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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1권] 29회 - 충격 요법 (29/188)



〈 29화 〉[1권] 29회 - 충격 요법

그러나 아자리가 손에 들고 있었던 불덩어리는 전기가 끊어진 전구처럼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녀는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풀썩 쓰러졌다.

“안 돼!”

“마법사님! 멈춰요!”

레스를 뒤따라서 피카니가 동시에 외쳤다. 그녀도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한 박자 늦었다. 루나의 손으로부터 혜성은 소리 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느린지, 빠른지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날아갔다. 레스는 무작정 아자리를 껴안고 던져서 몸을 피했다. 빛 덩어리가 닿은 곳은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 구덩이가 파였고  자리에 있었어야 할 땅은 완전히 증발해버린 듯 파편 하나 없이 사라져버렸다. 근방에 타는 냄새조차 안 났다.

피카니는 외투 안감에 끼워둔 철판 한가운데에 정확히 꽂힌 뭉개진 총알을 뽑아서 버리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나는 피카니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심하다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경악하고 혼란에 빠졌다.

레스는 정신이 멍멍했다. 유난히 한 쪽 귀만 소리가 잘  들렸고 축축한 느낌이 드는 거로 보아 고막이 터진 모양이다. 머릿속은 엉망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레스는 기절한 아자리를 부축하고 일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다 땅에 엎어지고는 일어설 수 없었다. 그동안 추격자 일행은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코앞의 난리가 한차례 지나가자 자리의 일동은 주변의 소리에도 신경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총성과 온갖 함성이 여기까지 닿았다. 아비투스가 하딘에게 말했다.

“싸움이 났군요. 정비를 마친 원주민들이 반격하나 봅니다.”

하딘이 정신을 집중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은 없는지 살피다가 일행에게 말했다.

“다친 사람은?”

다들 무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딘이 재촉하는 손짓을 했다.

“서둘러. 저쪽하고 휘말리기 전에 나가야 한다.”

카르델은 소총의 멜빵을 몸에 걸면서 일어났다.

“난 군대가 싫어.”

은근슬쩍 단테가 레스의 권총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피카니는 잽싸게 뽑아서 허리춤에 대고 지향 사격을 했다. 자기 코앞을 스치는 경고사격에 단테가 기겁하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하아앗!”

“결투 신청할 거 아니면 건드리지 마시오. 그 총은 평범한 사람이 손댈  못 돼.”

피카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앞장서 저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화살이 피카니의 코앞을 스쳤다. 피카니는 걸음을 멈추고 눈알만 굴려서 나무에 박혀있는 화살을 보았다. 그대로 눈알만 굴려서 반대 방향을 보니 낯설지 않은 모습이 보였다. 샤카자이아가 활을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다가오자 피카니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군인들이 권총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데도 샤카자이아는 계속 걸어왔다.

“멈춰!”

하딘이 그렇게 외쳐서 위협하고 보란 듯이 공이까지 당겼는데 샤카자이아는 레스와 일행들을 지키려는  어느 틈엔가 우뚝 섰다. 피카니가 그녀의 발 근처를 권총으로 쐈으나 여전히 꿈쩍도 안 했다. 피카니가 어금니를 한 번 악물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무슨 의리로 그들을 지키지? 만난 지 하루도 안 됐을 텐데?”

샤카자이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추장님께서 손님들을 책임지라 내게 명하셨다.”

하딘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귀찮아죽겠군. 골치 아픈 문제는 피하고 싶은데.”

하딘은 그렇게 말하고 루나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님. 죄송합니다만 아까보다 덜 파괴적인 수단은 없으십니까? 기절만 시킨다거나….”

루나는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까의 충격에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나 싶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쓰러졌다. 군인들이 모두 놀라서 당황하며 그쪽으로 모였다. 피카니가 제일 먼저 다가가서 루나의 목에 손을 대고 맥을 쟀는데 그의 손가락에 뭔가가 걸렸다. 바람총으로 날릴 수 있도록 작은 나무토막에 꽂힌 바늘이다. 샤카자이아가 설명했다.

“마비독이다. 금방 깬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와시추(백인). 날 구해준 보답의 뜻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르지 않고 홀로 왔다. 너희들의 의지로 돌아가라. 싸우고 싶지는 않으나 해야만 한다면 피하지 않겠다.”

“완전 머저리군.”

피카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틈에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상대를 향해 뭔가 던졌다. 샤카자이아조차 낌새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재빨랐다. 피카니가 던진 단검이 샤카자이아의 활시위를 끊어버리자 활은 퍽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막대기로 변했다. 하딘이 루나와 샤카자이아를 번갈아 보다가 격한 감정으로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거칠게 외쳤다.

“총을 쓰면 소리도 날뿐더러 목표물까지 휘말릴 수도 있다. 때려 눕혀!”

남자들은 군장을 풀면서 몸을 가볍게 했다. 그녀도 쓸모없어진 활을 버리고 주먹을 쥐었다. 인사치레 없이 피카니가 먼저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을 그녀는 간단하게 피하고 멱살을 붙잡았다.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남자들을 향해 피카니를 집어던졌다. 아무리 피카니가 마른 편이라고 하나 입고 있는 외투까지 합쳐서 몸무게는 80kg이 넘었다.  질량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카르델은 피카니와 함께 땅을 굴렀다.

다음 합에 아비투스가 자신의 압도적인 체격으로 그녀를 밀어붙였지만, 무거운 갑옷 탓에 동작이 단순해서 그녀는 상대의 습관을 바로 파악하고 주먹질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기회를 노렸다. 수그린 자세에서 그녀는 발뒤꿈치와 허벅지의 힘을 모아 상대의 배를 향해 주먹을 질러 꽂았다.

[쾅!]

주먹이 철갑을 때리는 소리가 맹렬하다. 철갑에 주먹 자국이 나면서 몸속으로 전달된 충격에 아비투스는 숨을 쉬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며 물러났다. 그녀가 상대를 걷어차서 넘어트리는 사이 하딘이 샤카자이아의 뒤를 빼앗았다. 그는 샤카자이아의 어깨와 팔꿈치를 잡고 꺾으려 했고 그녀는 몸을 비틀면서 버티느라 둘은 계속 힘 싸움을 했다. 아무리 근력이 뛰어나더라도 구조적인 한계까지 극복하기란 그녀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샤카자이아의 발꿈치가 하딘의 다리를 때렸다. 다친 곳을 건드려진 탓에 그는 집중이 흐트러졌고 바로 그녀는 몸을 돌리면서 팔꿈치로 상대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하딘은 그대로 뇌진탕에 빠질 때 들리는 특유의 이명을 들으며 옆으로 엎어졌다.

그녀는 숨을 거칠 게 쉬며 숨을 골랐다. 철갑을 때린 주먹에서 피가 흘렀고 몸에 묶인 붕대에서도 피가 새어 나왔다. 카르델이 자기한테 날라왔던 피카니를 쓰레기처럼 옆으로 치우고 아까 내려놓았던 자신의 소총을 들었다.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다. 샤카자이아가 멈춘 사이 카르델이 상대의 다리를 겨눴는데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레스가 달려들어서 소총에 매달렸다.

“으랴아아!”

두 남자는 볼품없는 꼴로 부단하게 실랑이를 벌였다. 어느 틈엔가 오금이 저려서 굳어있던 단테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같이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카르델이 짜증 섞인 고함을 질렀다.

“아 환장하겠네!”

시도는 좋았으나 단테는 싸움꾼이 아니었고 레스는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두 남자는 발길질과 개머리판에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샤카자이아가 일행들과 뒤섞인 상대를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는 찰나 카르델은 순식간에 자세를 갖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틱.]

하지만 메마른 금속음만 울렸을 뿐이다.

“불발인가?”

카르델은 노리쇠를 잡아당기려 했으나 노리쇠가 잡히지 않았다. 노리쇠가 사라진 상태였다.

“아 환장하겠네!”

카르델은 늑대처럼 달려든 샤카자이아의 무릎 차기에 명치를 찍히고 마지막으로 쓰러졌다. 싸운 시간은 다 합쳐서 20초도 안 됐다. 바닥을 나뒹굴며 쓰러진 남자들의 신음과 여인의 태평한 코골이를 뒤로하고 레스와 단테는 샤카자이아의 손을 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카르델을 내려보면서 중얼거렸다.

“어째서 총알이  나갔을까?”

레스가  물음에 대답하듯 자기 손에 들린 노리쇠를 보여주고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렸다. 단테는 아자리를 업었고 샤카자이아가 레스를 부축해주면서 일행은 마차로 향했다. 피카니가 휘청거리면서 다시 일어났으나 때는 늦었다. 고목 너머로 마차의 짐칸에서 개틀링 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마차 바퀴가 덜컹거렸다.

허탈함에 피카니는 여태껏 쌓인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그도 헛웃음을 터트리며 쓰러졌다. 그들은 군대를 상대로 싸웠으나 네 명을 이기지 못했다.







곯아떨어진 일행들을 짐칸에 두고 단테는 샤카자이아의 안내를 따라 마차를 몰았다. 그러다가 방향이 심상치 않아서 그가 물었다.

“이쪽은 도적들의 야영지인데요?”

“이제는 괜찮아.”

그녀의 말을 믿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단테는 말뜻을 이해했다. 요새화시킨 야영지 앞으로 사로잡힌 패거리들과 원주민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싸움을 수습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겼군요.”

“나도 믿기질 않아. 울 정도로 기쁘다는 표현을 여태껏 이해 못 했는데 이젠 알  같아.”

“나중에 울어주세요. 여기서 이상한 오해샀다간 곤란해서.”

단테는 마차를 세우자 레스가 아자리를 안아 들고 짐칸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힘없이 품안에  늘어진 아자리를 안아 들면서 사방을 향해 도움을 청했다.

“근처에 의사 없습니까?! 도와주세요!”

그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다가와서 레스 일행이 향해야 할 곳을 안내해줬다. 싸움을 수습하던 인파들이 일행이 가는 곳마다 갈라져서 길을 비켜줬다. 이내 일행은 수행원과 함께 있는 추장을 만났다. 추장도 소란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오던 참이었다. 그가 레스에게 아자리를 땅에 눕히라고 손짓하며 차분하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게. 다 괜찮을걸세.”

레스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무리해서 마법을 쓰려다가 쓰러졌어요. 온몸에서 빛이 났죠. 마치 달처럼요. 어떻게 된 건지 아십니까?”

추장은 아자리의 이마에 손등을 대다가 얼굴에 흘러내린 머릿결을 옆으로 치워서 정돈했다.

“자기 의지로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거야. 어린 마법사가 해내기엔 시도조차 까다롭고 위험한 행위인데 얼마나 다급했을지 짐작이 가는군. 잠깐 기다려보게.”

그는 여태껏 자신이 들고 다녔던 지팡이를 아자리의 품에 안겨주고 손에 쥐게 했다. 그가 지팡이에 대고 전부 알아듣기에는 빠른 억양으로 뭐라 중얼거리자 지팡이에서 빛이 났다. 추장은 지팡이에서 손을 떼고, 레스와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뜸을 다 마치고 추장은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하며 머리에 쓴 깃털 관을 벗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절을 하다시피 추장이 깊게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일행은 당황했다. 레스는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지 마세요! 주위 사람들이  보잖습니까!”

샤카자이아와 단테는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는 모양이다. 추장은 숙였던 머리를 들고 벗었던 깃털 관을 옆으로 치운 다음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오늘 해낸 일이 얼마나 값진지 나의 모든 삶을 통틀어도 빗댈 것이 없을 정도네. 손님들에게 마저 감사를 표해야 하니 다들 양해를 부탁하네.”

마을 사람들은 추장의 부탁대로 순식간에 자리를 비키고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최소한의 수행원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주위가 정리되자 레스가 말했다.

“추장님. 사과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희는 쫓기고 있습니다. 인류 연방이 보낸 추격자가 이 숲에 왔습니다. 저희가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여러분들까지 휘말리게  겁니다.”

추장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우리 걱정은 필요 없어. 우리 부족이 와시추들의 국경 안에서 어떻게 여태껏 버텨왔다고 생각하나? 필요한 물자는 원하는 만큼 가져가게. 사람들에게는 이미 말해두었네.”

“싸움은 어땠습니까? 아이들은 무사히 돌아갔나요?”

“모두 무사해. 그리고 순식간에 끝났지. 다친 사람조차 별로 없어. 놈들이 숲에 발을 들이고 지휘관과 중화기를 잃은 시점에서 승부는 이미  거지. 내가 자네에게 은근히 도와달라는 암시를 해주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네.”

“운이 좋았죠. 저 혼자 해낸 것도 아니었고.”

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일행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레스와 추장의 시선이 샤카자이아를 향해 교차하자 그녀는 긴장으로 몸이 바짝 굳었다. 레스는 뭐라 말하려다가  말을 찾지 못해서 입만 뻐끔거렸는데 결국 추장이 먼저 그녀를 향해 말을 꺼냈다.

“우리끼리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다는 거 알고 있을 거다.”

“네.”

샤카자이아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추방됐다.”

그녀는 물론이고 레스와 단테까지 경악해서 온몸이 얼었다. 추장이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너의 티피로 돌아가서 떠날 채비를 갖춰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돌아와라. 더 할 말은 없다.”

샤카자이아는 군말하지 않고 분부대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레스는 마을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으로부터 샤카자이아가 팔로 눈물을 훔치는 순간을 엿보았다. 그는 참지 못하고 조금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추장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그건 올바른 물음이 아니네.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질문이지?”

레스는 상대의 위엄에 밀려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그때 어느 틈엔가 의식을 다 차렸던 아자리가 몸을 추스르고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면서 물었다.

“왜 굳이 당장 서둘러서 돌아오라고 하셨죠?”

추장이 살짝 짓궂어 보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적절한 때가 왔기 때문이지.”

레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살짝 신경질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가 적절하다는 건데요? 샤카자이아는 최선을 다해 싸웠어요. 심지어 덕분에 저희도 살았죠. 하다못해 가족에게 소식이라도 알려주고 작별할 여유라도 주셔야죠.”

추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의 티피를 봤으니 알겠지만 이곳에는 그 애의 혈육이 없네. 샤카자이아가 아비를 여의고 어미가 사라진 뒤로 내 딸처럼 가르치고 길러줬지.  사람 몫의 사냥꾼이 될 때까지.”

아자리가 대신 말을 받았다.

“추장님의 따님이나 마찬가지군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라프라스 양. 환영을 통해서 아씨의 부모가 살아있다는 확신을 얻었네.”

시체처럼 누워있던 아자리는 되살아난 거처럼 벌떡 일어났다. 레스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사실인가요?! 어떻게요?”

추장조차 순간 움찔거리느라 대답이  박자 늦었다.

“나처럼 문명 바깥에서 무리를 이끄는 추장들에게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특별한 기술이 있단다. 마법의 일종이지만 성질이 다르지. 설명하려면 까다롭단다. 지금 당장은 아씨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살아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렴. 그리고 자네.”

그가 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에게서 특별한 무언가가 보이네. 수백 년을 살아온 내 경험상 자네 같은 방랑자의 등장은 언제나 예사롭지 않은 일의 징조였지, 자네는 옛친구를 생각나게 해.”

“무슨 말씀이신지.”

레스는 시선을 좁히면서 눈을 살짝 감았다. 그러다 목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어쨌든 제발 생각을 바꿔주세요. 집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데요. 필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 애한테 기회를 부탁드립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말하면 우습다는  알지만 샤카자이아는 정말로 순수한 영혼을 가졌습니다.”

아자리와 단테는 왜 레스가 저렇게까지 샤카자이아의 추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지 공감이 되질 않아서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눈치를 살폈다. 추장은 끌끌 웃었다.

“알아. 자기 마음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지나치게 순수하지. 그리고 지금쯤 그 아이는 자신의 정든 티피를 정리하면서 오래전부터 꿈꿔온 것이 이제 현실이 됐음을 깨달을 거고.”

그 말을 듣고 레스는 긴 생각 끝에 상대의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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