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권] 12회- 안 되면 되게하라
여인은 땅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그녀가 타고 있던 지팡이에서 내리고 후드를 벗자 조그맣고 단정한 얼굴이 드러나고 긴 머리카락이 치렁거렸다. 남자들이 인사를 건네려는데 갑자기 여인은 손을 들고 눈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리고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쪼그려서 구토했다. 피카니는 여인의 등을 토닥여줬다. 전부 게워내고 진정됐는지 여인은 쉬어버린 목소리로 자신의 추태를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반나절을 계속 날아왔더니….”
그러다 여인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서 굳어버렸다. 피카니는 묵묵히 할 말만 했다.
“고생하셨군요. 피카니 홀리데이입니다.”
여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악수를 받았다. 이제 중년 사내가 인사할 차례가 됐다. 그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중년 사내가 문을 열고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자세 고쳐 잡고 재정비하도록.”
흑인 사내는 바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체스 도구를 미련 없이 정리했다. 맞은편의 청년은 심드렁한 얼굴로 가만히 투덜거리기만 했다.
“이기고 있었는데.”
“그리고 발언 수위에 유의할 것. 너한테 하는 말이다.”
중년 사내가 핀잔을 주자 청년이 대꾸했다.
“오늘따라 예민하신데 생리라도 왔어요?”
“손님이 왔다.”
중년 사내가 말을 마치고 몸을 비키자 피카니와 여인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청년은 여자가 왔다는 걸 알자마자 조건반사 운동이라도 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중년 사내가 그들에게 여인을 소개했다.
“제국 수석 마법사인 루나 센델자레 님이시다. 전체 차렷.”
청년은 먼저 루나를 향해 경례하고 말투 대신 다른 사람 같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르델 캐시디 중사 보고합니다.”
옆에 있던 흑인 사내도 자신을 소개했다.
“아비투스 오리온 중사 보고합니다.”
마지막으로 중년 사내가 말했다.
“헨리 웨슬리 하딘 대위요. 먼 길 수고하셨습니다. 마법사님.”
하딘 대위가 대원들에게 ‘쉬어!’라고 외치자 다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정자세를 취했다. 루나는 군인들의 딱딱한 환대에 겁을 먹었는지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띠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부스스한 군청색 머리카락은 종이 끈에 묶여서 등까지 닿았고 얼굴에는 앞머리는 얼굴 절반을 덮을 정도로 길었다. 움푹 파인 퀭한 눈가에는 기미가 화장한 것처럼 진했고 주황색 눈동자는 부들부들 떨렸다. 여기다 상복을 방불케 하는 새까만 옷차림까지 더해지니 뭐라 말하기 힘든 음침함이 전신에 넘실거렸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동물의 새끼를 바라볼 때처럼 묘한 보호 욕구도 동시에 일어났다. 여자치고는 키도 남자들 못지않게 컸는데도 말이다. 피카니는 취향 특이한 사람이 마네킹을 화려하게 꾸미려다가 도중에 때려치우고 몇 달 내버려 두면 비슷한 느낌이 나겠다고 생각했다.
하딘 대위가 루나에게 말했다.
“의자 가져오겠습니다. 마법사님.”
괜히 긴장했던 그녀는 반사적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괘, 괜찮아요! 그냥 서 있을래요! 엉덩이가 아파서!”
하딘 대위는 창피로 얼굴이 빨개진 루나를 무시하고 피카니를 쳐다보았다.
“그쪽은?”
“종일 누워있었으니 지금은 세워두지요.”
“좋아.”
하딘 대위도 일어나는 걸 택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경직됐던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피카니가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카르델 중사도 그 생각에 동참했다.
“두목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저도 세부사항이 무척 궁금한데요.”
하딘 대위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평소에 하던 일을 할 것이다.”
어색한 침묵을 무시하고 대위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상황이 특수해졌다. 피카니 경과 마법사님도 함께할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루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군인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피카니가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갑자기?”
“그리됐네.”
“왜?”
“그것은 뭘 묻는 의문사지?”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나랑 당신들이-”
“사적인 대화는 나중에 하자고.”
하딘 대위는 곁눈질로 바로 옆에 있는 루나를 가리키자 피카니도 일단 말을 아꼈다. 하딘이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는 마족들의 땅까지 간다.”
폭죽이 터지듯 잇단 갑작스러운 소식에 각자 경악했다. 카르델 중사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농담이죠?”
“나는 과장하지 않았다.”
“우린 그런 거 못 하잖아. 잠입은 공작원들 몫이지….”
“이번에는 우리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단 들어.”
하딘이 무게 잡은 어조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피카니와 루나도 그 모습에 절로 압도당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건지 우리 모두 완벽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미리 말하도록.”
아비투스 중사가 손을 들고 물었다.
“피카니 경은 구체적으로 입장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희처럼 대위님의 지휘를 받습니까?”
피카니도 궁금했다. 하딘 대위는 숨을 크게 쉰 다음 자신의 외투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서 읽었다.
“상부는 레인저들의 자율적 판단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임무 완수 시 그 과정에서 일어난 범죄 이외의 행위에는 책임과 교전권 위반 여부를 묻지 않는다.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하여 보급 순위와 검문 과정 또한 지정된 부대가 활용 가능한 범위 안에서 특혜를 보장하지만, 이 특혜들은 피카니 조슈아 홀리데이 경의 임무 수행 보조와 엄호와 관련된 사항이었을 경우에만 적용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던 아비투스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반응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딘 대위가 말을 덧붙였다.
“피카니 경은 우리들의 상관도, 부하도 아니다. 우리들의 역할은 상하 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협력하는 것이다. 물론 마법사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보충할 점 있나?”
카르델 중사가 손을 들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 용사님의 임무요?”
“말을 가려서 해라 중사.”
하딘 대위는 최대한 무감정하게 말했으나 밑에 깔린 모멸의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피카니는 덤덤히 받아넘겼다. 루나는 용사인 피카니가 그들에게 왜 이런 취급을 받는지 이해를 못 했으나 손을 들 용기가 없었다.
하딘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1개월 전 일이다. 마족들의 땅에 있는 공작원들에게서 와야 할 소식이 모조리 끊어졌다. 대대로 쌓여온 정보망이 박살 났다더군. 말인즉슨 지금 제국은 장님에 귀머거리라는 거다. 첩보부의 ‘서커스’에 전례 없는 비상이 내려졌다.”
“서커스?”
피카니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루나가 반사적으로 속삭였다.
“은밀한 업무 부서를 전반적으로 칭하는 은어예요.”
“어…. 그렇군요.”
루나도 자신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놀랐는지 겸연쩍게 헛기침을 했다. 하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첩보부는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면 두 발로 직접 뛰어가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해결하려면 그쪽 요원들과는 달리 훨씬 단순무식한 분야에 능한 사람이 필요했지. 그래서 다리가 제일 튼튼한 우리가 여기 모인 거다. 작전은 우리가 피카니 경과 마법사님하고 합류하는 순간에 시작하기로 결정됐다.”
카르델이 구시렁거렸다.
“그래서 우리가 뜬금없이 나으리를 찾으러 다닌 거구먼.”
아비투스가 손을 들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닙니까? 이렇게 엄중한 일이라면 시간을 들여서 계획을 치밀하게 짜야 할 텐데요.”
하딘은 조금 뜸을 들이고 답했다.
“나도 항의해봤다만 상부에서 말하기를. 최대한 서두르는 게 효율적이라더군. 지금처럼 정보가 없는 판국에 세운 계획 따위는 어차피 쓸모가 없을 거라면서. 슬프게도 당장 우리 도울 계획이라고는 건빵 5인분이 고작이다.”
피카니가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따로 맡은 일이 있습니다. 이걸 내버려 두고 다짜고짜 합류하라니요?”
“마침 잘됐군.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시오.”
피카니는 하마터면 흥분할 뻔했다.
“그건 기밀입니다.”
“대충만 말하면 돼. 그리고 피카니 경의 임무는 아직도 유효하오. 나도 대충은 알지만 기왕이면 당사자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낫겠지.”
피카니는 이 정찰임무가 레스와 아자리 일행을 추격하는 것도 겸한다는 걸 깨달았다. 제국이 서두르라고 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도. 그는 아자리의 몽타주와 레스의 수배서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레인저 대원들과 루나는 그것을 보았다.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 전 마왕의 조카입니다. 제가 쫓고 있는 최우선 고가치 표적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카르델 중사가 레스의 수배서를 검지로 쿡 찌르면서 물었다.
“이 사쿠라비는 뭐야?”
“고가치 표적의 협력자. 협력하는 이유는 불명입니다. 지금 둘이서 같이 행동하고 있으며 마족 땅으로 향할 확률이 무척 높습니다.”
하딘이 이어서 말했다.
“가는 길에 이 두 명도 쫓아간다. 특히 여자 쪽은 반드시 생포하라고 상부에서 당부하더군.”
아비투스 중사가 손을 들고 말했다.
“생포한 뒤에는 돌아갑니까?”
“그래. 그 정도로 중요하다더군. 생포 및 사살에 성공한다면 마족 땅으로 가는 임무는 미루고 바로 돌아간다.”
사살이라는 말에 피카니가 당황했다. 하딘 대위가 덧붙였다.
“참고로 생포하면 우리들의 퇴직 연금이 다섯 배로 늘어난다. 대의와 노후를 위해 최후의 수단은 잊어두자고.”
카르델 중사는 휘파람을 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에 눈 돌릴 여유가 없어서 시큰둥했다. 카르델이 말했다.
“동기부여는 좋구먼. 그런데 말입니다.”
“뭐냐.”
“아무리 봐도 마법사님은 거친 일에 익숙하신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괜찮으신 겁니까?”
루나는 더듬거리면서도 씩씩하게 말했다.
“괘, 괜찮아요. 제가 원해서 지원한 거니까요. 이런 일인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카르델 중사가 진지하게 물었다.
“지원하셨다고요? 알면서 온 거 같지는 않은데요?”
“무슨 일을 하게 될 건지는 기밀이라며 자세히 말 안 해줬지만 누군가는 해야 해서 왔어요. 안 그럼 후배들이 가니까요.”
“뭣!”
하딘 대위가 내지른 탄식이었다. 다른 남자들도 경악했다. 모두들 루나가 이렇게 대충 뽑혀 왔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카르델 중사가 목에서 기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삼키고 말했다.
“대장님. 이분은 우리와 같이 가면 안 됩니다.”
하딘 대위는 오만상을 한번 찌푸렸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도 마법사님이 민간인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역사상 마법사와 군인이 함께 체계적으로 작전 수행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여정을 생각하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다.”
아비투스 중사도 반대했다.
“마법사님을 무시하긴 싫습니다만 황무지는 여자가 견딜만한 곳이 아닙니다.”
피카니도 거들었다.
“차라리 제 연줄로 다른 적임자를 찾아보지요.”
한순간 레인저들은 피카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침묵 속에서 하딘 대위는 길게 고민하고 말했다.
“내일 출발한다. 상세 계획을 피카니 경하고 의논하는 동안 너희 둘은 마법사님이 떠날 준비를 거들고 쉴 곳으로 안내해드려라.”
"떠날 준비요?"
아비투스가 물음에 하딘은 가차 없이 답했다.
"물론 우리랑 떠날 준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