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1권] 2회-만사에 공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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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레스는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가 깨지는 아픔을 느끼고 신음 소리를 냈다. 여자아이가 그의 다리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가느라 뒤통수에 구멍이 난 것 같았고 숙취까지 겹쳐서 죽을 맛이다. 그 아픔과 더불어 모르는 장소에서 정신을 차린 두려움이 더해졌지만 어째선지 레스는 상황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눈알만 굴려서 허름한 실내를 느긋이 살펴보았다. 넝마로 만든 커튼 사이로 햇살이 새어왔고 구석마다 세워진 철봉들이 철판 지붕을 짊어지고 있었다. 벽들은 싸구려 나무판들을 이어서 만들어졌으며 마감재로는 점토, 타르, 쇠못, 종이 등등 온갖 재료를 있는 대로 써서 틈새를 막고 보강해두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신문지들이 두껍게 깔려있었다. 엉성하고 초라했지만 어떻게든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한 정성이 느껴졌다.
두통이 심하지만 몸은 다친 곳이 없어서 레스는 일단 일어나보았다. 그의 몸에는 다소 크기가 작은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지저분한 이부자리에서 탈출했다. 방구석에는 그의 발에서 벗겨진 부츠 한 켤레와 권총이 꽂혀있는 벨트가 가지런히 있었다. 맨발로 다가가서 살펴보니 권총과 탄띠에 있던 총알들은 누군가 가져가서 없었다.
묵직한 몸뚱이를 움직여가며 다시 부츠를 신고 벨트도 허리에 찼다. 육체와 정신 모두 상태가 끔찍해서 몸에 걸친 잡동사니들이 평소보다 몇 배는 무거웠다. 레스는 소리 내어 걸어서 방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자아이는 그곳에서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마침 그의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는지 그녀는 일어나서 눈가를 비비며 레스를 쳐다보았다. 레스도 그녀를 보았다.
소녀는 수없이 기워내고 세탁해서 색 빠진 너덜거리는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그런 초라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와 당당한 눈빛에서는 영문 모를 기품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몸집은 레스의 한 팔에 감길 정도로 작고 머리 높이도 그의 명치에나 겨우 닿았다. 피부색이 분칠한 것처럼 희어서 검은색 머리카락과의 대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조그마한 얼굴 위의 이목구비들은 너무 단정해서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았다. 눈동자는 물감을 물에 탄 듯 투명한 붉은색에 동공이 세로로 살짝 찢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여자아이의 양 관자놀이에 난 산양 같은 작은 뿔을 보고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확실히 알았다.
“마족이네?”
“불만이에요?”
목소리는 여자아이다운 고음이지만 말투는 앳된 느낌 없이 성숙하다.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는.
“그냥 그렇다고.”
라고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거실 겸 부엌 겸 식당이다.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선반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유리병들이 가득했고 혼자 사는 지 의자는 여자아이가 쓰는 것 하나뿐이다. 같이 앉을 곳이 없어서 레스는 등에 기대고 있던 벽을 지고 스르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여자아이는 다리를 꼬더니 살짝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저씨는 어제 보안관한테 총을 쐈어요.”
두통 때문에 어제 있었던 일이 기억나지 않았던 레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상황 파악이 됐다.
“그놈들이 보안관이라고?”
“정확히는 부보안관. 아저씨 이제 큰일 났어요.”
레스는 특정 단어가 자꾸 거슬렸다. 그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꼬마야 나 아저씨 아냐. 아직 서른도 안 됐다고.”
“나도 꼬마 아니야.”
“꼬마잖아.”
“당신들하고 우리 기준 합쳐도 난 성년이야. 알고 말해.”
“어. 그래.”
레스도 종족마다 수명이나 성장속도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저런 모습으로 성인이라는 게 믿기지는 않았으나 언행은 분명 어린애가 아니었다. 마족 소녀는 등받이에 팔을 걸고 레스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레스가 술이 덜 깬 걸로 보였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짐 챙기고 도시를 떠나는 게 좋을 걸요.”
그 소리를 듣고 레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겨요?”
“1년 넘게 걸려서 여기 왔는데 하루 만에 이 꼴이 나다니.”
레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팔꿈치를 움직이고 손마디를 접었다 필 때마다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좀 풀고 나서야 레스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야 잠깐만. 어제 내가 너 구해줬잖아. 왜 이렇게 냉담해?”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다른 사람 같은 정중한 목소리와 함께 마족 소녀는 공손히 고개를 꾸벅 기울여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소녀는 팔짱을 끼고 순식간에 원래의 도도한 태도로 돌아왔다. 사람 놀리나 싶었지만 감사를 표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진지해서 레스는 화내기도 어려웠다. 힐난하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게 다야?”
“재워줬잖아요. 나눠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도 없고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저 여자아이는 일단 자신을 하나밖에 없는 이부자리로 데려가서 눕혀주고 자기는 부엌에서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술김에 구해주었다고는 하나 어차피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도 아니니 레스는 여기서 화제를 끊어버리고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로 생각을 돌렸다.
안 좋았다. 노잣돈은 바닥났고 가진 거라고는 권총과 그걸 다루는 손놀림뿐인데 이곳은 총기소지가 불법이란다. 연방보안관도 이제 와서는 동경의 대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체면 구기는 일이었지만 그는 여자아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꼬마야. 아니, 미안. 그러니까 아가씨.”
“왜요.”
“이상한 소리라는 건 알지만 여기서 더 머물러도 될까? 아무리 네가 애처럼 보인다고는 해도 일단은 여자이니 어려운 부탁이라는 거 알지만 내가 지금...”
“그러세요.”
여자아이는 바로 대답했다. 도도한 말투 그대로. 예상외의 반응에 레스는 다시 물었다.
“어? 진짜?”
여자아이는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말없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눈썹만 들어올렸다. 그제야 레스는 자기가 진즉에 그 정도 대접은 받을 자격이 있음을 이해했다. 여자아이의 태도가 하도 매몰차고 건방져서 자기도 잊고 있었다.
도저히 정이 안 가는 녀석이지만 진지하게 미워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다. 레스는 이제 그녀의 정당한 손님이 되었으니 예의를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허공에 두었던 시선을 여자아이에게 향하고 말했다.
“내 이름은 레스. 사쿠라비에서 온 레스.”
그가 자기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쿠라비? 처음 들어보는 곳이네요.”
“여기서 좀 멀어.”
그녀도 팔짱을 풀고 점잖은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아자리라고 부르세요.”
“요즘 마족들이 인간들의 도시에서 사는 일이 흔하니 아자리? 내가 세상물정을 몰라서.”
“밖을 보시죠.”
아자리가 엄지로 자기 뒤에 있는 창문을 가리키자 레스는 거기로 갔다. 바깥에서는 마족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간은 보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이곳은 마족들만 모여 사는 곳 같았다.
“원래 여기 살던 사람들이야?”
“대부분은 외지에서 온 난민들이에요. 제국에서 살던 마족도 있고요. 여기는 황무지로 향하는 국경하고 가장 가까운 도시니까 전쟁이 터지고 나서 다들 자연스럽게 몰렸죠.”
편견이 무너지는 중이어서 아무 말이 없는 레스를 대신해서 아자리가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아저씨는 여기 왜 왔어요?”
◆
아자리는 레스에게 의자를 양보해주고 탁자에 걸터앉아서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 만에 전부 벌어진 일이라고요?”
“어.”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지금까지 지켜온 품위가 뭐였냐는 듯 그녀는 숨이 넘어가라 웃었다.
“꺽! 으끅! 끽끽! 풉. 이건 진짜... 대단하네.”
레스는 뚱한 얼굴로 턱을 삐죽 내밀었다.
“근데 마왕이 잡혀갔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냐?”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고 아자리가 말했다.
“왜요?”
너무 근본적인 사실이라서 레스는 도리어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그야... 마왕은 너희 종족들을 한 곳으로 묶는 정신적인 지주이시고. 최강의 마족이니까?”
아자리는 차분한 말투로 설명했다.
“아뇨, 레스. 그냥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무언가일 뿐이에요. 당신들의 국왕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양민 대부분은 신경도 안 쓰죠. 그리고 별로 쌔지도 않아요.”
“안 쌔다는 건 어떻게 알아?”
마왕이 세계 최강의 존재라는 건 마족과 인간들 통틀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다. 아자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냥 알아요.”
눈썰미 좋은 레스는 그때 아자리의 얼굴에서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특유의 굳은 표정을 보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물어본다고 쉬이 대답할리도 없거니와 어차피 마왕이 무엇이었던 간에 이제 레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아자리는 레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에도 경계하는 기색이 사라져있었다.
“중간에 헤어졌다는 일행은 어떻게 됐어요?”
“몰라. 쉽게 죽을 놈은 아니지만 살아있으면 좋겠네.”
“좋은 사람이었나요?”
“아니.”
레스가 정색하고 대답해서 아자리는 처음으로 잠깐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다.
“아무튼 굳이 더 모험하지 말고 그때 겪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지 그래요?”
“난 글재주가 없어.”
“그럼 작가를 찾아서 대필을 시키면 되죠.”
“됐어.”
그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아자리가 끓여준 차를 마셨다. 맛은 없었지만 목으로 넘길 때마다 숙취 때문에 지끈거리던 머릿속이 상쾌해졌다. 한결 맑은 목소리로 레스는 말했다.
“효과 좋은데. 이런 게 특기냐?”
어깨를 으쓱 움직이며 그녀가 대답했다.
“그런 셈이죠. 먹을래요?”
아자리는 찬장에서 치즈 한 덩어리를 꺼내서 절반으로 나누고 레스에게 던졌다. 겉은 돌처럼 딱딱했지만 아자리가 겉부터 갉아먹기에 레스도 그렇게 했다. 맛은 그저 그래도 허기는 달래기 좋았다.
“고마워.”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 총알로 산거니까. 새벽에 잠깐 암시장을 들렀죠.”
레스는 치즈를 먹으려고 벌린 입 그대로 괴성을 냈다.
“엉?”
“댁이 여기 머무는 동안 다 쓰지 않는다면 남은 건 돌려줄게요. 세 발 남았어요.”
“어. 그래.”
한동안은 총 쏘는 일을 피하고 볼 일이라 레스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차고 넘쳤다.
“그런데 너는 용사가 어떤 놈인지 아니?”
“아뇨. 관심 없어서. 하지만 제 생각에 진짜 용사 같은 건 없을 거 같아요.”
“무슨 말이야?”
“그냥 홍보용으로 꾸민 거라고요.”
“그럼 마왕도 가짜로 생포했다는 소리야?”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은 소강상태지만 아직도 전쟁 중이잖아요. 왜 잔당들이 항복을 안 했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
레스는 차를 전부 마시고 잔을 뒤집으며 덧붙였다.
“아닐 수도 있고.”
“어느 쪽이던 상관없는 일이죠. 우리 쪽은 전쟁에서 지고 있으니.”
“진짜 마왕의 목을 들고 나타나도 이제 와서 제국이 두 번째 용사를 인정할리도 없겠지.”
아자리는 기대고 있던 탁자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들어줄 상대가 있으니 레스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계속 떠올랐다.
“한 사람의 꿈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적어도 시도라도 해보고 실패할거라 생각했는데...”
“저도 그 기분 알아요.”
아자리가 지나가듯이 바로 대답해서 레스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절대 모를 걸.”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죠. 하지만 제 원래 집은 마족 땅에 있어요. 어쩌다 여기로 왔겠어요?”
그제야 레스는 아자리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왔음을 알았다. 똑같은 처지의 사람이 아픔에 공감해주면 상상 이상으로 큰 위안이 된다. 레스도 그제야 아자리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 독특한 거만함과 품위를 따지는 태도로 보건데 귀족이었나 싶었다. 기구한 사연이 있을 거 같지만 초면에 쉬이 물어볼 내용은 아니었다.
뜸을 들여서 감정을 가라앉히고 그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어. 목표라는 건 일종의 계단이잖아. 세상의 규칙이라고. 계단을 올라가면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왜 노력을 했는데 목표를 이루지 못하냐고요?”
레스가 말을 흐리기만 하고 이어가질 못하기에 아자리가 거들었다.
“당신이 말하는 계단은 신이 만든 세상에만 존재하는 거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이 없으니까요. 오직 우리들뿐이죠.”
레스는 표정이 굳어버려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이 됐다. 아자리는 상심한 사람에게 해줄 말이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긴 침묵으로 공기가 점점 어색해져서 견디기 힘들어지자 아자리는 자리를 뜰 핑계를 찾았다.
“우물에 갔다 올게요.”
양동이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아자리를 레스가 불러 세웠다.
“잠깐만. 너도 지금 나가면 위험한 거 아니야?”
“마족에게 이 도시에서 안전한 곳은 없어요.”
마음 써준 점에는 고맙다는 듯 아자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제도 봤던 거적때기를 몸에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레스는 자신의 짐에서 칼 두 자루를 꺼냈다. 큰 칼은 탁자에 꽂아서 거울로 썼고 작은 칼로 수염과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수염을 많이 깎은 덕에 얼굴의 윤곽이 갸름해졌고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쓰레기들은 종이에 쌌다. 마침 어제 먹고 남은 샌드위치 포장지가 요긴하게 쓰였다.
심심해져서 돌아다녔다. 선반에 있는 유리병들마다 라벨이 붙어있었지만 마족들의 말로 적혀 있어서 레스는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알아볼 수 있는 내용물들이다.
“이건 약초, 이건 독초, 이건 환각 성분이 있는 건데? 참 다양하게도 모았군. 약사인가.”
찬장에 책도 있었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기괴한 그림이 가득하다. 이것도 마족들의 말로 적혀 있었지만 무슨 책인지는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아하. 이 녀석도 마법사구나.”
요즘 인쇄술이라는 게 개량돼서 책이 흔해지고 있었지만 이건 일일이 손으로 쓰인 책이다. 게다가 마법에 관한 것이니 상당히 비쌀 것이다. 레스는 딴생각 품지 않고 책을 원래 자리에 도로 놓았다.
남는 시간 동안 권총도 꺼내서 분해했다. 하지만 아자리는 권총 손질을 마칠 때까지도 돌아오질 않았다.
“늦는데.”
여차하면 그냥 떠날 수도 있지만 아자리는 나름대로 자신을 환대해준 사람인데다 자신의 총알도 가지고 있었다. 레스는 안 좋은 조짐을 느껴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