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2권] 43회 - 두 운명 사이에서
포탄보다 대포를 쏜 포성이 먼저 도착했다. 피카니 일행에게는 그 소리가 일종의 선고였으나 레스와 아자리, 단테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유일하게 샤카자이아만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얼굴표정이 가라앉았다. 단테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마차를 더 빨리 몰았다. 포탄의 위치가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제 날아가는 방향이 아래로 바뀌자 중력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귀가 밝지 않더라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에게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햇볕을 쬐던 괴물들이 본능적으로 무작정 뛰었다. 레스 일행 뒤쪽의 지평선과 하늘 사이로 검은색 점이 찍히더니 찰나의 순간에 착탄이 일어났다.
이리저리 서로 엉기고 짓밟느라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괴물들은 우레와 같은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하늘에 닿을 기세로 유기질과 무기질로 이루어진 파편들이 솟구쳤고 방사형으로 퍼져나간 돌 부스러기들이 날아가면서 중간에 서로 부딪쳐대자 신경질적인 마찰음이 났다. 마치 철사 줄 끊어지는 소리 같았다. 심장을 쥐어짜는 잔향은 메아리가 되어 평원을 꽉 채웠고 뒤늦게 전해진 충격으로 위태로이 서있던 기암괴석 몇 개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는 흙먼지로 기둥을 세웠다. 고작 한 발 떨어졌을 뿐인데도 터지는 소리가 너무 강력해서 귀로 들어온 음파가 아직도 몸속을 휘저어댔다. 충격은 피카니 일행과 레스 일행을 가리지 않았다. 루나는 멀리서 보고 있을 뿐인데도 그 광경이 너무 끔찍해서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흘렸다.
천만 다행으로 포탄은 레스 일행의 마차로부터 한참 뒤쪽에 떨어졌다. 하지만 저 멀리 검은색 점들이 악마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연달아 나타났다. 짐칸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반쯤 귀머거리가 된 탓에 태어나면서 내본 것 중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달려! 그냥 무조건 달려! 어서 달려! 이런 망할! 어떻게 이럴 수가! 서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착탄, 그리고 또 다시 착탄. 고폭탄이 곳곳에 차례대로 떨어졌다. 155mm 포탄의 살상반경은 약 40m에 이른다. 사방에서 일어난 충격파가 땅을 타고 일행들을 지나갈 때마다 누군가가 땅 밑에서 마차를 걷어찬 것처럼 모두 몸이 들썩거렸다. 괴물들은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도 재앙이 일으키는 초월적인 공포로 실신하거나 광란에 젖은 움직임만 보이는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샤카자이아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아자리를 감싸 안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좁쌀만 한 알갱이부터 주먹만 한 자갈에 이르기까지 온갖 파편이 짐칸의 천막을 뚫어대며 날아왔다.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도 이성을 잃어버리기 직전이었으나 주인과의 오랜 유대와 생존 본능이 합쳐져서 계속 통제에 따라주는 기적을 일으켰다.
레스는 광기에 가까운 집중력으로 귓가에 맴도는 이명과 머릿속을 휘젓는 뇌진탕을 견뎌내며 소총을 들고 바깥을 살폈다. 매달아둔 괴물 퇴치용 향로는 용케 끊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미쳐버린 놈에게는 효과가 없었는지 발광한 괴물 몇 마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포격을 견뎌내느라 1분 가까이 참았던 숨을 다시 쉬면서 레스는 마차에 매달리려는 괴물을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휘둘러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놈은 쏴버렸다. 50구경 탄환의 우렁찬 소리 따위 지금은 자장가나 마찬가지다. 그는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손가락에 화상을 입어가며 탄피를 꺼내고 다른 탄환을 집어넣었다.
유난히 불길한 각도를 그리며 날아오는 포탄이 있어서 레스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단테! 오른쪽으로 가! 네가 보는 방향으로 오른쪽!”
여태껏 떨어진 것 중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로 포탄이 떨어지자 그들 머리 위로 흙과 모래가 비처럼 쏟아졌다. 조치가 10초만이라도 늦었다면 꼼짝 없이 살상반경에 들어갔을 것이다. 온 사방이 흙과 먼지, 그리고 폭약 연기와 육편이다. 그 와중에도 레스는 아수라장 너머를 뚫어보며 표적을 찾아다녔다. 또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기에 쏴버렸다.
‘다행히 이 총은 내 영점하고 일치하는구나.’
그런 잡념이 드는 바람에 레스는 다른 포탄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유난히 커다란 휘파람 소리가 들려서 단테는 반사적으로 말들을 멈춰 세우고 방향을 틀었다. 다음 순간 그들에게 보이는 거라고는 암흑 밖에 없었다.
◆
11발의 포탄이 모두 떨어지고 난 후로 괴물들 중에 200마리는 직접적으로 파괴당했고 거의 죽어가는 놈은 죽은 놈의 배 이상이었다. 레인저들은 전쟁터를 몇 번이고 겪어왔으나 이 참혹한 광경과 끔찍한 현장을 보고는 다들 속이 불편해졌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레스 일행은 뭉개진 덩어리로만 보였다. 루나는 주저앉아서 망연자실하고 굳어 있다가 폭탄 터지는 소리가 멎고 나서야 입을 움직였다.
“우리가 죽였어요.”
남자들 모두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카르델은 포격이 완전히 멈췄음을 확인하고 다시 저격총의 조준경에 눈을 대었다. 광야에 있던 먼지란 먼지는 모조리 공중으로 떠올랐지만 치솟은 속도만큼 정리되는 시간도 빨랐다. 카르델은 포탄 구덩이들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레스 일행의 모습을 계속 찾아다녔다.
카르델이 본 것을 말했다.
“포탄이 놈들 앞에 떨어졌어. 반쯤 생매장 당했군.”
피카니가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정말로 너는 이런 곳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나?’
마음 한구석이 뭉텅이로 도려 나갔다. 자신의 최대 숙적이 사라졌다는 안도감이자 칠흑 같은 죄책감이었다. 허무함이 너무 커서 감정이 물리적 반응으로 이어지질 않았다. 다들 막중한 임무를 절반이나마 성공시켰다는 해방감과 상대를 너무 참혹하게 죽였다는 죄책감이 섞였다.
카르델은 홀로 침착하게 자기가 본 것을 계속 보고했다.
“말들이 아직 숨을 쉬고 있어. 생체기가 좀 났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야.”
가라앉았던 분위기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아비투스가 안도하는 말투를 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가 있는 바위 지대로부터 저쪽으로 갈수록 사막화가 심해지는 게 보이지? 저놈들 주위는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밭이야. 포병대가 쏜 게 유산탄이었으면 알짤 없었겠지만 다행히 고폭탄이라서 충격파와 흙덩어리를 뒤집어쓰는 걸로 끝났어.”
하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운 한 번 더럽게 좋군.”
“마차를 모는 사람이 잘 판단했어요.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면 폭발에 휘말리거나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간 굵은 파편에 맞았을 겁니다.”
◆
레스 일행의 마차는 천막이 걸레짝으로 변해서 반쯤 날아갔고 말들은 기절해서 앞으로 고꾸라진 채 꿈쩍도 안 했으나 일단 제 형체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정신이 들은 일행들은 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했다. 단테는 경기를 일으키면서 뒤집어썼던 모래를 흩뿌렸다.
“악! 으학! 으헉! 어? 우리 살아있었네?”
레스와 샤카자이아도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레스가 바닥에 엎어져있는 아자리의 몸을 일으키고 흔들면서 외쳤다.
“일어나! 죽으면 안 돼!”
“나 안 죽었어...”
레스는 흥분해서 속사포처럼 물었다.
“너였지? 마법으로 뭔가 한 거지? 어떻게? 마법을 쓰려면 며칠은 더 쉬어야 한다면서?”
“나 마법 안 썼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방금 지팡이가 썼죠.”
그녀는 남아있는 체력이 바닥났는지 목조차 제대로 가누질 못하고 레스가 붙잡고 있는 대로 머리를 덜렁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켈커트리 씨가 충격을 좀 막아줬어요. 대신 거기에 필요한 마력은 내 몸에서 뜯어져 나왔지만... 팔에서 힘 빼 이놈아 머리가 흔들려서 어지럽잖아.”
그 말을 듣고서야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그들 머리 위에서 지팡이가 빛을 내면서 허공에 떠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다시 아자리를 바라보았다.
“넌 괜찮은 거야?”
아자리는 혀하고 입만 간신히 움직이느라 아기옹알이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아니,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겠어.”
샤카자이아가 다가와서 레스 대신 아자리를 안아들었다.
“마차 바퀴가 땅에 박혔어. 바깥으로 나가서 꺼내야 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앞쪽을 향해 외쳤다.
“단테! 살아있지?”
이제 와서 자신을 신경 쓰냐는 표정을 지으며 단테가 대답했다. 그는 한참 전부터 짐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살아있는 거 같습니다.”
“말들을 깨워! 향로가 사라져서 여기 더 있으면 끝장이야!”
“빌어먹을 이게 뭔 꼴이야!”
투덜거리면서도 단테는 마부석에서 내리고 말들에게 달려갔다. 레스는 권총과 소총을 갖고 짐칸에서 나왔고 샤카자이아는 아자리를 눕힌 다음 머리맡에 베개로 쓸 만한 걸 넣어주고 그를 따라갔다. 샤카자이아는 아직도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했으나 지금은 레스도 그녀를 걱정해줄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등을 마차 짐칸에 붙이고 자세를 잡았다.
“하나, 둘, 셋! 아아아아아아아아악!”
“흐아아앗!”
다리와 등으로 땅바닥과 마차에 힘을 가하자 바로 반응이 왔다. 절반 이상은 샤카자이아의 공이었다. 샤카자이아가 진땀을 흘리면서 버티는 동안 레스가 박혀 있는 바퀴의 살을 붙잡고 들어 올리자 마차의 바퀴가 골에서 빠져나왔다. 샤카자이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마차에 몸을 기대고 주르륵 쓰러졌다.
“단테! 말들은 상태가 어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과 마차를 포기하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샤카자이아는 만신창이였고 아자리는 자기 발로 설 수도 없었다. 레스하고 단테만으로 짐과 여자 둘을 부담하면서 국경을 뚫기란 가망이 없었다. 레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탄약을 다시 세었다. 권총탄 6발, 소총탄도 6발 남았다.
하늘에 떠있던 지팡이는 동력이 다했는지 툭하고 마차 짐칸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아자리한테 맞지는 않았다. 레스는 터번과 망토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거칠게 털어내고 곧 일어날 싸움에 대비하여 심호흡을 했다. 샤카자이아가 덜덜 떨면서도 자신의 활과 손도끼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레스가 소리쳤다.
“지금은 쉬어! 내가 쓰러지면 싸워!”
숨 돌릴 틈도 없이 괴물 한 마리가 이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레스는 큰 칼을 꺼내서 괴물을 위협했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녀석한테 그딴 행동은 아무 의미 없었다. 총 말고 다른 무기는 자신 없었지만 그는 가능한 총알을 아끼고 싶었다.
느닷없이 아득한 곳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몇 초 후에 괴물의 머리가 터졌다. 들려온 방향에는 렌즈 반사광으로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섬광이 고지대에서 반짝거렸다.
“그래. 거기서 우리를 보고 있었구먼.”
총알이 도달한 시간을 보건데 거리가 700m나 됐는데도 사수는 이 조그마한 목표물을 단번에 맞힌 것이다. 조준경이 달린 고성능 소총을 썼다고는 해도 레스는 상대의 솜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샤카자이아와 레스가 숨을 돌리는 동안 괴물이 다가오면 저격수가 매번 도와줬다. 저격에 맞고 죽은 괴물이 4마리가 되어갈 때 단테가 소리쳤다.
“됐어! 애들이 정신을 차렸어!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살았다고!”
또 다른 포성이 하늘과 땅에 울려 퍼졌다.
레스 일행은 물론 피카니 일행조차 절망으로 굳어버렸다. 하딘이 착잡한 얼굴로, 하지만 냉정하게 정황을 설명했다.
“이번에도 똑같이 11발을 쏠 거다. 평원에 포탄이 안 닿는 곳이 없도록 골고루 쏘려면 20발은 쏴야하니까.”
카르델은 손을 놓고 진한 한숨을 내뱉었다.
“끝이군.”
운이 좋다면 무사할지도 모른다. 11발 모두 빗겨 맞는다면 말이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기왕 도와주기로 했으니 카르델은 자신의 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총을 붙잡았다.
한편 레스의 세상과 시간은 몇 십 배로 느려져 있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생사의 기로를 앞에 두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감각이다. 레스에게는 친숙했다.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바람이 입맞춤했고 피멍이 난 몸은 영혼에게 어서 포기하라고 말을 걸었다. 샤카자이아는 짐칸으로 돌아가서 레스에게 따라오라고 재촉했다. 마지못해서 그녀를 따라 짐칸에 올라타는 과정까지도 그에게는 모든 것이 느려져 있었다.
단테는 말들에게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애원했다. 샤카자이아는 아자리를 껴안고 어떻게든 안심시키려 하고 있다. 괴물들의 몸속에서 쏟아져 나온 오물의 악취와 폭약 냄새가 뒤섞여서 콧속에 꼬챙이가 들어간 느낌이다. 여러모로 이 땅은 죽음의 세계로 맞닿아가고 있었다.
상처투성이 동료들, 저항이 불가능한 예정된 죽음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포기하면 어찌 되는지 레스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신과 운에게 자신들을 맡기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전사는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싸움만 하지 않는다. 그가 소총을 손에 쥐고 망토를 뒤로 넘겼을 때 레스의 얼굴에는 인간의 감정이 사라져있었다.
지금은 저 소름끼치는 포탄 날아오는 소리가 요정의 노래 같다.
물론 그는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은 바라보면 그뿐.
원래 세상으로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레스가 말했다.
“여기는 너무 흔들려서 안 돼.”
샤카자이아는 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레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쪽 발을 짐칸 바깥에 걸쳤다. 그 모습을 보고 아자리가 솜털처럼 여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슨 짓이에요?”
“너희들은 계속 달려.”
그는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조준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카르델이 신음 소리를 냈다.
“무슨 짓이야? 왜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거야?”
기껏 살아나려던 희망이 꺾여서 다들 얼굴을 감싸 쥐고 묵묵히 소동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피카니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뛰어내렸다고요? 레스가?”
카르델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저런 미친놈이.”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고 카르델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저 자식 하늘을 겨누고 있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죽음이 엄숙해올 때 다른 이들은 본능에 굴복하고 달아나거나 눈을 피한다. 하지만 긍지 높은 총잡이는 그 두려움을 향해 조준한다.
단지 포탄이 있었다. 현대의 곡사포로 쏘아 보내는 포탄은 음속을 뛰어넘는 속도로 날아가 목표물에 맞을 때까지도 음속 아래로 내려가지 않지만 20세기 초에는 기술의 정밀함이 모자라서 날아가는 도중에 운동량이 소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포탄이 있었다. 11문의 대포가 차례대로 쏘아 보낸 11발의 저승사자가 초속 200M로 날아오고 있다. 괴물들은 다시 달아나거나 체념하고 주저앉았다. 레스의 귀에는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고 갈라지는 소리까지 생생했다.
그는 단발 소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와 쇄골 사이에 쑤셔놓고 총구를 위로 쳐들었다. 오른손은 방아쇠와 손잡이에, 손 떨림이 전해지지 않도록 왼손은 활짝 펼쳐서 총을 쥐지 않고 받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오른쪽 다리는 책상다리 하듯 몸 쪽으로 접었고 왼쪽 다리는 발끝을 땅에 세워서 무릎을 왼쪽 팔꿈치에 대어 떨림을 안정시켰다.
레스는 호흡이라는 개념을 잊어버렸다. 영혼의 힘으로 흥분이 가라앉자 심장은 아까까지 왜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맥박을 쳤는지 영문을 몰랐다. 죽은 자의 손에 들린 총은 조각상에 붙은 듯 미동하지 않고 자신의 조준선에 목표물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단지 포탄이 있었다. 40kg에 달하는 쇳덩어리의 표면에는 방금 곡사포의 강선에 깎여나간 앳된 훈장이 있었다. 회전력과 중력이 겹치자 가속도가 붙은 포탄의 머리 앞에서 압축된 기체 덩어리가 렌즈처럼 빛을 굴절시켜 이쪽을 향해 이상반사를 일으킨다. 각도가 불길했다. 레스의 눈에 보이는 포탄은 점에서 선으로 변하지 않고 여전히 점이었다. 이대로 가면 그를 향해 정통으로 착탄하고 만다. 레스는 방아쇠를 당기면서 생각했다. 맞히기 쉽게 와주셨군.
단지 빛이 있었노라.
상공 200m에서 난데없는 태양의 모사품이 나타나더니 귀머거리까지 들을 수 있을만한 천둥소리가 지천을 흔들었다. 충격파가 만들어낸 인조 폭풍이 레스를 뒤로 밀어서 쓰러트렸고 일그러진 대기 환경이 뒤이어 따라오는 포탄들의 궤도까지 망가트렸다.
그는 일어나서 미친 듯이 펄럭거리는 터번과 망토는 아랑곳 않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 뒤로 다가오는 포탄 몇 개는 떨어져도 상관없는 방향으로 날아갔기에 무시하고 필요한 놈만 노렸다.
다시 방아쇠를 당기자 오로지 빛과 어둠만이 존재하던 태초의 약동처럼 창공에 붉은 화염과 검은색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폭풍이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갈 곳이 없어서 허공을 떠도는 파괴력들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변하여 뒤이어 날아오는 포탄들을 굴복시켰다. 원래라면 레스와 일행들을 덮쳤을 죽음의 소나기는 그의 눈앞에서 모조리 추락했다.
마지막 포탄은 뜸을 들이고 발포되었기에 홀로 쓸쓸이 온전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왔다. 레스가 세 번째로 포탄을 맞추자 마침 장소가 가까웠던 피카니 일행이 애꿎은 봉변을 당했다. 공중 폭발로 인해 손실 없이 사방으로 퍼져나간 충격파와 폭풍을 견디느라 그들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귀를 막고 땅에 엎드렸다.
이론상으로 포탄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최고의 사수들은 방금 것보다 더 높은 곳을 날아다니는 더 조그마한 표적도 얼마든지 잡아왔었다. 차이점이라면 이쪽은 빗맞히면 완벽한 파멸이 보장된다는 것과 표적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사수를 향해 날아온다는 점이겠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레스는 땅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50구경 탄피 3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숨을 쉬었다. 광야는 끝없는 굉음과 폭발에 시달리느라 땅에 나뒹구는 메아리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는 듯 했다. 그가 서있는 장소를 기준으로 저 앞의 땅들은 지형이 변해버려서 광야가 둘로 쪼개져버렸다. 검은색 연기가 너무 많이 피어올라 하늘의 하얀 구름 아래로 검은 구름이 생겼고 그 사이로 완전히 떠오른 아침 햇살이 빛의 장막을 뿌렸다. 레스는 연이은 충격과 자극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몸이 온전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과하게 집중한 반작용으로 레스의 혼잣말에는 얼이 빠져 있었다.
“어떻게든 됐네... 그런데 마차로는 어떻게 돌아간다?”
마차는 이미 저 멀리로 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