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2권] 46회 - 비나예 아하니
사실 군인들은 피카니의 성대모사만이 아니라 그의 행동 그 자체에도 경악한 거였다. 뒤늦게 피카니는 자신의 무례를 깨달았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방금 실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아뇨.”
루나에게서는 화를 내거나 수치를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더 미안해하고 있었다.
“뭐라 말씀드릴 바가 없네요. 피카니 씨.”
“왜 마법사님이 죄송해하십니까?”
“안 그래도 사람들이 선택받은 용사가 아니라고 수군거려서 많이 속상하셨을 텐데, 제 입으로 험담을 들었으니 많이 실망하셨겠죠.”
그녀가 섬세하고 착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남을 미워하지도 못할 줄은 몰라서 다들 속이 죄여졌다. 상황이 복잡해지려하자 군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둘만 남게 되니 침묵이 더 커졌다. 피카니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해보았다.
“겨우 그걸 가지고 어떻게 험담인가요. 엿 들은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제가 몹쓸 놈이지.”
하지만 루나는 쉽사리 마음이 풀릴 거 같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더 편했으련만 피카니는 죄책감 때문에 옷 아래로 진땀이 났다.
“방금 성대모사 때문에 마음이 걸리는 모양이신데 연기에 몰입하느라 어쩌다했던 거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네.”
루나는 여전히 울적한 얼굴이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겉치레로 들리리라. 여기까지 오고 나니 피카니는 좀 더 세게 나올 필요를 느꼈다.
“생각해보니 이정도로는 저의 사과가 전해지지 않겠군요. 그런 의미로 약속을 하겠습니다.”
“약속이라뇨?”
“지금부터 훗날까지 무슨 부탁이든 하나 이뤄드리겠습니다. 제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한에서 무엇이든요.”
그녀는 멍하니 굳었다가 갑자기 허둥지둥 호들갑을 떨었다.
“아아아아 아니! 겨우 이런 걸 가지고 어떻게 그런 약속을!”
“물론 굳이 말 안 해도 아시겠지만 암살 같은 곤란한 부탁은 하지 말아주세요.”
“됐어요!”
과정이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루나는 기운을 차리기는 했다. 피카니가 손짓으로 루나와 자기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능글맞게 웃었다.
“서로 미안한 짓 했으니까 비긴 걸로 치는 겁니다?”
“뭐...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카페에서 다과라도 한턱 쏴주세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있다가 일행들은 다시 모여서 길을 떠났다. 다시 말 위에 오른 피카니는 새삼스레 자신의 몸을 붙잡은 루나의 손길이 다시 신경 쓰이고 있었다.
◆
마차를 고치고 나서 몇 시간을 달렸으나 아직도 붉은색과 주황색 밖에 없는 허허벌판이다. 심지어 선인장도 없었다. 도통 풍경이 바뀌질 않으니 지평선과 능선에게 갇힌 기분이었다. 근처에 솟은 바위산의 그림자가 쉴만해 보여서 마차는 그곳에 멈췄다. 늦은 오후였고 그들은 미뤄두었던 끼니를 챙겨야 했다.
“이번 요리는 내가 하지.”
그렇게 말하고 샤카자이아가 페미컨을 꺼내자 아자리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요리용 냄비도 나타나자 그 표정은 곧 의문으로 바뀌었다.
냄비로 끓인 물에 바스라트린 페미컨을 넣자 육포 입자의 농축된 맛이 녹아서 인스턴트 고형육수 역할을 했다. 거기에 단테가 챙겨왔던 옥수수 통조림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국물의 농도를 맞추기 위해 빵조각을 넣었다.
“우리들이 먹는 고기 스튜다. ‘루바부’라고 하지. 원래라면 여기에 과일즙이나 단풍 수액을 넣지만 지금은 없으니까 별 수 없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대로 만들어주겠다.”
아침부터 대형사건에 휘말리느라 다들 아직도 먹기보다는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나 요리하는 냄새를 맡고 군침이 고였다. 완성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리는데도 일행들이 계속 구경하고 있자 샤카자이아는 아무거나 말하고 싶어졌다.
“통조림은 가능한 아끼고 싶었지만 아침에 고생이 많았으니 제대로 해서 먹어야지.”
레스가 반응했다.
“너도 통조림 정도는 아는구나.”
단테가 대답했다.
“그야 제가 상품으로 곧잘 가져왔거든요. 깡통 따개까지 팔아먹을 수도 있고.”
아자리가 그를 쳐다보았다.
“와... 약았어.”
샤카자이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다들 관심사는 내용물보다는 깡통에 있었다.”
“다 만들어지려면 얼마나 걸려요 언니? 배고파 죽겠어요.”
“이제 소금으로 간만 하면 돼. 다들 땀을 많이 흘렸으니 조금 넉넉하게 넣겠다.”
그녀가 가져온 물건 중에는 한 손바닥으로 쥘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돌절구가 있었다. 샤카자이아는 저번에 레스하고 교환했던 암염에서 깎아낸 파편을 절구에 넣고 빻았다. 요리가 끝났고 일행들은 들고 있는 그릇에 스튜를 담자마자 바로 선채로 먹었다. 아자리가 한입 먹어보고 품평을 읊었다.
“누린내가 걱정됐는데 국물로 만들어서 먹으니까 거부감이 덜하네요. 아니면 그냥 익숙해져서 그러나.”
“달아야 누린내도 잡고 혀에 감겨서 맛있는데 아쉬워.”
“제 입맛에는 생소하지만 먹으니까 기운이 나네요.”
남자들은 말없이 체하지 않을 정도로만 부지런히 먹고 있다. 기왕이면 어떤 맛인지 자세하게 말해주면 좋았겠지만 샤카자이아는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만으로 만족하였다.
주변에는 어린아이가 부는 휘파람처럼 황량한 바람소리밖에 없다. 그래도 레스는 소총을 몸 앞에 놓고 먹는 중에도 계속 주변을 살폈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각자 할 일을 했다. 단테는 말들을 챙겨주러 갔고 아자리는 샤카자이아의 붕대를 풀어주었다. 상처에 고인 고름을 닦아주며 아자리가 말했다.
“지팡이의 도움이 있었지만 새살이 빨리 돋았네.”
“체질이 그러니까. 하지만 이틀 연속 총에 맞는 바람에 나도 한동안은 제대로 싸우기는 힘들겠어.”
아자리는 본인 소지품에서 깨끗한 붕대와 소독약을 꺼내서 다시 처치를 해주었다. 옷에 가려져 있는 상처는 샤카자이아가 옷을 들춰서 스스로 감았다. 남자들이 보고 있지는 않았으나 아자리가 몸으로 가려줬다. 자기 몸도 성치 못한데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서야 아자리는 한숨 돌렸다.
“의약품이 벌써 동이 났네요. 도적놈들이 뺏어간걸 어떻게든 되찾아서 다행이었지만 그 사이에 놈들이 엄청 썼어요.”
“꼭 필요해? 그런 거 없어도 마법으로 고칠 수 있잖아.”
레스는 아직 샤카자이아가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몰라서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자리는 타이르는 어투로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총에 맞을 때마다 마법사가 도와줘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가요?”
“의사가 왜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편리하던데.”
“총에 맞았던 곳을 스스로 만져보세요.”
“갑자기 왜?”
“해봐요.”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레스는 그 말에 따라서 저번에 맞은 곳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았다. 분명 아플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자기 살이 아닌 것처럼 느낌이 없었다.
“어? 뭐야? 왜 이러지? 아무 것도 안 느껴지는데?”
“억지로 살을 아물게 해버렸으니 신경계가 맛이 가버릴 수밖에요.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하겠지만 제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아시겠죠.”
“마법만 믿지는 말라는 거지.”
“제대로 회복하려면 자연스럽고 느린 방법이 확실하고 부작용도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위험한 일이 있으면 겁부터 먼저 먹어놔요. 내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믿지 말고.”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의약품부터 찾아봐야겠네. 어떤 게 필요해?”
아자리는 수첩을 펼쳐서 자기가 미리 적어둔 메모를 보았다.
“일단 소독약하고 알코올이 최우선이에요. 그것만 있으면 다른 천도 얼마든지 붕대로 만들 수 있고 다른 약도 조제가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진통제랑 생리식염수랑 지혈 연고. 아 연고는 언니의 도움을 받으면 저희들이 직접 만들 수 있겠네.”
“마녀들만의 비급으로 전해지는 마법약 같은 거는 안 만들어?”
레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자리가 그를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잊어먹었나 이 인간이.”
“하지만 네 오두막에는 마법약 재료도 잔뜩 있었잖아.”
잠깐 아자리가 할 말을 찾느라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갖춰두면 좋겠네.”
“야 이것아.”
“수단은 많을수록 좋죠. 인간들의 마을에 마법약을 취급하는 가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단테가 근처로 오자마자 대화에 끼었다.
“아자리 양은 ‘신 시티’에 가본 적 없나보군요?”
“뭔가요 그 재수 없어 보이는 마을 이름은.”
“엄밀히 말하자면 마을이 아니라 도시지요. 인구가 10만은 됩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가게쯤이야 당연히 있죠.”
“10만?!”
아자리만이 아니라 레스와 샤카자이아도 깜짝 놀랐다. 아자리는 바로 레스를 보고 소리쳤다.
“잠깐만, 나하고 언니는 인간들 세상을 잘 모르지만 당신은 왜 놀래요? 여기까지 오면서 마을을 다 들러 다녔을 거 아니야.”
“몰랐으니까 놀랬지. 마을은커녕 사람도 제대로 못 만나고 다녔거든.”
“대체 얼마나 헤매고 다닌 거예요?”
“나도 잘 몰라.”
그 말을 듣고 단테가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지도는 제본소에서 제대로 인쇄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지도책 위에 기름종이를 겹쳐놔서 베껴 그린 거였다. 그걸 보고 레스는 생각에 빠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소총을 거꾸로 쥐어서 개머리판으로 땅에 선을 그어가며 간략한 세계 지도를 그려갔다.
“이 참에 샤키한테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게. 지금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는 인간들이 사는 땅이야. 우리가 뭉뚱그려서 인류 제국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정식 명칭은 ‘인류연방제국’이지.”
“연방이 뭔데?”
“여러 나라가 뭉쳐서 하나의 거대한 나라를 이룬 거야. 연합하고 비슷하지만 뭐라고 표현해야하나. 훨씬 더 끈끈한 사이지.”
여태껏 다들 인류 제국이라고만 불러서 샤카자이아는 인간들의 나라가 하나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럼 뭐야. 실제로는 연합과 연합끼리 전쟁을 한 거야?”
“맞아. 하지만 이건 종족의 사활이 걸린 특별한 전쟁이잖아. 다들 서로의 종족을 구분하고 강조하려는 의미로 대충 인류 제국이라고 뭉뚱그려서 부르고 있지.”
“괜히 헷갈리게 시리.”
샤카자이아의 불평을 무시하고 레스는 지도에 국경선을 그어가며 나라들을 소개했다.
“이쪽 섬나라는 ‘아카수스 제국’. 지금 인류 연방을 대표하는 최강대국이야. 대륙 왼쪽 가장자리에는 ‘쇼생 공화국’, 바로 오른쪽에 ‘슈타이만 제국’. 내 소총이 저곳에서 만들어졌지. 나하고 아자리가 처음 만났던 도시도 저 나라에 속해있었고. 거기서 남쪽 산맥 너머의 반도에는 ‘르바티아 왕국’이 있어. 가본 적은 없지만 음식이 맛있다더라. 이 나라들 사이사이에는 여러 소국들이 끼어있지.”
샤카자이아는 지도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는 뭐라고 부르나? 세상의 끝?”
“거기는 바다.”
“바다? 네가 말했던 소금물 호수? 이 땅은 그 커다란 소금물 호수에 둥둥 떠 있는 건가?”
레스는 굳은 얼굴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해줄게. 너희 부족이 사는 숲은... 이정도 넓이가 되겠네.”
그렇게 말하고 레스가 사각형 정중앙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진 곳에 점을 쿡 찍었다. 샤카자이아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 넓은 숲이 고작 이거?”
세상이 넓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샤카자이아의 마음속에서 잠깐 혼돈이 일었다. 단테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돌아다니다가 설명을 도와줄 생각으로 땅에서 모래 한줌을 움켜쥐고 레스가 찍어놓은 점 근처에 뿌렸다.
“지금 단테가 모래를 뿌린 곳이 우리가 있는 와하비 사막이야. 다음 마을까지 일직선으로 쭉 간다면 150km미터 가량 되는데 도중에 뚫고 가야할 산맥도 있고 길이 험해서 체감되는 이동거리는 300km가 넘겠네.”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고맙지만 나는 너희들의 거리 단위를 모른다.”
어디서부터 가르쳐줘야 할지 몰라 레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앓는 소리를 낼 때 아자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의 오른편으로 갔다. 그녀는 자기가 밟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마족들이 살고 있는 땅이에요. 그런데 너무 작게 그렸는데요.”
“난 지도에 나온 대로 그렸을 뿐이야.”
“저희들 땅을 이보다 4배는 더 크게 그려야 옳아요.”
“진짜야?”
“네. 그래야 옳다고요.”
한 호흡 뜸을 들이고 레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영토가 넓은데 마왕 놈은 뭐 하러 침공 따위를 했어?”
자기가 하는 소리를 강조하려고 아자리는 말하면서 양팔을 활짝 펼쳤다. 표정은 담백했다.
“넓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요. 대부분은 간척과 개간이 안 되는 얼음덩어리거든요. 아무튼 여기가... 전에 말했던 단테 씨 같은 수인들의 나라인 ‘욜스카’, 바로 밑에 엘프와 페어리들의 나라인 ‘셀라렐’, 그대로 오른쪽으로 가면 난쟁이와 고블린들이 사는 ‘카쟈카스’.”
나라들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아자리가 신발 끝으로 국경을 그려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미 그려져 있던 지도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발로 비벼서 지우고 새로 그려서 지도를 넓혔다. 축약해서 그린 지도인데도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에 다들 살짝 넋이 나갔다.
“여기가 저와 같은 고위마족과 온갖 종족들이 섞여 사는 ‘블러디아 제국.’ 인간들은 대체로 그냥 마계라고 부르죠.”
설명을 마치고 아자리는 뒷짐을 진채 ‘욜스카’에 해당되는 곳으로 돌아왔다. 단테가 두 사람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약 2400km입니다. 아무 일 없이 평탄하게 여행만 할 수 있다면 도착까지 한 달 정도 걸릴 겁니다.”
“가슴이 콩닥거려.”
샤카자이아는 그 엄청난 거리에 긴장하거나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아다녀볼 땅이 많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충 그려진 지도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반면 레스와 아자리는 지도 한복판에 서서 서로를 마주보며 표정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레스가 팔짱을 끼고 마족 땅에 서있는 아자리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여기서 너한테까지 아무 일 없이 도착했다 쳐도...”
아자리는 그의 말을 예상하고 가로챘다.
“골칫거리는 끝이 없죠.”
눈을 몇 번 끔뻑거리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절 노리는 세력들도 어떻게 해야 하고. 부모님들도 구해내 드려야하고. 당신하고 언니의 부족도 도와줘야 하는데 우리 가문은 지금 힘이 없으니...”
레스는 당황했다.
“너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냐?”
아자리는 무슨 말을 하냐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당연한 거잖아요.”
“나중에 고민해. 전쟁이 끝나는 게 우선이니까. 벌써 걱정을 미리하고 난리야.”
표정이 굳어있던 아자리는 갑자기 피식하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남 말 하고 있네! 아하하하!”
대체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자리는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혹시 심각한 이야기를 시작 하나 싶어서 긴장했던 단테와 샤카자이아는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 다시 여행을 시작할 때다.
“콜록! 컥! 콜록!”
그런데 아자리는 웃음이 멎자마자 갑자기 듣기 불안한 기침소리를 연달아 냈다. 기침소리부터 몸짓까지 행동의 기색에 병자들만 낼 수 있는 어둑한 기운이 맴돌았다. 다들 그녀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한 눈에 봐도 그 심각함이 단번에 느껴졌다. 일상적으로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있는 기침 소리가 아니었다.
레스는 바로 달려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도 모르겠어요... 켈커트리 씨한테 도움을 너무 받았나?”
그 모습을 본 일행들은 쓸데없는 위로인사나 걱정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서둘러서 떠날 채비를 갖췄다. 그들은 순식간에 야영한 흔적까지 지워버리고 다시 움직였다. 아자리는 샤카자이아의 무릎베개에 머리를 얹고 곤히 잠들었다. 아자리의 얼굴을 보며 샤카자이아가 중얼거렸다.
“기운을 차리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싶었다. 아무래도 켈커트리의 지팡이도 상황 봐서 사용해야겠다.”
레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법이라도 만사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는구나.”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니까.”
“그 ‘신 시티’인가 하는 곳에 도착하면 일단 아자리부터 의사한테 보여줘야겠어.”
레스는 아자리에게서 눈을 돌린 다음 소총을 들고 마차 뒤쪽을 살폈다. 마차 짐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샤카자이아는 하품을 참느라 고생했다. 아자리의 상태가 아무리 걱정되어도 시간이 지나니 따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루함을 쫓기 위해 아까 봤던 지도를 떠올리다가 샤카자이아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레스. 아까 그 지도에서 사쿠라비는 어디쯤에 있었어?”
“그러고 보니 거기 그리는 걸 잊었네.”
“에에에에엑?”
샤카자이아는 황당해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렇게 중요한 걸 넘어가버리면 어떡해. 나도 언젠가 거기로 가보고 싶었는데.”
“일단 사쿠라비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이라면 셀라렐 제국이야.”
“그래?”
“어디까지나 그나마 가까운 거야. 고향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엘프는 최근에야 봤으니까.”
“그렇구나. 어? 그럼 토착 원주민 중에 우리 부족말고 다른 엘프는 없었다는 거야?”
“나는 못 봤어. 그만큼 너희들은 흔히 볼 수가 없는 종족이야. 앞으로 가게 될 도시라면 아마 엘프도 있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 그런데 왜? 우리를 싫어하나?”
“그 반대야. 너희들은 종족 불문하고 인기가 좋아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샤카자이아의 순박한 마음으로는 인기가 좋아서 조심하라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저번에 마왕군하고 싸웠던 경험을 떠올려보니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분명 자신들 종족은 노예로 아주 비싸게 팔린다고 했었지. 힘이 세서 그런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심하겠다.”
“누가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꼬드기면 절대로 따라가지 마.”
“날 그 정도 수준으로 보고 있었구나.”
방금 한 마디는 평소처럼 딱딱하지 않고 유독 억양이 자연스러워 레스는 그녀가 살짝 화가 났다는 걸 눈치 챘다. 오래알고 지내려면 기억해두는 편이 좋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총에 이름을 지어준다고 했었지. 결정했어?”
“생각은 해뒀지만 네가 웬일이냐. 무기에 이름 지어주는 건 관심 없다더니.”
“오늘은 이 녀석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까. 충분히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어.”
“흐으응.”
그녀는 묘한 느낌이 드는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비나예 아하니.’ 그걸로 정했다.”
“무슨 뜻이야?”
“우리 부족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의 종족이다. 쳐다보기만 해도 누구나 무엇이든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총에게 붙여주기에는 딱 좋군.”
생각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레스는 소총의 개머리판을 쓰다듬으며 어떤 모양으로 새길지 궁리해보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운 놈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모든 종족들의 왕이 됐을까?”
레스는 생각 없이 말했으나 그걸 들은 샤카자이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멸족했다. 그들에게도 약점이 있었거든.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과 보복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몰랐다. 어느 날 종족의 구성원 중 하나가 잘못을 저질렀다. 사소한 실수였지만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죄인을 쳐다봐서 죽여 버렸다. 방금 죽은 사람의 가족이 난생처음 복수라는 감정을 깨우쳐서 모조리 보복했다. 복수는 끝이 없었고 결국에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아버렸지. 그자는 아무도 쳐다보기 싫어서 동굴로 들어갔지만 그 종족에게 원한이 있었던 다른 종족들이 그에게 저주를 걸어서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 비나예 아하니는 아직도 자신의 눈을 뽑아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동화였지만 레스는 흘려들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침까지 삼켜가며 집중하고 들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 레스는 망보는 것도 잊어버렸다. 조금 뜸을 들이고 그가 감상평을 전했다.
“좋은 이야기였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꼭 들려줘.”
“어머니가 오래전에 들려준 이야기였다. 이것보다는 더 멋있고 밝은 이름이 좋을까?”
도중에 예전 생각이 났는지 샤카자이아의 눈빛에 우수가 서려있었다.
레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방아쇠는 무거울수록 좋아. 안 그래도 이건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았어. 50구경은 위력이 너무 강해서 급소를 피해서 맞춰도 사경을 헤매거든.”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 말을 듣고 샤카자이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레스는 쓰고 있는 터번을 고쳐서 잡고 다시 망을 보았다. 아자리의 머릿결을 쓸어주다가 샤카자이아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레스.”
“왜.”
“그냥 물어봤어.”
마차 바퀴는 별 일 없이 계속 구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