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권] 15회- 한 움큼의 식사
발끝으로 서면 움푹 파일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다. 단풍이 들고 낙엽이 수북한 게 사방에서 가을의 풍취가 물씬거렸다. 심심해진 아자리가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정착하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갑자기 왜?”
“여기까지 걸어서 왔다면 도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한 번쯤은 있었을 거 같아서요.”
“그다지. 눌러앉는다는 개념은 나한테 생소하거든.
은근슬쩍 샤카자이아는 두 사람을 향해 곁눈질까지 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가다가 샤카자이아가 멈추라고 손을 들어서 일행에게 신호했다. 그들이 가만히 있자 나무 위나 수풀 속처럼 숨을 수 있는 온갖 장소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졌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모두 젊었다. 레스는 갑자기 나타난 다크 엘프 파수꾼들의 차림을 보고 긴장해서 턱을 집어넣었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더니?”
권총이나 소총을 가지고 다니는 건 기본에 수류탄까지 차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아자리는 불안한 마음을 잊으려 잡소리를 늘어놓았다.
“최고의 전통은 효율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들어본 적 없는데.”
단테와 샤카자이아가 저쪽하고 계속 말을 나눴다. 대화가 길어지자 할 일이 없었던 레스는 샤카자이아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는데 도중에 파수꾼들이 샤카자이아에게 크게 말하자 그녀는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야단 비슷한 걸 맞은 게 분명했다.
“왜 저러는 거지?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아자리는 모르겠다는 뜻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저었다.
파수꾼들과 같이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마을은 수목선이 끊어지자 나타났다. 일행은 원뿔형 천막이 가득한 들판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천막 겉에는 그림이 빼곡했다. 단테가 그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부모들이 자기가 겪은 이야기들을 저기에다가 그려둔 거예요. 대대로 집을 물려받으면서 후손들은 조금씩 내용을 늘리죠. 가운데에 있는 그림일수록 오래된 그림이고 나선을 그리면서 지금 세대까지 이어집니다.”
일행이 향하는 방향에는 커다란 나무집이 있었다. 폭이 50m는 되었고 지붕에는 지푸라기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관광지 가이드처럼 단테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데노사우’. 방금 우리가 지나온 ‘티피’가 개인 주택이라면 저기는 연립 주택이에요.”
천막마다 무두질한 가죽이나 고기를 걸어두는 건조대가 있었다. 어떤 남자가 거기에 빨랫감을 올려놓다가 자기 집사람에게 등을 얻어맞고 있었다. 거주 지역 바깥에는 크게 여물은 옥수수랑 호박 등의 작물들이 수확을 기다렸고 칠면조와 염소는 마을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
“일단 여기에다가 둡시다.”
단테가 짐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들은 마을 광장 비슷한 곳으로 보이는 공터에서 멈췄다. 아자리도 그제야 숨을 돌리고 제대로 주변을 구경했다. 그녀가 어느 천막 앞에 걸려있는 깃털 장식을 가리키면서 단테에게 물었다.
“왜 저 집만 장식해둔 깃털이 빨간색이죠?”
그쪽을 보고 단테는 정색했다.
“붉은색은 공격을 받았다는 뜻이에요. 깃털에 톱니 모양이 나 있다면 싸움을 의미하고요.”
그때 뒤편에서 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들아?”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니 그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용모와 차림새가 어지간히도 신기해 보였는지 다들 겁도 없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손가락으로 그의 몸을 쿡쿡 찌르는가 하면 그의 터번과 망토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레스는 아이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평온한 말투를 유지하되 난처하다는 얼굴로 친구들에게 애원했다.
“애들아?”
아자리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마을 분위기가 안 좋은데 괜히 웃다가는 주민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저희는 추장님을 뵙고 올 테니 물건들 잘 보고 있어요.”
단테마저도 그를 저버렸다. 레스는 심각했다.
“이 애들 힘 엄청 세서 무섭다고! 농담 아니야!”
“댁은 어차피 따라와도 할 일도 없잖아요.”
레스는 농담 반 진심 반으로 한탄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꼴이 됐지.”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저희의 강대하고 고결하신 마왕님을 잡았었던 거? 그거면 충분하고도 남죠.”
샤카자이아가 순간 눈을 부릅뜨며 레스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눈치 못 채고 레스는 상자 위에 걸터앉으며 친구들에게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단테와 아자리는 샤카자이아가 계속 자신들을 안내해주리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대는 말없이 손을 들어 방향만 가리킬 뿐이었다. 레스를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있을 심산으로 보였다.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와서 안내해주겠다고 하자 단테와 아자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갈 길을 갔다.
한눈에 보아도 다른 천막하고는 구별하기 쉬운 커다란 천막 앞으로 둘은 안내받았다. 안내해준 다크 엘프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들어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단테와 아자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갔다.
안에서는 향초를 태우는 냄새가 났다. 작은 모닥불이 어둑한 실내를 밝히고 꼭대기에 난 작은 구멍으로 연기가 올랐다. 그 안에서는 모든 이들이 검붉은 색이었다. 추장은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얼굴을 매운 노인이었다. 수십 개의 깃털을 이어서 만든 장식을 관처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장수하는 종족인데 저 정도로 늙으려면 얼마나 살아왔을지 짐작도 안 갔다. 아자리는 단테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면서 몸가짐을 지켰다. 서로 최소한의 예의범절을 마치자 추장이 말했다.
“우리 일원의 무례에 사과하겠네. 일단은 물어보는 건데 이곳에 대해 누설한 적 있나?”
자연스러운 공용어 억양이었다. 목소리는 위엄있는 겉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인자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단테는 침착하게 답했다.
“맹세컨대 없습니다.”
아자리는 바짝 얼어붙어서 마른 침을 연달아 삼켰다. 추장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랬겠지. 그래도 물어봤어야 했네.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추장은 모닥불에 곰방대를 갖다 대어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피웠다. 그리고 단테에게 담뱃대의 부리를 돌렸다. 상대가 담배를 한 모금 다 피울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그가 말했다.
“마왕군이 근처에 있어.”
아자리와 단테는 놀라서 말을 잃었다. 머릿속을 정리한 아자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그제야 추장은 아자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묘하게 어디선가 본 거 같은 얼굴인데… 혹시 아레이스타의 친척인가?”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짓는 아자리를 보고 추장은 충분한 대답을 들었다는 양 고개를 들고는 목 안으로 기침을 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뭘 가져왔나?”
단테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고 수행원에게 전달하였다. 추장은 목록을 읽었다.
“지금은 사정이 사정인지라 내가 매입해줄 수는 없다네. 물건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만 팔게나. 내일 아침에는 떠날 수 있게 준비하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단테가 말했다.
“무슨 사정인지 자세히 더 들을 수는 없을까요?”
“우리 문제야. 휘말리지 않게 배려하는 거니 들을 필요 없네.”
아자리가 끼어들었다.
“저한테는 남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주목이 자신에게 쏠렸지만 아자리는 떨지 않고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의사예요. 의대는 안 나왔지만 현대 의학을 조금 알아요.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의사라는 말에 부족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추장은 또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아자리의 얼굴을 또다시 뚫어지라 보았다. 그가 손짓하자 수행원들은 바로 천막 바깥으로 자리를 비켰다. 천막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마녀라는 사실을 감추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고귀한 핏줄이 어쩌다 이런 곳까지 왔는고?”
추장의 연륜이 상상을 초월하는 건지, 아니면 따로 특별한 재주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설픈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아자리는 판단했다.
“도망치는 중이죠. 계속 헤매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어찌 되었느냐?”
“헤어지고 오래 만나지 못했습니다.”
“많이 걱정되겠구나.”
아자리는 애써 잊었던 감정이 떠오르는 바람에 대답하는 걸 잊어버려서 뒤늦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추장은 곰방대를 다시 입에 물어서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점을 쳐봐야겠다.”
◆
레스는 상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다리 위에 양손을 얹은 채 명상 중이었다. 몇몇 유연성 좋은 아이들이 똑같이 따라 하다가 결국 제풀에 질려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중얼거렸다.
“배고파.”
처음에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던 주민들도 이제는 레스를 원래 있던 나무나 바위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혼자 있으니 따분하고 고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샤카자이아가 옆에 있었으니 혼자는 아니었으나 여태껏 둘은 서로를 계속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중이다. 계속 무시하려고 했지만 레스는 그녀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더는 못 참겠다.”
깔고 앉았던 상자를 열어서 살펴보니 안에는 술이 가득 있었다. 지난번에 술김으로 사고를 친 이후로 술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다른 상자에는 간식들이 가득했다. 병에 담긴 캐러멜 스프레드. 과일 병조림. 꿀 사탕. 종이와 은박지로 포장된 초콜릿. 다른 상자에 들은 물건은 생필품 같은 못 먹을 물건이었다. 마음대로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하나 정도는 단테한테 돈 주고 사 먹는다는 생각으로 그는 초콜릿을 집었다.
레스는 포장을 살짝 뜯어 먼저 냄새를 맡아보고는 그 향기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작게 쪼개서 입안에 넣자 턱에서 경련이 일 정도로 맛이 강렬했다.
“우왓.”
머릿속에서 별이 터질 지경이다. 레스는 빨리 삼키면 아쉬워서 느긋하게 녹여서 먹었다. 그러다 샤카자이아가 이쪽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걸 눈치챘다. 상대는 순식간에 딴청을 피웠지만 군침을 삼키던 모습은 이미 들킨 채다.
무시하고 계속 먹으려고 했는데 신경 쓰이니 맛이 제대로 안 느껴졌다. 그는 초콜릿을 포장지째로 절반을 뚝 부러트리고 여기에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린 샤카자이아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응?”
“받아.”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레스가 던진 초콜릿을 양손으로 받았다.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는 초콜릿과 레스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초콜릿을 깨물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어지간히 배가 고팠거나 초콜릿을 처음 먹어보는 거 같았다. 눈가에 눈물이 방울지고 있었다.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레스는 더 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어디까지나 생각만.
작은 식사를 마치고 손에 묻은 걸 핥고 있는데 샤카자이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
똑똑히 들었지만 레스는 자기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이 안 들었다.
“마왕을 잡은 거야?”
억양은 조금 어색했지만 분명 공용어였고 자신에게 거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