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2권] 41회 - 사람만 빼고
아자리와 단테는 레스나 샤카자이아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숨기로 했다. 마차로 가는 건 예측 당하기 쉬웠고 애초에 레스를 두고 먼저 떠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탐정이라는 직함을 멋으로 가진 게 아니었다. 그들도 신선한 발자국 정도는 구분할 관찰력이 있었다. 게다가 하필 막 여명이 시작되어서 아침 해의 희미한 빛이 천지를 비추고 있었다. 아자리와 단테는 숨죽이고 그들이 지나치기만을 바랐으나 탐정들은 착실하게 포위망을 좁혀왔다.
아자리는 최후의 상황에 대비해서 주문을 외칠 준비를 했다. 마법을 쓰려면 쓸 수 있었지만 결단을 내리는 게 쉽지 않았다. 망가진 몸 상태가 아직 회복이 덜 됐다.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 그녀는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반만 당긴 상태다. 그리고 총에는 방아쇠를 당기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망가진 총알만 들어있었다. 그녀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탐정들은 두 사람이 숨은 곳을 완전히 파악하고 오두막을 포위하려 했다.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탐정들은 뒤를 보았다.
레스는 여명의 햇살을 등에 짊어진 채 때를 기다렸다. 네 남자가 더 이상 이쪽을 향해 등을 보이지 않게 되자 레스는 손을 쳐들어서 망토 자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뒤로 넘긴 망토 자락이 등에 닿기도 전에 그의 오른손은 총집에서 권총을 뽑았다. 남자들이 겨우 상황을 깨닫고 갖고 있던 권총을 이쪽으로 향했다. 난데없이 폭죽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탐정들이 들고 있던 리볼버는 어디론가 사라졌거나 총의 몸통에 총알구멍이 나있었다.
무기가 망가진 이들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권총이 날아가면서 방아쇠울에 손가락이 걸렸던 사람은 자기 손가락이 날아간 줄 알고 경악했었다. 레스의 검은색 리볼버는 하얀색 초연을 가늘게 피워 올리고 있다. 권총의 공이에서 왼손을 땐 다음 멋 부려서 총을 돌리다가 총구에 입김을 훅 불고 그가 말했다.
“두 손 높이 들라고.”
탐정들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여서 굴욕이나 치욕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 말에 따랐다. 소리로 상황을 파악한 단테와 아자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들을 보며 레스가 인사했다.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다. 그치?”
아자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산책을 이렇게 오래 해요? 걱정했잖아요!”
“지금은 이 친구들부터 처리하자.”
탐정들은 그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물론 레스는 아직도 권총을 그들에게 겨누고 있다. 단테가 물었다.
“정보를 캘 건가요?”
“그럴 시간 없어.”
레스가 위협하는 동안 단테가 그들의 몸을 수색했다. 총집과 탄띠가 달린 벨트도 벗겼고 몰래 숨겨둔 나이프까지 단테는 싹 청소했다. 때마침 그들의 소지품에 올가미와 오랏줄이 있어서 그걸로 탐정들을 묶고는 마무리로 재갈까지 물려서 아까 아자리와 단테가 숨어있던 오두막으로 밀어 넣었다. 때가 지나면 언젠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꺼내주던가 할 것이다. 그들로서 베풀 수 있는 자비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작업이 마무리되자 총성을 들었던 샤카자이아가 그들을 찾아왔다. 그녀의 팔다리는 피투성이여서 일행들은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세상에! 언니! 괜찮아요?!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지혈해줄게요. 어서 앉아요.”
샤카자이아는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손을 들어 도움을 거절했다.
“그냥 긁힌 거야. 지금은 서두르자.”
레스가 물었다.
“다른 놈은 더 없어?”
“방금 그 카우보이를 제압하고 왔다. 그놈이 마지막인 거 같다.”
“히콕이?! 그럼 약속은 가짜였던 거야?”
“아니, 우리 정체는 나중에야 알았던 모양이다. 거짓말 같지는 않아. 처음부터 알았다면 진즉에 공격했을 테니. 우리가 탄광에 있었을 때라거나.”
단테가 재빨리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전 괴물 퇴치 도구를 챙길 테니 여러분들은 짐들을 가져 오세요. 최대한 빨리요.”
방금 일어난 소동을 듣고 잠에서 깬 무법자들이 주변으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문제가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일행들은 앞 다투어 움직였다.
◆
여명이 시작됐을 때 루나와 남자들은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다. 지금 루나는 지팡이에 걸터앉아서 날아다니고 있다. 당장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시간이 촉박했고 피카니의 말에 그녀가 같이 타면 뒤처질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포격지원을 요청할 때 쓸 전서구의 새장도 그녀가 맡고 있었다. 만일 새장을 들고 말위에 올랐더라면 흔들림 때문에 비둘기가 스트레스로 죽을지도 몰라서 루나의 존재는 천만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들은 말을 데리고 걸어가야만 했다.
남자들은 레인저의 전투용 외투와 기병대 모자 대신 사제 외투와 모자로 바꿔서 걸쳤다. 복장이 바뀌지 않은 건 카르델 뿐이다. 그는 여전히 후드 달린 먼지 막이 외투차림이었다.
가면 갈수록 지형이 거칠어지고 험난해졌다. 왼쪽을 보면 거인이 휘두른 도끼자국처럼 높고 가파른 바위 협곡이 보였고 오른쪽의 낭떠러지 아래에는 심연만 넘실거렸다. 공기마저도 돌가루 맛이 났다. 생명의 증거라고는 죽음 밖에 없는 황야를 다섯 명의 원정대는 계속 달렸다.
협곡을 지나가자 드넓은 평지와 지평선, 그리고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대장간의 거푸집처럼 협소하고 거친 곳만 지나다니던 그들에게는 커튼이 올라간 연극 무대처럼 급작스런 변화였다. 시야가 넓어졌으니 앞을 살필 겸 말들이 쉴 수 있게 일행들은 지대가 높은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멈췄다.
아비투스가 모자를 벗고 휘파람을 한 번 불렀다.
“경치는 좋다.”
여명의 희뿌연 빛이 드리우진 황량한 광야는 아직 회색이었으나 가을 하늘은 호수처럼 깊고 청명한 푸른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쳐다보고 있으면 빨려 들 것 같은 풍경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사막에 가까운 매 마른 땅이 펼쳐져 있었다.
루나는 새장을 들고 지팡이에서 내려와 하딘에게 다가갔다.
“여기 비둘기요.”
“수고하셨습니다. 마법사님.”
하딘은 새장을 받았다.
“역시 말을 타는 것보다 날아다니는 게 편하네요.”
“여정 내내 그럴 수 있다면 저희도 좋겠지요.”
그는 나침반과 지도, 그리고 주변 지형을 번갈아보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계산해보았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주목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렉커들이 나타나는 곳이 저 앞이다. 곧 녀석들이 굴속에서 나오고 햇볕을 쬐러 이리저리 뛰어다닐 거야. 청각과 후각이 예민한 놈들이니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불을 피우거나 방아쇠에 손대지 말 것.”
카르델이 말했다.
“말 안 해도 압니다요.”
피카니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물었다.
“우리들이 따로 할 일이 있습니까?”
하딘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없어. 그냥 자세 낮추고 편히 있어. 굳이 할 게 있다면 말들이 편히 쉬게 솔질이라도 해주면 좋겠군. 때가 되면 부리나케 뛰어야 할 테니까.”
“괴물들이 몰려올 때 대비해서요?”
“그보다는 진내사격이 걱정되는군. 포병은 기병을 죽이는 놈들이야.”
“어제부터 유난히 표정이 안 좋던데 따로 겪었던 경험이 많은가봅니다?”
“내가 기병대 시절부터 열 번 정도 죽을 뻔했는데 절반은 포병들 때문이었어. 우리 포병.”
카르델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다음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근처에 말라죽은 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그는 대검을 꺼내서 그 나무에 박았다. 그리고 대검을 받침대 삼아서 저격총을 그 위에 올려놓고 자세를 잡았다.
루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먹은 거랑 마신 것도 없으신데 괜찮으시겠어요?”
“화장실 가면 안 되니까 사양하겠습니다.”
배설욕구는 정신력으로 견딜 수가 없지만 허기와 갈증은 정신력으로 견딜 수 있다. 루나는 항상 경박한 모습만 보이던 카르델의 진지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딘은 카르델의 옆으로 가서 쌍안경으로 관측수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이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머지 세 명은 거리를 벌리고 대화를 나눴다.
아비투스가 말했다.
“너무 편하니까 불편하군요.”
피카니가 그를 바라보았다.
“하딘 대위와 같이 싸운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4년. 면식 자체는 알파 분대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있었고. 활동하는 지역이 겹쳤거든요.”
아비투스의 말투는 피카니를 상대할 때 존대와 평칭을 오갔으나 피카니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전에도 포격 지원을 해본 적 있습니까?”
“있죠. 하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놈들을 향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보통은 시설물을 부술 때에나 하죠.”
“왜 괴물들이 이런 척박한 곳에 뜬금없이 나타났을까요.”
아비투스가 말이 없어서 루나가 대답했다.
“먹을 게 없어서 쫓겨 난거죠. 저들에게는 어떤 땅이냐 보다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 유무가 더 중요했을 거예요.”
아비투스가 혀를 내둘렀다.
“자연에서 먹을 거를 찾는 대신 국경을 넘어가는 인간들을 노리는 건가. 살아 있어봐야 생태계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니 이 기회에 씨가 말랐으면 좋겠군요.”
루나는 계속 말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인류는 괴물들에게 제대로 맞서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 황무지 개척 50년 만에 이젠 괴물들이 굶어죽을 지경이 됐군요.”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시대가 변했죠.”
“네. 모든 것이 변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아비투스가 중얼거렸다.
“사람만 빼고.”
하딘과 카르델에게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 상황이 계속되자 세 사람은 자리에 편히 앉아서 각자의 무기를 끌어안았다. 태양은 여명에서 완전한 아침으로 변했다.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비투스가 문득 피카니의 자동권총을 보고 물었다.
“전부터 신경 쓰인 건데 그 권총은 누가 만든 겁니까?”
“모세스 브라우닝이 수작업으로 만든 시제품입니다. 모델 이름은 콜트 거버먼트. 소도 한 방에 죽일 정도로 강력하지만 전용 탄환을 쓰기 때문에 저도 황무지에서 쓸 물건을 따로 구해둬야겠군요.”
“언젠가 우리들도 제식 무기로 보급 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여담으로 수도에서 그 사람 작업실을 자주 들르는데 혼자서 들고 쏘는 기관총의 시제품까지 있더군요.”
루나는 그 말을 듣고 상식이 뒤바뀌는 감각을 느꼈다.
“그건... 너무 과하지 않나요?”
“그 양반 왈. 자기 설계를 따라서 양산하기에는 인류의 기술력이 10년은 이르다고 하네요.”
“언젠가 서로 그런 무기를 들고 싸우게 될 날이 걱정되네요.”
하딘이 손을 들고 카르델에게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뒤에 있던 세 사람은 앞쪽으로 기어가서 언덕 아래 저편을 살펴보았다. 피카니는 접이식 망원경을 꺼냈다. 저 멀리 바글거리는 난쟁이만한 파충류들이 두발로 걸어 다녔다. 모습을 동물에 빗대서 설명하면 두발로 걸어 다니는 거대한 카멜레온에 가까웠다. 의래 맹수들이 무기로 삼는 날카로운 손톱이나 뿔, 이빨 같은 건 없었으나 문제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먹물이 종이를 적시듯 땅 아래에서 기어 나온 도마뱀이 땅의 빈 공간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이미 천은 족히 넘었다.
루나가 뜨악하고 입을 벌렸다.
“포격 한 번으로 쫓아낼 수 있을까요?”
아비투스도 표정이 딱딱해져있었다.
“우두머리가 포탄에 휘말려주기를 바랄 수밖에요.”
하딘과 카르델은 서로 상의해가며 괴물들의 이동 경로와 좌표를 계산했다. 카르델이 새장에서 비둘기를 꺼내자 하딘이 포탄이 떨어질 장소를 적은 쪽지를 비둘기의 발에 달린 구리캡슐에 집어넣었다. 자유로워진 비둘기는 깃털을 몇 가닥 떨어트리며 높이 날아갔다. 평화의 상징이 폭탄을 불러온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단테의 마차는 마을을 빠져나왔다. 샤카자이아는 아자리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누워서 안정을 취했다. 켈커트리의 지팡이는 쥐고 있는 사람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 원래 신진대사와 생명력이 강한 종족이라 지팡이의 도움을 받으니 마법 없이도 상처는 제법 빨리 낫고 있었다. 하지만 회복을 체력과 맞바꿔야만 했기에 샤카자이아는 의식이 몽롱한 상태다.
아자리는 히콕이 만들었던 괴물 퇴치 재료가 담긴 항아리를 보고 있었다. 안에는 고약이 반쯤 굳어서 딱딱하게 변한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이걸 숯과 함께 향로에 넣고 피우면 된다. 물론 향로도 히콕의 집에서 따로 가져왔다.
레스는 아까 탐정들에게서 압수했던 총과 탄환들을 모두 확인해보고 혀를 찼다.
“모두 22구경이야. 내 권총에 쓸 물건은 하나도 없어.”
“큰일이네요. 지금 제대로 싸울 사람이라고는 당신뿐인데.”
“그 괴물 퇴치 도구가 제 역할을 해주길 바라야지.”
다들 낙관적인 상상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느긋하게 잡담을 나눌 기분도 아니었다. 마차를 몰고 있는 단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가만히 눈을 붙였다. 걱정에 시달리는 대신 졸음으로 달아날 수 있을 만큼 몸이 피곤해서 다행이었다.
도중에 단테는 저 멀리 흰 비둘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았다. 이 근방에서는 비둘기가 살지 않아서 그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일행들의 잠을 깨우지는 않았다. 신경 쓸 거리는 이미 차고 넘쳐서 거기에 뭔가를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중에 일어날 재앙의 시발점이 될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