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2권] 35회 - 불사람과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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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던 루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루나는 장교용 막사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지금 있는 방은 원래 안 쓰던 곳이어서 병사들이 허겁지겁 청소를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전투적 기세로 방을 정리해준 병사들 덕분에 호사를 누렸던 루나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루나는 잠옷을 벗고 원래 자신의 옷을 꺼냈다. 온 몸을 덮는 소매달린 망토와 리본으로 장식된 작은 실크 모자였다. 망토의 앞섶에는 단추가 달려있어서 앞쪽을 채우면 로브로 변했다. 망토 아래로는 레인저들이 사준 셔츠와 가죽 바지를 입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 옷이 헐렁해진 기분이 들었다.
“하루 만에 엄청 날씬해진 거 같아.”
햇빛을 보는 일이 손에 꼽았던 생활만 보내다가 갑자기 열량을 엄청나게 소모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루나는 방안에 거울이 없어서 마법으로 비슷한 걸 만들어 거울 대용으로 삼아 온 몸을 훑어보았다. 보라색 실크 모자와 자신의 군청색 머리카락이 만들어낸 고스(goth) 분위기가 자신의 창백하고 음침한 외모와 어울렸다. 마녀보다는 서커스에 등장하는 마술사 같은 모습이 됐지만 난생 처음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고안해낸 루나는 이 모습을 지키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남장차림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흠... 실크 모자라도 햇빛만 가릴 수 있으면 되겠지.”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더 누워있기도 싫었던 루나는 외출하기로 했다. 체력 좋은 피카니와 레인저들이라면 벌써 피로를 회복하고 만나기로 했던 식당에 이미 가있을 거 같았다. 루나는 남자들이 한데 모여서 카드를 치거나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하늘에 구름이 조금 꼈을 뿐 날씨는 상쾌했다. 땅은 황무지로부터 날아온 흙먼지와 모래 때문에 희거나 노란색이었다. 루나는 장교용 숙소를 나와서 싸구려 조립식 건물들을 지나 주둔지 한복판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만났다. 이곳에서 외부 시설과 군용 시설이 구분된다. 병사들이 루나를 보자마자 척하고 경례를 올리기에 그녀는 군인이 아니었지만 같이 경례를 해주고 지나갔다. 솔직히 재미있었다. 가는 길에 병사들이 회전초를 주워 한곳으로 모으는 장면도 보았다. 별 생각 없이 구경하면서 지나가던 루나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거기서 뭐하세요?”
카르델은 쇠스랑을 들고 회전초들을 퍼서 아주 높게 쌓고 있었다. 아비투스도 옆에 있었는데 그는 뜬금없이 한 손에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원래 입고 있었던 군복 대신 편한 사복차림이었다. 회전초 더미는 높이가 3미터 정도 되어보였는데 마구잡이로 쌓인 게 아니라 형태가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가진 거 같았다. 아비투스가 진지한 얼굴로 카르델과 상의하던 중에 루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잘 꾸미셨군요.”
루나는 반사적으로 표정이 풀어져서 배슬배슬 웃었다. 그녀는 다시 체면을 되찾고 좀 더 가까이 다가와서 두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을 관찰했다. 카르델이 회전초에 막대기 2개를 꽂자 아비투스가 꼭대기에 양동이를 씌웠다. 루나는 그제야 이들이 뭘 만들고 있었는지 알았다.
“지금 회전초로 눈사람 만드는 건가요?”
방금 꽂힌 막대기 2개는 눈사람의 팔이었고 양동이는 모자였다. 얼굴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구멍을 파내서 표정도 그려져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풀사람이 되겠죠. 뭔가 독창적인 걸 만들고 싶어도 도구가 제한되니 이게 고작이었습니다.”
카르델은 쇠스랑에 두 팔과 체중을 싣고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불만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작품이 만족스럽지 못한 눈치였다. 그가 기밀임무 모의라도 하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여기에 불만 붙이면 전례 없는 불사람이 완성될 거야. 문제는 표정 묘사인데 뭐 좋은 생각 없냐?”
아비투스가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하루 사이에 수염이 꽤 자라서 쓰다듬을 때마다 사포 긁는 소리가 났다.
“아까 창고에서 봤는데 구리 코일이 꽤 있더라고. 끼워 넣으면 원하는 부위만 푸른색을 낼 수 있을 거야.”
“그럼 눈은 문제없겠네. 파란색 안광을 뿜으면서 타오르는 불사람이라니 오늘밤을 기다릴 수가 없군. 입가에 해맑은 미소까지 그릴 수 있으면 최고인데 포기해야만 하나?”
루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냉정하게 말했다.
“혹시 해서 미리 말해두는데 전 두 분 작품에 끼어들지 않을게요.”
아비투스는 태연히 받아넘기고 손짓과 함께 대답했다.
“마법 같은 편법을 쓰면 재미가 없지 말입니다.”
“그... 그렇군요.”
루나는 다른 것보다 불사람이 완성됐을 때 강풍이라도 불면 뒷수습을 어쩔 생각인지 우려됐다.
두 남자는 자신들의 작품을 다른 병사들에게 넘기는 인수인계 과정을 마친 다음 루나를 따라갔다. 걸어가면서 그녀가 두 사람에게 질문했다.
“헨리 대위님이나 피카니 씨는 어디에 있나요?”
카르델이 손깍지를 뒤통수에 걸면서 대답했다.
“두 양반은 핑커튼에서 보낸 직원을 마중하러 갔습니다. 그 친구가 우리들 대신 그놈들을 추적할겁니다.”
“우리들은요?”
“저희는 내일 국경을 넘어서 그놈들이 지나갈 장소에서 놈들을 미리 기다립니다. 핑커튼의 탐정이 놈들을 붙잡지 못했다면 결국 우리들한테 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이죠. 저번에는 어이없이 놓쳤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잡을 겁니다.”
카르델은 특히나 그 일행들을 놓친 게 분했는지 말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루나는 의욕이 가질 않았다. 그녀가 눈동자를 다른 곳에 둔 채 말했다.
“그런데 붙잡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죠?”
“놈들은 제국에게 넘기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떠나야죠. 그건 걱정하지 마요. 그냥 갈 수 있을 곳까지만 가보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어요. 이런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그 사람들 악당은 아니었잖아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기절만 시켰고요.”
카르델이 대답하기 곤란해서 말문이 막히자 아비투스가 나섰다.
“한쪽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친구들이 악당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사쿠라비는 제국까지 살아서 온 유일한 사람이고 여자아이는 차기 마왕입니다. 한쪽은 지리정보를 가졌고 한쪽은 누군가의 손으로 들어가면 지휘체계가 다시 확고해지게 되죠. 그 친구들의 의지하고는 관계없이 그들은 인간들에게 위험한 존재에요. 그 위험을 막는 게 우리 임무고요.”
루나는 아비투스의 말을 듣고 깊게 깨달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 혼자만 깔끔한 척 했네요.”
아비투스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 친구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국은 인재를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사법거래를 통해서 우리들하고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카르델도 그런걸요.”
카르델이 정색했다.
“야 갑자기 내 이야기가 왜 나와?”
아비투스는 카르델의 불평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카르델은 청부업자였습니다. 사법거래로 군에서 근무하는 걸로 형량을 줄이고 있죠. 원래는 교수형 감이었지만 전시라서 잘 싸우는 사람이 절실했거든요.”
“어이!”
루나는 카르델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는 놀라움보다는 흥미가 더 많았다.
“당신 킬러였어요?”
“제 예전 직업에 대해서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네요. 벌써 7년 전 일입니다.”
아비투스가 자연스러운 말투로 다시 발언권을 가져왔다.
“이제 식당이나 가죠. 카드 쳐본 적 있으십니까 마법사님?”
“잘 모르지만 이번 기회에 배워볼래요.”
카르델의 기분을 꿀꿀하게 만드는 대가로 루나와 아비투스는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웠다.
식당의 칸막이 문을 손으로 밀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피카니와 하딘이 거기에 있었다. 점심에 이야기했던 원탁에 자리를 잡고 서로 마주 앉아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떫었다. 그리고 탁자 한 가운데에는 천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방금 식당에 들어온 세 사람은 무슨 일인지 짐작도 안 가서 피카니와 하딘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루나가 원탁 가운데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건 뭔가요?”
피카니가 대답하듯 천을 치우자 그 밑에 있던 게 드러났다. 작은 새장 속에 들어있는 하얀색 비둘기였다. 카르델이 평소의 말투로 물었다.
“핑커튼은 어디에 있어요?”
하딘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가 여러 개 생겼다.”
비둘기가 새장 속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구구구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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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이 타고 있는 마차가 마을 입구를 통과했다. 울타리는 빗물에 뭉쳐서 굳은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었고 땅에는 메마른 황색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싸구려 나무 건물들은 오랜 세월동안 겪은 경년열화 때문에 걷어차면 쓰러질 거 같았다. 이런 무덤 밑바닥 같은 환경에서도 바늘처럼 가느다란 잎사귀를 펼친 작은 나무들이 땅에 달라붙어서 자라고 있었다.
겉을 회벽으로 칠한 직육면체 건물들은 형태도 온전했고 안에 들어가도 안전해보였다. 그 건물 안에 있던 사람이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까무잡잡한 얼굴의 인간 사내였다.
단테가 그를 알아보고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모자를 위로 올리며 인사했다.
“봉주르(안녕하시오).”
남자는 건성으로 손을 올려 인사를 받았다.
“살루스(안녕하쇼).”
단테가 주머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서 남자를 향해 튕겼다. 맑은 소리와 함께 날아간 은화를 낚아챈 사내는 다시 단테를 바라보았다. 푼돈이었지만 사이좋게 지내자는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길면 이틀 정도 여기서 머무를 거 같습니다.”
사내는 땅을 향해 거무튀튀한 가래침을 뱉고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들어가 있어.”
그리고 말들의 고삐를 넘겨받으러 다가왔다. 그전에 단테는 일행들에게 외쳤다.
“승객 여러분들은 이제 내리세요.”
갑자기 짐칸에서 각자 소지품을 갖고 나온 사람이 셋이나 되자 사내는 당황했다. 머리에 이상한 천을 두른 까무잡잡한 피부의 키 큰 남자, 몸에 장궁을 매고 있는 진한 갈색 피부의 엘프 여자, 그리고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쓴 하얀 피부의 여자아이. 하나 같이 이곳에서는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내는 멀뚱히 서서 단테에게 물었다.
“대체 이것들은 뭐야? 저번 네 동업자들은 어디 갔어?”
단테는 태연히 받아넘기고 일행과 사내에게 서로를 소개시켰다.
“이쪽 남자는 사쿠라비의 레스. 여자는 슈슈니 부족에서 온 샤카자이아. 그리고 고깔모자 쓴 숙녀는 아자리. 지금 제 동업자들이죠. 그리고 이 아저씨는 안토니오. 이곳의 촌장 격인 사람입니다.”
레스 일행들은 소개를 받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쓰고 있는 모자를 움직이면서 인사를 했다. 안토니오는 시큰둥한 얼굴 그대로 마부석 위로 올라가 고삐를 붙잡았다.
“말썽만 피우지 마.”
마차는 마을 어딘가로 움직였다. 혹시 안토니오가 마차를 마음대로 가져가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는 일행들을 위해 단테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안토니오는 이 마을을 돌보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객관적으로 깨끗하고 신뢰 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마을 안에서라면 신용할 수 있어요. 저희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하니까요.”
아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디서 묵어요?”
단테가 팔을 높게 들고는 사방을 향해 휘둘렀다.
“아무데나 빈 집으로 들어가서 자면 되요. 무너지지 않을만한 곳은 알아서 찾아야죠.”
다들 별로 상관없었다. 샤카자이아가 마을을 둘러보고는 감상평을 말했다.
“정말 정감 안 가는 곳이다. 정령도 오질 않겠어.”
금을 보고 몰린 사람들 때문에 대충 지어진 마을이라서 크기가 제멋대로인 오두막과 건물들로 뒤죽박죽이었다. 개척지 근처의 마을은 대체로 큰 길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지만 이곳의 건물 배치는 손에 움켜쥐었다가 뿌린 쓰레기들 같았다. 그나마 제대로 마감을 한 목재로 정성들여 지은 건물 몇 개는 노숙하기에 알맞아보였다. 일단 일행들은 그곳을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 생각은 다 마찬가지라 안에는 손님들이 먼저 와있었다. 칸막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째려보았다. 먼지 묻은 외투와 망토를 걸친 인간과 마족들이었다. 하나 같이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떤 인간들인지 짐작이 갔다.
내부를 한 번 둘러보니 이 건물이 마을의 술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들어온 위치에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발코니가 보였다. 바텐더와 주방장이 자리 잡는 공간에는 늙은 소의 해골이 걸려있었다. 탁자와 의자가 없어서 손님들은 바깥에서 가져온 빈 상자나 통나무 그루터기 같은 잡동사니로 의자와 탁자로 삼아 우글거렸다. 그리고 해가 들어오는 방향을 계산하지 않고 창문을 대충 만든 탓에 컴컴했다.
안에 있던 손님들이 경계를 풀지 않는 걸 보아하니 단테하고 일면식이 없는 사이들 같았다. 인간 남자 중 하나가 허리춤으로 손을 댄 채 물었다.
“정체를 밝혀.”
그들은 모두 레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스는 양손을 보인 채 침착하게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야. 기왕이면 사이좋게 지내자고.”
그들 중 하나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참견했다.
“적당히 해. 여자랑 아이도 있잖아.”
머리에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다들 그 말을 듣고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원래 자기들 일로 돌아갔다.
단테가 일행들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여자하고 아이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쌘 줄은 몰랐겠죠.”
어두컴컴한 술집을 돌아다니며 일행들은 자리 잡을만한 곳을 둘러보았다. 단테는 어떻게든 아는 얼굴이 없나 찾아다녔고 레스는 만에 하나 허리춤으로 손을 뻗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샤카자이아는 처음 만나보는 문명의 환대에 다소 실망하고 있었다.
“저 사람 아까부터 우리를 보고 있다.”
레스의 망토를 붙잡고 졸졸 따라가고 있었던 아자리는 샤카자이아의 말을 듣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