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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1권] 7회-운 좋은 날도 있다 (7/188)



〈 7화 〉[1권] 7회-운 좋은 날도 있다

아자리는 사이드카에서 눈을 떴다. 바이크는 레스가 운전대를 잡고 느긋하게 몰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몸에 덮여있는 레스의 망토에서 팔을 꺼내고 기지개를 켰다. 야생의 공기가 온몸에 스쳤다. 태양의 위치를 보니 시각은  점심을 지나갔다. 그녀는 길게 하품을 하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케 터득하셨네요.”

천천히 모느라 엔진 소리도 크지 않았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소리 지를 필요가 없었다. 레스는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어떻게든 됐어.”

“천천히 모는 건 잘 생각했어요. 그래야 연비가 좋아요.”


“잠깐, 꽉 잡아라.”


바이크가 비탈을 내려갔다. 아자리는 덮고 있던 망토를 치우고 잠시 바람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레스의 머리에 묶여있는 천이 휘날렸다.


“새벽 내내 달리셨나요?”

“응.”

“어디로 가는 거죠?”

“내가 왔던 방향이 아니라서 모르겠다. 그냥  따라서 가고 있어.”


아자리는 태양의 방향과 그녀가 알고 있는 지리정보를 종합해서 그들이 향하는 곳을 짐작해보았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곧 숲이 나올 거예요.”


“그래.”

“그 너머로 마을이 있고요.”

레스는 하품을 했다. 그의 눈가에 기미가 진하게 꼈고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버틸만해.”


“무리는 마세요. 졸음운전은 위험하다고요.”

레스는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서 목을 풀었다. 마침 그는 아자리가 잠에서 깨면 꼭 꺼내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어제 네가 한 걸 보고 일어난 소름이 아직도 안 가라앉았어.”


“어제? 아, 그거요. 쉬운 일은 아니었죠.”


성문을 뚫어버린 일을 덤덤하게 표현하는 그녀에게 레스는 속으로 살짝 질렸다.

“진즉 그럴 수 있었으면 맞서 싸우지 그랬어?”


“마법은 생명을 총알로 삼는 총과도 같아서 가볍게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거기 보안관들을 다 날려봐야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일도 없고요.”

앞뒤  가리고 난동을 피우면 난민촌에 사는 애꿎은 주민들에게 피해가 갔을 것이다.


“나무가 보인다.”

아자리의 눈에는 검은색 점으로만 보였지만 레스에게는 숲이었다. 도로가 서서히 거칠어지자 레스는 속력을 조금 높였다. 숲이 가까워지면서 바람과 공기는 서늘해지고 있었다.

“녀석들이  원하는 이유가 혈통 때문이라고 했었지.”

“네.”


“어쩌다보니 같은 배를 타게 된 처지인데 사연을 들어봐도 될까?”

아자리는 안 그래도 나중에 말해줄 생각이었다.

“제 이름은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에요. 우리 가문을 아세요?”

“아니.”


“저희는 왕족이에요. 순위는 아주 낮은. 생각해보니 이젠 그마저도 과거형이네.”

“흠. 그래 왕족.”


레스는 어조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마왕의 피가 흐른다고?”


“아버지가 마왕의 동생이에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레스는 운전대를 뒤집을 뻔했다. 아자리가 범상치 않은 신분임은 짐작을 했으나 이 정도일  몰랐다.

“맙소사. 네가  정도면 마왕은 얼마나 셌던 거야?”

“전에 말했잖아요. 별거 아니었다고. 마법의 힘이랑 마왕의 혈통은 관계없어요.”

“그래?”


“저번 세대까지는 저희 혈통에 특별한 점이 있었다는데 인제 와서는 옛날이야기죠. 지금 마왕이 특별한 존재로 띄워지는 건 저희 측에서 꾸며댄 거예요.”


“방금 엄청난 기밀을 들은  같은데.”


“알 게 뭐야. 그딴 거.”


아자리는 눈을 반쯤 감았다.

“넌 마왕이 싫어?”


모터바이크가 숲길로 들어섰다. 그들 머리 위로 나무 그림자가 스쳐 갔다. 아자리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예, 안 좋아해요. 우리 가족 다 안 좋아했어요.”

“꽤 복잡한 사연이 있었나 보네.”


“그리고 우리 가족만 전쟁을 반대하는 바람에 더 복잡해졌죠. 결국, 살던 곳을 떠나게 됐어요.”

왜 지금 그녀가 가족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있는지 레스는 굳이 묻지 않았다. 거기까지 파고들 정도로 가까워지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서 레스는 바이크를 세웠다. 두 사람은 굳은 몸을 푼 다음 시냇가로 향했다. 물은 깨끗하고 차갑다.  사람은 물가에 얼굴을 처박다시피 고개를 숙이고 갈증을 풀었다. 레스가 수통에 물을 채우는 동안 아자리는 뭔가 꾹 참는 얼굴로 계속 물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씻고 싶어서?”

“하지만 그럴 시간 없잖아요.”

레스는 머리띠를 풀면서 말했다.

“나한테 허락받을 필요 없어. 서로 구해준 처지에 윗사람 행세하고 싶지 않아.”

그는 쓰고 있던 천을 물에 헹구며 간단하게 빨고 멱을 감았다. 아자리도 서둘러 멱을 감고 얼굴에 붙은 때를 벅벅 밀었다. 먼저 볼 일을 마친 레스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뭔가 먹을  없는지 둘러봤다. 아자리는 머리카락에서 물을 짜며 물었다.


“아저씨 고향에서는 다들 천을 그렇게 머리에 두르고 다녀요?”

“이건 터번이야. 지역에 따라서는 쿠피하, 우트라, 쉼마그라고도 부르지. 두르는 방식은 우리 부족이 제일 간소하고.”


“나도 해볼까? 낯설어서 그런지 조금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그러기엔 너한테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요?”

레스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드렸다.


“뿔.”


“아.”

그 사이에 레스는 도토리랑 나무 열매를 찾아냈다. 도토리는 어차피 날로 먹기에는 좋지 않아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아자리와 절반으로 나눴다. 바이크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람쥐나 토끼 같은 야생동물이 보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권총을 뽑았지만 쏘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괜찮으세요?”

살구를  먹고 아자리가 물었다.

“뭐가?”


“아저씨는 순전히 휘말려서 이 신세가 됐잖아요.”

“별로. 어차피 제국에 있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럼 고향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모르겠다. 그리고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가는 길에 방해되는 나뭇가지들을 레스가 칼로 쳐서 치워버렸다.

“인제 와서 떠올려보니 알겠는데, 확실히 피카니에게 뭔가 미심쩍은 기색이 있었어. 날 죽이려 했다는 걸 믿기 어렵다만 뭔가 감추고 있던  확실해.”

아자리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둘은 모터바이크로 돌아왔다.


“제가 운전할게요. 아저씨는 눈 좀 붙여요.”

“맡기겠나이다 마님.”

모터바이크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엔진에서는 이상한 소리만 날 뿐이다. 점검 결과 원인은 지극히 단순했다. 달리 선택지가 없어서 둘은 같이 힘을 모아 연료가 바닥난 모터바이크를  바깥으로 끌고 가서 덤불에 감췄다. 그리고 걸었다.










수목선을 벗어났을 때 초저녁이 됐다.

“마을이다.”


레스가 말했다.


“저도 보여요.”

마을 주위에 동물들이 넘어가지 못하게 세운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따로 보초를 서는 사람은 없다. 훑어보니 최근 세워진 소박한 곳이다. 대부분 통나무집이었고 벽돌이나 시멘트로 지은 건물은 드물었다. 두 사람에게 불어오는 바람은 저녁밥 짓는 냄새를 담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수염 난 노인이 의자에 앉아 물담배를 뻑뻑 피웠다. 두 사람이 다가가도 늙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자리가 공손히 물었다.

“안녕하세요. 들어가도 될까요?”

노인은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려 가래를 뱉고 말했다.

“난 그냥 여기 담배 피우러 왔어.”

노인은 마족인 아자리나 이방인으로 보이는 레스에게 경계는커녕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레스가 물었다.


“식당은 어디로 가면 됩니까?”


노인이 팔을 뻗어 방향을 가리키자 두 사람은 고개를 한  숙이고 갔다. 가는 길에 보이는 주민 중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마족도 심심찮게 보였다. 마족들의 옷차림이나 안색은 그냥 평범했다. 그래서 여러모로 떠나온 도시에 비하면 훨씬 마음이 놓였다.


식당 앞에서 아자리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무슨  생겨도 총 꺼내지 마요.”

레스는 그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이 평화를 망칠까 봐 걱정돼서요.”


“난 그렇게 경솔한 사람 아니거든?”

“절 구해준 건 고맙지만 당신 신세가 어쩌다 여기까지 떨어졌는지 말해보시죠?”

레스는 할 말이 없었다.

칸막이 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에는 바와 주방이 있고 곳곳에 원형 테이블이 넉넉했다. 손님들 대부분은 일과를 마치고  벌목꾼들과 목장 치기, 농사꾼들이다. 총잡이는 없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잡기 전에 종업원에게 가서 물었다. 여기 주인장이 누군가요. 종업원이 바텐더를 가리켰다. 두 사람이 그쪽으로 가자 주인장이 말했다.


“어서옵쇼.”


“안녕하세요.”

레스가 인사를 받았고 아자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사람 다 배를 많이 곯으셨구먼. 뭐로 드릴까?”


“먼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 저희가 지금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인장의 말투에 딱히 문전박대하는 기색은 없었다.

“식대만큼 일을  수 있을까요? 장작 패기든 접시닦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셔. 베이컨이랑 콩죽으로 괜찮나?”

두 사람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주인장은 내숭 없는 미소를 지었다.


“원래 평소에는 이런 거 안 받아주는데 여행자들이라서 특별히 봐주는 거요.”

“우리가 복이 전혀 없지는 않은가 보다.”

그녀도 인정하고 눈을 깜빡였다. 주인장은 두 사람에게서 범상치 않은 내력을 감지했는지 계속 관심을 보였다.


“둘은 무슨 사이야? 이방인과 고위 마족이라니. 난생처음 보는 조합인데.”

“좀 복잡해요.”


아자리가 말했다.

“재미있을 거 같은데. 난 여행자들 이야기 듣는  좋아해.”


“일단 밥부터 먹고요.”


레스가 말했다. 종업원이 식사를 가져오자 두 사람은 먼저 심호흡을 하고 정신없이 먹었다. 아자리는 왕족답게 끝까지 식사 예절을 지켰지만 레스는 많이 먹기 대회 참가자처럼 삽질하듯 입으로 퍼 넣었다.


잠깐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았던 주인장이  사람에게 돌아왔다. 그때 주인장이 레스의 옷에 난 붉은 무늬 한가운데에 총알구멍이 난 걸 보았다.


“가만. 옷에 그거 핏자국 아냐?”

“맞습니다.”


레스는 잠시 먹는 걸 멈췄다.

“세상에 당신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일이 있었던 거야? 최근에 맞았군.”

“위험했죠. 요 녀석이 구해줬어요.”


“그래?”

“어려 보이지만 재주가 많아요.”

“난민촌의 유일한 의사였어요.”

아자리가 말을 받았다. 주인장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난민촌의?”


“떠나기 전에는 거기서 살았어요.”

“어쩌면 도움이  거 같은데. 우리 마을은 제대로 된 의사가 없거든.”

“위독한 사람이 있나요?”


그녀는 눈초리를 번뜩였다.

“종종 사람이 총에 맞아.”

레스와 아자리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총?”

그때 손님들의 테이블 중 하나에서  소란이 났다. 카드놀이를 하던 중이었는지 테이블 위에 술잔과 카드 패, 그리고 돈들이 가득했다.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젊은이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봤어. 속임수를 썼다고!”


젊은이 맞은편에 있던 사람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아무것도  했어!”


젊은이가 가리킨 상대는 외투를 걸친 털이 붉은 여우 수인이었다. 여드름이 난 젊은이는 비싼 정장을 입었지만 가진 품격은 옷의 가격에 한참 못 미쳤다. 아무래도 카드 게임에서 져놓고 시비를 거는 모양이다. 주인장이 작게 말했다.


“또 시작이로군.”


젊은이가 자기 패거리로 보이는 자들을 부르고 상대를 붙잡게 했다. 레스는 그때 젊은이가 은근슬쩍 자기 손바닥 안으로 카드를 숨긴 걸 보았다. 젊은이는 붙잡힌 상대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방금 자기가 숨겼던 카드를 꺼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어디서 수작을 부려.”

“이건 순 억지잖아!”

누가 봐도 그랬지만 주위 사람들은 외면했다. 젊은이의 허리에는 권총이 두 자루나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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