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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1권] 21회 - 별 말씀을 (21/188)



〈 21화 〉[1권] 21회 - 별 말씀을


아자리가 약 기운 때문에 살짝 혀 꼬인 발음으로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레스.”

“왜.”

“대체 마왕군이 뭘 노리고 싸움을 거는 걸까요?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그는 주머니 안에서 방금 추장에게 선물 받은 금 알갱이 하나를 꺼냈다. 아자리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쪼그려 앉아서 가까이 들이댔다. 아자리의 눈빛에는 탐욕 없이 객관적으로 물질을 바라보는 건조한 감정밖에 없었다.


“사금이군요. 이렇게 알이 굵은 건 처음 봐요.”

단테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상하다. 여기 사람들하고 오래 알고 지냈는데 금으로 값을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레스가 말했다.

“사정이 있겠지. 우리가 일일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어.”


꺼냈던 사금은 아자리의 손에 쥐여주고 그는 일행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샤키한테 가서 상의해봐야겠어. 몸조리들 잘하고 있어.”

“샤키가 누구예요?”

레스는 손짓하면서 둘러대는 투로 말했다.

“오늘 아침 새로 사귄 친구 알잖아. 일일이 발음하기 힘들어서 난 이렇게 부르려고.”


단테가 그 말을 듣고 턱에 손을 대고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는 레스에게 손짓만으로 둘이서 이야기하자는 표현을 보냈다. 아자리는 약 기운이 다 떨어졌는지 피로가 몰려와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 흔들어줬다.


둘은 천막을 나와서 대화했다.


“샤카자이야 양하고 같이 다니시게요?”


“나한테 활을 빌려주겠대. 처음 오는 곳이니 안내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믿을만한가요?”

상대가 넌지시 꺼낸 물음에 레스는 당황했다.

“처음엔 별로였는데 말을 나눌수록 괜찮게 느껴지더라. 왜?”


“마을 주민들이 하는 이야기를 어쩌다 귀동냥했는데 그 아가씨를 주민들이 좋게 보질 않던데요. 샤카자이아 양 때문에 이 난리가 났다는 얘기가 마을에 퍼져있어요.”


“사정이 있겠지.  소문보다는 직접 보고 느낀 내 직감을 믿을래.”


샤카자이아한테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닐 터다. 레스도 그 정도는 알았다. 단테가 레스의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말했다.


“총잡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겠죠. 굿 스피드(행운을 빕니다).”







샤카자이아의 천막에 도착했더니 그녀는 일행이 가져왔던 화물들을 자기 집 옆에 정돈하고 있었다. 레스는 그녀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가볍게 뛰어서 다가갔다.


“그건 같이 들자. 술 상자라서 무거워.”


“괜찮다.”

그렇게 말하고는 샤카자이아는 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몸놀림이 마치 빈 상자를 든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샤카자이아가 장력이 엄청난 활을 장난감처럼 다루던 모습이 스쳐 갔다. 여차하면 정말 어젯밤에 뼈도 못 추렸겠군. 레스는 같이 정리하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들었던 짐을 내려놓고 손을 털면서 샤카자이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알려준 기술 말이다.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계속 연습했더니 솜씨가 붙었다. 열 걸음 정도의 거리라면 노릴 법해졌다.”

“벌써? 대단하네. 난 연습하다가 내가  화살에 맞았어.”


그는 긴장 풀자는 의도로 말투를 능청스럽게 내었으나 샤카자이아는 표정에 근심이 훤히 보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추장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친절하시더라. 우리는 그냥 예정대로 움직이면 돼.”

“정말로 그게 다인가? 추장님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신데.”

“당연히 나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지. 그런데 너도 자기 사정 일일이 다  안 해주잖아. 정말 일일이  듣고 싶어? 필요해?”

할 말이 없어진 샤카자이아는 입술을 깨물고 일단 천막 안으로 그를 들였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레스가 바로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긁적이며 자리를 잡았다.


“방금 내가 한  듣고 굉장히 언짢았겠지. 미안.”


맞은 편에 자리 잡은 샤카자이아는 그 말을 듣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천막 안의 침묵은 신기할 정도로 길어졌다. 샤카자이아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레스는 아무래도 자기가  사과를 했는지 자기 입으로 설명해야 하는 끔찍한 재앙의 조짐을 느꼈다. 저 무자비한 다크 엘프 명사수는 아직도 사람을 처음 만난 야생동물 같은 눈으로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 조각칼로 파낸  같은 눈매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오는지 그는 속으로 감탄하며 뜬금없이 자연의 신비를 느꼈다. 그 정도로 천막 안의 침묵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샤카자이아는 동그랗게 뜬  위로 눈꺼풀을 정확하게 절반 정도 내리고 아침 안개만큼이나 투명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피곤하다면 누워도 좋다. 누울 텐가?”


“응.”

레스는 머릿속에서 생각이 증발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베개로 쓸만한 둘둘 말린 모피가 레스의 품으로 날아왔다. 샤카자이아도 자기가 쓸 베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둘  나란히 누웠다. 원뿔형 천막의 지붕 가운데로 뚫린 구멍에 파란 하늘이 보이는데 레스에게는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저거 비 내오는 날에는 닫아?”


“응.”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람들끼리 의미 없는 고즈넉한 대화를 나눴다. 방랑 중에 이런 경험은 흔치 않다. 레스는 점점 그녀에게 정이 들려는 거 같았다. 가슴 안쪽이 꽉 차오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심장이 쓰렸다. 고민에 찬 얼굴로 레스는 눈을  번 질끈 감다가 생각을 돌리려고 아무 말이나 꺼내보았다.

“우리는 적당히 어두워질 때까지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건가?”

“일단은.”


레스는 팔꿈치로 윗몸을 일으키고 샤카자이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추장님이 너한테 내린 명령은 어디까지나 손님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바라는 바를 들어주라는 거였지? ‘마을에 가만히 있어라’가 아니라.”
“어차피  말이  말 아닌가?”

딱딱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감정적으로 그런 의도를 품은 게 아니라 그냥 적절한 말투를 잘 몰라서 그런 거 같았다. 목소리 자체는 평이했다.


“왜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모호하게 명하셨을까? 추장님은 사소한 것도 안 놓치는  같으시던데.  생각에는 너한테 몰래 뜻을 숨겨서 전한 거 같아. 나중에 일 다 마치고 변명할 때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고 해봐. 거짓말이지만 명령은 전혀 안 어긴  되잖아.”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누워있던 샤카자이아는 눈을 번쩍 떴다.

“그게… 그래도 되는 건가? 나쁜 짓 하는 기분이 드는데.”

“나쁜 짓은 이미  예정이잖아. 실천하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게 더 양심에 걸려?”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게슴츠레 감았다.

“끄응.”

‘너에게 맡기는 소임은 손님을 지키는 것이다.’ 추장은 그렇게 말했다. 레스는 생각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내심 우리 일행이 마을을 도와줬으면 싶었다는 건가? 하지만 그럴 의도였다면 날 따로 부를 이유도 없었는데. 대체 추장님은 무슨 생각이신 거지?”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옆에 나란히 누웠으니 레스의 혼잣말은 당연히 그녀에게 전부 들렸다.


“추장님과 네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이유 없는 말이나 행동은  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통찰력은 특별하시다.”

“내 부족에도 저런 분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여튼  모르겠다. 큰 그림은 아무래도 됐고, 우리는 닥친 일에나 집중하자고.”


레스는 양팔을 머리 위로 번쩍 들고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가 앓는 소리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샤카자이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 사람을 죽여봤냐고 물어봤을 때, 넌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레스는 조금 신경질을 내며 대답했다.

“꼭 알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난 죽여본 적 없다. 사실, 난 싸워본 적 없다.”

눈을 감고 한숨  참이던 레스는 바로 일어났다. 샤카자이아는 이미 책상다리로 자세를 바꿨다. 진지한 대화가 될 거 같으니 그는 목을 가다듬고 조심히 말했다.

“싸워본 적 없다고? 무슨 소리야? 야생에서 생존하려면 어지간한 건 다 해야 할 텐데.”


“사냥이라면 많이 해봤다. 하지만 목숨을 거는 싸움은 해본 적 없다. 순찰 도중에 외지인들을 만나면 적당히 겁줘서 쫓아냈던 게 고작이다. 여태껏 그랬다.”


레스는 상대가 보통 각오로 말을 꺼낸 게 아니라는  느끼고 깊게 생각했다. 여태껏 샤카자이아한테서 종종 느껴지던 어수룩한 면모가 겉모습하고는 안 어울린다고 느껴졌는데  말을 들으니 앞뒤가 맞았다. 생각을 마치고 그가 물었다.

“그러니까 여차하면 싸울 각오도 있고 실력도 있는데 경험은 없다고?”

“너는 나만 믿고 같이 갈 텐데 모르면 안 되잖아.”

조금 주눅 든 말투였다. 실망할 거라고 걱정한 걸까. 레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깐 고개를 내렸다가 바로 올려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순찰할 때 지키는 규칙 정도는 있지?”

“물론이다.”

“들려줘.”

샤카자이아는 자신의 땋은 머리를 손으로 가다듬고 말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자마자 공격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으면 도망친다.”

“이제 할 일도 똑같아. 하지만 만약, 만약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졌고 도저히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면. 혹은 내가 눈으로 보기에 그때 네가 어쩔  모르는 상태라면.”

레스는 평소보다 몇 단계 목소리를 낮게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때는 내 말을 들어. 그쪽 경험은 내가 더 많으니까. 그리고 죽이지 마. 다치면 목숨이 위험해질 급소는 피해서 공격해.  실력이라면 그 정도는 여유는 부릴 수 있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때도?”


샤카자이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냥 내  들어.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말하는 거야. 죽이지 마. 해서는  되는 이유를 일일이 다 말해  수도 있는데 아무튼 죽이지 마. 나한테서 이런 걸 기대하고 싸운 적 없다고 고백한  아니겠지만 그냥 죽이지 마. 알았어?”

“알았어.”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끄덕 위아래로 흔들었다. 눈동자가 아주 맑았다. 오히려 레스가 그 반응에 놀라서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진짜?”


“이곳의 지리를 아는  나니까 들키지 않는 동안에는 내가 주도한다. 만약의 상황이 일어나면 그쪽 경험이 더 많은 네가 주도한다. 어려운 거 없잖아.”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러면 항상 괴악한 놈 취급했는데. 심지어 자기주장 강해 보이는 녀석이 이럴 줄이야.”

레스의 목소리는 조금 뒤집혀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날 어떤 사람으로 상상했는지는 알 바 아니다. 챙겨갈 물건들 보겠나? 미리 싸뒀다.”

샤카자이아가 가리킨 곳을 보니 몸에 맬 수 있는 작은 배낭이 2개 있었다. 바로 근처에는 두 사람이 쓸 활과 화살집이 나란히 놓였다. 레스가 그쪽으로 기어가자 샤카자이아는 배낭을 풀어서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레스는 새까만  뭉치 같은 걸 집어 올렸다. 바스락거렸고 매우 가벼웠다.


“뭐야 이건?”

“그건 바싹 말린 이끼다.”


“어디에다가 쓰는 건데?”


“피가 났을 때 그걸 대고 꽉 누르면 좋다. 이끼는 물기는 잘 흡수하니까.”


레스는 이해하고 감탄했다.


“아! 지혈용으로 쓰는 거군! 목화솜보다  효과적이겠어.”

샤카자이아는 잎사귀에 쌓인 기름 덩어리를 보여주었다.

“이건 아까 네 손에 발라줬으니 뭔지 알겠지.”

“여차할 때는 비상식량으로도 쓸 수 있겠네.”

“추천하지는 않아.”


그녀는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눈빛에서 불현듯 매스꺼워하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레스는 호기심을 해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길쭉한 대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샤카자이아가 눈치 빠르게 그걸 들고 자세히 보여주었다.


“바람총이다. 써본  있나?”


“아니. 보는 것도 처음이야. 넌 이거 잘 써?”

“시범을 보여줄 수도 있는데 귀찮으니까 안 할래.”

그녀는 바람총을 내려놓았다. 레스가 바람총에 넣는 작은 화살들을 보고는 물었다.

“여기에는 무슨 독을 써?”


서로 말문을 제법 튼 덕에 샤카자이아는 이제 레스의 눈치를 알아차리는 데에 익숙해졌다.

“혹시 이걸로 누군가가 죽을까 봐 걱정돼서 묻는 거라면 그럴  없다. 그런 독은 귀해.”


둘은 계속 가방의 내용물들을 부스럭거렸다.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고 숲은 어둠이 일찍 깔린다. 땅거미가 질 무렵, 순찰하러 나간 사람들이 교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에  사람은 몰래 마을을 빠져나왔다. 샤카자이아의 천막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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