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1권] 27회 - 플랜 B
머리는 어지럽고 총소리 때문에 귀도 먹먹했다. 그에게 아자리가 말을 걸었다.
“사거리 안이에요.”
아자리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도망치려는 유혹에 마음이 꺾였을지도 몰랐다. 단테는 성냥을 바지에 긋고 수류탄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모래주머니가 매달린 것 같은 육신이 바람처럼 가벼워지더니 수류탄은 아주 쉽게 그의 손을 떠났다. 적들이 빨간색 불씨를 보고 멈칫거렸다.
어둠 속에 떠다니는 새빨간 불씨를 향해 아자리는 손끝을 겨누고 외쳤다.
“리카인 페카!”
가는 천둥소리와 함께 얇은 벼락이 허공을 갈랐다. 수류탄이 터지자 폭압과 소리에 짓눌린 적병들은 기절해서 와르르 쓰러졌고 구형 흑색 화약이 진한 연막을 일으켰다. 병사들 대부분이 놀라서 기세가 죽어 모두 걸음이 멈췄다.
단테와 아자리는 도망치자고 부족의 전사들에게 외쳤다. 일행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후퇴했다. 단테는 소총을 앞으로 매고 탈진해버린 아자리를 등에 업었다. 공중폭발이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있었는지 뒤쫓아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부족 전사들을 쫓아갔으나 아자리를 업고 있느라 단테는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두운 곳에 그녀와 같이 숨어서 쉬었다. 부족 전사들도 그들을 살펴주기 위해 잠시 발을 멈춰야만 했다. 아자리가 속이 울렁거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의외로 우리 뒤를 안 쫓네요.”
“아까 폭발 때문에 개틀링 건이 망가져서 수습하느라 그럴 지도요. 잘했어요.”
“레스 일행하고는 만나지 못했어도 이게 저쪽이 도망칠 기회로 이어진다면 좋을 텐데요.”
단테가 눈을 크게 뜨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저쪽! 얘들이에요!”
납치당했다가 구출된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를 따라 숲을 헤쳐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단테는 휘파람을 불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이쪽으로 잰걸음에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은 다시 만나 서로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그들이 이긴 것이다.
단테는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요술을 부리는 파란 머리의 여자가 레스를 도와줬다는데요?”
“파란 머리? 요술을 부린다고요?”
“아무리 봐도 일이 좀 이상해진 거 같죠?”
“파란 머리라….”
“따로 떠오르는 거라도 있는 겁니까?”
“특별한 체질이거나 자연적이지 않은 힘이 있으면 먼저 겉모습부터 변화가 생겨요. 보통 머리카락과 눈이 가장 먼저 변하죠. 게다가 파란 머리의 마녀…?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
레스는 단단히 포박됐다. 그가 처량히 한숨을 뱉었다.
“내 팔자야. 정말 빨리도 쫓아왔네.”
샤카자이아가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군인들이 팔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내 손님이야. 데려가지 마!”
레스는 내심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괜찮아. 이건 내 사정이야. 너희 마을로 돌아가.”
피카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들었지? 저리 꺼져. 너한테는 용건 없으니까.”
“대체 무슨 레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알 필요 없어.”
“그럼 같이 나도 데려가.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나한테도 용건이 있는 거겠지?!”
“그랬다간 너희 부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저리 가.”
피커니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딘이 몸에 맨 장비들을 고쳐잡으며 그를 재촉했다.
“상대해주는 건 그쯤 해. 더 있다가 싸움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야. 어서 벗어나자고.”
그때 루나가 샤카자이아의 몸에 매인 붉은 붕대들을 보았다. 그녀가 샤카자이아에게 부드러운 손짓을 보이며 몸에 손을 대는 짓에 양해를 구하고 다가가려 하자 피카니가 가로막았다.
“응급치료라면 이미 저희가 다 해줬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쳐줄 수 있는데.”
“이 이상의 친절은 필요 없습니다.”
루나는 피카니의 냉정한 태도에 주눅이 들었다. 샤카자이아는 그래도 루나의 의도는 알고 있기에 괜찮다는 뜻으로 그녀에게 위로의 눈짓을 보냈다. 레스가 말했다.
“안녕. 짧았지만 같이 있는 동안 재밌었어.”
카르델이 중얼거렸다.
“어째 우리가 나쁜 놈 되는 분위기인데.”
아비투스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하딘이 손짓하자 그들은 레스를 데리고 일제히 움직였다. 샤카자이아는 만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의 뒤만 바라보았다. 레스는 한참이 지나도록 뒤돌아보지 않았고 나중에 뒤를 보니 따라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때가 됐다 싶어서 하딘이 레스의 앞에 서서 소총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며 위협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핵심만 묻지. 아자리아는 어디 있어?”
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시간 끌어봐야 소용없어. 원주민들의 마을에 있나?”
“아무리 캐물어봤자 우리 이미 각자 갈 길 가기로 해서 말이지.”
레스는 어수룩하게 말을 돌렸다. 그때 폭탄 터지는 소리와 천둥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싸우는 소리야 아까부터 계속 들렸으나 이번 것은 느낌이 심상치가 않아 일동의 주목이 저쪽으로 쏠렸다. 피카니가 말했다.
“방금 뭐였지?”
루나가 대답했다.
“기운이 느껴져요.”
아비투스가 물었다.
“기운이라고요?”
“총을 쏘면 총성이 퍼지듯이 마법을 쓰면 특별한 기운의 파문이 퍼져요. 방금 것은 분명 마법이 틀림없어요.”
여태껏 겁 없이 두꺼운 낯짝으로 버티던 레스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친구들? 아무래도 우리 모두 계획을 크게 바꿔야 할 거 같은데.”
하딘은 연달아 일어난 예상외의 사태에 머리가 아파졌다. 그가 레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아자리아가 왜 저기에 있지?”
“그 멍청이가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어떻게 알아! 이럴 시간 없어! 댁들도 우리를 산 채로 잡아가야 하잖아!”
카르델이 의견을 냈다.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요.”
“불행이자 행운이로군. 가자.”
하딘은 고민하지 않고 단칼에 방향을 바꿨다. 군인들은 하딘을 필두로 앞에 서서 경계 태세를 지켰고 어쩌다 보니 레스와 피카니는 단둘이서 나란히 걷게 됐다. 레스가 속삭였다.
“하나만 물어보자. 저 도적들 진지는 어떻게 알고 여기에 왔어?”
“근처를 수색하던 중에 마차 바퀴 자국을 찾았어. 왠지 너희 것들 같았지.”
“그랬군. 이건 여담인데 네 머리에 떨어졌던 화분은 내 의도가 아니야.”
“말 그만 걸어.”
피카니는 쓸데없이 그의 손목에 매인 포박을 거칠게 당겼다. 앞에서 레인저들이 흔적을 발견하고 멈췄다. 나무줄기에 총알이 박힌 자국과 낙엽이 파헤쳐진 흔적과 발자국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피카니가 권총을 뽑자 레스가 소곤거렸다.
“비상사태잖아. 나도 싸워야 해. 풀어줘.”
피카니는 듣는 척도 안 했다. 하딘은 몸을 낮추고 부하들을 향해 낮게 외쳤다.
“11시 방향에 탱고.”
일동은 각자 자리를 잡았다. 저쪽 패거리들도 횃불을 들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는 중이라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카르델은 쌍안경을 들고 눈알이 아파지도록 숲의 어둠 너머로 저쪽을 끈질기게 관찰했다. 바로 옆에 있는 하딘이 그에게 속삭였다.
“뭐가 보이지?”
“원주민들의 마을로 향하고 있습니다. 바퀴 달린 커다란 물건도 보이고. 개틀링 건이겠지. 머릿수는 적어도 서른은 넘고. 사방이 기습당할 수 있는 곳인데 그 먼 마을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딘이 냉소적으로 답했다.
“놈들 꼬락서니 봐서는 글쎄. 인질을 뺏겨서 조급해진 지휘관이 판단력을 잃은 거겠지.”
“붙을 겁니까? 놈들이 먼저 우리 목표물을 찾으면 손 쓸 수가 없게 될 겁니다.”
“수는 우리보다 열 배가 넘고 중화기까지 보유한 놈들을 상대하겠냐고? 그러려고 왔잖아. 첫 번째 저격은 반드시 지휘관이나 기관총 사수를 노려라.”
그렇게 말하고 하딘은 뒤에 있는 일동들에게 부지런히 수신호를 보내어 각자 위치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갔다. 레스는 루나와 같이 있었다. 루나가 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해요 사쿠라비 씨.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신 거 같은데.”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그쪽은 나쁜 분이 아니니까. 혹시 그쪽도 싸울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저는 군종 마법사가 아니에요. 전 대학에서 왔어요. 싸울 때 쓰는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니지만 실전 경험이 없어요. 어쩔 수 없으면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렇군요.”
레스는 피카니로부터 따라오라는 신호를 받았다. 레스는 인상을 구기고 손이 묶인 채 저쪽까지 기어갔다. 각자 있어야 할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 모두 때를 기다렸다. 흙투성이가 된 레스는 입에 들어간 이물질을 뱉은 다음 피카니와 등을 맞대고 숨을 죽였다. 한참 동안 일동들은 카르델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렇게 긴장이 한계까지 팽팽해진 지금 예고 없는 이변이 일었다. 레스가 피카니에게 속삭였다.
“어이. 내가 지금 보는 방향에 뭔가 있어.”
레스가 바라보는 방향에 누군가가 달아나고 있었다. 윤곽을 보니 외투를 입은 남자와 어린아이 같았다. 정체가 누구인지 레스는 바로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나갔다. 외투를 입은 남자와 어린아이 뒤로는 한 무리가 뒤를 쫓았는데 몸놀림이 민첩한 게 한눈에 예사롭지가 않았다. 피카니도 그걸 보고는 다른 사람하고 상의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계획 변경.”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는 단도로 레스의 포박을 끊어내고 권총을 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