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2권] 54회 - 종족차별
잠깐 뜸을 들이고 아비투스가 입을 열었다.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서.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하딘은 회중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나하고 피카니 경은 좀 돌아다니고 오겠다. 그동안 너희들은 마법사님을 숙소로 모셔드리고 머리 비운 채로 쉬고 있어.”
그는 지휘관다운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다. 남자들은 군말하지 않고 식어버린 음료들을 단숨에 들이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카니가 계산대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이 꼴이 될 때까지 연방보안관이라는 자는 뭘 하고 있던 건지.”
루나는 자기가 먹은 간식들까지 그가 계산해주는 바람에 당황했다.
“어? 제 것까지 같이 내시게요?”
“뱉은 말은 지켜야죠.”
피카니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덤덤히 말했다.
일행들은 각자 갈 곳으로 향했다. 햇빛은 진해지고 하늘에는 음영이 드리워 늦가을의 이른 저녁이 도시를 덮어갔다. 오후 내내 호객꾼들로 북적이던 길거리는 행인들만 남았다.
걸어가는 동안 입이 근질거렸던 카르델이 잡담을 시작했다.
“마법사님은 대학에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들이 처한 상황이 골치 아프기는 했으나 하딘 대위는 머리 비우고 쉬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리고 카르델은 그쪽 방면에서는 도가 텄다. 적당한 순간에 카르델이 분위기를 바꿔주자 루나는 당황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 다음 할 말을 정리했다.
“대부분은 연구실에 처박혔어요.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학생들한테 인기는 없었고요.”
아비투스가 그 말을 듣자 실례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녀의 몸을 한번 훑어보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했다.
“정말요?”
그 와중에 루나는 아비투스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걸어가면서 지나치는 행인들까지 그녀를 보면서 숙덕거렸는데 그녀는 그것까지도 몰랐다.
“시험을 치르면 다들 건성으로 치르더라고요. 수업만족도 설문은 항상 만점으로 나오지만 동료들은 학생들이 제가 불쌍해서 동정표를 보낸 거라고 하데요. 맞는 말 같아요.”
“혹시 학생들 중에 남자가 얼마나 되던가요?”
아비투스의 질문에 루나는 왜 묻는지 이해가 안 돼서 눈을 잠깐 동그랗게 떴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전부 남학생이었어요.”
아무래도 루나는 학생들이 자신에게 사심을 품고 있었다고 의심해본 적이 없던 모양이다. 아비투스는 괜히 그 점을 지적했다가는 대화가 복잡해질 거 같아서 말을 아끼고 목만 가다듬었다. 하지만 카르델은 그런 섬세함이 없었다.
“시험을 건성으로 치는 건 아마 학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럴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루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동기들도 항상 그렇게 말했는데.”
그에게는 루나의 존재 자체가 남학생들에게 자극적이었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 거시기 뭐냐 무법자의 육감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에게 더 물어보면 다들 말을 돌리더라고요. 왜들 그럴까요?”
아비투스는 그녀가 상처입지 않을 말을 겨우 생각해냈다.
“아마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아아. 그렇구나.”
두 남자는 마법사들이나 대학 안의 사회상은 아는 게 없었지만 방금 대화로 루나의 동료들이 그녀를 다소 짓궂게 대했다는 걸 알았다. 말하다보니 루나도 묻고 싶은 게 생겼다.
“그러고 보니 아비투스 씨는 어쩌다 군에 입대하셨나요?”
“저는 식민지 자원 병사입니다. 제 고향은 르바티아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루나는 그 첫마디부터 가벼이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고 직감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시작했습니다. 르바티아 왕국은 체력 좋은 저희 민족들에게 갑옷을 입혀서 싸우게 했고요.”
“세상에.”
그녀는 낯빛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이야기를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감정 변화를 뚜렷하게 보이는 루나의 모습에 아비투스가 되레 당황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흑인들을 총알받이로 썼다는 거잖아요.”
“사실 대우는 굉장히 좋았어요. 싸울 때 입는 갑옷들도 한 땀 한 땀 정성들여서 주문제작해준 거였고. 음식도 맛있고. 저희들이 차별을 많이 받기는 합니다만 왕국은 군인들에게 극진히 대해줍니다. 입대하고 나서 대위님을 만나고 백인들에 대한 제 편견도 조금 바뀌었죠.”
카르델이 능글맞게 입가를 꿈틀거리다가 끼어들었다.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요. 어떤 마족 장교가 르바티아에서 온 제국군에게 붙잡혀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나는 귀를 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요?”
“마족 장교는 엄숙히 고문과 심문을 견뎌낼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이게 웬일. 포로수용소가 와인까지 곁들인 맛있는 음식을 한상 차려주는 겁니다. 장교는 직감했죠. 아, 나를 데리고 있을 가치가 없으니까 마지막 자비로 최후의 만찬을 차려줬구나. 그는 울면서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얌전히 때를 기다렸죠. 그날 저녁에 사관이 감방으로 오기에 장교가 말했죠. 나는 이제 준비가 됐다. 그리고 전사들에게 예를 지킨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잠깐 쉬고 그는 말을 이었다.
“사관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대답했어요. 나는 사과를 하러 왔습니다. 착오가 있어서 당신에게 사병들이 먹는 짬밥이 보내졌는데 이제부터라도 장교에 걸맞게 대접할 테니 무례를 용서해주지 않겠습니까?”
“우스갯소리죠?”
루나는 당연한 반응을 보였고 아비투스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때로는 현실이 농담을 능가할 때도 있는 겁니다.”
평소의 모습으로 봤을 때 아비투스는 빈말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루나는 헛웃음 소리를 한번 내고 감탄했다.
“르바티아가 그렇게 국력이 강한 나라인 줄 몰랐네요.”
“그냥 먹을 거에 집착하는 겁니다. 총알보다 와인을 더 많이 가지고 다닐 정도니.”
그때 카르델이 길거리에 있는 간판을 보고 일행들을 불러 세웠다.
“야. 공중목욕탕 있다.”
루나가 그 말을 듣고 카르델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어디?! 어디요!”
카르델은 그 기세에 눌려서 손을 들고 어눌한 목소리를 냈다.
“저쪽이요.”
“먼저 갈게요!”
그녀를 떠나보내고 남아버린 남자들은 서로 말없이 얼굴만 쳐다보다가 결국 루나의 뒤를 쫓았다. 머리에 쓴 실크 모자를 누르면서 달린 루나는 공중목욕탕 현관문에 앞에 멈췄다. 벽보가 문짝에 붙어있어서 보니 영업을 하지 않는 중이라고 되어있다. 루나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됐다.
옆에 있는 작은 부스에서 경비원이 미닫이 창문을 열고 말했다.
“최근에 온 여행자요? 목욕탕은 한 달 전부터 이런 꼴이라오.”
“왜요?”
“난 몰라유. 정부 사람들이 하지 말라 하더라고.”
아직도 온수 목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루나가 벽보만 바라보며 멀뚱히 서있자 뒤에 있던 아비투스가 가자고 재촉했다.
“어디 하는 곳이 따로 있겠죠. 마법...”
그녀를 평소대로 부르려다가 아비투스는 옆에 있는 경비원을 보고 말을 고쳤다.
“루나 아가씨. 그게 아니더라도 여관에서도 씻을 수는 있습니다.”
아직도 실망에서 벗어나질 못한 그녀를 위해 카르델이 불에 기름을 부었다.
“양철 그릇과 최고급 스펀지가 마련되어 있지요.”
루나는 토라진 얼굴로 카르델이 옆구리를 찰싹 때렸다.
◆
온갖 공방들과 창고들이 틀에 찍힌 벽돌들처럼 길거리에 똑같은 모양으로 줄줄이 늘어섰다. 대패에서 튀어 오른 톱밥이 흩날리고 달궈진 쇠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인부들은 자재들을 들쳐 매고 성큼 걸어 다녔고 바람이 지나가면 옻칠할 때 쓰는 약품 냄새가 콧속을 핥았다. 거리가 끊어지면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를 계속 뿜어대는 거대한 공장이 나타나는데 수작업으로 세워진 공방들의 애교 있는 모습하고 비교되어서 보고 있으면 이물감이 들었다.
걸레짝이 된 마차가 궁상맞은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길거리를 가로질렀다. 단테는 가게의 간판들을 계속 살펴가며 길을 찾았다. 원하는 곳에서 마차를 멈추고 그가 말들을 묶자 짐칸에 있던 일행들도 알아서 바깥으로 내렸다. 샤카자이아는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자리는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신경질이 가득한 손길로 자신의 보라색 케이프에 붙은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계속 때려서 털어내려고 했다.
“어떻게 이 넓은 도시에서 영업하는 목욕탕이 하나도 없어?!”
레스가 허리춤에 찬 권총이 망토에 가려지도록 고쳐 잡으면서 대답했다.
“장사가 안 돼서 닫았나보지. 서구의 인간들은 목욕을 싫어한다고 들었어.”
“예전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제대로 씻고 살아요. 그러고 보니 당신 유목민이잖아. 목욕 안 하고 지내는 일이 꽤 많았겠네요.”
“물이 없어서 그런 거지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야.”
“가장 오래 못 씻어본 게 어느 정도에요?”
“안 듣는 편이 좋아.”
그 말을 듣고 아자리는 레스로부터 슬금슬금 멀어졌다. 진짜 불결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장난이었다. 레스는 아자리하고 같은 날에 여관에서 씻은 적이 있었다.
단테는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혹시 목수이십니까?”
거기 있는 사람은 난쟁이였다. 땅딸막해서 머리 높이는 아자리하고 비슷했지만 팔다리는 다부져서 나무줄기 같았다. 얼굴도 우락부락해서 보이는 것 그대로 본을 떠서 조각을 하면 도둑 쫓는 부적으로 쓰기 좋아보였다. 수염은 턱하고 입술은 물론이고 구레나룻부터 뺨까지 스멀스멀 전염되듯 기어오르고 있었다.
난쟁이는 단테를 올려다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차별적으로 말해?”
“네?”
“난쟁이라면 다 기술직인줄 알아?! 난쟁이라면 전부 금화를 숨겨둔 던전 뺨치는 비밀 공간이 자기 방에 있고 맨날 냄새나는 몰골로 공방에서 뒹굴 거리며 사는 줄 알아? 우리도 예술가가 있어! 우리도 학자가 있어! 우리도 그냥 평범하게 살아!”
상대가 갑자기 성을 내자 단테는 어쩔 줄 몰라 모자를 벗고 굽실거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민감한 이야기이신 줄 몰랐습니다.”
“다른 종족 놈들이 우리들만 보면 백 명 중에 백 명이 다 그렇게 묻는다고! 세상이 어느 땐데 정치적 중립성도 몰라?!”
레스 일행들도 난쟁이들을 생각하면 대장장이에서 망치를 들고 있는 모습 밖에 떠오르질 않아서 그 말을 듣고 깊이 깨달았다. 상대가 유난히 예민하게 굴기도 했지만 단테는 어른스럽게 대처했다.
“다름이 아니고 이 근처에 제페토라는 난쟁이 장인이 있다고 들어서 오해했습니다.”
“내가 제페토인데.”
제페토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가만히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모두 당황해서 어떤 표정을 할지 모르고 있어서 제페토는 만족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 우하하하하! 아, 이건 매번 통한단 말이야. 여하튼 뭐요. 뭘 맡기고 싶어서?”
일행들은 재미있기는커녕 표정이 떫기만 했다. 단테만이 능숙하게 편안한 얼굴을 지켰다.
“마차를 수리하려고 하는데요.”
그 말을 듣고 제페토는 바로 근처에 세워져있는 마차로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이거 새로 사는 게 더 나을 걸.”
어느 정도 각오는 했으나 단테는 얼굴이 착잡해졌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바퀴 축만 망가졌으면 몰라 이렇게 표면이 아작 나면 방법이 없어. 이대로는 아무리 칠을 해도 안개나 이슬이 속으로 파고 들어서 금방 썩어. 비라도 한 번 내리면 황야 어딘가에서 벌레들 부화장으로 변할 걸.”
다른 사람들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마차는 폭탄 파편에 맞아서 일그러진 곳에서 묘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하이고야. 지금까지 잘 버텨줬는데...”
“참나 폭격이라도 맞은 꼴이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심한 건 처음 보는구먼.”
뒤에 있던 일행들은 정곡을 찔려서 머쓱한 얼굴로 괜히 헛기침을 했다.
“마차를 새로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할까요?”
제페토는 자기 턱수염을 엄지손가락으로 쑤시듯이 긁으면서 답했다.
“많이 급하쇼?”
“빠를수록 좋지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일단 마차는 지금 재고가 없어. 제국군 새끼들이 아가씨들 모실 때 쓰는 인력거까지 싹 쓸어갔거든. 새로 얻으려면 주문제작을 해야 할 걸.”
갈수록 일이 골치 아파져서 단테마저도 평정심을 잃고 입 꼬리 한쪽이 씰룩거렸다.
“그럼 주문제작을 가장 빨리 끝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죠?”
“당연히 나지. 다른 놈들은 일주일이지만 나는 4일 걸려. 그런데 잔뜩 기대하고 찾아온 손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거시기 뭐냐 공방의 상태가 별로 좋질 않아...”
단테하고 제페토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일행들은 계속 사방을 구경하면서 멍 때리고 있었는데 순찰 중이던 기마경찰대가 그들이 있는 거리에 나타났다. 아자리는 급하게 둘 사이에 끼어들고 말했다.
“여기서 계속 이러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말할까요? 다리 아픈데.”
제페토는 수상한 점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말 잘했다 꼬맹이. 안 그래도 계속 올려다보느라 목이 꺾일 거 같았다.”
다행히 일행들은 순찰하는 경찰들의 눈을 피해 물 흐르듯이 길거리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제페토의 공방은 사람들이 수십 명은 들어갈 정도로 널찍했다. 벽 한 곳에는 자재들이, 그 반대편 벽에는 30가지 공구들이 보기 좋게 걸려 있고 공방 가운데에는 재료들을 다듬는 대형 장비들이 나란히 정리되어있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하는 예쁜 나선형 계단도 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유리창들은 모조리 깨졌고 마련된 자재들도 절반가량은 박살나서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장비들에는 누가 오줌이라도 갈겼는지 지린내가 났다. 난장판들이 정리되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최근에 이리 됐거나 치울 의욕이 없어질 정도로 자주 당했던 모양이었다.
“원래 손님들 앉으라고 만든 의자도 있었는데 저번에 같이 박살나버려서 이걸로 참아주라고.”
일행들은 그가 가져온 적당한 크기의 잡동사니들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누가 악의를 가지고 난동을 부린 거 같은데요.”
“댁들은 여기 온지 얼마나 됐나? 오늘?”
“네.”
“그렇다면 후딱 떠나는 게 좋아. 저 마차는 대충 보강만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 구하도록 해.”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나쁜 사람들한테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최근에 난처한 처지에 빠져있던 경험 때문에 샤카자이아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일처럼 생각하게 됐다. 제페토는 엘프가 자기에게 말을 거니 기분이 이상했는지 얼굴이 씰룩거렸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지. 나만 자릿세를 안 내고 있거든.”
그 말을 듣고 아자리가 물었다.
“지금 갱들이 여기를 지배하고 있나요?”
“내가 뭐 꿇릴게 있어서 그깟 놈들한테 고개 숙이고 살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현실을 바라볼 때도 됐을지 모르겠어.”
그렇게 쓸쓸한 목소리로 말하며 제페토는 난장판이 된 공방을 둘러보았다.
“내 공방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절반은 병원으로 실려 가고 난리도 아니야. 병문안을 가봤더니 병원은 또 진통제가 없어서 환자들한테 술을 주고 있더라. 완전 개판이라고.”
잠깐이나마 번화한 도시의 겉모습만 보고 기분이 들떠있었던 레스 일행은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레스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갱들이 이렇게 나대고 다녔어?”
어차피 마차가 수리되는 동안은 도시에서 지내야하니 사정을 들어두는 편이 좋을 거라 그는 생각했다. 공방이 엉망이 된 이후로 마땅히 할 일도 없었던 제페토는 답답한 속이라도 풀기위해 넋두리를 시작했다.
“원래는 다운타운에서 술집하고 도박장이나 운영하면서 근근이 살고 있던 놈들인데 4개월 전부터 갑자기 자잘한 조직들이 깡그리 망치 맞은 슬라임처럼 한 곳으로 합쳐졌어. 통일한 거야. 그 뒤로는 양아치들 눈에 뭐가 씌웠는지 경찰들한테 총까지 쏘지 뭐야.”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명색이 치안력이 존재하는 곳인데 어떻게?”
“경찰들은 돈 많은 놈들이 사는 ‘스트립’ 구역만 지켜. 하지만 이곳. 다운타운은 완전히 30~40년 전 황야나 마찬가지야. 총을 빨리 뽑는 놈에게 정의의 여신이 가랑이를 들이댄다고.”
다소 저속한 비유에 여자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으며 헛기침을 했다.
“아, 미안. 이곳에 여자들이 온 적이 없어가지고 그만.”
그때 제페토는 레스의 허리춤에 달린 권총 벨트를 보았다. 실내라서 레스는 잠깐 망토를 벗고 어깨에 걸쳐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