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1권] 9회-인맥은 금맥 (9/188)



〈 9화 〉[1권] 9회-인맥은 금맥



“악명 높은 무법자. 그 정도는 듣기에 그럴싸하니까 상관없어. 그런데 소아 성추행이 뭐냐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눈에 띄는 순간 머리가 날아가겠지….”

레스는 우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바로 옆자리에  피카니가 억양 없이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유감이야.”

아자리는 바텐더 노릇을 하고 있다. 그녀가 잔을 2개 꺼내서 두 사람에게 내밀고 하나씩 음료를 따라줬다. 둘은 건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각자 알아서 마셨다. 레스가 말했다.

“빨리도 왔군.”


“너희들이 뚫어버린 성문을 지나면 여기 밖에 없으니까.”

“너 혼자야?”


“혼자야. 말을 타고 계속 왔어.”

레스가 자기 앞에 있는 음식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계속 굶었던 피카니는 한 점 입에 넣었다. 피카니가 먹던  삼킬 때까지 기다리다가 아자리가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피카니는 뜸을 들이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난 너희들을 잡으러 여기 온 거야.”

“그리고?”

레스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기 싫어.”

“인제 와서 온정을 되찾으셨나?”

피카니는 그의 비아냥을 꾹 참고 계속 말했다.

“상황이 복잡해. 전하의 역할이 특히 막중하지.”


레스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래. 아자리가 말해줬어. 실은 왕족이라며.”

“그녀가 마지막 직계야. 다른 정당한 후보들은 반란으로 모조리 무력화됐어.”


 사실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정보부 말로는 그래. 마왕군이 안 물러나는 건 그저 체계가 개판이라 퇴각을 지휘할 핵심이 없어서라는군.”


아자리는 레스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살짝 피했다. 레스는 머리가 어질거려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현직 용사와 차기 마왕이 같은 자리에 계시다는 거지.”


“그래.”

“넌 애를 수도로 데려가러 왔었지. 대체 제국이 아자리한테 원하는 게 뭐야?”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정치적으로 쓸 용도가 어디 한두 개여야지.”

피카니의 말투에는 꾸밈없는 냉소와 비난이 생생했다. 가짜로 꾸민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레스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왜 용사까지 되어놓고 그렇게 회의적이야?”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니까. 넌 절대 몰라.”

“나야 모르지. 근데 마왕님은 아시나 봐.”


레스가 아자리를 가리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알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전하.”

피카니는 피식하고 쓴웃음을 엷게 짓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국이 지금보다 유리해지면 안 돼.”


“또 무슨 소리야?”

“놈들은 저쪽 영토와 식민지까지 진격할 생각이야. 역사적으로 인간 측이 이렇게까지 우세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복수한다는 명분도 있고.”


아자리와 레스 모두 헉하고 숨을 삼켰다. 아자리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어코 끝장을 보겠다고요?”

“확률이 높지요. 전하가 놈들 손에 들어가면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고.”


두 남자는 아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다문채로 가만히 있다가 잔을 하나 꺼내서 자신 앞에 놓았다. 레스가 음료를 따라줬다. 잔을 비우고 그녀가 말했다.


“저희를 체포하기 싫다고 하셨죠. 실제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는 내내 계속 고민해봤습니다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누가 옳을지는 아무도 모르죠. 어쩌면 세상이 통일되어야 진정한 평화가 올지도 몰라요. 제가 마왕이 되는 것보다는요.”

“그랬다가는 사쿠라비가….”

레스가 말을 하다말고 끊었다. 아자리와 피카니도  말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하려던 말을 이을지 주저하다가 결국 말을 돌렸다.


“나를 쏠 생각이 절반이었다고 했지. 그건 뭐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보안관을 쏜 사람을 그냥 꺼내기는 힘들어. 특히 어제는 여러 가지로 정신도 없었고. 그래서 대강 둘러대고 널 빼돌리려고 했지.”

“그게 절반이었고.”


“나머지는 알잖아. 나도 사람이야.”


피카니는 잔을 벌컥 비웠다. 레스는 무표정했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겨우 아자리가 나서서 서로의 잔에 음료를 채워주자 다시 화제가 흘렀다. 그녀가 말했다.


“어제 새벽 연회는 괜찮았어요?”


“항상 똑같죠. 와인과 아가씨들, 청혼, 그리고 저는 최대한 돌려서 거절하고.”


피카니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넌 술 싫어하잖아. 이틀 전에는 왜 취한 거야?”

“겨우 도착했더니 마왕은 이미 네가 잡았고, 나 같은 깜둥이는 보안관을 못 한다더라.”

레스는 애써 농담조로 말했으나 그때의 참담한 마음은 일행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카니는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너라면 레인저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군인도 충분히 명예로운 일이야.”


“내 스승님처럼? 됐어.”


두 남자는 곁눈질로 서로의 얼굴을 봤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아자리는 묘하게 그 모습이 웃겼다. 피카니는 팔꿈치를 바에 기대고 팔짱을 꼈다.


“참고로 너희들이 탈옥하고 나서 보안관은 책임을 지고 강등당했어. 아마 해리엇 부보안관이 자리를 대신하겠지.”

해리엇이 누군지 모르는 레스 대신 아자리가 대답했다.


“일단은 우리가 좋은 일 하나 했네.”

피카니가 손을 턱에 대고 맞장구쳤다.


“결과적으로는.”


서로 음료를 홀짝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던 중에 바깥에서 소란이 들렸다. 피카니가 입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지?”

“별거 아냐.”


대충 짐작이 갔던 레스와 아자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잔만 내려놓았다.


식당 입구로 아까 봤던 여드름투성이 젊은이와 패거리가 욕설과 함께 우르르 몰려왔다. 아까보다 수가 훨씬 많았다.


“배짱도 좋다 개자식아! 널 여기서 갈아버리고 우리 목장 거름으로 만들….”


기세 좋게 들어오던 패거리들은 피카니의 얼굴을 보고 얼어버렸다. 레스는 권총을 뽑지도 않았고 피카니는 뽑을 총이 없어서 그냥 바라만 보았다. 아자리는 유리잔에 입김을 불고 행주로 닦으며 느긋하게 바텐더 흉내를 냈다.


패거리들은 영혼 없이 지껄였다.

“어…. 그게…. 어?”

“이거 뭐냐?”


피카니는 한숨을 쉬고 정중히 요청했다.


“미안한데 자리를 비켜주겠나?”


패거리들은 나타났을 때보다 더 잽싸게 사라졌다. 덕분에 분위기가 신선해지기는 했다. 레스가 하품을 길게 뱉고 말했다.

“피곤하다.”


“나도.”


“저도요.”

아자리가 말했다.


“그리고 계속 이러고 있으면 주인장에게 민폐에요.”


“타당하군요.”


피카니를 따라서 레스와 아자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카니는 일행들이 마셨던 음료의 대금으로 바에 금화를 하나 올려놨다.


가게 바깥에는 주민들이 멀찍이 거리를 두고 웅성거렸다. 레스가 피카니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그는 피카니의 자동권총을 손잡이가 앞으로 향하도록 거꾸로 쥐고 있었다. 피카니는 총을 돌려받고 레스의 손에 주머니 하나를 놓았다.


“응?”


주머니는 묵직했다.


“내일 봐.”


피카니는 총을 멋들어지게 돌려서 총집으로 되돌리고 그들과 헤어졌다. 레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동안 아자리는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돈이 가득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아마 저놈도 모를 거야.”













여관방 침대에 누워있던 레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런 정상적인 기상이 너무 생소해서 그는 아직 꿈인가 의심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바로 앞에 아자리가 있었다. 레스가 자고 있는 동안 몸단장을 하고 옷도 새로 샀는지 그녀는 한결 귀족 아가씨다운 풍채가 됐다. 너덜너덜했던 원피스 대신 소매와 목깃에 프릴이 달려있는 여성용 셔츠와 종아리까지 닿는 검은색 스커트로 갈아입었고 목에는 파란색 타이를 매었다. 어깨에는 부보안관에게 선물 받았던 보라색 케이프를 둘렀다. 신발은  여행길에 대비해서 원래 신던 구두대신 더 튼튼하고 착용감이 편한 부츠로 갈아 신었다.


반면 레스는 아직도  묻은 셔츠를 입은 채다. 아자리는 그의 품으로 종이봉투를 턱 안겨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봉투 안에는 가지런히 접힌  셔츠와 스카프가 여러 벌 들어있었다. 아마 원래 갖고 있던 터번이 망가지면 쓰라는 의미 같다.

“고맙기도 하시지.”

레스가 옷을 벗고 갈아입을 옷을 집어들자 아자리가 말했다.

“아직 입지 마요.”


“상처라도 봐주게? 괜찮아.  빨리 회복하거든.”

아자리는 조용히 면도칼을 들어 보였다. 어느새 옆에는 면도크림이 담긴 그릇도 있었다. 레스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힐난하는 말투로 물었다.

“왜?”

“사람 꼴 좀 하세요.”


“내 수염이 어때서?”


“앉아.”


아자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레스는 아자리를 상대로 계속 눈싸움을 하다가 마른 침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싫어.”

“마법 하나 보여줄까?”


그녀가 면도칼을 번뜩이며 오묘한 미소를 짓자 그는 소름이 돋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가 의자에 앉자 아자리가 면도를 시작했다. 면도 크림이 입가를 전부 덮고 나서 레스가 말을 하자 입술을 덮었던 거품이 살짝 허공으로 날아갔다.

“싹 밀어버릴  아니지?”


그녀는 단칼에 구레나룻을 싹 밀어버렸다. 레스는 미련을 버리고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자리는 정성껏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얼굴에  털을 모조리 없앴다. 면도가 다 끝나자 여급이 따듯한 물이 담긴 대야를 가지고 방에 들어왔는데 여급은 갑자기 이 광경을 보고 관심이 생겼는지 아자리와 함께 레스가 다 씻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레스는 세수를 다하고 거울을 들고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 절반을 차지하던 수염들이 맨피부로 바뀌어버리니 10년은 어려 보였고 이목구비도 더 잘 보였다. 레스가 보기에는 그저 허전하기만 했다.

“이건 좀….”

여급과 아자리는 그사이에 서로 쑥덕이고 있다. 어째선지 만족한 얼굴로 여급이 세면도구들을 정리하고 나가자 그녀가 방문을 닫고 말했다.

“우리 집에 도착하면 오디션 볼 생각 없어요? 대사 없는 배역으로 잡아줄게요.”

“아주 나중에.”


레스는 옷을 갈아입고 짐을 꾸렸다. 그동안 아자리는 말없이 그를 계속 노려봤다. 당연히 레스는 그 시선이 계속 신경 쓰였다.


“너 오늘따라 이상하다?”

“그냥 생각했어요.”

“어떤 생각.”


“별거 아니에요.”


 물어봤다간 무슨 대답을 들을지 겁이 나서 레스는 신경을 돌릴 생각으로 리볼버의 탄창을 빙그르르 돌렸다. 장전을 마치고 그가 말했다.

“밥이나 먹자.”

여관주인은 어제 소동을 봤던 관객  한 명이었는지 돈을  받으려 했지만 레스와 아자리는 말없이 계산대 위에 돈을 올려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에는 보안관 배지를 찬 뚱뚱한 사내가 서있었다. 허리에 권총도 차고 있지 않았는데 아마 치수에 맞는 벨트가 없어서 그런  같았다. 레스가 쓰고 있는 터번을 위로 올리며 인사했고 아자리도 점잖은 얼굴로 목례했다.


“안녕하쇼.”


마을 보안관은 성대까지 살이 찐 거 같은 둔탁한 목소리로 레스의 인사를 받았다.


“어제 난동을 일으켰더군.”

“죄송해요.”


아자리가 말했다.

“처음이니까 봐주겠네.”

보안관은 그것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레스와 아자리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갈 길이나 갔다. 식당으로 가면서 레스가 말했다.


“이미 우리를 신고했을 거야.”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어제 새벽에 연락했다면 오늘 저녁에 사람이 도착하겠지.”

“그래도  끼 먹을 정도는 되겠군요.”


어제 갔던 식당으로 다시 갔다. 마을 주민들은 반가워하며 인사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긴장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단테도 식당에 있었다. 옆에 자리가 비어 있는 게 두 사람을 기다리던 눈치여서 레스와 아자리는 그곳에 앉고 먹을 걸 주문했다. 단테는 어제보다 여유가 많이 모자라 보였다.


“여러분들 정체가 뭡니까?”

아자리가 대답했다.


“단테 씨. 전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입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인  알지만 제국을 나오고 싶어요. 당신의 마차에 합승할 수 있을까요?”


단테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라프라스 사람이었군요. 저도 돕고는 싶지만….”


“가문의 명예를 걸고 충분한 보상을 약속할게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마을에 용사가 있는데 두 사람이나 숨길 수는 없어요.”

레스가 끼어들었다.

“한 명만 숨기면 됩니다.”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아자리는 놀란 얼굴로 레스를 바라보았다. 레스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용사라면 내가 묶어둘 수 있습니다. 절실하게 부탁드립니다. 대의를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이게 대의하고 무슨 관련이….”


레스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자리아는 마지막 계승자입니다. 그녀를 도우면 당신은 마왕의 조력자가 되는 거고, 성공하면 모든 마족을 구하는 거죠. 할 일은 평소보다는 화물을 하나 더 싣는 것뿐이고.”


단테가 충격에 빠져서 굳어버린 틈에 아자리가 레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여기 혼자 남아서 어쩌려고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난 눈에 너무 띄어서 같이 가면 방해만 돼.”

그때 식사가 왔다. 레스는 더 말하지 않고 밥을 먹었고 아자리도  말이 떠오르질 않았는지 착잡한 얼굴로 한 박자 늦게 식기를 들었다. 그동안 생각을 정리한 단테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