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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1권] 4회 - 예상할 수 있는 것도 없다 (4/188)



〈 4화 〉[1권] 4회 - 예상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마차는 서민 구역을 담당하는 보안관 사무소 앞에서 멈췄다. 아자리는 레스를 흘깃 보다가 족쇄에 달린 추를 들고 짐칸에서 내려왔다. 넝마주이를 입은 꼴에 족쇄까지 달려있으니 영락없는 노예 꼴이라 주목이 아자리에게 쏠렸다. 주위에 붉은 복면 차림의 건달들하고 보안관은 없었고 아까 레스를 쐈던 부관만이 마부석에서 내려와 그녀를 마중했다.

부관이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레이디. 잠시 발  보여주시죠.”


발판까지 앞으로 대령해주기에 아자리는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부관은 아자리의 발에서 족쇄를 풀어주고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가져온 가방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안에는 여자들이 외출할 때 입는 작은 보라색 망토와 새 구두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인간들 기준으로는 대단한 물건은 아니나 아자리 같은 마족들에게는 사치품이나 진배없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자리에게 부관은 대본을 읊는 배우 같은 말투로 말했다.

“급하게 준비해온 터라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성의를 봐서라도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건강을 위해서.”

아자리는 붙잡혀온 처지라 아직도 누더기에 가까운 원피스 차림이었고 신고 있는 샌들도 끈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 냉담히 말했다.

“나쁜 경찰, 좋은 경찰 놀이인가요?”

“옷과 신발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어찌나 자연스럽게 읊어댔는지 그런 대사를 듣고도 아자리는 가식적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타고난 귀족이 아니고서야 해낼 수가 없는 재주다. 아니꼬운 심정이 들지만 아자리는 쓸모없는 자존심 싸움을 포기하고 실리를 택했다. 그녀가 망토를 몸에 두르자 부관이 직접 구두를 그녀의 발에 신겨주었다.


아자리는 레스가 있는 방향을 한 번 바라보고 부관을 따라 보안관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한바탕 난리였다. 책상에 앉아있는 여자 직원들은 타자기를 부서져라 두드렸고 구석에서는 수북이 쌓인 모르스 신호들을 해독하느라 직원들이 과로에 시달렸다. 2층에서 서류가 담긴 상자를 옮기던 직원들끼리 서로 부딪쳐서 아래쪽으로 종이의 폭포가 쏟아졌다. 부관은 절제된 동작으로 팔을 휘저으며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종이들을 막아내고 아자리를 안내했다.

지나가는 동안 사무실 사람들이 아자리를 보고 잠깐 쳐다보기는 했지만 다들 바로 자기  일로 돌아갔다.  사람은 ‘헤리엇 리퍼’라는 문패가 붙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하고 깔끔한 곳이었지만 보안관의 집무실치고는 너무 소박했다.


“당신 사무실인가요?”


헤리엇 부관이 아자리가 앉을 의자를 자신의 책상에서 가져왔고 본인은 책상에 앉았다. 부관은 일단 아자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변하고 말을 이었다.

“보안관은 높으신 분들에게 갔습니다. 방금 봤다시피 저희들한테 비상사태가 생겼거든요.”

“비상사태?”


“수도에서 용사가 이곳으로 올 거랍니다. 열차를 타고.”


그건 확실히 대사건이었다. 게다가 아자리는 용사가 실제로는 없을 거라 믿었기에 많이 놀랐다. 헤리엇 부관이 자신의 서랍에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고는 물었다.


“알로에 주스?”

“됐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고. 오늘 하루 내내 물  방울 못 마셨을 텐데.”


유리잔에 담아서 앞에 내밀자 아자리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단숨에 절반을 들이켰다. 헤리엇 부관은 주스 병을 옆에 놓고 동정 섞인 눈으로 아자리를 보았다.


“멋진 친구를 두셨더군요.”


아자리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남은 주스를 천천히 마셨다. 헤리엇 부관은 가만히 기다렸다.

“비꼬는 건가요. 당신이 쏴 버려놓고.”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빈총이었다고는 해도 제 동료를 겨눴으니까요.”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아자리는 입을 다물었다.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아자리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헤리엇 부관이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말을 걸었다.


“앞으로 적어도 몇 시간은 대기만 하게  겁니다. 그동안 레이디는 제가 맡을 거고요. 궁금하거나 필요하신 거 없으신지요?”


“집에 돌아가는 거요.”

“원하신다면 친구 분의 안부도 가능한 봐드리겠습니다.”

아자리는 자신을 정중히 대하는 보안관을 처음 봤기에 경계심이 들었지만 어차피 부탁한다고 손해 볼 일은 없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영양보충을 하고 안정을 취해야 해요. 그건 마법으로도 어떻게 못해요.”

“유치장에는 매끼니 식사가 제대로 나옵니다. 용사 때문에 다들 바빠서 그를 학대할 사람도 없을 거고요. 한동안은 편히 쉴 수 있을 겁니다.”

“학대?”


아자리는 정색했다.


“따로 부정하는 위선을 저지르진 않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안전하다니 다행이다.  호흡 쉬고 그녀는 말했다.


“전 이제 어떻게 되나요?”

“수도로 보내드릴 겁니다. 나머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희는 레이디를 데려오라는 명령만 받았거든요.”

“그래서 요즘 꾸준하게 절 데리러 왔었군요.”


헤리엇은 거기엔 뭐라  말이 없어서 팔짱을 끼고 목만 가다듬었다.


“레스는 어떻게 되고요?”


“그게 누굽니까?”


“당신이  사람이요. 사쿠라비에서 왔다고 했어요.”


그 이름을 듣고 헤리엇 부관은 탄성을 질렀다.

“사쿠라비! 그 옷차림을 보고 자꾸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는데. 그 친구가 위험할까봐 걱정이신가요?”


그녀는 고개를 작게 움직였다.


“좋은 소식은 제국이 태평성대한 분위기를 꾸미고 있어서 사형수를 가능한 만들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특히 지금처럼 용사가 머무는 와중에 교수형은 절대 안 합니다.”


“나쁜 소식은요?”

“하지만 보안관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들은  몸으로 성 바깥에 버려집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말이나 차를 타도 꼬박 하루가 걸리고요.”


결국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을 뿐 사실상 처형이다. 아자리에게 레스는 만난  겨우 하루지난 사람이어서 사적인 정 같은  거의 없었지만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을 위해서 두 번이나 위험을 감수한 사람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붙잡혀있는 와중에 여기서 친구라 할 사람은 레스 밖에 없기도 했다.


아자리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헤리엇이 화제를 바꿨다.


“현실적인 조언을 좀 드려도 될까요?”

“하세요.”


“지금 보안관은 용사에게 잘 보이려고 필사적입니다. 여기 서민 구역 담당에서 벗어나려고요. 만일 용사가 이곳에 왔을 때 당신이 보안관에 대해서  말해준다면... 당신이나 친구 분에게 조금이나마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도록 협상할 수도 있겠죠.”


 만한 정보였다. 간신히 기분이 나아진 그녀는 상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렇군요. 요즘 인간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 연달아 생기네요.”

“저희 종족이 싫겠죠. 이해합니다.”


헤리엇 부관은 상의의 윗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 위로 두툼한 시가가 튀어나온 게 보였다. 그는 담배 생각이 간절해보였다.

“그쪽도 저희를 이해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일단 말하고 싶군요. 여기 보안관들은 항상 약자들을 핍박하고 욕망에 맞춰서 권력만 휘두르는 압제자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도시의 모든 종족이 가진 이기심의 가장자리에 서서 충돌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는 저희들의 그런 모습은 보시지 못했겠죠.”

“인간이나 마족이나 똑같아요. 진짜 악은 전쟁이죠.”

마족이 점령한 곳에 살고 있는 인간들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사적인 감정하고는 별개로 아자리도 알고 있었다.

“딱히 제 손이 깨끗하다고 변호하지는 않겠습니다.”

헤리엇 부관은 팔짱을 꼈다.

“더러운 것을 닦으려면, 걸레는 자기 몸을 더럽혀야만 하는 법이죠. 아무도 그러기 싫겠지만 누군가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기가 짊어진 배지와 권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  하지요.”

바깥에 한  소란이 나서 두 사람은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마주보았다. 별 일 아니었다. 헤리엇은 어깨를 한  들썩였다.


“그래서 당신 친구를 높게 평가한 겁니다. 총알 없이도 맞서 싸웠으니까요. 사쿠라비 전사들의 명성은 허풍이 아니었군요.”

“거기 사람들에 대해서 아시나요?”

관심 가는 주제가 나오자 아자리는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시력이 굉장히 좋습니다. 게다가 사막은 공기도 건조하고 바람도 잘 안 불어서 조준하는 대로 총알이 박히죠. 사막에서 그들 눈에 띄면 그냥 죽는 겁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광경이 흘깃 지나갔다.


“확실히  쏘더라고요.”

“사막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 전쟁이기에 그곳의 민족들은 강하기로 유명합니다. 제국도 그들의 땅을 넘어가지 못했죠. 자랑할 만한 역사는 아닙니다만.”


헤리엇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자리는 그곳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어떻게든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물었다.


“사쿠라비가 정확히 어디죠?”

“인간과 마족들의 영토 사이에 있는 커다란 반도로 압니다. 중립지역이죠. 정확한 설명은 힘든 게 전쟁 때문에 정밀한 지도 제작이 중단돼서요. 전쟁이 난 이후로 살아서 여기까지 온 사쿠라비는  친구가 유일할겁니다.”

말하다 말고 헤리엇 부관의 표정이 굳었다.


“이제 보니 이 친구 정말 굉장하잖아. 객사시키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야. 알고 있는 지리 정보도 유용할거고…….”

“그럼 도와주실 건가요?”

아자리는 넌지시 비꼬는 투로 물어봤지만 헤리엇 부관은 썩 진지한 얼굴이었다. 곧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고마워요.”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였으니 그녀는 감사를 표했다.














시간이 지나 해가 저물고 밤으로 접어들었다. 아자리는 사무실 안에서 헤리엇의 감시를 받으며 끼니를 때우고 조금이나마 걱정을 풀고 피로에 지쳐 곤히 잠들었다. 헤리엇 부관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소리 내지 않고 집무실을 나갔다. 문에 자물쇠는 채워두지 않았다. 그는 윗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고 흡연구역으로 향하는 도중에 보안관과 마주치고 말았다. 시가를 거꾸로 쥐고 헤리엇이 말했다.


“같이 피우러 가시겠습니까?”

“나중에. 계집은 어디 있지?”

“제 방에 있습니다.”

“마녀를 혼자 두다니 제정신이야?! 가서 봐!”

흥분한 보안관과는 대조적으로 헤리엇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자기 친구가 잡혀 있어서 섣부른 짓은  할 겁니다.”


“하지만  사무소를 통째로 날려버리면 어쩌려고?”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진즉에 잡혀오기나 했겠습니까.”

헤리엇 부관은 인내심을 가지고 보안관을 진정시켰다. 흥분한 상태였기에 보안관은 이해하는 속도가 느렸다. 불에 달궈진 주전자 같은 낯짝으로  박자 늦게 보안관이 말했다.

“하여튼 무슨 일이 생기면 전부 자네 책임이야. 안 그래도 병력들을 위쪽으로 죄다 보내야하는 참이라고. 곧 이 사무소에는 너하고 버러지들만 남게 돼.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

마지막까지 그를 째려보고는 보안관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헤리엇은 시가를 도로 집어넣고 쉬고 있는 직원을 찾아서 물었다.

“병력을 전부 위로 올린다는 건 무슨 말이야?”

“오늘 온 열차에 용사님 말고도 왕족이랑 귀족도 있었데요. 모든 구역에서 소집령이 내렸어요.”


헤리엇은 눈살을 살짝 찡그리고 입가 한쪽을 일그러트렸다.

“그렇다고 전부 보낼 필요는 없잖아.”


“잘 보이고 싶어서겠죠. 우리 빈자리는 저놈들이 메꾼답니다.”


직원이 가리킨 곳에는 허름하게 차려입은 건달들이 즐비했다. 마음대로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거나 계단에 자리를 깔고 카드 게임을 하고 있다.  냄새와 담배 악취가  공간에 퍼져서 보안관 사무소는 싸구려 선술집 같은 풍경이 됐다. 방금 보안관이 말했던 ‘버러지들’이다. 낮에 아자리를 데리러 슬럼가로 갔을  봤던 얼굴도 몇 보였다. 헤리엇 부관은 한탄했다.

“병력은 필요도 없는 곳으로 보내고 제일 중요한 곳에는 용역을 부르다니.”

“적어도 실내 흡연을 불평할 사람은 없겠군요.”


직원은 오늘 당직을 서게 될 헤리엇 부관을 위로하는 의미로 어깨를 토닥였다. 무표정과 쓴 웃음 사이에 있는 표정을 짓고 헤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물었다.

“오늘 낮에 체포했던 친구는 어떤가?”

“상태가 별로라서 취조는 나중으로 미뤘고 지금은 유치장에 있습니다.”


“알았네. 조심해서 들어가고.”

마침 두 사람의 시선이 입구로 향해 있었는데 거기로 누군가 들어왔다. 외투와 검은색 모자를 쓴 청년이다.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였다. 외투는 맞춤 제작한 건지 청년의 늘씬한 체형에 딱 맞았다.

외투에 붙어있는 견장과 장식을 보고 헤리엇이 중얼거렸다.


“레인저가 여긴 왜 왔지?”

입구에서 짝다리를 짚고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서 있던 건달이 사내를 불러 세웠다.


“어이, 오늘 영업 끝났어.”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모자를 벗어서 자기 얼굴을 보여줬다. 건달은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사무소 안의 모든 이가 경악에 빠졌다. 헤리엇 부관도 머릿속까지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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