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0화 〉[1권] 30회 - 손님에서 동행으로 (30/188)



〈 30화 〉[1권] 30회 - 손님에서 동행으로




루나는 아주 건강한 하품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내 졸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남자들이 누워있거나 쪼그린 채 아픈 곳을 움켜잡으며 신음을 흘리는 광경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외쳤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죠?”


피카니가 다가와서 루나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부엉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빛도 아주 맑았다.

“아, 저요? 기분이 아주 개운해요. 다친 분은 없으시나요? 무슨 일이 있었죠?”

“저희가 졌어요.”

일행은 소지품들을 도로 챙겼다. 카르델은 공이가 사라져버린 소총을 바라보고 혀를 차면서 소총의 멜빵을 몸에 걸었다. 그리고 하딘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깝쇼.”


하딘은 망가진 개틀링 건과 함께 널브러져 있는 패거리를 가리켰다.

“하나 데려간다. 살아있는 놈이 있겠지.”


남자들이 쓰러진 상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맥을 재보니 다들 기절했을 뿐이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 장교용 외투를 걸친 엘프였다. 각자 말없이 이쪽으로 모였다. 카르델이 상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총대장이야. 조준경 너머로도 봤어.”


아비투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개틀링 건을 쥐고 있던 것도 이놈이었어. 무슨 생각으로 지휘관이 여기까지 와서 단독행동을 한 거야?”


“난들 아냐.”

하딘이 대화에 끼었다.

“이상하군. 셀라렐 공국의 엘프들은 정규군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예외도 있다는 건가?”


피카니가 손깍지를 풀면서 관절 꺾는 소리를 냈다.


“적어도 하나는 건졌군요.”

그대로 피카니가 사정없이 상대의 배를 걷어차자 엘프는 헛구역질하면서 몸을 웅크렸다. 그가 위협하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널 따듯한 상태로 데려갈 수도 있고. 차가운 상태로 데려갈 수도 있어. 이해했냐?”


남자들은 상대를 둘러싸고 각자의 무기로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무서운 분위기 때문에 뒤로 물러난 루나를 제외하고 다들 혐오하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엘프는 콜록거리면서 두려움에 젖은 시선을 사방에 뿌리다가 양손을 들었다.

“그… 어… 전쟁 포로 인권 보장을 요구한다. 난 장교야!”

하딘이 내리까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탈영한 데다가 민간인을 상대로 전쟁 범죄까지 저질렀다. 그럴 권리 없어. 상식이 없군. 이런 얼간이가 두목인데 여태껏 숲에서 어떻게 버틴 거야?”

아비투스가 말을 받았다.


“누가 도와준 거 아닐까요? 여기 주민들은 마왕군을 적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처음에는 환대해줬을지도 모르죠.”

카르델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오랏줄을 양손에 들고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잠시 후 피카니 일행은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간 도적 우두머리를 끌고 가면서  바깥으로 향했다. 루나는 자기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듣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자기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잡은 걸 놓쳤군요.”

카르델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마법사님은 자기 몫을 다하셨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쇼.”

피카니가 엘프에게 말을 걸었다.

“소리를 들으니 너희가 싸움에서 졌어. 널 구하러 올 사람도 없다.”


엘프는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뒤에서 총으로 겨누고 있던 아비투스는 비웃음을 참으려고 입가를 움찔거렸다. 피카니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 군복. 명찰이 뜯어져 있는데, 네 옷이 아니지? 게다가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나? 보면 볼수록 점점 낯이 익은데.”

상대가 계속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자 피카니는 자신의 예감을 확신했다.


“그래 이제 기억난다. 너 마왕의 수행원이었어. 나는 군인이 아니니까 보내 달라고 나한테 사정했었지. 훔쳐 입은 군복만으로 용케 여기까지 왔군. 그건 대단하네.”


“틀려! 아니야! 나는…. 어? 잠깐만. 이상한데?”


“뭐가 이상해.”

“왜 지금 여기 너 혼자 있는 거냐?  녀석은 어디에….”


피카니는 다급하게 손수건으로 상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그가 설명했다.


“왜요? 지쳤으니까 이제부터는 조용히 갑시다.”


남자들은 물론 루나까지 눈빛에 의심과 의문이 스쳐 갔으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묵묵히 발만 옮겼다. 말을 묶어둔 곳에 도착하니 지평선 너머에 모래알 같은 태양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포로는 꽁꽁 묶여서 하딘의 안장 뒤에 실렸고 일행은 모였다.

루나가 말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고작 첫날 지났네요. 여러분들은 이런  일상인가요?”

고생을 같이 겪어온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연대감 덕에 그녀의 말투는 한결 편안하게 들렸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하딘이 분위기를 정리했다.


“첫날 만에 목표물들을 붙잡고 집으로  수도 있었지만, 세상일이  그런 거지. 아쉬움은 일단 잊어라. 이제부터 우리는 국경수비대에 들러서 저놈을 넘기고 국경을 넘는다. 시작은 이제부터다. 앞으로 몇 시간은 계속 달릴 거니까  말 있으면 손들어.”


하딘이 바로 손을 들고 말했다.

“오늘 싸우느라 수고했다. 피카니 경과 마법사님도. 

하딘이 말을 마치자 아비투스가 손을 들었다.

“마무리가 아쉬웠지만 느낌이 좋습니다. 용사랑 마법사도 있으니 옛 시대의 모험가 같지 않습니까?”

일행은 다들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차례가 된 카르델을 향해 일행이 시선을 모으자 바라보자 그는 고개만 저었다.

“난 됐어. 피곤해.”


하딘 대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콧수염도 씰룩거렸다.

“정말? 평소에는 가장 말 많은 놈이.”


“나도 사람이라고요.”


레인저들은 바로 피카니와 루나를 쳐다보았다.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머뭇거렸다. 피카니가 먼저 손을 들었다.

“당신들이 날 싫어하는  압니다. 지금은 어쩔  없이 같이 다닐 뿐이죠. 그래도 우리가 앞으로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건 기밀이지만 모두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른 사람들 모두 긴장했다. 하딘이 물었다.

“정말 말할 생각인가?”


“어차피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알게  테니까요. 아자리아가 누구인지 말하겠습니다.”

다들 침을 삼키고 피카니의 말을 기다렸다.


“6개월 전, 마왕이 사로잡히자 마계에 정권이 뒤집힐 만한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정당한 후계자들은 여러 이유로 무력화됐고요. 정보부들이 말하길 기존 왕당파가 이제 추대할 만한 차기 계승자는 이제 그 인물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탄식했다. 카르델이 자기 눈가와 관자놀이를 손으로 쥐어 잡았다.


“신이시여 맙소사.”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안 그래도 철갑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던 아비투스는 목깃을 잡아당겼다. 하딘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면서 눈을 신경질적으로 깜빡였다.


“이 사실이 얼마나 알려져 있나?”

“물론 정보가 공개될 예정은 없습니다. 마족 쪽에서도 민감하게 다루고 있을 겁니다.”


루나가 그에게 물었다.

“왜 저희에게 말씀하시죠?”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 나중에 여러분들이 눈치채도 입막음 당할 일이 없으니까요.”

남자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잠깐 달라졌다. 루나는 눈시울이 붉었다. 피카니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며 정중히 말했다.


“마법사님 차례입니다.”


다들 기대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떠오르던 해는 이제 이곳까지 손을 펼쳤다. 루나는 수줍어하면서 말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이 여행이 끝나길 항상 주께 기도하겠어요.”


“그럴 겁니다. 반드시.”

각자 말 위로 올라탔다. 피카니는 뒤에 탄 루나가 자신의 옷깃을 제대로 붙잡게 도와주고 고삐를 잡았다. 해가 공 모양으로 완전히 떠오르자 잠에서 깨어난 야생동물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주변은 북적였다. 하딘은 말의 앞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앞으로!”

기수들이 평원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화폭 위의 수묵화 같았다.









터번과 망토를 몸에 도로 걸치고 옷차림을 자락을 고쳐잡던 레스에게 아자리가 다가왔다. 아자리도 세탁이 다 끝난 원래 복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레스에게 물었다.


“어때 보여요?”


추장이 갖고 다니던 거였다. 길이는 성인 남성이 쓰기에는 산책용으로 적당해 보였으나 아자리에게는 다소 커 보였다. 섬세한 목각이 새겨진 몸통에 머리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물들인 깃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겁지는 않아?”

“보기보다 가벼워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사연도 심상찮은 물건 같고요.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마을을 구해준 보답이라잖아. 보답은 받는 게 예의야.”


사로잡힌 도적들이 주민들의 손에 이끌려 숲으로 향했다. 마차 쪽에서 화물을 정리하던 단테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언제든 출발할  있어요. 저희 물건도 다 되찾았고 주민들이 선물까지 따로 넉넉하게 챙겨줬어요.  패거리들은 탈영, 도망친 포로, 그리고 패주하던 놈들이 모인 거랍니다. 처음에는 구심점 없이 어중간하게 모여만 다녔는데 어느 날 장교를 자칭하는 놈이 나타나서 대단한 웅변술로 일당을 선동해서 여기까지 왔다네요.”

아자리가 말했다.

“그 장교는 정체가 뭐죠?”

“아무도 모른대요. 다들 어딘가 수상하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정작 자기가 직접 나서서 어떻게 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내내 끌려다녔나 봐요. 지금까지는 생활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원주민들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내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쩐지 너무 쉽게 항복하더라.”

레스의 말에 단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집단은 자신들의 수준에 걸맞은 우두머리를 가진다고들 하죠.”

아자리가 단테에게 물었다,

“새로 생길지도 모르는 동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테가  호흡 뜸을 들이고 말했다.

“사람이 하나 느는 건 나쁘지 않아요. 원래 마차 한 대에는 네 명이 타는  딱 좋거든요. 샤카자이아 양에 대해서는 그 활약을 직접 보기도 했으니 동행에는 불만 없습니다.”

레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동시에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쁜 점도 봐야지. 샤키는 눈에 굉장히 띄어. 엘프잖아. 세상 물정도 몰라서 어떤 사고를 칠지도 모르고. 먹을 입이 느는 건 당연하고.”

단테는 팔짱을 끼면서 낙천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강하잖아요. 게다가 앞으로 야생 지역도 많이 지나다닐 텐데 그쪽 방면으로 유능한 사람이 있으면 좋죠. 아자리아 양의 의견은 어떤가요?”

아자리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레스한테 맡길게요. 전 기절하느라 제대로 만나서 보질 못했으니.”

“나?”

레스가 단말마를 냈다. 아자리가 눈썹을 까딱까딱 들썩거렸다.

“당연하잖아요. 우리 중에서 같이 지내본 시간이 가장 길잖아요.”

레스는 터번을 벗고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뒤로 시간이 한참 지났다. 숲 가운데의 들판 한복판에 비어버린 요새와 마차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레스는 멍하니 달이 기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추장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레스가 추장에게 물었다.

“사로잡은 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피해가 심했다면 규칙대로 응징했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완만히 해결됐으니 그들은  대신 땀으로 대가를 치를 걸세. 때가 되면 와시추에게 넘겨야지.”

“처벌이 가볍다며 반대가 심할 겁니다.”


추장이 잠시 깃털 관을 벗고 길게 길러서 땋은 백발을 뒤로 가지런히 넘겼다.

“사람이 만든 첫 번째 법이 뭔지 아는가?”

“눈에는 눈. 이는 이.”

“얼핏 보기에는 빈틈없이 아귀가  들어맞는 규칙이지. 하지만 지금 세상의 문명 중에  규칙을 그대로 지키는 곳은 없지. 왜겠나?”

“악순환은 모든 사람의 눈이 멀어야 끝납니다.”


“순환을 끊는 최선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거지.  평생을 내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네. 난 그들이 선을 넘지 않기를 바라며, 이대로 살아갔으면 싶어. 그러고 보니 바다위윤들의 맹세 중에 이런 게 있었지. 정의가 실패한 곳에는….’”

추장이 말을 완전히 맺지 않고 말꼬리를 늘리자 레스가 이어서 말했다.

“복수가 나타난다.”


“때로는 그래야만 하는 날도 있지. 바다위, 자네가 보기에는 오늘이 그런 날인가? 악순환을 감내하고 그래야만 하는 날인가?”

“전혀요.”

“자네를 보면 오래전 내 친구가 생각나. 많은 면에서 닮았고 동시에 많은 면에서 다르네. 굉장히 흥미로워.”


추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스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들의 길을 와칸탕카가 보살펴주기를. 그리고 샤카자이아를  부탁하네. 새끼 새가 날개를 펼칠 때가 됐으니 그대들이 나는 법을 알려주게.”


샤카자이아가 나타나자 레스는 생각을 끊었다. 그녀의 온몸에 흐르는 땀방울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몸에는 튼튼해 보이는 활과 개인 소지품으로 가득 찬 가죽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녀는 헐떡이면서 레스의 앞으로 달려가고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


“날 기다려줬는가?”


레스는 이제 그녀의 어수룩한 공용어 실력에도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추장님이 부탁하셨어. 너도 눈치챘겠지만.”

샤카자이아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뻐끔거렸다. 레스는 진정하고 천천히 말하라는 뜻으로 손짓을 했다. 간신히 그녀가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는 내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속 고민해봤는데. 적당한 말을 모르겠어. 그냥 말하겠다. 나도 너희들과 같이 가겠어.”


레스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확실해?”


“나는 언제나 바깥세상이 궁금했어. 게다가 나만의 숙원도 있다.”


“숙원이라고?”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샤카자이아가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아버지는 와시추에게 죽었어.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야. 어머니는 예전에 스스로 숲을 떠나셨어. 내가 아는 사실은 동쪽으로 향하셨다는 것뿐이지. 만날 수 있다면 다시 만나겠어. 예전부터 각오만 하고 실행을 미뤘는데 지금이 바로 떠날 때야.”

레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고 진지한 태도를 지켰다.


“우리는 쫓기고 있어. 너도 봤잖아. 우리와 같이 다니는 건 위험해.”


“혼자 다니는 것도 위험하지. 상관없어.”

좀처럼 간단히 포기할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레스는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샤카자이아. 바깥에는 지금  세상이 싸우는 중이라는 거 알지?”


“그 정도는 알지. 무슨 상관이냐?”


“아자리는 차기 마왕이야.”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는 샤카자이아라도 그 사실에는 놀랐는지 그녀는 반사적으로 벌어진 자기 입을 양손으로 감췄다. 레스는 상대가 자기 말을 의심하지도 않고 곧이듣는 모습을 보고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의 황무지를 횡단할 예정이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도 몰라. 그런데도 우리와 같이 갈 거야? 너와는 상관없는 위험에 휘말리면서?”


샤카자이아는 서슴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너희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우리 마을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잖아.”


레스는 잠깐 대말을 머뭇거렸다.

“그건 다른 얘기야.”

“어떤 말로 겁줘도 신경  써. 이미 굳게 결심했으니까. 만약 끝까지 거절한다면!”


“한다면?”


“돈을 내서라도 얻어탈 거야!”

잠시 후에 샤카자이아도 이건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는걸 깨닫고 상대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으려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입가를 우물거렸다. 레스는 필사적으로 자기 허벅지를 꼬집다가 손을 풀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입술을  번 핥은 다음 말했다.


“보통 각오로 따라오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괜찮아. 그리고 있잖아, 나도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했어.”

“추방당했다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 샤카자이아에게 레스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추방당한 놈들끼리 앞으로 잘해보자고. 그리고 부탁 하나 더.”

레스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그녀에게는 악수라는 개념이 없었다.

“말하라.”

“앞으로 샤키라고 불러도 될까? 바깥세상에서는 친구끼리 이름을 줄여서 부르기도 하거든.”


레스는 일단 오른손을 흔들었다. 샤카자이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양손으로 악수했다.


“이상한 관습이지만 너희들이 좋다면야.”

“그럼 가보실까. 일행들도 널 환영한다더라.”

그의 뒤를 따라 그녀는 자신의 배낭을 고쳐잡고 따라왔다. 짐칸에 올라타기 직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살던 곳이 있는 방향을 향해 돌아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작별을 마치고 샤카자이아가 짐칸 위로 올라타자 아자리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당겨줬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언니.”


“나도. 정령의 인도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일행들이 모두 올라타자 단테는 말들의 등에 고삐를 내리쳤다. 마침내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또 다른 날의 새 출발이었다.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레스는 해방감을 느끼고 몸이 나른해졌다. 아자리가 다리를 길게 뻗고 누우려는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여기까지 목소리가 들렸어요. 추방당했다고요? 왜 말 안 했어요?”


“안 물어봤잖아.”

“추방당하고도 부족과 고향을 위해서 싸우겠다니,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사정이 복잡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둘에게 물었다.


“분명 어제 레스가 마왕을 잡았다고 했었지. 그건 무슨 의미였지?”

레스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제발.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고.”

아자리는 콧방귀를 꼈다.

“어쩔  없네.”


샤카자이아도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 자신의 짐을 뒤졌다.

“짐을 꾸리다가 찾은  있다. 어머니는 바깥세상과 다른 부족과 교류할 때 나서는 일을 맡으셨어. 그러다보니 바깥세상 물건을 이것저것 자연스럽게 수집하셨지. 이건 그것 중 하나야.”

그녀는 가지런히 접힌 무언가를 자신의 배낭에서 꺼내고 펼쳤다. 접힌 것이 완전히 펼쳐지자 아자리와 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커다랗고 검은 고깔모자였다. 샤카자이아가 모자를 들어 보이면서 멋쩍게 미소지었다.

“바깥의 마녀들은 다들 이런 걸 쓰고 다닌다고 들었어.”


아자리는 샤카자이아의 선물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단테! 이거 봐요! 나도 모자가 생겼어!”

마부석에 있던 단테가 고개를 돌리며 이쪽을 보자 바로 웃으면서 손짓하며 권했다.


“그럼 어서 써봐야죠!”

아자리는 그 말대로 했다. 치수가 조금 커서 머리를 절반 이상 덮었지만 덕분에 뿔이 가려졌고 검은색 모자와 하얀색 피부의 대조가 조화를 이뤄서 한결 신비로운 용모가 되었다. 모자 아래에서 빛나는 빨간 눈동자도 평소보다 선명해보였다.

“어때요?”

샤카자이아가 소녀 같은 목소리로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

“어울려!”

“브라보!”

단테도 칭찬했다. 이제 레스가 감상평을 말할 차례다. 레스는 정성 들여서 감상평을 말하려 했지만, 도중에 포기하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예쁘네.”


아자리는 잠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굳었다가  기색을 감추듯 곧바로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조심스레 모자를 벗었다.

“당신 문장력은 형편없어.”

“아 하하하하하.”

피곤하니 일일이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레스는 대충 웃어서 얼버무렸다. 그리고 얼굴을 터번으로 덮었다. 아자리도 자신의 고깔모자로 얼굴을 덮고 잠에 빠져들었다. 샤카자이아는 두 사람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여서 단테가 앉아있는 마부석으로 갔다. 단테가 그녀를 향해 자신의 모자를 살짝 기울이면서 그녀를 맞이해줬다.

“승선을 환영합니다. 슈슈니가 저와 함께한다니. 영광입니다”

“너희들이 내 은인이라서 보답하기 위해 따라오고 싶었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당황해서 미처 말하질 못했어.”

그녀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단테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말하면 되지~ 사는 게 그런 거지~”


아무리 숲이 우거져도 햇빛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차를 끌고 가는 말들은 점점 밝아져오는 숲길을 안심하고 밟아가며 속도를 올렸다. 자신의 얼굴 위를 스쳐 가는 햇빛과 그림자들을 근사한 그림자 연극이라도 되는 양 샤카자이아는 감명 깊게 보다가 말했다.

“졸려.”


“가서 주무세요.”

마차는 계속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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