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권] 13회- 아름다운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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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꺼지고 어둠이 깔렸다. 푸른 초원을 달려온 마차는 활엽수가 듬성듬성 자란 곳에 멈췄다. 단테는 짐칸에 앉아있는 손님들의 따분한 끝말잇기 놀이에서 귀를 떼고 자리에서 내렸다. 짐칸에 타고 있던 손님들도 따라 내렸다.
하늘에 달이 떴고 야영하기 알맞은 평평한 땅이 바로 옆에 있었다. 주위에는 말들이 먹을 푸른 풀이 무성했고 나무들이 사방에 있었다. 덕분에 불을 피워도 나무들이 빛을 가려줄 것이다.
아자리는 내내 짐칸에 박혀있느라 머리가 아팠는지 계속 휘청거리면서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중이다. 단테도 욱신거리는 몸을 여기저기 풀면서 마차에서 내려와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밥 준비하지요.”
“우리가 도울 게 있을까?”
“땔감만 넉넉하면 되겠군요. 오늘 밤은 추울 겁니다.”
레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자리와 함께 주위를 돌아다녔다. 아자리가 나뭇가지들을 손으로 만져보거나 조금씩 부러트리면서 확인하면 레스가 받아서 모았다.
그녀가 조금 두꺼운 나뭇가지를 밟아서 부러트리고 말했다.
“아직은 잘 풀리고 있네요.”
“그러게. 지금쯤 습격받을 때도 된 거 같은데.”
“단테 씨가 방향을 무척 잘 잡네요. 길에서 너무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잘 숨어다니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간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 일도 안 생긴다면.”
“말이 씨가 되니까 여기까지만 말하죠.”
땔감을 한 아름 안고 돌아가니 단테는 이미 요리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을 지폈다. 불쏘시개, 돌, 잔가지를 차곡차곡 쌓고 마지막으로 나무껍질을 얹은 다음 레스는 부싯돌을 부딪쳤다. 불꽃은 화려하게 튀기만 하고 성과가 없어 아자리는 답답해져 레스의 등을 쿡쿡 찔렀다.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던 그가 뒤를 보았다.
“왜?”
“물러나 있어요.”
그녀가 입으로 뭔가 중얼거리고는 허공으로 손가락을 튕기며 주문을 외쳤다. 마법을 부리는 아자리를 단테는 신기해하는 눈으로 보았고 레스는 겁먹은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포르차 샬페.”
모닥불은 기름을 듬뿍 끼얹은 듯 화려하게 타올랐다. 단테는 태연히 불 위에 솥을 얹고 요리를 시작했다. 미리 손질된 재료들을 넣어서 볶은 다음 농축 수프 통조림과 물을 부어 끓였다. 일행들은 각자 자리를 깔고 국물 끓는 소리를 반주 삼았다. 운은 레스가 뗐다.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그가 대답했다.
“어디 보자. 일단 제국의 국경을 완전히 넘는 데에 3일. 만일 열차까지 탄다면 저쪽까지 한 달 정도.”
아자리가 말했다.
“가는 길에 우리가 탈 수 있는 열차가 있어요?”
단테는 냄비 바닥을 주걱으로 통통 때렸다.
“제국이나 연합 말고 지하조직에서 운영하는 철도가 있습니다. 원래는 마왕 쪽의 높으신 분이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철도가 갓 완성되자마자 도중에 엎어졌죠. 철도는 어느 길드에 낙찰됐고요.”
레스가 끼어들었다.
“원래 사업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데?”
“그 높으신 분의 불륜, 횡령, 입에 담기 좀 뭐한 것들까지 다양하게. 데리고 있던 시종들이 다 여장한 남자들이었다던가.”
레스는 표정이 오묘해지더니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그런 놈하고는 안 엮이는 게 좋지.”
단테는 무슨 말인지 물었다가는 식욕 떨어질 대답이 돌아올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말을 삼켰다. 아자리도 신경 쓰였지만 주제를 흐리고 싶지 않았다.
“열차는 한참 나중 일이고. 당장은 어디로 가나요?”
“근방에 토착 원주민들이 지내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즐겨 들르는 곳인데 거기서 작은 물물 교환을 하고 갈 겁니다.”
“가는 길에 있고 오래 걸리지만 않으면 상관없어요.”
레스가 다시 끼어들었다.
“원주민?”
“물 좋은 계곡과 푸른 숲 사이에 슈슈니라고 불리는 다크 엘프 부족의 마을이 있습니다. 총이나 전기 시설 없이 자연 그대로 살고 있죠.”
냄비 안의 재료들이 펄펄 끓는 물에 풀어져 갔다. 단테가 향신료까지 한 움큼 넣자 식욕을 돋우는 향이 사방에 퍼졌다.
스튜는 거의 완성됐다. 아자리가 단테에게 물었다.
“그런데 엘프 부족이 왜 여기 있죠? 고향으로부터도 까마득한 데다가 제국령 안이잖아요.”
“원래 여기 살고 있었는데 인간들이 왔을 뿐이죠.”
그가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레스는 모닥불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원주민들이라면 오는 길에 몇 번 만나 봤지. 불쌍한 사람들. 개척시대에 인간하고 마족들한테 땅도 빼앗겼는데 전쟁에까지 휘말리고 있더라.”
그 말을 들은 아자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남자들은 그녀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레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국이 그 사람들을 내버려 둔 건 이상하네. 엘프라서 건드리면 안 된다고 여론이 반발했나?”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앞으로도 그들이 영혼을 간직하며 살기를 빌 뿐입니다. 좋은 사람들인데.”
일행들은 스튜를 남김없이 먹고 잘 준비를 했다. 레스가 침낭의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불침번은 내가 할게.”
“돌아가면서 하는 거죠?”
아자리의 물음에 레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단테는 마차를 몰아야 하고 너는 의사잖아.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
“무슨 일 생기면 싸울 사람은 아저씨잖아요. 분담해요.”
“말은 고맙지만 그렇게 피곤한 얼굴로 말해봐야 불안하기만 하거든.”
그 말대로 아자리는 눈이 당장이라도 감길 거 같은 모습이었다. 단테가 몸을 뉘며 말했다.
“총잡이에게 한 표. 신사도를 위해.”
“빨리 자.”
그렇게 말하며 레스는 모닥불에 따끈히 데운 담요를 아자리에게 던져줬다. 그 푸근한 감촉에 아자리는 참아왔던 잠기운이 몰려와서 눈꺼풀이 2배는 무거워졌다. 그녀는 결국 바로 항복하고 하품을 길게 뱉고는 작별 인사도 없이 드러누웠다. 그리고 순식간에 꿈나라로 떠나는 평온한 숨소리가 이쪽까지 들려왔다. 아무리 씩씩한 척해도 역시 체력은 여자아이였다.
레스는 소리 안 나게 권총을 꺼내고 안을 살폈다. 리볼버에는 총알을 여섯 개까지 넣을 수 있으나 그는 일부러 하나를 덜 넣었다. 오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다니면서 레스는 생각했다.
‘맹수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풀들은 다른 초식 동물무리가 찾아올 만큼 무성하지도 않았고 새들의 둥지가 지어진 나무도 없었다. 이런 척박한 곳에 볼일 있는 동물은 사람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탈 만한 부스러기를 몇 개 주워서 모닥불에 던지고 위를 보았다.
‘아는 별자리가 없네.’
고향으로부터 대체 얼마나 멀리 떨어진 건지 계산이 안 됐다. 이런저런 잡념으로 기분이 심란해지자 그는 지평선과 하늘 사이에 시선을 놓고 마음을 비워서 명상했다. 문득 나무 잎사귀 하나가 근처에서 팔랑거리기에 그는 손끝으로 낚아채고 불빛에 비춰서 그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의문을 느꼈다.
바람 따위로 떨어질 낙엽이 아니라 파란 나뭇잎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세게 불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조금 요란했었다. 생각 없이 시선을 위로 올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사람의 눈이 모닥불에 반사된 거였다.
소리를 질러서 일행을 깨워야 한다는 생각보다 손에 들린 권총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철컥하는 소리만 났다.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나무 위에 숨어있던 사람이 레스를 향해 떨어졌다.
피부색이 진하고 귀가 유난히 뾰족한 여자였다. 여자는 그의 권총을 멀리 쳐내고 팔다리를 레스의 몸에 휘감아서 제압하려고 했다. 뱀에게 휘감긴 먹잇감의 심정으로 레스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켁! 칵! 애들아 일어나! 일어나라고!”
노력은 가상했으나 속삭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몸싸움으로 계속 뒤엉키면서 땅바닥을 굴렀고 의도치 않게 모닥불 근처까지 갔다. 그때 마침 속이 빈 장작이 타고 있었는지 모닥불 속이 펑 하고 터졌다.
“큭!”
모닥불에서 튄 불꽃에 여자가 놀라 빈틈이 생겼다. 레스는 헐떡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
여자는 기겁하고 효율적인 자세는 잊어버리고 마구잡이로 달라붙었다. 그 와중에 레스의 머릿속 한 편에서는 여자와 이렇게 몸을 붙여본 건 난생처음이라는 태평한 생각도 돌아다녔다. 어처구니없다고 레스도 자각은 했으나 원래 사람이란 게 상황이 급할수록 온갖 잡념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 와중에 단테와 아자리는 잘 자고 있었다. 레스도 잘 자기 직전이었다. 일행들을 깨우려고 모기 같은 목소리로 계속 질러봤으나 부질없었다.
그때 레스는 아까 손에서 놓쳤던 권총이 아자리가 덮고 있는 담요 위로 떨어진 걸 깨달았다. 레스는 마지막으로 저력을 쥐어짜서 몸을 구르고 팔꿈치를 비비고 손가락만 움직이는 등 온갖 수를 써서 아자리의 담요를 잡아당겼다. 권총이 그의 손으로 들어오려면 아직 멀었다. 물론 습격자도 그 시도를 막으려 했으나 너무 거칠게 움직였다가는 기척 때문에 잠을 깨울까 저항이 소극적이었다.
마침내 담요 위에 있던 권총이 레스의 손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웅.”
아자리는 한기를 느끼고 자기 몸에서 거의 벗겨지려던 담요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권총도 저 멀리 떠나버렸다. 레스의 얼굴은 모닥불하고도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시뻘게졌다.
입을 뻐끔거리며 온갖 저주를 쏟아내는 레스가 어지간히 웃겼는지 여자는 닥친 상황조차 잊어버리고 웃음을 참느라 뱃속에서부터 몸이 떨렸다. 찰나에 그것을 감지한 레스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팔꿈치가 여자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꽂히자 ‘퍽!’하고 소리가 났다. 여자를 상대로 손찌검을 한 게 바로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다.
상대가 정신을 찾기 전에 레스는 여자의 손은 뒤로 꺾어서 급한 대로 쓰고 있던 터번으로 단단히 묶었다. 입도 손수건으로 재갈을 물리고 나서야 싸움이 끝나자 그는 탈진해서 한참을 드러누웠다.
‘죽는 줄 알았네…. 애들을 깨워야 하나? 일단 조금만 쉬고….’
레스는 그대로 잠들었다.
◆
다음 날. 온몸을 적시는 아침 이슬에 아자리는 눈을 떴다. 잠에서 깨면 항상 그렇듯이 아자리는 더 자고 싶었지만 모닥불이 꺼져서 너무 추웠다. 그녀는 축축해진 담요를 치우고 일어났다. 여기저기 생각 없이 둘러보는데 바로 앞에 포박당한 다크 엘프 여자와 레스가 나란히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자리의 비명과 함께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벌떡 서서 레스에게 삿대질을 하며 평원 전역에 들릴 만큼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어젯밤에 뭔 짓을 한 거야?!”
레스는 모래 묻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키고 한쪽 무릎을 세운 다음 거기에 팔과 턱을 올렸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가 변명했다.
“제가 먼저 시작했어.”
“웃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