍼졌다. 소년은 다시 눈을 떴고 들개는 쓰러져서 바짝 말라붙은 흙을 피로 축여주고 있었다. 총소리가 난 곳으로 눈을 돌리니 누군가가 오는  보였다.

남자는 키가 컸으며 머리에는 하얀색 천을 두르고 이상하게 생긴 머리띠로 그것을 고정하고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는 사람은 드물지 않으나 소년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두건이었다. 몸은 폰초 망토로 덮여있는데 자수가 새겨진 천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서 머리만 쏙 집어넣은 거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청바지도 눈에 보였다. 축적된 세월로 물이 빠지고 얼룩이 겹쳐서  어떤 화가도 그림으로는 옮겨내지 못할 정도다. 부츠는 더러웠다.

소년은 자연스러운 두려움으로 차마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그의 가슴께에만 시선을 두었다. 그런 소년을 향해 남자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가까운 성문이 어느 쪽이니.”

목소리가 거슬거슬했지만 딱히 겁주려고 낸 게 아니라 그저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 말투에서는 충분한 친절이 담겨있어서 소년은 품고 있던 두려움을 절반만 덜어내고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바람이 불자 소년은 그의 망토가 펄럭이는 순간 총집에 꽂힌 권총을 보았고 코에는 화약 냄새가 스쳐 갔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는 고무공이 들려있었다. 그가 소년에게 공을 휙 던졌다.


“다음에는 살살 차라.”

그는 감사의 인사 한마디도 듣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이었다.







인간과  외의 수많은 종족이 마족이라 불리며 함께 사는 세상. 마왕은 정기적으로 마족들을 이끌고 인류를 지배하러 정기적으로 전쟁을 치렀다. 인간 측에는 그때마다 홀연히 용사라 불리는 뛰어난 전사가 나타나 위기의 순간을 넘어갈  있었다.

1903년.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된  어언 4년째가 되었다. 마족 땅의 양민들은 이기든 지든 전쟁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원했고 인간들은 또 다른 용사의 등장만을 빌었다. 하지만 총잡이는 용사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고자 길을 걸었다. 용사는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거라면서.

그 믿음은 남자가 성문을 통과하고 6시간 만에 무너지게 된다.








서류, 서류 그리고 서류. 공무원은 책상 위를 점령한 종이 무더기를  아름 들고 종이 상자에 쏟았다. 사무실 벽에는 창문이 없어서 백열전구가 안을 밝혔다. 내부는 비좁기까지 해서 폐쇄공포증 환자가 들어오면 발작 일으키기 딱 좋았으나 그래도 서류로 가득한 책상을 제외하면 난잡하거나 불결한 구석은 없이 청결했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기에 공무원이 말했다.


“다음 사람 들어오시오.”

들어온 남자의 몰골은 그 청결함을 부수러 나타난 침략자로 보였다.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천을 벗자 지푸라기 같은 더벅머리와 까맣게 탄 얼굴이 드러났다. 피부색은 진한 밤색이었는데 햇볕에 타서만은 아니고 남자가 가진 인종적 특징도 겹쳐있었다. 검었지만 흑인의 피부색은 아니다. 공무원은 남자가 무슨 민족인지 몰랐어도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관을 수북하게 덮은 수염들을 보고 있으니 인간이 외모 관리를 안 하고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시험이라도 했나 싶었다. 하지만 두상은 꽤 잘생겼고 이목구비 또한 칼과 같이 선명했는데 피곤함에 찌들었음에도 진지한 눈빛이 맹금류 같았다.

얼굴 밑으로는   없었다. 어깨에 걸쳐있는 망토가 그의 온몸을 가렸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사무적인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앉으시오.”

발음이 공기에 자국을 남길 듯 선명하고 음색은 모래만큼 건조했다. 남자는 방안을 신기해하는 눈으로 둘러보다가 앉으라는 말을 듣고서야 거기에 따랐다. 책상 너머로 마주 앉은 남자를 향해 공무원이 물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소.”


“원정대에 지원하러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떤 거?”

“제일 먼 곳으로 향하는 거.”


“그냥 말씀하시오.”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파티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적막 속에서 전구의 필라멘트가 떨리는 소리만 흘렀다. 공무원은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용사가 되려고 왔다고요.”

상대가 눈썹만 꿈틀거리며 묘한 표정만 짓고 있어서 남자는 답답해졌다.

“왜 그러시죠?”

“마왕은 이미 없는데.”

남자는  말을 듣고 굳어버려서 눈 깜빡거리는 것도 잊어버렸다.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그가 다시 물었다.

“뭐?”

“반년 전에 용사가 이미 나타났다고. 진짜로 몰랐던 거요?”

“마왕이 없어졌다면 전쟁은 왜 안 끝난 거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꽤 멀리서 온 거 같은데 여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1년하고도  달 더. 사쿠라비에서 왔습니다.”


공무원은 그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마족들의 최전선과 우리 측의 최전선을 홀로 걸어서 뚫고 왔다는 뜻인데.”


“물론 낙타랑 말을 탔지요. 일행도 있었고. 지금은 잡아먹어서 둘  없지만.”

“일행을 먹었어?!”

태연하게 식인을 했다고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공무원이 경악했다. 남자는 바로 자신의 말실수를 바로 잡았다.


“낙타랑 말을 잡아먹었다고요. 일행하고는 도중에 헤어졌습니다.”

“아, 그래. 그랬군. 사는 게 다 그렇지. 나가시오.”


남자는 다급히 손을 뻗고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아직 용무가 있어요!”

상대가 너무 필사적이어서 공무원은 평소답지 않게 다시 듣는 자세를 했다.

“그럼 원하는 게 뭐요.”


“연방 보안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공무원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데.”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기회만 준다면….”

“말을 못 알아들었군. 연방 보안관은 제국의 귀족만 할 수 있어. 그런데 아무리 봐도 댁은 귀족은커녕 여기 나라 사람 같지도 않은데.”

남자는 이제 꼭두각시 실에 매달린 껍데기 같은 꼴이 되었다. 그대로 누우면 시체로 오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생기가 없다. 방을 나오는 남자의 처량한 뒷모습을 공무원의 목소리가 마중 보내주었다.


“다음!”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중앙 청사를 나온 남자는 다시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머리끈을 둘렀다. 펼쳐진 풍경은 모조리 회색이었다. 인도를 뒤덮은 타일.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 그리고 아스팔트 도로가 벽돌 타일 도로와 섞여서 깔렸다. 그 안에서 한 줌의 먼지와 흙덩어리만으로 잡초와 이끼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곳곳에 피어있었다.


남자는 아린 속을 달래며 거리를 걸었는데 바로 옆에서 자동차  대가 매연을 내뿜으며 지나갔다. 승합마차도 그 뒤를 쫓듯 지나갔는데 매연 때문인지 말들의 표정이 불쾌해하고 있었다. 자동차와 마차들이 서로 충돌하기 쉬운 도로 사거리에서는 교통 경관이 한복판에 서서 거리가 혼잡해질 때마다 운전사와 마부들에게 호루라기를 불면서 수신호를 보냈다. 사실 거리가 혼잡해지는 이유는 마차와 자동차보다는 아무렇게나 도로를 건너는 시민들이 대부분이다. 건널목이 그어지기는 했으나 다들 무시했다. 다만 남자는 급히  곳도 없어서 천천히 기다리다가 교통 경관으로부터 괜찮다는 신호를 받고 나서야 쓸쓸히 건널목을 건넜다. 도심의 건물들은 4층보다 더 낮은 건물들이 없어서 남자에게는 별세계로만 보였다. 시대가 변할수록 땅만이 아니라 하늘도 좁아져 갔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에는 전쟁 중임을 자각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들은 깨끗하게 다림질된 정장 차림에 보울러나 실크 모자를 썼고 여자들은 외출용 드레스와 프릴 달린 모자를 썼다.  사이를 거지꼴로 지나다니던 남자의 안 그래도 우울했던 마음에는 소외되는 느낌까지 더해졌다.

서민들의 거리로 들어서니 말똥 냄새가 진동했다. 시의 공무원들이 오물을 아무리 치워도 악취까지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재개발하려면 순서가 한참 남은 지저분한 목조건물들을 지나다가 남자의 눈길에 싸구려 술집 하나가 들어왔다. 술집 안에서는 조율이  된 신시사이저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들어가 보니 일단은 아늑했고 어쨌든 말똥 냄새도 없었다. 그는 바의 스툴에 힘없이 걸터앉아 은화 몇 개를 바텐더에게 보였다.


“이거면 얼마나 마실  있지?”


바텐더는 남자의 나쁜 안색과 은화를 번갈아 보고 말했다.

“형씨는 밥을 먼저 먹어야 할  같은데.”

“얼마나 되냐고.”

바텐더는 묵묵히 라벨이 없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과 나무로 만든 잔을 대령했다. 잔은 엎어두었던 걸 며칠 만에 꺼낸 건지 표면에 먼지가 푸근히 잡혔다. 대금을 받은 바텐더는 잔에 술을 따라줬고 남자는 한 모금 마셨다. 맛을 본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이거  탄 거잖아.”


“실피 3개로는 그게 전부야.”

이제는 불평할 힘도 없어서 남자는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질 않는 액체만 입안에서 한참을 머금다가 삼켰다.

“난 사막에서 왔어. 거기 특산물이 뭔지 알아?”

“사막에 무슨 특산물이 있어?”

“저격수. 사막의 전사들은 다 명사수야.”

바텐더는 접대 정신이 빠진 사람이어서 손님의 넋두리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딴 일을 했다.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떠들고 보았다.

“개중에서도 내가 최고였고. 아, 소개가 늦었네. 레스라고 해요.”


레스는 벌써 취기가 도는지 목소리가 떨렸고 말투는 존대와 반말이 오갔다.

“마왕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전쟁이 끝났을 거라고. 난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갑자기 레스가 마왕을 언급하자 바텐더는 자기도 모르게 주의가 움직였다.


“장담한다고요.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게 증거니까. 그런데 빌어먹을 용사가 선착순이었다니!”


“뭔 소리야?”

“마법사도 내가 용사가 될 운명이라고 예언해줬어. 실력도 있었어. 증명만 하면 되는데 마왕 자식이 먼저 죽어버렸다고! 반년만 더 버텼어야지 약해빠진 놈!”


바텐더는 상대의 입을 조금이라도 다물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왕은 안 죽었어. 생포 당했지.”

“난 마왕이 이제는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그거잖아.”

생포되나 죽으나 그에게 달라지는 건 없다. 레스는 잔을 비우고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안타깝지만 어쩌겠어. 남은 인생을 살아야지. 내 원래 꿈이었던 보안관이 되자고 바로 결정했지. 제대로 위임받은 연방 보안관 말이야.”


“그랬군.”


레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바텐더는 레스의 이야기보다는   술에 취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런데 귀족만 보안관이 된다더라. 이게 말이 되냐고? 그 귀족 중에 목숨 건 결투 제대로 해본 놈이 있기나 하겠냐고. 저 국경 너머 황무지에서  달이라도 생활해 봤겠냐고.”

레스의 옆자리에 쓰러져 있던 늙은 주정뱅이가 느닷없이 넋두리에 끼어들었다.

“불평 더럽게 하네. 세상 탓하지 말고 노력하란 말이야. 용사가 두 번 될 몫만큼 진즉에 노력했으면 용사가 됐을 텐데….”


레스가 인상을 구기며 충동적으로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내리자 바텐더가 급하게 물었다.


“잠깐만. 지금 권총 있는 거야?”


“왜.”

바텐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진짜 세상 물정을 모르네. 이제 평범한 사람은 총기 소지가 불법인 거 몰라?”


“하지만 도시로 들어올  몸수색 같은 거 안 했는데.”

“군기가 빠졌으니까 그렇지. 진정하고. 총에 손대지 말고. 그 술 가지고 어서 나가.”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날 쫓아내네.”


레스가 말을 안 듣고 잔에 술을 채우려고 하자 바텐더는 종이로 감싼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서 그에게로 밀었다.


“제발 형씨. 화  풀고.”


이렇게까지 간청하니 레스도 마음이 바뀌었다. 특히 샌드위치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레스는 잔을 엎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샌드위치는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눈물이 나는 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해가 완전히 졌다. 전기 가로등의 창백한 불이 귀신처럼 허공에서 빛났다. 레스는  아래를 걸으며 끼니를 마쳤다.  먹고 남은 포장지는 땅바닥에 버리지 않고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차피 주변이 쓰레기 천지라 쓰레기 하나 더 늘린들 바뀔 것도 없었는데.


묵을 곳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는 계속 정처 없이 걸었다. 우울함이 술기운에 젖어서 그의 영혼과 육신을 짓눌렀다. 생각 안 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주변의 건물은 엉터리로 만들어진 오두막들로 바뀌어 갔다. 아무래도 슬럼가로 들어선 모양이다. 주변의 가로등도 전구가 나간 게 대부분이고 어둑하니 나쁜 짓 당할까 무섭다. 하지만 레스는 신경 쓰지 않고 가던 방향으로 걸었다. 자기 몸 걱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취했다.


사막 출신이다 보니 마실 것을 아끼는 습관이 있어서 술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주변에는 레스하고 비슷한 주정뱅이들이나 종종 보였을 뿐 사람들은 야간 통행금지령에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레스의 머릿속에서 이대로 경관들에게 끌려가 유치장에서 하루 묵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랬다가는 권총 때문에 일이 고약해지겠지만.

 술병을 입으로 기울이며 쓸모없는 생각만 반복하던 중에 레스는 방금 지나갔던 골목에서 생긴 소란을 들었다. 여자아이가 고성을 질렀다.

“이거 놔!”


레스는 고민하지 않고 뒷걸음질로 걸었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가서 상황을 보았다. 사내 둘이 거적때기를 둘러쓴 여자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비싼 정장 차림에 멋진 모자까지 썼다. 분명 남자들은 여기 동네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옷차림은 하는 짓 하고는 여러 의미로 썩 어울렸다.


“아 더럽게 끈질기네!”

“꽉 붙잡아! 또 놓치면 좆된다고!”


하도 시끄러워서 근방 주민들에게 모조리 들렸겠지만 구경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결국 여자아이는 진이 빠져서 저항이 멈췄고 사내는 이때라고 번쩍 들어서 어깨에 짊어졌다. 그들이 레스와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여자아이를 짊어지지 않은 쪽이 멀뚱히 있는 레스를 보고 당황했다.

“뭐야 넌?”


 일에 상관할지 0.5초 정도 고민한 다음 레스는 오른쪽 주먹을 한번 힘껏 움켜쥐었다가 펼치며 손을 풀었다. 손가락과 손목 관절 사이에서 우두둑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면 안 되잖아.”

목소리가 술기운 때문에 우스웠다. 사내들은 그가 너무 같잖아서 화낼 마음도 안 들었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새꺄.”

“그 녀석 보내줘.”

그 와중에 업혀있는 여자아이는 달아나려고 계속 발버둥을 쳐댔다. 여자아이를 들지 않은 쪽이 겉옷을 들춰서 똑똑히 보라는 듯 허리춤에 달린 권총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누군지 모르냐?”


“몰라.”

레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오른손으로 몸을 덮은 망토를 뒤로 넘겼다.

망토 아래에 갈려져 있었던 권총이 밤의 불빛에 닿아 은은한 광택을 일렁였다. 왼손에 든 술병을 위로 힘껏 던지자 상대방의 주목이 자기들도 모르게 그쪽으로 쏠렸다. 그 찰나에 레스의 오른손은 벼락처럼 움직였다. 사내들이 그가 권총을 뽑은  깨닫기도 전에 총성이 골목에 울렸다. 첫발은 방아쇠를 당겼고 이어서 왼손이 벌새의 날갯짓처럼 잽싸게 공이를 때렸다. 그 과정이 너무 빨라 총성이 겹쳐서 한 번으로 들렸다. 바로 앞에 있는 사내의 권총은 총집과 함께 구멍이 났고 다른 총알은 여자아이를 업은 사내의 모자를 날려버렸다. 자기 머리 위로 총알이 스치자 사내는 당황해서 균형을 잃어버리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당연히 업혀있던 여자아이는 땅으로 떨어졌다.

“꺅!”


너무 순식간이어서 다들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몰랐다. 다시 레스를 바라보았을 때는 그가 아까 위로 던졌던 술병이 레스의 왼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내는 술병하고 권총을 같이 들고 서있는 주정뱅이를 계속 바라보다가 결국 도망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승부라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이겼으니 승리의 의식으로 레스는 들고 있는 권총을 멋을 부려서 돌리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여자아이는 레스가 무서운지 몸에 두른 거적때기가 마치 방패라도 되는 듯 필사적으로 붙잡고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는 내심 감사 인사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집에 가.”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레스는 술을 마시고 있다. 호루라기 소리가 계속 가까워지지만 레스는 멍청하게 계속 술만 마셨다. 보다 못한 여자아이는 아까 겁먹었던 모습은 어디 갔냐는 듯 대뜸 달려들어서 그의 옷깃을 붙잡고 끌었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 잡으러 오는 거야!”

“그런가?”

그는 얼떨결에 여자아이가 끌고 가는 대로 달렸다. 들고 있던 술병은 여자아이가 뺏어서 바닥으로 버렸다. 계속 달렸다. 슬럼가는 구조가 굉장히 복잡했기에 숨바꼭질하기 좋았지만 레스에게 문제가 생겼다.

“꼬마야 나 속이 안 좋은데.”

“나 꼬마 아니야!”

그 와중에 불평하는 태도가 앙칼지다. 계속 달렸다. 애를 쓴 보람은 있어서 슬럼가 깊숙이에 들어오고 나서야 추격자들은 그들을 포기했다. 취기가 온몸으로 퍼진 레스는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여자아이는 숨을 돌리느라 헐떡거리며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걸었다.


“아저씨? 자요?”

아무리 기다려도 꿈쩍도 하질 않는다. 여자아이는 쯧 하고 혀를  다음 그를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녀는 도중에 머리를 움켜쥐고는 레스에게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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