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2권] 42회 - 국경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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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을 날던 비둘기는 자신의 둥지로 돌아왔다. 전서구를 담당하는 국경수비대 병사가 비둘기의 발에 달린 캡슐에서 쪽지를 꺼냈다. 쪽지는 전령에게 맡겨져 몇 분 만에 포병대로 전해졌다. 기다리는 동안 대포하고 포탄만 죽어라 닦고 있던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쪽지를 직접 전달받은 이등병은 포병대 장교에게 달려갔다.
“좌표가 왔습니다 장군님!”
“좋았어.”
장교는 이등병에게 따라오라 손짓하고는 근처에 있는 곡사포로 갔다. 옆에는 사람 머리통만한 155mm 포탄이 쌓여있었다. 그 곡사포 옆으로 10정의 곡사포가 줄줄이 거인병사처럼 늘어서 있었다.
“보이나 이등병? 이거 한 발이면 용도 푸딩이 된다. 오늘은 직접 좌표를 외쳐보도록.”
“네! O U P J 7556!”
대포마다 붙어있는 부사관들이 좌표를 듣고 포격 거리를 계산했다. 병사들이 손잡이를 돌려서 포문의 각도를 조정하고 저울로 넣어야할 장약을 쟀다. 풍향계를 보고 있는 사람은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이등병이 들고 있는 쪽지는 2장이었다. 그는 좌표를 외치고 나서 다른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왜 그러나?”
“그게... 이건 장군님에게 전하는 사적인 내용 같습니다.”
“그럼 더더욱 다른 사람 입으로 들어야지. 괜찮으니까 말해봐.”
“이번에는 제대로 쏴라 얼간아. 헨리가 위로를 담아서.”
장교는 빙긋 웃고는 이등병의 어깨를 격려를 담아 툭툭 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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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왔다. 레스 일행이 타고 있는 마차는 괴물들이 점령한 곳에 도착했다. 넓기만 하고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붉고 메마른 땅만 천지였다. 바람에 깎여 나간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지도 그릴 때 구역나누기 편하게 해주겠다는 양 여기저기 서있었다. 그들 왼쪽으로는 작은 언덕과 협곡이 합쳐진 고지대가 있었는데 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그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피카니 일행들에게는 레스 일행이 보이지가 않았다.
단테는 마차를 멈추고 괴물들의 압도적인 규모에 말을 잃었다. 짐칸에 있던 사람들은 마부석으로 가서 앞을 보았다. 샤카자이아도 어떻게든 의식을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물들과 그들은 1km가량 떨어져 있었으나 저들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 위해 망원경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우글거린다는 표현보다는 생물로 이루어진 바다라고 비유하는 게 적확했다.
시력 좋은 레스가 그렉커들을 한 번 관찰하고는 말했다.
“저놈들 선인장까지 씹어 먹고 있어.”
단테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목덜미를 긁었다.
“뭐든 먹어요. 심지어 흙까지 삼켜서 양분을 섭취하죠. 지렁이처럼.”
“와, 신기하네.”
남자들은 쓸모없는 소리만 해댔지만 샤카자이아는 현실을 직시했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지만 저기 중간에 갇히면 끝장이야.”
아자리는 평소에 하지도 않던 성호까지 긋고 향로에 숯 덩어리와 재료를 넣었다. 레스는 향로와 성냥을 챙기고 심호흡을 했다.
“가보실까. 내 매력이 저놈들한테 통하기를 빌어줘.”
“방금 그 말은 제 여행기에 꼭 적어드리죠.”
아자리의 친절한 배웅을 뒤로 하고 레스는 마차에서 나와 용감히 앞으로 나아갔다. 일단 권총하고 소총으로 무장은 하고 있었지만 저만한 숫자를 상대로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몰랐다. 중간쯤 나아가자 레스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려고 중얼거렸다.
“수가 적으면 괴물들이 무시한다고? 그럼 그렇지.”
괴물들이 레스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전부 직립부동 자세로 고개를 이쪽으로 향했다. 괴물들의 눈은 희뿌옜고 귓가까지 찢어진 주둥이 사이로 생선 이빨 같은 조그마한 치아가 번들거렸다.
사실 히콕이 말하고자 했던 건 소규모의 인원이 먼 곳을 지나갈 때는 괴물들이 몰려오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금처럼 대놓고 당당하게 다가가도 사람 수만 적으면 저들이 무시해줄 거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튼 지금 레스 일행에게는 소용없는 정보였다.
레스는 향로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숯에 성냥불을 붙였다. 연기가 제대로 퍼지기도 전에 바로 앞에 있던 놈들은 괴성을 질러대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향을 더 멀리 보낼 겸 그가 향로를 최대한 높이 쳐들고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니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괴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생각 이상으로 잘 먹히는데?”
일행들은 괴물 퇴치 도구의 효과를 확인하고 다시 마차를 출발 시켰다. 레스는 계속 앞장서서 괴물들을 계속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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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저놈들 상태가 이상한데요?”
망을 보고 있던 아비투스가 그렇게 말하자 일행들이 주목했다. 카르델은 반 조각 밖에 안 되는 샌드위치를 최대한 시간 들여서 깨작거렸고 하딘과 루나는 누워서 쉬고 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망을 봤던 피카니가 아비투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왜 저러는 거지?”
수많은 괴물들이 한꺼번에 뒤엉켜대면서 이리저리 복작이는 통에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먼지폭풍으로 덮여있었다. 맨눈으로는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피카니는 망원경으로 가장 시끄러운 곳을 살폈다. 그는 거기서 먼지들의 장막 너머로 마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마차잖아.”
뒤에 세 사람은 괴물들이 일으키는 소동에 아무 관심이 없었으나 그 말을 듣자 누웠던 사람들은 서둘러서 일어났고 카르델은 사례 들릴 뻔했다. 하딘 대위가 피카니에게 물었다.
“어떤 마차지?”
“말 두 마리가 끌고 있는 평범한 마차. 워낙 흔한 물건이라 그놈들인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먼지 때문에 누가 몰고 있는지 제대로 안 보여요.”
“카르델. 위치로.”
지시를 받은 카르델은 남은 샌드위치를 입안에 쑤셔 넣고 다시 저격총과 한 몸이 되었다. 루나는 망원경이 없어서 손차양을 하고 보았지만 도움은 안 됐다. 그녀가 말했다.
“곧 있으면 폭탄이 날아올 텐데 경고해줘야죠.”
당연한 소리지만 남자들은 다들 마음이 유보적이었다. 그들이 달려가서 어서 돌아오라 경고해줄 수도 없었고 여기서 소리를 질러봐야 저기까지 닿지도 않았다. 총을 쏴서 경고를 해주면 괴물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게 된다. 무엇보다 제 발로 괴물들한테 달려가는 정신 나간 놈을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구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아비투스가 총대를 메었다.
“폭탄 이전에 괴물들한테 당하겠죠. 우리가 해줄 게 없어요.”
바람이 강해지자 먼지가 걷혔고 피카니와 카르델이 사이좋게 경악했다. 마차 앞에서 살짝 거리를 두고 향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레스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보였다. 피카니가 소리쳤다.
“놈들이야!”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 설마 싶어서 속으로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각자 입에서 탄식과 절규가 튀어나왔다. 카르델은 저격총에서 눈을 때고 다급하게 말했다.
“두목. 우리가 전서구를 날린 지 얼마나 지났죠.”
하딘은 시계를 보고 말하면서 현기증을 견디느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20분. 비둘기가 길을 제대로 찾아갔다면 지금쯤 도착했을 거다.”
“그럼 10분 안에 측량을 마치고 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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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거친데다 괴물들이 굴을 이리저리 파놓는 바람에 승객들은 최악의 승차감에 시달렸다. 덕분에 샤카자이아는 난생 처음 멀미를 경험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려... 나 병 걸린 거야?”
“걱정마요 언니. 정상이니까.”
아자리도 같은 고통에 시달리느라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마차 바퀴는 듣기 불쾌한 소음을 끝없이 내고 있었지만 다행히 망가질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차가 간신히 입자가 고운 흙 위를 지나가고 나서야 여자들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레스는 향로의 내용물을 새로 채우고 마차에 매달았다. 단테는 말들에게 빨리 달리라 재촉했다. 주변 어디를 봐도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으니 어디까지 왔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체감으로는 3할 가량 지나간 것 같았다.
짐칸으로 돌아오자마자 레스는 겨우 안심하고 벌러덩 누워서 가픈 숨을 내쉬었다.
“아자리.”
“왜요.”
“다음에는 너가 해!”
“싫어.”
“농담이야. 여하튼 잘 풀려서 다행이다. 국경 한 번 넘기 더럽게 힘드네.”
“까놓고 말해서 우리 가족이 암살자들을 만났던 순간들보다 지난 며칠 동안 당신하고 겪은 일들이 더 힘들었어요.”
“은근슬쩍 내 탓으로 돌리지 마라.”
“농담이에요. 사실이지만.”
레스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피카니랑 녀석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놈들도 발이 묶였겠죠 뭐. 어디 이상한 일에 휘말려줬으면 좋겠네요.”
마차 승객들은 화목하게 수다를 떨었다. 샤카자이아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자리는 고향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그녀는 시간을 들여서 기억을 더듬고 말했다.
“배를 탔어요. 셀라렐 제국의 크림 항구에서 출발했고 황무지 중간쯤에 멈췄죠. 그 뒤로는 중립 지역을 전전했는데 결국 자객들에게 꼬리가 잡혀버렸어요.”
샤카자이아는 아자리의 아픈 기억을 건드려서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하다. 괜히 질문했군.”
아자리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할 이야기인걸요. 저는 수행원도 없이 홀로 배낭 하나만 갖고 달아나서 어떻게든 제국에 닿았죠. 역마차 몇 대만 갈아탔을 뿐이니까 모험 따위는 없었어요. 제국에게 신분을 밝히고 정식으로 망명 절차를 밟으려 했지만 무시당했고요.”
“그대로 2년 동안 난민촌에서 생활한 거야?”
레스의 말을 듣고 아자리는 한쪽 눈썹을 짓궂게 치켜 올렸다.
“가끔 구호물자를 받으러 정부 청사로 갈 때마다 사람들이 공주님이라고 불러주기는 했죠.”
“대충 알만하다.”
그는 한 호흡 뜸을 들이고 질문을 바꿨다.
“그런데 네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보다 먼저 계승을 받을 거 아냐. 왜 네가 차기 마왕이 되는 거지?”
“예전에 아버지는 권력과 계승을 포기하는 대가로 정해진 배우자를 거절하고 우리 엄마하고 결혼했어요. 그때 성씨까지 어머니의 것으로 바꿔버렸죠. 만일 그때 다른 선택을 하셨다면 제 이름은 아자리아 비온 블라디아가 됐을 거예요.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겠지만.”
“그러니까 아버님은 아예 호적에서 파인거구만?”
“그래도 저는 마왕의 조카에요. 티끌만한 정통성이지만 다른 후보자가 없다면 억지로 옥좌에 앉힐 명분은 되죠.”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난장판이구나.”
“아버지도 그쪽 동네 이야기만 나오면... 잠깐만 누가 나한테 염화를 보내고 있는데요?”
갑자기 아자리가 말하는 도중에 돌변해서 고개를 쳐들고 마차 뒤쪽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철렁였다.
“아자리? 괜찮은가? 피곤하면 무릎베개 해주겠다.”
“집중해야하니까 잠깐 말 걸지 말아줘요.”
아자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하고 지팡이를 손에 쥔 다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옷 안에서 수첩이 자기 마음대로 소리 없이 나오고는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공중에 떠있는 수첩이 스스로 펼쳐졌을 때는 이제 와서 놀랄 것도 없었지만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닌지라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긴장하고 침을 삼켰다. 수첩 위로 하늘에 보이는 별만큼 조그마한 불꽃이 수십 개나 생겼다가 바로 터지자 종이 위로 글자 모양의 그을음이 나타났다. 아자리는 감았던 눈을 뜨고 허공에 떠있는 수첩을 낚아채고 글자를 읽었다.
“약 6분 안에 그곳으로 포격이 떨어질 테니 어서 왔던 길로 돌아가세요. 비상사태입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포격이 온다는 소리에 레스와 샤카자이아의 표정이 얼어버렸다. 아자리는 들고 있는 수첩을 향해 불신과 경멸이 담긴 시선을 보내다가 검지 손톱으로 종이를 긁어서 글자를 쓰고 조곤조곤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일행들을 위해 설명했다.
“방금 건 누군가가 저한테 마법으로 전보를 보낸 거예요. 참고로 약속 없이 다짜고짜 염화를 보내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에요.”
레스가 아자리의 수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근처에 마법사가 있다는 거잖아.”
“누군지는 알아요. 그 파란머리 기억하죠?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지만 괴물들 때문에 쫓아오지 못하는 거겠죠.”
샤카자이아의 얼굴은 점점 불안으로 물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포격이 오고 있다면 큰일 아닌가?”
아자리는 콧방귀를 꼈다.
“아무리 우리들 재수가 옴 붙었어도 하필 지금 포격이라니 그게 말이 돼요?”
같은 시각 언덕 저편에서 계속 상황을 보고 있던 피카니 일행에게 아자리의 답장이 도착했다. 루나가 지팡이를 땅에 꽂자 흙 위로 작은 돌멩이들이 움직여서 글자모양으로 변했다.
[시도는 좋았어]
공용어로 그리 적혀있었다. 그걸 본 피카니는 체념하고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체는 건질 수 있어야 할 텐데.”
다른 사람들도 피카니하고 표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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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포병이 줄을 잡아당기자 곡사포들의 주둥이에서 하늘을 향해 포탄과 함께 대량의 가스가 뿜어져 나오고 땅으로 전해진 충격파는 주변의 흙을 갈아버렸다. 11문의 곡사포가 골고루 한발씩 쏘자 포병들은 충격으로 틀어진 포문의 각도를 바람에 맞춰서 조정했다.
장군은 귀마개를 벗고 사방에 자욱한 작약의 향기와 아직도 몸에 남아있는 충격파의 전율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그의 옆에 서있는 이등병은 귀마개를 썼는데도 고막이 터진 기분이어서 새끼손가락을 귀에 집어넣었다. 장군은 주위 상황은 아랑곳 않고 혼잣말을 했다.
“155mm가 발사될 때 대포 옆에 있으면 살아있다는 게 뭔지 알 수 있다네. 세포 단위로 섹스를 하는 기분이지.”
고향을 떠난 포탄들은 이미 시야 저편으로 날아가서 구름을 찢어버리고 있었다. 그들의 생애는 대략 20초로 추정되었다. 그 뒤로는 태어난 목적을 이루고 진정한 존재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