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2권] 44회 - 어머니의 칼날
마차 안에서 샤카자이아가 단테에게 달려가서 소리쳤다.
“그만 멈춰! 이제 폭탄은 안 와! 레스가 뒤에 있어!”
“말들이 흥분해서 못 멈춰요!”
이 지옥도에서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려는 일념으로 말들이 죽을힘을 다해 뛰느라 통제가 힘들었다. 일단 단테는 속도라도 늦춰보자 고삐에 힘을 줬고 샤카자이아는 짐칸으로 돌아가서 레스가 있는 쪽을 봤다.
“아까 한 말 취소! 나 좀 주워가!”
아까 소총을 들고 있었을 때의 처연한 모습은 뭐였냐는 듯 레스는 처량한 꼬락서니가 되어있었다. 그의 뒤로 괴물들까지 무리지어 따라오는 중이다. 기묘한 광경이라 샤카자이아는 직접 보면서도 현실감이 안 느껴졌다.
“샤키! 샤키이이이!”
레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샤카자이아는 활을 들었다. 샤카자이아의 실력이라면 알고 있지만 자신을 향해 활이 겨눠지니 레스는 소름이 돋았다. 괴물 한 마리가 그의 망토 죽지를 잡아 뜯기 직전에 화살이 표적의 미간을 꿰뚫었다. 덕분에 살긴 했지만 그가 옆으로 한발자국만 움직였다면 괴물 대신에 맞았을 거다. 샤카자이아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이 너무 나빠서 어쩔 수 없었다.
마차와 레스는 서로 100m 가량 떨어져 있다. 다행히 레스는 신체 건강한 남자였고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는 했어도 체력도 많이 남아있었다. 아자리는 그때 마을을 떠나기 전에 탐정들에게서 빼앗았던 올가미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누운 채 샤카자이아를 향해 외쳤다.
“언니. 저것들 다 이어서 묶으면 30m는 될 거 같아요.”
“30미터?”
“하여간 어서 레스한테 던져요.”
마차를 끌던 말들은 슬슬 숨이 차기도 했고 이제 포탄 소리가 들리질 않아서 힘을 빼기 시작했다. 레스와 마차 사이의 간격이 순식간에 짧아졌고 그 사이 샤카자이아는 잽싸게 올가미들을 풀어서 밧줄로 만들고 끝과 끝을 이어 묶었다.
“뭘 하던 간에 어서 해!”
문제는 레스도 괴물들에게 거의 따라잡히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레스는 샤카자이아가 집어던진 밧줄의 끝자락을 붙잡고 다시 속도를 올린 마차에게 이끌려 달아났다. 샤카자이아는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땅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레스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
먼지로 범벅이 된 채 간신히 마차 짐칸으로 돌아간 레스의 뒷모습을 조준경의 십자선 너머로 지켜보던 카르델은 잠꼬대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보고를 마쳤다.
“목표물들은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시발 방금 뭘 본 거지?”
“글쎄 나도 모르겠다.”
하딘은 부하의 격식 없는 어휘를 지적할 여유가 없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경미한 쉘쇼크 증상에서 회복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카니는 아직도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려가며 깊이 후회했다.
‘내가 대체 뭘 믿고 저 녀석을 배신했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아비투스가 하딘에게 물었다.
“대장님. 이제부터 어떻게 합니까?”
하딘은 말이 없었다. 그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석고상처럼 가만히 있다가 하딘은 겨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정대로 우리는 큰길을 따라서 마을로 향한다. 놈들은 쫓아가지 않는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정말 그대로 보내시는 겁니까?”
피카니도 충격에서 회복하고 입을 열었다. 하딘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 설명했다.
“나도 안타깝지만 오늘은 때가 아니야. 다른 놈이었다면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모험을 해보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안 되겠어. 카르델, 혹시 그 사쿠라비가 가진 총알이 몇 개였는지 봤나?”
“탄띠에 총알이 3개 남아있었습니다.”
“그럼 우리 중에서 세 명은 확실하게 죽어.”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하딘 대위도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뱉은 말을 주워 담는 심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겪을 만한 일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거대한 벽을 만난 기분이야. 그 자식 정말 인간이기는 한 건가?”
피카니는 하마터면 아는 척을 할 뻔해서 입을 옴짝달싹 거렸다. 루나가 겨우 정신을 차리자 일행들은 갈 길로 향했다.
◆
지옥에서 벗어나오고도 30분을 달리고 나서야 마차는 멈췄다. 일행들과 말들 모두 무사하였고 마차도 한쪽 바퀴가 덜컹거리기는 했지만 천막이 거의 찢어진 걸 빼면 망가진 곳도 없었다. 고층 건물처럼 높이 서있는 바위의 그늘 아래에서 말들이 숨을 골랐다.
아자리는 아직도 축 늘어져서 일어나질 못했다. 샤카자이아는 그녀를 위해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고양이 세수라도 시켜주었다. 아자리가 말했다.
“레스한테 말해주세요. 방금 같은 짓 또 했다가는 가만 안 두겠다고.”
“나 지금 바로 옆에 있거든?”
레스의 반응을 무시하고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아자리가 말하기를 아까 같은 짓 또 했다가는 가만 안 두겠다는군. 동감이야.”
“다른 방법이 없었잖아.”
샤카자이아가 언성을 높였다.
“너 혼자만 의미 없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딴 멍청한 짓 안 해도 다 같이 달아날 수 있었다고! 물론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대체 어느 누가 그딴... 세상에 머리에 뭐가 들어서 그런 발상이 떠올랐니?!”
“화를 내니까 말투가 자연스러워졌네.”
“난 지금 심각하거든!”
레스는 겸연쩍은 얼굴로 터번을 벗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미안.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나도 또 해보라면 못 할 거 같으니까.”
샤카자이아는 눈가를 부여잡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무튼 네 덕분에 다들 무사했으니 오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 그런데 너 인간 맞아?”
“그래.”
“네 부모님 중 한 분이 특이한 종족이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난 그냥 사람이야.”
“그런 실력을 가지고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됐어?”
“몰라.”
말들을 보살피고 있었던 단테가 일행들에게 돌아오자마자 레스를 향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방금 여러분들을 돕기로 한 걸 깊이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이해해요.”
대답은 아자리가 했다.
“하지만 아까 그 광경을 보고 확신했어요. 내가 역시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고.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건데 이번 일을 계기로 발을 빼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원한 살 짓도 안 할 거고요. 그거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자살 행위겠죠.”
“괜한 소리하지 말고 앞으로의 여정이나 설명해주세요... 힘든 거 알지만 전 지금 기분이 엄청 안 좋으니까요.”
아자리를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될지 단테는 알고 있었기에 짐칸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일단 그놈의 국경은 어떻게든 지나왔습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됐는데 축배를 들 형편이 아니니 지금은 축포 한 번 거하게 쏜 걸로 만족합시다. 오늘 하루는 내내 바깥에서 지낼 겁니다. 아무 일 없다면 내일에야 첫 번째 마을에 다다를 거고요.”
레스가 손을 들고 말했다.
“내가 계속 뒤를 살펴봤는데 피카니 일행이 이쪽으로 쫓아올 기미는 없었어. 혹시 모르니 지켜보기는 하겠지만 놈들이 다른 경로를 택했다면 언제 우리랑 겹칠까?”
“용사와 군인들 그리고 음산한 면이 고혹적이었던 마녀는 제국이 관리하는 길로 가겠죠. 당장은 우리가 앞서고 있지만 금방 따라잡힐 겁니다. 같이 마을로 향한다면 비슷한 시기에 다시 보겠군요.”
“거기서 또 결판을 봐야하나.”
레스가 말을 마치자 샤카자이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왜 놈들을 그냥 보냈던 걸까... 일단 간접적으로 우리 부족의 은인이었으니 죽이지는 않더라도 뼈라도 몇 군데 꺾어놨다면 이런 걱정할 필요 없었을 텐데.”
아자리가 그녀 스스로를 대신해서 변호해줬다.
“멍청한 건 우리들이었지 언니는 아니에요.”
“너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잖아. 게다가 워낙 정신없었고.”
레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지팡이를 껴안고 계속 누워있던 아자리는 겨우 자기 몸을 가눌 정도로 회복됐는지 자기 힘으로 어렵사리 일어났다. 앉은 채로 그녀가 레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계속 묻고 싶었던 게 있거든요. 대체 새벽에 어디를 쏘다니고 있었어요?”
“산책. 그런데 오다가 주운 게 있어.”
그는 이제야 정체불명의 신전에서 챙겨두었던 흑요석 칼날을 일행들에게 보였다. 샤카자이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마을에서?”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가져와봤어.”
샤카자이아는 흑요석 칼날을 건네받고 뚫어져라 보았다. 흑요석은 특유의 성질 때문에 쪼개지면 가장자리가 원자 단위로 날카로워진다. 본질은 유리라서 단단한 물체에 닿으면 쉽게 부서지지만 절삭력은 금속에 뒤처지지 않는다.
“전사가 자신의 무기를 그냥 아무데나 두지는 않았을 거야. 대체 이걸 어디서 얻은 거냐?”
레스는 변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꾸며낼 궁리도 해보았으나 결국 귀찮아져서 항상 그랬듯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가 소총을 주워온 곳하고 같은 곳에서.”
아자리와 샤카자이아의 얼굴이 싸늘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잠깐 진공 상태 같은 침묵이 지나갔다. 아자리가 입을 열었다.
“분명 우리가 멈췄던 곳에서 그런 물건은 절대 못 봤었는데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장소에서 좀... 더 깊은 곳이었지. 일단 괴물이 과거형으로 정말 있기는 하더라고.”
“대체 또 뭔 짓을 하고 왔던 거야!”
아자리는 자기도 모르게 온 몸에서 얼마 있지도 않았던 체력을 끌어 모아서 고함을 지르느라 발작을 일으킨 고혈압 환자처럼 뒤통수를 잡고 뒤로 쓰러졌다. 샤카자이아가 급하게 그녀의 몸을 받아주고 그에 뒤지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굳이 말을 안 했는데! 내가 어머니를 얼마나 찾고 싶었는데! 아까도 그렇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까는 레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포탄을 쏴서 맞추는 기행을 저지른 덕에 다들 무사했으니 얼추 넘어가줬으나 이번에는 봐줄 여지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레스가 자리를 비운 탓에 일행들 모두 위험에 처했으니까. 아자리가 샤카자이아에게 안긴 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기나 하자. 말해.”
“내가 보기에는 무슨 신전처럼 보였어.”
계속 듣고만 있었던 단테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신전?”
“엄청 넓더라고. 그때는 공간 감각이 이상해져서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모르겠어. 산속이든 땅속이든 그만한 규모로 지으려면 기술력하고 돈이 엄청 들었을 거야.”
다들 어이가 없어서 또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뭔가 기억이 나려고 있었던 단테가 말을 꺼냈다.
“난 그냥 유령마을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게 있었다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데.”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그럼 혹시 그 신전에서 나타난 괴물 때문에 유령마을이 됐나?”
“모르겠어요. 일단 그 금광은 가치가 없기는 합니다. 레스 씨.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 신전에 뭔가 돈 될 만한 게 보이기는 했습니까?”
“문화적 가치는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폐허였어.”
아자리가 말했다.
“과거형으로 존재했다던 괴물은 언제 등장하죠.”
레스가 설명하면서 손짓으로 표현을 더했다.
“다 큰 곰만큼 커다란 녀석이었어. 뿔하고 송곳니도 큰데다 머리뼈도 어찌나 묵직하던지 공성추로 쓸 수도 있겠더라고. 꽤 오래 방치 됐는데도 벌레가 시체를 먹지 않아서 고스란히 미라가 됐었지. 이 흑요석 칼날은 그 친구 목에서 뽑아온 거야.”
샤카자이아가 이제야 알겠다는 양 납득했다.
“역시 우리 부족 사람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했던 거야. 그럴 줄 알았다고.”
“어디보자 한 번 정리해서 추측해보죠. 10년 전에 광맥이 말라버려서 여기저기 파고 있던 광부들이 우연히 그 신전으로 통하는 굴을 뚫어버렸겠죠. 저하고 언니가 찾아낸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탐험하러 왔지만 결말이 나빴고요.”
“그리고 어머니가 그 괴물을 죽인거지.”
계속 흑요석 칼날을 보고 있던 샤카자이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들 놀라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흑요석은 우리들에게 귀중한 물건이라서 다들 하나 밖에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무기를 보면 쓰는 사람의 취향이 확연히 드러나. 세월이 오래 지나기는 했지만 보면 볼수록 확신이 들어. 칼을 이렇게 얇게 만든 사람은 어머니 밖에 없었어. 왜 칼을 회수하지 않으셨지?”
레스가 의견을 냈다.
“아마 괴물의 몸과 피에 독성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어. 진짜 독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벌레가 시체를 먹지 않기도 했고. 혹시 해서 말해두는데 주위에 사람 시체 같은 건 없었어. 네가 절망할까봐 사실을 숨기는 거 아니야. 진짜 네 어머님이셨는지는 난 모르겠다만 그 사람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원래 왔던 길로 돌아갔어.”
단테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강인한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 몸 정도는 알아서 지키겠군요.”
아자리도 좋은 소식에 기뻐하였다.
“벌써 단서를 찾았네요 언니. 일단 무사하시다니 다행이에요.”
하지만 샤카자이아는 얼굴이 굳어있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는 와중에 레스가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
“이걸 보니까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어머니가 설명 못할 위급한 일이 있어서 부족을 떠났을 거라고 믿어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나 할 여유는 있으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