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1권] 6회-급할수록 침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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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는 쑤시는 삭신을 부여잡고 뜬눈으로 계속 누워있었다. 아무도 없는 지하실에 기척이 나자 레스가 누운 채로 말해보았다.
“피카니?”
상대로부터는 대답이 없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는데 이상하게도 발자국 소리나 옷깃 스치는 소리 같은 건 가까워지는데도 눈에 보이는 건 여전히 아무도 없는 지하실뿐이다. 계속 갇혀있다 보니 몸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서 레스는 계속 눈을 껌뻑거렸다.
갑자기 코앞에서 아자리가 나타나는 바람에 레스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녀는 무언가를 한 아름 가득 안고 있었다.
“아자리? 여기서 뭐하는 거야?”
“쉿!”
아자리는 눈을 부릅뜨며 자기 입술에 검지를 댔다. 그녀는 들고 있던 잡동사니들을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망토와 칼, 권총, 벨트, 부츠와 배낭 등등 모두 그의 물건들이다. 그리고 아자리가 주머니에서 열쇠까지 꺼내서 철창의 자물쇠를 풀어주자 레스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됐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아자리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일단 나와요.”
자신의 소지품들을 모두 챙기고 레스는 아자리의 뒤를 따랐다. 난데없는 탈출이라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하지만 그렇다고 제 발로 계속 갇혀있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하실 입구 근처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가만히 상황을 살폈다. 속삭이면 들키지는 않겠거니 싶어서 레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넌 돌아갈 집이 있잖아? 이런 짓을 했다간...”
“전 이제 못 돌아가요.”
아자리도 소곤거렸다. 레스는 목 윗부분으로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젠장 피카니하고 겨우 만났는데.”
“역시 둘이 아는 사이였군요.”
아자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레스는 조금 놀랬다.
“너도 그 녀석이랑 만났어? 아, 여기 왔던 볼일이라는 게 너 때문이었구나.”
“내일 피카니가 아저씨를 총살하고 절 수도로 데려갈 거예요.”
“뭐?”
레스가 깜짝 놀라서 말소리를 줄이지 않고 생으로 단발마를 내는 바람에 아자리가 급하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틀림없이 들었어요. 자기 손으로 아저씨를 쏴버리겠다고. 그리고 전 수도로 가기 싫어요.”
레스는 거기에 대해 뭐라 말하려 했으나 아자리가 움직이라고 신호하는 바람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따라가기는 했지만 레스는 아직 아자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들키지 않고 복도 하나를 지나갔다. 사무소 안의 용역들을 관리할 보안관이 없었던 탓에 완전히 늘어져있었다. 일어서 있는 사람보다 앉아서 노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다.
앞에 보이는 모퉁이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져서 두 사람은 급한 대로 바로 옆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숨었다. 청소 용품이나 공구들을 두는 창고인지 냄새가 안 좋았다. 레스가 다시 화제를 이었다.
“같이 달아나는 건 반대 안 한다만 그 녀석하고는 아까 나하고 반갑게 이야기까지 나눴어. 네가 오해하는 거 같아.”
“그 사람이 아저씨한테 자기가 용사라는 거 이야기했어요?”
아자리는 미리 손을 뻗어서 레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손 사이로 그의 숨결이 퍽하고 새어나왔다. 아자리의 손을 치우고 레스는 소리를 낮추려고 안간힘을 쓰며 속삭였다.
“용사?! 그 녀석이?!”
“제가 아저씨를 속이고 싶으면 이런 거짓말은 고르지 않았겠죠?”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기이하게도 아자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다급한 와중에 실없는 소리나 할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레스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게 무슨... 머리가 상황을 못 쫓아가겠어.”
아자리는 계속 넋이 나가려는 레스의 정신을 현실로 붙잡으려고 말을 걸었다.
“저도 진상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하여간 확실한 건 탈출만이 우리가 살 길이에요.”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 생각 없이 청소도구나 꺼내려고 창고 문을 열었던 사내는 피부가 시커먼 남자와 뿔이 달린 여자아이를 보고 놀라서 굳어버렸다. 레스의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권총도 들려 있었다.
“어?”
사내는 얼빠진 소리를 내다가 레스에게 옷깃을 붙잡히고 권총의 몸통으로 머리를 맞았다. 1kg에 가까운 쇳덩어리로 맞은 사내는 바로 혼절해버렸다. 창고 안에 세 명이나 들어온 탓에 공간이 엄청 비좁아졌고 사내의 체취도 지독해서 아자리는 코를 잡았다. 한참 동안 불편함을 감수하며 상황을 살폈다가 두 사람은 다시 복도로 나왔다. 레스가 속삭였다.
“좋은 생각 있어?”
“뭘 물어봐요. 당장 도시를 나가야죠.”
레스는 말 끝나기 무섭게 의견을 냈다.
“맨몸으로 도망쳐봐야 금방 따라잡혀. 말이 필요해.”
아자리도 레스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거라면 어디 있는지 알지만...”
발소리가 들린다. 다시 창고로 몸을 숨기기에는 늦다. 레스는 일단 자신의 망토 속으로 그녀를 숨겼다. 모퉁이 너머로 사내가 나타났는데 레스는 상대의 취한 얼굴과 술병을 보았다. 레스는 부자연스러운 기색 없이 당당히 걸어갔다. 아자리는 그의 몸을 꽉 안으면서 걸음에 맞췄다.
사내는 그냥 자기 갈 길 갔을 뿐이다. 서로 교차하는 순간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아자리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레스는 그녀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게 허리에서 다 느껴졌다.
“하여간 나는 이상한 곳에서만 운이 좋아.”
레스가 중얼거리자 아자리는 동감한다는 듯 망토 속에서 그의 등에 머리를 비볐다.
새벽이 되면 보안관 사무소 같은 공공기관들은 절약 차원에서 최소한의 전구에만 불을 넣었다. 이 어둠 덕에 둘은 끈질기게 몸을 숨겨가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은 사무소의 창문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고 바로 옆에 있는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레스는 거기가 마구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에서는 지푸라기 냄새나 말들의 숨소리는 없었고 대신 기름 냄새와 쇠 비린내만 느껴졌다. 컴컴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니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알 수가 없다.
레스가 아자리에게 물었다.
“여기 맞아? 마구간이 아니잖아.”
“말보다 더 좋은 게 있죠.”
아자리가 주문을 속삭이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 조그마한 불빛이 떠올랐다. 창고 안에 있는 걸 보고 레스는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모터바이크?”
레스는 익숙지 않은 물건이라서 당황했다. 아자리는 주의 깊게 모터바이크를 살폈다. 그리고 작게 감탄했다.
“V 트윈 엔진. 600CC. 제법인데.”
“몰 줄 알아?”
“귀족을 우습게 보지마세요. 저기 사이드카가 있네요. 어서 옮겨요.”
아자리는 계속 불을 밝혀야 했기에 레스가 그녀의 지시대로 사이드카를 모터바이크에 연결시켰다. 레스는 마뜩치 않았다.
“난 이거 마음에 안 들어. 기계는 툭하면 고장 나는데다 기름은 구하기도 힘들고 도로가 아니면 빌빌 거리다가 도랑에 빠지면 꺼내느라 고생인데...”
“불평 그만해요.”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등불을 들고 있는 남자 셋이 레스와 아자리를 보고는 얼어붙었다. 레스는 재빨리 그들을 향해 공구를 집어던져서 머리에 맞췄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구를 맞은 사람은 당연히 기절했다.
“으아아아아아!”
두 사내가 레스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아자리는 서둘러서 바이크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레스는 한 명은 쉽게 때려눕혔지만 다른 한 명에게 붙잡혀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평소대로였다면 바로 뿌리쳤겠지만 오늘 하루 내내 혹사한 탓에 힘이 나질 않았다. 몸싸움으로 버둥거리며 레스가 외쳤다.
“아자리!”
“알아요!”
그녀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위쪽으로 휘두르자 레스와 사내는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혀서 허공에 붕 떠올랐다. 땅에 떨어지자마자 레스는 이를 악물고 먼저 일어나서 상대에게 한 대 쥐어박았다. 그리고 차고의 문을 연 다음 사이드카에 탔다. 모터바이크 엔진의 우렁찬 소리에 지지 않게 아자리가 고함을 질렀다.
“꽉 잡아요!”
한밤의 질주가 시작됐다. 1900년대 초반에 존재하였던 모토바이크의 속력은 시속 70km 정도였는데 현대인들의 시점에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제대로 훈련받은 경주마가 내는 속력이 시속 40km인 걸 감안하면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였다. 레스는 공포에 질려서 온몸으로 절규를 질렀다.
“세상에 맙소사!”
아자리는 운전대를 돌릴 때조차 거의 감속을 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몰았다. 야밤의 풍경이 수평으로 날아가는 유성우처럼 보일 지경이다. 급히 선회했을 때는 사이드카가 허공으로 떠올라서 그는 반쯤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잠시 후에 모든 바퀴가 멀쩡히 땅에 닿고 나서야 그의 입에서 평범한 언어가 나왔다.
“너 이거 몰 줄 아는 거 맞아?!”
아자리는 신경질을 팍팍 내며 대답했다.
“안 다고요! 전에 몰아본 건 엔진이 없었지만!”
다루는 지식 자체는 있었지만 실제로 타본 건 자전거가 고작이었다는 뜻이다.
“지금 장난 하냐!”
“아무튼 바퀴로 굴러가면 상관없잖아!”
모터바이크가 시내로 들어갔다. 난데없는 소음에 잠이 깬 시민들이 하나둘씩 창문을 열고 바깥을 보기 시작했다. 통금 덕분에 거리가 한산하기는 했으나 아직 마차와 사람들이 조금 남아있었다. 아자리는 사람들을 치지 않게 속도를 줄이고 경적을 울리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좋았어!!”
“그만 징징거려 좀!”
한바탕 대로변에 혼란을 일으키며 달려가던 중에 갑자기 뒤에서 말발굽이 땅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서 레스는 그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사람 넷이 말을 타고 쫓아오고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레스의 말을 듣고 아자리는 사이드 미러로 곁눈질을 했다.
“기마경찰대에요!”
“속도 높여! 따라잡힌다!”
“더 높이면 위험해요!”
하필 당장 달리는 곳이 곡선 도로인데다 내리막길이라 아자리의 말대로 속도를 더 높였다가는 위험했다. 더 가까워지자 경찰들이 고삐를 한 손으로 쥐고 권총을 꺼냈다. 모터바이크가 총의 사거리로 들어오기 직전이다. 레스는 자신의 총알을 세었다. 3발 밖에 없다. 아마 아자리가 맡아놨던 총알들이리라.
“총알 더 없어?!”
“무기고까지 갈 수가 없었어요!”
경찰들이 권총을 쏘기 시작했다. 노리는 건 모터바이크의 바퀴다. 어둑한 데다 아자리도 나름 이리저리 움직였기 때문에 아직은 총알들이 스치지도 못했다. 레스는 몸을 낮추고 권총을 조준하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추격자들이 조준하기 어렵게 움직였다. 시간은 조금 벌 수 있었지만 그뿐이다.
그때 아자리의 시야 저편에 전신주 하나가 보였다.
“레스! 2시 방향에 저거 보여요?!”
“왜!”
“저기 위에 있는 거 맞출 수 있겠어요?!”
“잠깐 직선으로 달려봐!”
레스는 양손으로 권총을 붙잡고 정조준 자세를 취했다. 모터바이크가 일직선으로 움직였을 때 바로 쏘았다. 탄환이 전신주의 배터리를 꿰뚫어버리자 그곳을 중심으로 일대의 전력이 전부 끊겨버렸다. 전기 가로등도 정전으로 모조리 꺼졌다.
뒤에서 달려오던 말들이 갑작스러운 어둠에 놀라서 통제를 잃었다. 그 탓에 추격자들끼리 엉겨서 뒤쪽은 혼란에 빠졌다. 모터바이크의 속력을 다시 올리자 몇 초 만에 추격자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었다.
“와! 진짜 맞췄네!”
아자리는 레스의 솜씨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레스는 칭찬을 즐길 틈이 없었다. 앞이 캄캄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넌 괜찮은 거야?!”
“전 밤눈이 밝아요!”
옆에서 보니 아자리의 눈이 고양이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생긴 것만 고양이를 닮았던 게 아니라 실제로도 야간 투시력이 있던 모양이다.
“그건 다행이네!”
가로등이 켜진 구역으로 들어오자 앞에 성문도 나타났다. 그걸 보고 레스가 중얼거렸다.
“저건 다행이 아닌데.”
소식이 어찌나 빨리 전해졌는지 성문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절반 이상 내려왔다. 아자리는 속력을 더 높였지만 시간에 맞추기 역부족이다. 레스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제안했다.
“근처에서 멈춰! 내가 가서 다시 올려볼게!”
아자리는 속도를 조금 낮추고 말했다.
“운전대 잡고 있어요!”
“뭐?!”
“그냥 잡고만 있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레스는 사이드카에서 몸을 뻗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붙잡았다. 운전대만 잡는 거야 어렵지는 않았으나 아직도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자리는 손을 모아 자인을 맺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성문이 집채만 하게 보이자 레스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뭘 하든 간에 당장 해!”
아자리의 양 손바닥 사이에서 잉걸불이 춤추고 벼락이 파도를 쳤다. 눈은 달궈진 석탄처럼 붉게 빛났다.
“포르차 데르피 스포르티 칼레!”
그렇게 주문을 외치며 양손을 앞으로 뻗자 천둥소리와 함께 거대한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한순간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섬광이 터졌고 어느새 성문에는 마차 한 대 정도는 넉넉히 드나 들만한 구멍이 뚫렸다.
“오.”
레스는 입을 쩍 벌렸다. 굳이 말 안 해도 다들 알겠지만 어지간한 대포로도 쉽게 못 뚫는 게 성문이다.
그들은 유유히 도시를 나왔다. 그녀는 거친 숨을 뱉으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고 레스는 권총으로 뒤를 살폈다. 몇 분 정도 더 달리고 나서 아자리는 바이크를 멈췄다. 엔진이 꺼지니 무서울 정도로 적막하다.
“더는…. 운전 못 하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자리는 곯아떨어져서 머리를 운전대에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