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2권] 40회 - 사냥과 사냥감
◆
다들 자고 있는 와중에 레스는 홀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시간이 됐다 싶어서 그는 조용히 샤카자이아에게 다가갔다. 흔들어서 깨우는 동안 레스는 그녀의 뾰족한 귀를 만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가 눈을 뜨자 레스는 말했다.
“교대하자.”
“후아아으으으...”
레스는 샤카자이아가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 모습을 보고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자러 안 가고 뭐해?”
“바람 좀 쐬려고.”
“그렇게 중무장을 하고?”
그는 권총은 물론이고 소총까지 등에 매고 있었다. 샤카자이아가 만들어준 가방의 멜빵에는 탄띠가 꿰어 있다. 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위험한 곳이잖아.”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모습이지만 졸음 때문에 만사가 귀찮았던 샤카자이아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감기 든다.”
그는 바깥으로 나왔다.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각은 모르지만 하늘의 색과 공기의 감촉을 보건데 확신은 없었지만 새벽 4시쯤 되어보였다. 레스는 나올 때 가지고 온 기름등에 불을 붙이지 않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만으로 움직였다. 탄광으로 향했다. 민둥산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기만 하면 목적지가 나오니 헤맬 일 없이 순식간에 찾았다. 탄광 안으로 들어가니 살짝 따듯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기름등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권총을 쥐었다. 그리고 샤카자이아가 설명했던 표식을 찾아서 나아갔다. 괴물의 내장을 탐험하듯 구불구불한 갈림길들을 지나갔고 굴이 깊어질수록 바깥세상과 단절되는 감각이 온 몸을 감쌌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땅속에서 죽은 최초의 바다위윤이 되겠군.”
그의 발 근처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물건이 사라진 자국이 보였다. 지금 등에 매고 있는 소총의 원래 주인이 잠들었던 곳이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그는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 판단했다.
‘어디보자. 만일 저 앞에 괴물이 잠들어 있다면 숨소리가 들릴 거야. 그렇게 귀가 좋은 샤키도 이상한 소리는 못 들었다고 했었지.’
이번에는 불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주변을 살폈다.
‘깨끗하군. 이런 곳이라면 핏자국은 10년 넘게 가는데. 하지만 오는 내내 그런 건 없었어. 여기 친구가 있던 곳도 핏자국이 거의 없고. 괴물 같은 놈한테 공격당해서 죽은 거라면 난장판이었을 테지. 그럼 사고로 죽은 건가.’
앞으로 갈수록 바닥이 점점 거칠어졌다. 파버린 구멍을 미처 다듬지도 못하고 이곳을 포기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아자리와 샤키가 말했듯이 점점 공기에서 신선한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지의 장소를 알아내가는 설렘과 긴장감을 같이 느끼며 레스는 마침내 시커먼 암흑을 목도했다. 심호흡을 하고 그는 앞으로 한발자국 내딛으며 기름등을 들어올렸다.
“뭐야 이거?”
그가 찾아낸 거대한 공간을 보고 떠올린 첫 인상은 신전이었다. 내부가 어찌나 넓었는지 불이 안쪽을 전부 비추지 못해서 천장과 주위가 암흑 천지였다. 그리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위가 쿵쿵 울렸다. 지금까지는 좁은 공간에 갇혀있다는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했지만 이제는 거대한 공간이 자신을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바닥들은 수평 균형이 모두 완벽했다. 종종 사람 몸통만한 굵기의 대리석 돌기둥도 있었는데 위쪽은 하늘과 연결된 듯 아득히 높았다. 지붕이 보이질 않으니 모르고 왔으면 이게 하늘에서 내려와 꽂힌 건지 지붕을 지탱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르겠네. 고고학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관광은 그쯤하고 레스는 다시 흔적을 쫓아보았다. 저번 방문자가 남긴 흔적을 찾아가는 건 쉬웠다. 바닥을 보면서 걸어가니 먼지가 흩어졌거나 금이 간 곳이 보였다. 그리고 바닥 위로 검은색 물방울이 묻은 채 굳은 것처럼 보이는 흔적도. 추적을 계속한지 얼마 안 가서 찾아다닌 물음의 해답을 찾아냈다.
그곳에 거대한 괴물의 미라가 쓸쓸히 잠들어있었다. 몸집은 다 자란 큰곰만 했다. 그것을 향해 레스가 인사했다.
“안녕.”
대답은 없다. 일단 유령 같은 정체불명의 존재는 아니라 판단하고 레스는 자세히 보았다. 괴물 주변에 10년 묵은 핏자국이 모여서 생긴 말라붙은 검은색 웅덩이가 있었다. 괴물의 이마 한가운데에 돋은 뿔은 사람 몸통을 쉽게 뚫을 정도로 길었고 송곳니는 아직도 예리해서 끝부분은 윤이 났다. 레스는 이 괴물의 사체가 백골이 안 됐는지 신경 쓰였다. 몸에 독성이 있어서 벌레들도 먹기 꺼려하는 건가? 아니면 이 신전 자체에 특수한 힘이 있나?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는 핏자국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계속 찾아다녔다. 핏물이 굳은 흔적을 보아하니 괴물은 목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진 모양이다. 지금은 배를 깔고 엎드린 자세여서 상처가 보이질 않아 레스는 미라의 옆구리를 발로 밀었다.
“실례 좀 할게.”
부즈카시를 할 때 쓰는 송아지 시체를 옮기는 느낌이었다. 옆으로 누운 괴물의 목에는 부러진 창이 박혀있었다. 그는 말라버린 시체에서 창을 쑥하고 쉽게 뽑았다.
“흑요석 칼날이라... 샤키 것하고 비슷하네.”
원래 창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아니라 흑요석 단도를 장대에 단단히 묶어서 쓴 급조품이다. 그는 칼날 부분만 장대에서 떼어내고 가져갔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피가 흐른 자국은 없었지. 이 칼의 주인은 상처 없이 저 괴물을 죽여 버리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뜻이야. 굉장한데.”
찾아볼 곳은 아직도 많았지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고 기름등에 남은 연료도 무한하지 않았다. 레스는 괴물을 향해 최소한의 예의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늦었지만 별 일 없겠지.”
◆
여명이 오기 직전, 히콕의 집에서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히콕은 산탄총으로 무장했고 나머지 사내들은 리볼버만 손에 들었다. 그들은 불 없이 소리 내지 않고 움직였다.
마을 한복판에서 히콕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걸 보고 탐정 중 하나가 수선 떨었다.
“그거 포션 맞죠? 먹으면 힘이 솟고 상처가 순식간에 아문다면서요?”
“그런 효과를 내는 건 따로 있어. 이건 내 변이인자를 활성화시키는 것뿐이야. 그리고 나처럼 내성이 없으면 먹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 꿈도 꾸지 마.”
그가 약병의 내용물을 비우고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마치 산이라도 삼킨 사람처럼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좋아. 이제는 완전히 한낮처럼 보이는군. 내 뒤만 따라와.”
카우보이와 탐정들은 샤카자이아와 아자리, 그리고 단테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바짝 다가갔다. 히콕은 그들이 어디를 공격해야하는지 확실히 알렸다.
“따로 뒷문은 없지만 두 명은 저기 뒤로 돌아가도록 해. 그리고...”
[쾅! 와그작!]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집 안에서 뭔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에 있는 주민들이 전부 들었을 정도로 요란한 소리에 히콕과 탐정들은 잠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히콕과 탐정들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목표물들은 이미 달아나서 없었고 벽에는 사람이 드나들만한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구멍을 통해서 집 반대편의 골목을 누군가가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히콕은 바로 탐정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은 다른 방향으로 가. 놈들도 보통은 아니니 흩어지지 말고 함께 다녀.”
거기서 그들은 갈라졌다. 탐정들은 현행범에게 다가가는 형사들처럼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골목들을 돌아다녔고 히콕은 아자리 일행을 곧바로 쫓았다. 그는 불 없이도 앞이 잘 보였기에 방금 생긴 발자국을 구분해가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갔다.
‘발이 큰 남자의 부츠 자국, 아이 하나, 그리고 여성용 부츠. 남자가 하나 더 있어야 하는데 왜 셋 밖에 없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발걸음은 늦추지 않았다. 난잡한 골목길 어디서 습격해올지 모르니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설마 그 정도로 귀가 밝을 줄이야. 처음 상대하는 엘프한테 너무 방심했군.’
멀지 않은 곳에서 소동이 하나 생겼다.
“뭐야! 거기 누구야! 읍!”
히콕은 소리가 난 곳으로 서둘러서 달려갔다. 거기에는 무법자 하나가 땅에 누워서 해롱거렸다. 소란을 듣고 불안해진 사람이 바깥을 나와서 정황을 보다가 그들과 마주쳤던 모양이다. 근처에 찍힌 발자국을 어린 아이와 성인 남자의 것이었다. 샤카자이아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벌기 위해 중간에 갈라졌나.’
그 소란을 들은 탐정들이 다가왔다. 여유가 없는 탐정들과는 대조적으로 히콕은 침착하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놈들이 둘로 갈라졌어. 한쪽은 타고 왔던 마차를 가지러 갔고 남은 하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우리를 상대하러 남았지. 마차가 다니는 길은 하나뿐이니 잘 쫓아간다면...”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오기에 히콕은 허공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탐정들은 지시를 받는 도중에도 빈틈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으나 샤카자이아가 화살을 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뭐야! 화살이 자기 혼자서 방향을 틀고 이쪽으로 날아왔어!”
“원주민들은 요술을 부린다던데 진짜였나?!”
히콕은 그 기술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스크라엘링은 내가 맡을 테니 너희들은 마차 쪽으로 가! 뛰어!”
샤카자이아가 노골적으로 이쪽을 도발하고 유인하려는 것임을 히콕은 알고 있었지만 겁먹고 내뺄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오히려 적수를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었다. 샤카자이아는 발소리를 감추지 않았고 히콕은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샤카자이아가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이쪽을 향해 다시 활을 쏘았다. 곡사 시킨 화살은 느려서 쏴봐야 아까처럼 붙잡힐 거라 생각하고 당당하게 직선으로 날렸다. 히콕은 손만 따로 움직여서 산탄총을 지향사격 자세로 놓고 몸을 뒤로 쓰러트렸다. 뒤로 누운 히콕의 눈으로 밤하늘의 별빛과 날아가는 화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15발이나 되는 쇠구슬이 신문지 한 장 넓이로 퍼져서 샤카자이아를 향해 날아갔다.
땅으로 쓰러진 히콕이 머리만 들어 올리고 산탄총을 앞으로 겨눴지만 샤카자이아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가서 살펴보니 그녀가 있던 자리에 피가 몇 방울 묻어있었다.
“기개 있으시군.”
히콕은 비명소리가 들리질 않아서 빗맞혔을까봐 내심 불안했었다. 얼마나 크게 다쳤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다크 엘프가 피까지 흘리는 와중에 흔적을 감추고 기습할 여유 따위는 없게 됐다. 히콕은 자신감을 얻고 흔적을 쫓는 일에 집중했다. 물론 방심하다가 뭐가 날아올지도 모르니 성급하게 굴지도 않았다. 붙잡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발자국과 혈흔은 좁고 긴 골목길로 향하고 있었다. 양팔을 좌우로 뻗으면 담벼락과 오두막의 벽이 손바닥에 닿을 정도로 비좁았다. 아무래도 저 골목을 지나가려는 순간 저 앞의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기습할 거라고 히콕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대놓고 쏘는 화살 정도야 얼마든지 먼저 공격하거나 피할 자신이 있었다. 주저 없이 나아갔다.
하지만 골목을 중간쯤 지나갔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흔적이 사라졌어?!’
마치 앞에 있던 사람이 하늘로 솟아오르기라도 한 듯 핏자국과 발자국이 사라졌다. 몇 초 동안 가능성을 차근차근 생각하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끊김발’이었나!”
히콕은 급하게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양팔을 벽으로 뻗어서 뒤쪽 허공에 매달렸던 샤카자이아는 땅으로 떨어진 다음 손에 닿는 대로 돌 하나를 힘껏 집어던졌다. 돌은 히콕의 갈비뼈를 때리고 전신으로 맹렬한 충격을 전했다. 뼈는 금이 갔으며 폐에 있던 공기가 억지로 밀려나와 그는 헛구역질을 했다. 히콕은 맞은 곳을 부여잡다가 고꾸라졌다.
그녀는 걸어왔던 길 그대로 자기 발자국을 밟으며 뒷걸음질 친 다음 숨었을 뿐이다. 그뿐이지만 아무리 간단한 속임수라도 서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용기를 갖고 임기응변으로 쓰이면 예상 이상의 효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특히 총을 맞춰서 상대가 기고만장했을 때라면 더더욱.
샤카자이아는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전날 새벽에 총상을 입었던 곳이 다시 벌어져서 새로 감았던 붕대에 피가 적셔지고 있었다. 히콕이 쐈던 산탄은 운 좋게 그녀의 팔과 종아리만 살짝 긁어놨을 뿐이다. 그래도 제대로 처치하지 않으면 몸 상태가 순식간에 나빠질 것이다.
샤카자이아는 히콕에게 다가가서 활로 그를 겨누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노렸나?”
히콕은 입 다물고 있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밤에 내 친구들이 너희들을 쫓아왔다. 현상금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그때야.”
“그럼 퇴치 도구는 진짜인가?”
“그래 그건 진짜야.”
그녀는 그의 허벅지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히콕은 전사답게 패배를 인정하고 이만 악물면서 조용히 고통을 견뎌내었다. 샤카자이아는 그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한마디 뱉었다.
“쫓아오면 산채로 머리가죽을 벗겨버리겠다.”
그리고 먼저 떠난 일행들을 찾으러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