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2권] 45회 - 마녀의 기도 (45/188)



〈 45화 〉[2권] 45회 - 마녀의 기도

레스는 표정이 어두워진 샤카자이아를 향해 차분히 말을 건넸다.


“찾으면 알게  거야. 내가 보기에 네 어머니는 자진해서 무기를 들고 싸워줬다고 생각해. 그렇게 선량하면서도 강한 사람이 정말 살던 곳과 네가 싫증난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졌을까?”

괴물이 있던 신전에는 보물이 없었고 금을 캐러온 광부들이 위험수당에 적절한 대금을 지불할  있었을 리가 없다. 결국 샤카자이아의 어머니는 선의만으로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위해 그 위험을 감수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 정도는 샤카자이아도 자기 힘으로 깨달을  있었지만 억눌렸던 감정이 먼저 튀어나온 탓에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레스의 위로를 듣고 나서야 샤카자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의 맑은 눈빛을 보였다.


“그랬겠지. 맞아. 위험에 처한 사람이 보이면 절대 무시하지 못하는 분이셨으니. 분명 찾아서 직접 들어야할 이야기가 있을 거야.”


아자리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마을은 버려졌네요. 레스, 그 신전에 혹시 도굴 당한 흔적이 있던가요? 하다못해 어지럽혀진 흔적은?”

“전혀 없어. 내가 10년 만에 들어간 방문자야.”


“이상하네. 거기까지 굴을 판 광부들이 어떻게든 본전이라도 뽑으려고 갖은 궁리를 해봤을 법한데 너무 쉽게 포기했어요. 하다못해 고고학자들한테 알렸다면 광부들은 고스란히 발굴탐사대로 고용됐을 걸요.”


단테가 손을 들고 헛기침을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진실은 어떨지 궁금합니다만 지금은 과거 대신에 앞날을 궁리할 때라고 봅니다. 마차 바퀴에 문제가 생긴 거 같으니 레스 씨하고 샤키 양은 도와주시겠어요?”


위기를 한  넘겼다고 안심하고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일행들은 아자리만 쉬게 하고 힘을 모아 마차를 수리하는 일에 전념했다.









피카니 일행은 점심이 됐을 때 멈춰서 쉬었다. 주위는 온통 허허벌판이다. 아까 그들이 있던 곳보다는 토양이 비옥해져서 죽음의 붉은빛 대신 갈색 위로 초록색이 드문드문 섞이기 시작했다. 피카니의 뒤에 있던 루나는 한결 능숙해진 동작으로 말에서 내려와 자신의 지팡이를 허공으로 띄워 의자 삼아 앉았다. 첫날보다는 관록이 생긴 모습이지만 얼굴은 피로와 신경성 두통 때문에 일그러져 있었다.

각자 말을 세워두고 모여 앉았다. 평소대로라면 이제 불을 피우고 차를 한잔 즐겨야겠지만 근방에 태울만한 게 없었다. 다들 아쉬운 대로 수통만 꺼내서 입에 대려는데 뒤늦게 아비투스가 커다란 물병과 거름망을 가지고 나타났다. 하딘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그건 뭐냐.”


“냉침 시켜서 우린 다즐링입니다. 어젯밤에 미리 준비해놨죠.”

하딘은 양철 머그잔을 꺼냈다.


“나도 한잔 주지 그러나.”


“물론이죠.”


다른 일행들도 골고루 한잔씩 나눠받고 티타임을 가졌다. 몇 모금 마시고 루나가 말했다.

“홍차 고마워요 아비투스 씨.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겨우 진정이 되네요.”


“안타깝게도 곁들일 간식이라고는 건빵 밖에 없습니다.”

카르델은 기껏 받은 홍차를 아껴서 음미하지도 않고 맹물 마시듯 단번에 벌컥 삼켰다. 눈빛을 보아하니 멍한 게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레스가 포탄을 쏴서 맞춘 일이 충격적이었던 건 다들 마찬가지였지만 카르델은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본데다가 저격수로서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몽롱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왕이 미치면 사쿠라비로 전쟁하러 간다는 속담이 떠오르네. 아는 사람?”

아는 척하는 사람은 하딘 대위뿐이었다.


“거기에 관한 무용담은 나도 많이 들어봤다. 중립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관심이 생긴 피카니가 입을 열었다.

“아시는 이야기가 어떤 겁니까?”

“공식적으로 검증된 이야기라면 80년 전에 있었던 ‘아카수스’의 침공이겠군.  조국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로스마니’ 제국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고 당당하게 들어가서 반년 만에 된통 깨진 적이 있었지.”


“침공한 명분은 뭐였습니까?”

“없어. 그때는 모든 나라가 서로 식민지를 얻겠다고 경쟁하던 시기였으니까. 로스마니 제국군과 만나서 싸웠을 때 병사 교환비가 1 대 9로 기록되어있다. 전 용사의 직계 후예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모든 면에서 비참한 싸움이었지.”

“교과서에 당당히 실을 내용은 아니군요.”

루나가 대화에 끼었다.

“그때 ‘메흐테르’ 군악대도 있었나요? 나팔 소리에 맞춰서 ‘시파히’가 돌격해오던가요?”


하딘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꽤 잘 아시나 봅니다.”

“그냥 귀동냥만 해본 정도에요.”


“일단 설명해두자면 ‘시파히’는 그쪽 동네의 기병대들을 뜻한다. 사막 땅에서 두꺼운 갑옷을 입고 싸워댔던 괴물들이지.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흉갑기병이나 용기병으로 전향했겠군. 그리고 마법사님의 기대와는 달리 저희들은 머스킷과 아부스 포로 무장한 보병만 상대했습니다. 아, 딱 한  ‘예니체리’를 상대한 적은 있군요.”


“술탄의 근위대가 쉬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

“‘예니체리’를 호위로 대동한 사절이 오자 이성을 잃어버린 당시의 지휘관이 인질로 삼겠다며 다짜고짜 공격을 했습니다. 결과는... 먼저 포위해서 공격해놓고도  지휘관이 도리어 사로잡혔습니다. 죽은 예니체리는 없었고요.”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카르델이 한마디 했다.

“대체 뭐가 아쉬워서 사막 밖에 없는 땅을 침공하러 갔답니까?”


하딘은 들고 있는 머그잔을 들어보였다.

“차.”


일행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마저 설명했다.

“사쿠라비에는 사막만 있는  아니야.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사막이 압도적이지만 비옥한 땅도 엄청나게 넓어. 무엇보다 차 생산지가 그곳에 있지.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 다즐링도 그곳의 재배지 이름을 따서 붙여진 품종이다. 지금까지도 아카수스가 찻잎 무역에 들이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면 놀라서 까무러칠걸.”


아비투스가 떫은 표정으로 자신의 찻잔을 바라보다가 단숨에 마시고 말했다.


“결국 핑커튼은 그 친구들의 발목도 붙잡지 못했군요. 죽었을까요?”

“그 사쿠라비와 차기 마왕은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는 놈들로 보이지는 않았다만 잘 모르겠다. 필요하다면 독한 결정도 내릴 기개는 있을 테니까.”

“앞으로도 고용해볼 생각입니까?”


“회의적이다. 안 그래도 시선을 끄는 위험을 무릅써야하는데 맡길만한 놈까지 없으니 결국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카르델이 그 말을 듣고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탐정들 중에도 쓸 만  놈은 있습니다.  레오포드.  칼리헬. 제프 칼. 제임스 렉터.  넷  하나하고 만날 기회가 생기면 의뢰를 해보시죠.”

“아는 놈들이냐?”


“잊을 수가 없죠.”

하딘은 잠깐 생각해보고 스스로 깨달았다. 아비투스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무슨 말을 하려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나와 피카니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여서 아비투스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와일드 번치’를 찾아내서 쓰러트렸던 최정예 4인조들을 말합니다.”

피카니는 정황을 깨닫고 그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그는 유명한 무법자의 이름과 카르델의 이름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그쪽이 ‘와일드 번치’의 다섯 명 중 하나였다고?”


“그랬던 적도 있지.”


“당신이 ‘부치 캐시디’였군. ‘선댄스 키드’의 파트너.”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몰랐던 루나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카르델하고 부치 중에 진짜 이름은 뭔가요?”


“둘 다 골고루 썼습니다 마법사님.”

“지금 선댄스 키드라는 예전 파트너도 군에 있나요?”

“목 매달렸어요.”


그는 담백한 얼굴로 즉답했다. 루나가 충격 먹은 얼굴로 굳어버리자 카르델이 둘러댔다.


“괜찮아요 마법사님. 내가 죽였으니까. 붙잡히고 나서 사법 거래로 남은 잔당들을 쫓는 일에 협조했었죠. 그때 실력을 인정받고 입대해서 형량을 처리하기로 합의한 겁니다.”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야기하니 루나도 어떻게든 받아넘기기는 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이번에는 아비투스가 피카니에게 물었다.


“국경 바깥에서 도움을 받을 만한 연줄은 없습니까?”


피카니를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있다고 해도 여기부터는 내 신분을 쓰지 못합니다. 국경을 넘었으니 앞으로는 제 편보다는 죽이려할 사람이 몇 배로 있을 테니.”


하딘도 그 말을 거들어줬다.


“그리고 용사가 직접 일선으로 나섰다는 소식이 퍼졌다가는 저쪽의 비밀 요원과 암살자들이 깡그리 우리한테 올 거다. 마왕군을 피해가기도 힘들어질 거고.”


일행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골이 아파지려는 상황에 왜 자신들이 이런 임무를 맡기로 했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다들 멍하니 허공에 초점을 두거나 생각에 빠진 얼굴로 빈 머그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계속 무거워져가는 공기를 다시 흐르게 만든 건 피카니였다.

“사실 굳이 용사의 이름을 쓰지 않더라도  알아볼 사람들은 많을 겁니다.”


루나가 손을 깍지 껴서 무릎에 얹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들이요?”

“대부분은 갱입니다. 이젠  아는 사실이지만 저는 황무지 토박이였고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살던 곳도 꽤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치과 진료랑 카드치기를 가장 잘했는데 도박사로 살다보니 원한을 좀 많이 샀죠.”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들의 표정은 물론 루나의 얼굴까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치과 진료 자격증을 가진 도박사이자 총잡이라면 단  명밖에 없었다. 아비투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쪽이 ‘닥 홀리데이’였다고요? 와이어트 어프랑 OK 목장에서 단체로 결투를 했던?”

피카니는 자기 입으로 스스로를 자랑하기가 거북해서 시선을 땅에  채 최대한 기복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까놓고 말해서 치과 진료 자격증은 가짜였지만 그래도 받은 돈값은 제대로 했습니다. 도박사로서는...”


하딘이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아니 궁금한  그게 아니고 자네가 ‘닥 홀리데이’였다고?!”


“때로는요. 어쩔 때는 ‘빌리 더 키드’였고. 한 때는 ‘제시 제임스’였고. ‘조니 링고’도 있었군.”


피카니가 말했던 이름들은 모두 유명한 무법자였다. 하지만 활약한 장소가 모두 제각각이었고 몇 명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하딘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황당해서 감정이 절제가 되질 않았다.


“그 모든 무법자가 전부 자네였다고 할 생각은 아니지?”


“그럴 리가요, 하지만 그렇게 믿게 할 자신은 있습니다.  정도 연기 실력과 변장이 없으면 도박사 일은 오래 하지 못하죠. 결국 한계가 있어서 총잡이도 겸해야 했지만.”

“제국이 자네 같은 사람을 용케도 혈통 있는 귀족으로 둔갑시켜놨군 그래. 예절 교육 강사라도 붙여주던가?”


“필요 없습니다. 귀족 흉내쯤이야.”

카르델이 한쪽 눈을 반쯤 감고 넌지시 말했다.

“변장은 지금 도구가 없으니 그렇다 치고, 연기 실력을 여기서 한  보여줘 봐.”


피카니도 슬슬 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격식 차리는 일에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고민하는 척하지도 않고 그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성대모사로 해볼까. 우리들  가운데에 그 물병 눕혀놓고 돌려봐. 멈췄을  물병 주둥이가 가리킨 사람을 흉내내보겠어.”

물병이 바닥에 놓이자 루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기도 뭐하지만 여러분들을 쫓아와서 정말 별 걸 다 보게 되네요.”

물병이 돌아갔고. 멈췄다. 주둥이는 루나를 향하고 있다. 남자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굽히며 자기 얼굴을 가렸다.

“우 흡! 풉! 어흠!” 이건 하딘.

“읍! 흡! 읍!” 이건 아비투스.

“아 하하하하하! 와하하하하!” 카르델은 체면 따위 무시하고 시원하게 폭소하고 있다.

루나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지켰다. 그녀가 물었다.


“어... 괜찮으시겠어요 용사님? 흉내는 그렇다쳐도 체면이 있으신데...”

호흡곤란 증상을 일으키며 꺽꺽 기침까지 해대는 남자들의 모습은 신경 안 쓰이는지 피카니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있던 수통을 꺼내서  안으로 물을 머금다가 일부러 사래가 들도록 기도로 삼켰다. 그가 일부러 목을 쉬게 하려고 기침하는 모습을 보고는 남자들은 웃고 있을 수 없었다. 침묵이 주변을 감싸자 피카니가 모자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성대모사를 시작했다.

“저도 제가 왜 이런 일에 끼어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여자 몸으로 남자들을 따라가다니 정신이 나갔죠. 후배들이 끌려갈 걸 걱정해서 오기는 했지만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어쩌면 뭔가 거대한 일이 있을 거라고 직감했을 지도요. 하지만 제가 그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걸까요? 주여 우리를 지켜봐주소서. 비록 저 용사가 진정 선택받은 자는 아니지만 그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들의 원정이 무사하기를.”


자기 얼굴을 가렸던 모자를 치우자 피카니의 눈으로 경악으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장본인인 루나는 놀라움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제 기도가 들렸었나요?”

“장교용 숙소는 벽이 얇거든요.”

아무튼 그의 성대모사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