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1권] 25회 - 아군도 적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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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풀숲을 흔들고 바위를 때렸다. 도망치던 일행은 지금 바위 뒤에서 총알을 피하기 바빠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저 앞의 숲까지는 숨을 곳이 전혀 없는 벌판이었다. 샤카자이아는 숨을 고르며 저쪽이 공격하는 기세가 약해지길 기다리다가 레스의 상태를 보고 초조해졌다.
“많이 아픈가?!”
“아픈 것보다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문제야.”
레스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샤카자이아는 위기가 임박한 지금 상황을 전부 받아들이자 본능에 가까운 속도로 각오를 다졌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 너희들이 먼저 달려.”
그렇게 말하고 샤카자이아는 바깥으로 나와서 활로 상대를 견제했다. 병사들이 화살을 피해 엎드리느라 포위망을 좁혀오던 상대의 기세가 잠시 수그러들었다. 샤카자이아가 돌아오자 레스가 식은땀 가득한 얼굴로 화냈다.
“흥분하면 안 돼. 흥분하면 돌아올 수 없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뛸 준비 해라.”
마음은 내키지 않았어도 레스는 다른 여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자기가 쓰려고 마을에서부터 가져왔던 활을 원주민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네가 써라. 머리 말고 다리를 맞춰야 한다.”
아이는 말귀를 알아먹고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샤카자이아가 바위에 몸을 바짝 붙이고 상황을 보면서 속으로 초를 세었다. 그녀가 외쳤다.
“지금이야!”
일행은 각자 가진 무기로 상대를 향해 전력을 다했다. 레스는 양손으로 들어 올린 권총의 공이를 엄지손가락으로 연달아 잡아당겨서 순식간에 약실을 비웠다. 두 아이 중 하나는 레스의 팔을 잡아당겨 주었고 다른 아이는 계속 뒤를 살피면서 활을 쏘았다.
왜 하필 지금 달빛은 이리도 밝은지.
일행들은 무사히 숲속으로 들어간 참이다. 화살 다발을 손에 쥐고 숨은 곳에서 바깥으로 나오니 추격자들은 꽤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온 힘을 내서 달렸다. 적들을 향해서.
“갑자기 뭐야 저거?!”
“오지 마!”
흥분한 샤카자이아는 한계까지 버티다가 적들을 다른 곳으로 따돌리자고 마음먹었다. 당황한 병사들은 침착하게 조준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보호하기에 급했다. 샤카자이아의 운동 신경은 압도적이었다. 그녀가 대열을 이뤄서 다가오던 병사들 속으로 파고드는 데에는 몇 초도 안 걸렸다. 돌진하는 방향에 있었던 운 나쁜 병사는 바람 만난 회전초처럼 튕겨 나갔다. 당황한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방아쇠를 당기자 온갖 아우성이 사방에 퍼졌다.
“함부로 쏘지 마! 서로한테 맞는다!”
병사들의 분대장이 외쳤다. 그가 바쁘게 지시를 내렸다.
“착검! 둘러싸서 덮쳐!”
그들은 소총에 대검을 끼우고 그녀를 향해 몰렸다. 샤카자이아는 자신에게 셋이 동시에 달려드는 걸 보았다. 그녀는 먼저 달려드는 자의 총검을 몸만 틀어서 피하고 멱살을 붙잡았다. 그녀는 인형을 던지듯 상대를 번쩍 들어서 다른 놈에게 내팽개쳤다. 측면에서 파고드는 공격은 총검이 몸에 닿기 직전에 샤카자이아는 맨손으로 소총의 몸통을 붙잡아버렸다.
“윽!?”
병사는 당황했다. 소총이 바위 틈새에 끼인 것처럼 꼼짝도 안 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힘으로 총을 빼앗아버리고 크게 휘둘러 개머리판으로 상대를 패버렸다. 그 반동으로 총열이 휘어지자 샤카자이아는 토마호크와 단도를 양손에 들고 자세를 잡았다.
“고작 한 명이다! 겁먹지 마!”
상대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샤카자이아는 용기가 났다. 쓰러트리는 상대가 늘어날수록 힘이 솟았다. 도끼질에 소총이 토막이 나고 발길질에 사람이 공처럼 땅을 굴렀다. 그녀가 막지 못하는 공격은 없었다. 살아서 처음 겪는 실전 속에서 싸움의 흥분과 승리가 주는 원초적인 쾌락이 그녀의 판단력을 흐렸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빠져나가야 할 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녀는 병사 하나를 붙잡고 방패로 삼아서 그들과 대치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차에 못 보던 놈이 보였다. 그들 사이로 갈색 피부의 거한이 거대한 언월도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소매가 길고 품이 넓은 옷을 입은 오크였다. 오크가 어깨에 올려둔 언월도를 내리고 자세를 잡았다. 주위의 병사들이 길을 비키고 그의 자리를 텄다. 샤카자이아는 잡고 있던 포로를 옆으로 던지고 토마호크를 고쳐잡았다.
◆
아이들은 산토끼처럼 재빨랐다. 레스는 옆구리를 누르면서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앞장선 아이들은 레스가 길을 잃지만 않도록 뒤를 돌아보며 도중에 멈추었다. 레스도 계속 뒤에서 인기척이 안 나는지 신경 썼는데 아무 일 없었다. 추격자가 없는 건 다행이었으나 샤카자이아가 돌아오지 않는 건 큰일이었다.
“썩을. 잘난 놈 행세하고선 도움은 나만 받았잖아.”
걱정으로 속이 쓰려오던 레스는 아이들이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걸 조금 늦게 눈치챘다. 기뻐해하는 것 같은 기색을 보아하니 도와줄 사람을 찾은 모양이다. 레스는 기운을 차리고 빨리 걸었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데리고 이쪽으로 왔다. 숲속은 어두워서 아이들이 데리고 온 사람의 정체는 어렴풋이 보이는 윤곽을 통해 성인 여자라는 사실만 알 수 없었다. 상대가 어두운 숲속을 헤쳐가는 몸놀림이 어수룩하게 보였다. 레스는 권총을 총집에 꽂고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공용어 할 줄 아십니까?”
“네? 네! 할 줄 알아요!”
가녀리고 연약한 여자 목소리였다. 공용어 솜씨가 어찌나 유창한지 외부인 같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레스는 상대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상대는 어리바리한 말투로 대답했다. 몸매가 매우 원숙한 여인이었다. 눈동자는 주황색에 머리칼은 밤하늘과 한없이 닮은 어두운 푸른색이다. 저런 머리카락 색이 자연적으로 존재할 리가 없었다. 눈가에는 기미가 잔뜩 껴서 며칠 밤샘하다 온 사람 같았다. 손에는 등산용 지팡이치고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 지팡이를 들고 땅을 짚고 있었다. 셀 수 없는 이유로 레스는 당황하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길을 잃었어요.”
루나는 당황해서 지나치게 정직한 반응을 했다. 그녀는 서둘러 다시 말했다.
“아 참, 죄송해요. 자기소개를 잊었네요. 루나 샌델자레에요.”
“사쿠라비에서 온 레스입니다.”
도통 정체를 알 수가 없는 상대였지만 레스의 눈에는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루나는 그의 소개를 듣고 신경 쓰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그의 피로 물든 옷을 보고 다급하게 말했다.
“다친 곳을 보여주시겠어요? 보면 아시겠지만 전 마녀랍니다.”
급했던 아이들이 자기들 말로 그녀에게 재촉했다. 레스가 아이들에게 지적했다.
“애들아 공용어로 말해줘.”
루나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테리카라 바슈다우스키? 쉬사 루페리카론. (너희들 쫓기고 있었지? 먼저 떠나렴.)
“치르카라비 웨렌피아 메르티카 슈세리우스카? (아저씨하고 누나는 어떻게 하고요?)
“나메와 치르카라 아운비 웨루피 루페리카. (나는 아저씨를 도와주고 같이 다닐게.)”
레스가 상대의 자연스러운 대처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떠났다. 루나가 지팡이를 들고 다가오면서 말했다.
“이쪽 지방의 방언은 배운 지 오래됐는데 잘 통한 거 같아요.”
“애들을 먼저 보내도 괜찮을는지.”
“저희랑 같이 묶여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녀의 손바닥 위로 따듯한 색을 띤 도깨비불이 떠올랐다. 레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지혈대로 썼던 벨트를 풀었다. 루나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그의 옆구리에 도깨비불을 대었다. 도깨비불이 상처 안으로 들어가자 레스는 이물질이 스스로 튀어나오는 기이한 감촉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총알이 살 밖으로 밀려 나오자마자 흐르던 피도 멎었다. 뒤이어 피로감과 통증이 짧은 순간에 확 몰려와 그는 헛구역질했다.
“세상에…! 화끈하네. 그래도 두 번째로 겪는 거라 기절은 면했다. 어우….”
“두 번째?”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스는 얼이 나간 얼굴로 멍청이처럼 나무에 기대었다가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움직일까요. 서로 궁금한 게 많을 텐데 그건 차차 해결하죠.”
“근처에 제 일행이 있어요. 합류하면 친구들이 도와줄 거예요. 레스 씨라고 했나요?”
레스는 루나와 함께 터벅터벅 걸었다.
“무슨 일로 오신 일행이신지요? 탐험입니까?”
루나는 둘러댔다.
“으으음. 죄송해요. 밝힐 수가 없어요. 수상쩍어 보여도 어쩔 수가 없어요.”
“수상한 사람끼리 만나서 다행이군요.”
레스는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때 아득한 곳으로부터 총성이 연달아 들렸다.
◆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샤카자이아는 오크의 빈틈을 찾아냈다. 그녀가 자신의 무기를 상대에게 집어 던지자 오크는 그걸 막았고 그 틈에 샤카자이아는 언월도의 자루를 붙잡았다. 무기를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힘겨루기가 오갔다. 도중에 샤카자이아는 쥐고 있는 언월도의 자루를 디딤대 삼아 뛰어올라서 상대의 팔뚝에 다리를 걸고 온몸으로 매달렸다.
샤카자이아는 관절이 꺾이는 섬뜩한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고 상대에게서 떨어졌다. 오크는 상당한 격통을 겪고 있음에도 눈만 부릅뜨고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보다는 패배했다는 굴욕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체력을 너무 쓴 샤카자이아는 현기증을 느꼈다. 떨어트린 무기를 줍고 주변을 보니 병사들은 하나 같이 구경하는 자세로 멀찍이 둘러싸고만 있었다. 방금 일대일 대결의 결과를 보고 사기가 꺾인 건지 나서서 덤비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캭!”
그녀가 짐승처럼 위협하는 소리를 내자 그쪽에 있던 병사들이 뒤로 주춤거렸다. 샤카자이아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달아날 눈치를 살폈다. 그때 어딘가에서 총성이 났다. 곁눈질로 그쪽을 보니 우두머리 엘프가 허공에 총을 쏴서 이목을 집중시킨 거였다.
“일렬로 모여!”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근처로 모였다. 샤카자이아는 앞뒤 안 가리고 앞에 있는 사람들을 밀쳐가며 달아났다. 포위당하는 건 면했으나 우두머리 엘프 주위로 수십 명의 병사가 대형을 갖추고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쏴라!”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한꺼번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들이 그녀 주변의 높게 자란 풀까지 깎아버릴 기세로 몰려왔다. 샤카자이아가 고꾸라지자 엘프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흥. 살갑게 굴 때 잘했어야지.”
분대장이 엘프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살려놔. 물어볼 게 많다. 자잘한 과정은 신경 쓰지 않으마. 무슨 뜻인지 알지?”
분대장은 상대의 농담에 어울려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높게 자란 풀숲 속에 엎드려 있던 누군가가 몸을 일으켜 달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2m는 가볍게 넘는 거한이었다. 머리에 얼굴을 모조리 덮는 철모를 쓰고 있어서 위압감이 대단했다. 거한은 전신에 철갑을 두르고 쌍총열 산탄총으로 이쪽을 겨눴다. 거대한 그림자가 벌판에 드리웠다.
“조준해라!”
엘프가 다급하게 외쳤다. 한데 모여서 한 명을 노렸다. 거한은 투구 때문에 고개를 뒤로 돌릴 수 없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쪽을 향해 말했다.
“숙이십시오.”
아비투스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샤카자이아에게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려가 몸으로 덮었다. 마치 소나기가 철판을 때리는 듯한 격렬한 소리와 함께 그의 온몸에서 불꽃이 튀었다. 튕겨 나간 탄환의 충격에 거한은 조금 신음을 흘리다가 한 번 심호흡을 마치고 벌떡 일어났다. 엘프는 경악했다.
“저 갑옷은 설마 헬파이터 척탄병인가! 어째서 이런 곳에?!”
“어떻게 합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 죽을 때까지 쏴!”
“별 소용도 없어 보이는데 고작 한 명에게 총알을 그렇게 낭비해도 됩니까?”
엘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래 생각해보니 그런 거 같다. 방패를 들어! 포위해서 사로잡아라!”
하지만 명령에 따르는 부하는 아무도 없었다. 지휘관의 재촉에 그들은 마지못해 일단 방패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