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권] 14회- 손님은 왕이다
영문은 몰랐으나 일단 단테는 여인의 재갈을 풀어줬다.
말갈기처럼 올이 굵고 윤이 흐르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땋아 등줄기를 따라 흘렀고 그 풍성한 머리칼 속에 뾰족하고 긴 귀가 삐죽 나왔다. 양쪽 뺨에는 붉은색 분장이 칠해져 있고 숫돌로 갈아낸 듯 매서운 눈매에 녹색 눈동자가 물에 젖은 옥돌처럼 빛났다. 녹색에 푸른색이 살짝 섞였다. 전날 밤에 레스와 투덕거린 탓에 얼굴과 온몸이 흙투성이였지만 지저분하다는 인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맹수의 몸에 흙이 묻었더라도 그 위압감이 줄지 않는 것처럼.
입고 있는 가죽옷은 움직이기 편하게 치수를 몸에 딱 맞춰서 군살 없이 날렵하게 단련된 근육질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피부색이 진한 것과 더불어 마치 흑표범의 그림자 같았다. 본인의 취향인지 옷깃 여기저기에 알록달록한 색으로 자수가 박혀있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 마무리가 엉성해서 올이 튀거나 대칭이 안 맞았다.
잠깐의 시간 뒤. 레스로부터 사정을 들은 아자리가 단테에게 물었다.
“이걸 어쩌면 좋죠?”
단테는 침착하게 여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케르가르 비 아나스트리. 레이비아 세르사?”
여태껏 볼만 부풀린 채 뚱한 얼굴로 침묵만 지켜왔던 다크 엘프는 바로 대답했다.
“메르투아 웨스티 니스키파.”
여인의 목소리는 늑대의 울음처럼 살짝 쉬어 있었다. 억양이 재빠르면서도 어찌나 발음이 정확한지 레스는 알아먹지 못했어도 뭐라 했는지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그가 말했다.
“방금 뭐 한 거야?”
“여기서 뭐 하냐고 물어봤어요. 보초를 서고 있었다는데. 저로서는 글쎄요.”
단테는 여인을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라 발라푸 카니 미니르하?”
“로르코.”
“트리비아 발라 시피.”
“루르코. 라 발라 샤나르페 비 즈리샤심리.”
단테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같이 가야겠네요. 어차피 우리랑 갈 길이 같아요.”
그 말을 듣자 레스가 기겁하고 손사래를 쳤다.
“싫어! 나 아니었으면 우리한테 뭔 짓 했을지 모른다고! 운이 좋아서 다행이지! 어제 재랑 싸울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아자리는 태연했다.
“전 상관없는데.”
“제정신이냐?”
“당신 몰랐군요? 다크 엘프는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아요. 저 사람이 진심으로 싸웠다면 댁은 상대도 안 됐어. 그리고 딱 봐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눈치 좀 길러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자리는 눈썹을 들썩거리며 레스의 옆구리를 찰싹 때렸다. 그 와중에 여인은 레스를 향해 경멸하는 눈빛을 광선처럼 쏘아 보내고 있었다. 나쁜 사람인지는 둘째치고 친해질 일은 영영 없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새 아침 해가 지평선에서 튀어나왔다. 주변이 밝아지니 어젯밤에 저 엘프와 레스가 얼마나 난장판을 만들어댔는지 확연히 보였다. 아자리는 구경을 멈추고 말했다.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하죠?”
아자리가 여자의 묶인 손을 가리켰다. 단테가 여인과 잠깐 말을 나누고 대답했다.
“그편이 더 안심된다면 그대로 둬도 상관없다네요.”
여인은 레스를 그만 째려보고 어제 자신이 숨어있던 나무로 걸어갔다. 도움닫기를 짧게 하더니 그대로 다람쥐처럼 단숨에 올라갔다. 어떻게 손이 묶인 채로 저럴 수가 있나 레스는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턱을 떨궜다.
아자리는 단테를 따라가고 있었다.
“여기서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마차나 말을 타서 3시간 정도.”
“그렇게나 멀어요? 뭐하러 이렇게 멀리까지 왔지?”
“큰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일행들이 야영한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여인은 나무 위에서 자신의 소지품들을 내렸다. 동물의 뼈를 깎아서 만든 날을 단 손도끼, 흑요석 단검, 활과 화살. 온갖 무기들이 줄줄 떨어지는 걸 보고 레스는 떨군 턱을 이번에는 다물고 침을 삼켰다. 과연 아자리 말대로 저 여인이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어제처럼은 안 넘어갔을 것이다.
무기들의 주인도 사뿐하게 고양이처럼 내려왔다. 그녀는 레스와 자신의 물건들을 번갈아 봐서 노골적으로 눈치를 줬다. 레스는 여인과 잠깐 눈싸움을 하다가 결국 대신해서 물건을 챙겨주었다.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오늘은 예상치 못한 동행 때문에 안쪽은 분위기가 어색하면서도 활기가 돌았다. 아자리는 양손의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뭔가 필사적으로 기억해내려 하더니 어색한 억양으로 말문을 열었다.
“으흠. 밀레시마르 비 에됴르.”
“밀레시.”
여인은 바로 아자리의 말을 받았다.
“아둔케르 비 발라 루베카?”
“로르코.”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아자리가 레스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는데 그렇다고 하네요.”
“과연. 그런데 너 저쪽 말로 대화할 수 있어?”
“간단한 것밖에 못 해요. 제가 아는 엘프어가 여기에서도 제대로 통하는 건지 잘 모르겠고요. 어느 정도는 통하는 거 같은데.”
“이름을 물어봐.”
아자리가 여인을 바라보았다.
“와리후 니크마?”
“샤카자이아.”
사카거웨아? 샤카구헤아? 뭐라는 거야? 레스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메 데 니크마데토 아자리.”
“밀레시 아자리. 카모그타 니세크투와.”
방금 아자리가 자기를 소개했고 어조로 보건데 샤카자이아도 적당히 받아준 거 같았다. 아자리는 계속 대화를 이었다.
“키리도 니크마데토 레스 알 하자르.”
여인은 레스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푸시트 니크마.”
알아듣지는 못해도 레스도 이 정도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녀석 방금 내 이름이 이상하다고 한 거냐?”
“용케 아셨네요.”
“너도 만만치 않아 이것아.”
소용은 없겠지만 당하고만 있기는 싫어서 레스는 통역 없이 직접 말했다. 의도는 제대로 전달된 거 같다. 샤카자이아는 뚱한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삐죽 혀를 내밀었다.
◆
빵 가게의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노동자들은 각자의 일터로 떠난다. 마을 광장에서 하딘과 피카니는 각자의 말에게 짐을 실었다. 탄약 주머니, 수통 여러 개, 휴대식량, 그리고 여분의 부츠. 카르델이 자신의 말을 끌고 왔다. 그가 하딘에게 건성으로 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왔지 말입니다.”
하딘이 자신의 말에게 솔질을 계속하며 대꾸했다.
“좋은 아침이다.”
“상세한 이동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피카니가 말했다.
“국경을 향하는 도로는 하나뿐이니 첫날에는 거기로 갈 겁니다.”
“그리고? 바로 국경을 넘나?”
“둘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면.”
세 남자는 근처의 빵 가게에서 방금 구운 빵을 사서 요기했다. 거의 다 먹어갈 때 아비투스 오리온과 루나 센델자레가 나타났다.
“이게 뭔?”
카르델 중사가 루나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르델은 루나에게 바로 달려가서 길을 막고 물었다.
“옷차림이 왜 그러십니까?”
루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제 평소 복장인데요?”
루나는 머리에 검은색 실크 모자를 머리에 쓰고, 어깨에는 소매와 후드가 달린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사람 키만 한 지팡이로 땅을 짚고 있었다. 아비투스도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문제 있어?”
“얼간아! 난 마법사가 보이면 그것부터 쏜다고!”
그 말에 일행들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딘도 그 말을 듣고 솔질을 멈추고 루나를 보고는 눈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카르델이 이어서 물었다.
“마법사님. 타고 가실 말은 어디 있습니까?”
“그.. 그게...”
루나는 겁먹어서 더듬거렸다.
“그냥 왔을 때처럼 지팡이에 타서 날아갈 생각이었는데…. 저 말 타본 적 없어요.”
“조짐이 아주 좋구먼.”
하딘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카르델! 마법사님의 잘못이 아니라 미리 신경 써주지 못한 우리 잘못이다! 입 다물어!”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카르델은 헛기침을 하고 길을 비켜주었다. 카르델의 태도가 무례하긴 했어도 의견은 꺼낸 말은 지당했다. 하딘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정수리를 긁었다.
“의견 떠오른 사람?”
아비투스는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남장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여자 옷보다는 남자 옷이 야외 생활에 적합하다. 더군다나 남자들 사이에 여자가 끼어있으면 특히나 눈에 띌 것이다. 남자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지레 겁먹고 피카니에게 물었다.
“그럼 저도 여러분들처럼 삭발해야 하나요?”
피카니가 루나의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번 살펴보고는 말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산뜻하게 다듬어야겠군요. 길면 불편하니까.”
아비투스가 하딘에게 말했다.
“타고 갈 건 어떻게 합니까? 여기 목장에서 조랑말이라도 데려올까요?”
하딘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조랑말한테 맞춰주면 너무 느려져. 마법사님이 같이 올라탈 수밖에.”
“제 건은 안 됩니다. 튼튼한 놈이지만 저하고 제 장비들만으로도 너무 무겁습니다.”
갑자기 아비투스가 루나 쪽을 바라보면서 변명하듯 급하게 말했다.
“마법사님이 무겁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딘은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나는 가장 선두로 가야 하니까 안 돼. 카르델은 저격수니까 다른 사람 태울 여유가 없고.”
카르델이 피카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하나 남네.”
루나는 피카니를 보고는 어쩔 줄 몰라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피카니는 생각 이상으로 아주 힘들어지겠다고 표정 없이 뇌까렸다.
◆
“슬슬 내릴 준비 하세요 여러분.”
단테가 마차 속도를 늦췄다.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불편하게 잠을 잔 탓에 피로가 쌓였는지 오는 길에 곯아떨어졌다. 아자리는 둘을 깨우지 않고 수첩에 뭔가를 계속 끼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단테가 물었다.
“뭘 그렇게 쓰시나요?”
“일지요. 계속 써보려고요. 기회가 되는대로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다 적어두고 싶고요.”
“저기 있는 총잡이의 이야기라던가?”
아자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속 연필을 움직였다.
“마족과 인간의 관점이 동등하게 실린 책은 여태껏 전혀 없었거든요. 레스가 용사라는 건 상황보고 넣어야겠죠.”
“그럴 기회는 영영 없을 거 같습니다만.”
“왜요?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텐데.”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간신히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뜸을 들이고 아자리가 말했다.
“정말 제가 옥좌에 올라야 할까요?”
“제게 떨어질 부스러기만 생각하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다른 계승 후보들은 글러 먹은 놈들뿐이었습니다. 라프라스 가문이라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아자리는 대답하지 않고 수첩을 닫았다. 손에 힘을 너무 주는 바람에 졸고 있던 사람들은 수첩이 닫히는 소리에 잠을 깼다. 레스가 아자리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
“시끄러.”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니면 말고. 말 나온 김에 이 녀석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해줄래?”
그가 샤카자이아를 가리켰다.
“왜요?”
“이제 터번 돌려받고 싶거든.”
아자리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샤카자이아에게 말했다.
“트비레 토바라슈 베이투필가렐.”
샤카자이아는 뒤로 묶여 있던 양손을 위로 번쩍 들고는 태연하게 머리를 넘겨서 자기 앞으로 두었다. 경이로운 유연성에 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바로 말을 삼키고 포박을 풀어주었다. 터번을 쓰고 끈으로 묶는 레스를 보며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푸시트.”
“그래 마음대로 불러라.”
모름지기 외국어는 욕설부터 배우는 게 빠르다고 했다.
마차가 멈췄다. 그들은 물건을 챙겼다. 레스가 평소 습관대로 권총을 꺼내서 살펴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자리가 빼앗았다.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반응할 수 있었지만 레스는 일부러 가져가게 두었다. 볼멘소리로 그가 말했다.
“야.”
“당신은 생각하는 속도보다 손이 더 빠르니까 안 되겠어요. 이번에도 마을 한복판에서 사고 쳤다가는 진짜 못 돌이킨다고요.”
레스는 눈앞의 샤카자이아를 흘깃 보고 깊이 고민했다. 결국, 허리에 찬 벨트까지 벗었다. 그녀는 정중히 받았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자리는 레스의 권총을 벨트에 꽂고 둘둘 말아서 자신의 배낭에 깊이 넣었다. 마침내 그들은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다. 레스가 단테에게 물었다.
“마을 안으로는 마차로 못 들어가는 거야?”
단테는 마차에서 말들을 분리하고 근처에 느슨히 묶었다. 곳곳에 말들이 먹을 신선한 풀이 가득했고 못도 하나 있었다.
“마을로 향하는 바퀴 자국을 남길 수는 없거든요. 짐 좀 들어주세요.”
일행들은 물물교환에 쓸 상품이 들어있는 상자를 챙겼다. 교환만 끝나면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고 들고 갈 상자의 무게가 상당해서 부피가 큰 개인 물품은 마차에 뒀다. 아자리는 몸수색을 당할까 걱정되어서 레스의 권총이 들어있는 자신의 배낭도 마차 안에 두기로 했다.
샤카자이아가 말없이 자연스럽게 앞장을 섰다. 퉁명스러운 건지 친절한 건지 레스는 도통 속을 모를 여자라고 생각했다.
조금 걷다가 심심해진 아자리가 레스에게 잡담을 걸었다.
“여기 주민들이 손님을 참 싫어하나 봐요.”
“뭔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접대의 관습이라고 알아?”
아자리는 이것저것 떠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손님에게 빵과 소금을 내오는 걸 최고의 환대로 여겨요.”
잠깐 먼 산을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그가 답했다.
“우리에게는 예전 이야기가 아니라 생존수단이야. 유목민들은 훨씬 엄격하지.”
“얼마나 엄격한데요?”
“자기 가족을 죽인 원수라고 해도 손님이라면 건드릴 수 없어.”
“우와악.”
아자리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경악했다.
“손님에게 해를 끼치고 부족의 명예를 더럽힌 놈들은 엄벌이야. 명예를 잃은 부족은 다른 부족의 영역을 안전히 통과할 수 없게 되니까. 사막에서 그렇게 되면 치명적이지.”
문명인에 속하는 아자리로서는 지평이 넓어지는 이야기였기에 그녀는 감명 깊게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물건 팔러 와서 그런 걸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단테는 여기 사람들하고 면식이 있잖아.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
덕분에 일행들은 한층 더 심란한 마음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