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2권] 61회 - 결투장
레스는 한번 신음 소리를 내고는 엎드린 채로 웅얼거렸다.
“왜 마룻바닥이 내 얼굴에 붙어있지?”
“그보다는 왜 머리에 터번이 붙어있는지 답해주지 그러나.”
“터번?”
말을 마치고 레스는 마치 조각상이 움직이듯 힘겹게 일어났다. 찬 바닥에 엎드려서 자느라 입이 조금 돌아갔지만 그가 손으로 대충 슥슥 문지르자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쓰고 있던 터번을 벗고 레스는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째려보았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아자리도 근처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깼다. 그대로 생각 없이 몸을 뒤척이다가 그녀는 누워있던 바에서 떨어졌다.
“꺅!”
그녀는 손님들이 앉는 스툴의 쿠션 부분에 한 번 부딪치고 땅으로 떨어졌지만 용케 고양이처럼 반사적으로 등을 웅크리고 양손과 양발을 뻗어서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본인도 놀라서 아자리는 몸을 일으켰을 때 얼굴이 귀신 본 사람 같았다. 샤카자이아가 인사했다.
“아타케라 미리시 (좋은 아침).”
“언니도 안녕하세요...”
레스는 목을 뿌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다가 바에 팔을 올려놓고 기대어 섰다. 아직 잠이 들깨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시간을 들여서 그는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었어... 그게 뭐였냐면...”
아자리가 재촉했다.
“뭐요.”
“아자리가 샤키보다 연상인데 왜 아직도 언니라고 부르는 거야? 어제 나이가 드러났을 때부터 호칭이 바뀌질 않았잖아.”
아자리는 즉시 답했다.
“그냥 나이 상관없이 서로 익숙하고 편한 쪽으로 부르기로 했어요.”
“정말 그래도 괜찮아?”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네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지. 아자리는 스물 둘. 나는 열일곱.”
레스는 그걸 왜 이제 와서 말하는지 몰라서 눈을 가늘게 떴다.
“맞기는 한데 무슨 상관이야?”
“너도 우리가 평소에 말 놓고 편하게 대하지만 별로 신경 안 쓰잖아. 비슷한 거다.”
그동안 아자리는 바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손님 자리보다 바텐더의 자리가 더 마음에 들어서 그랬다. 도중에 그녀는 그곳에서 뭔가 발견했다.
“레스... 왜 내 고깔모자가 여기 있죠?”
그녀가 자신의 고깔모자를 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레스는 아까 째려봤던 자신의 터번을 다시 보았다. 샤카자이아는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서 얼굴이 움찔거렸다.
“신기하네. 나도 지금 터번이 여기 있는데.”
“그리고 이 돈은 뭐죠?”
아자리는 주화가 80개 넘게 들어있는 무거운 종이봉투를 바에 올려놓았다. 금속들이 안에서 부딪치고 나무판자에 닿는 묵직한 소리가 가게 전체에 퍼졌다. 세 사람은 얼굴이 굳어버렸다. 레스는 어젯밤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기 시작해서 자신의 권총을 꺼내서 안을 살폈다. 원통 약실을 또르르 돌리면서 살피다가 그가 말했다.
“저기 애들아. 어젯밤에 뭔가 일이 있었나봐.”
레스는 권총 안에서 속이 텅 빈 탄피를 꺼내어 일행들에게 보여주었다. 샤카자이아는 그 탄피와 돈이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번갈아보다가 뭔가 깨닫고 창백해진 얼굴로 레스의 멱살을 붙잡고 봉제인형처럼 번쩍 들어올렸다.
“대체 뭔 짓을 하고 온 거야!”
“뜨헙! 으헉! 으아악!”
그녀가 화를 낼 때 의래 그렇듯 무척 자연스러운 공용어 억양이 나왔다. 소란을 듣고 단테와 윈프리도 1층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서 정신을 차린 아자리와 레스의 기억을 합치자 어제 일이 얼추 정리되었다. 아자리와 레스는 벌 받는 표정으로 무릎에 손을 얹고 나란히 손님용 좌석에 앉아있다. 단테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리며 바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무슨 짓거리들이야!”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자리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텐더 자리에 있는 윈프리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가를 움켜쥐고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단테가 말을 이었다.
“그나마 얼굴은 안 들켜서 다행이지만 댁들을 데리고 상인길드로 가기는 글렀군.”
윈프리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끼어들었다.
“진정해. 꼬리는 안 잡혔으니까 별 일 없을 거야.”
“소문 듣고 곧 여기로 누군가가 올 거 아닙니까?!”
“그 금은방은 클랜턴 갱들이 돈세탁을 하거나 장물을 처리하는 가게야. 자기들이 보호하는 가게가 그런 망신을 당했다고 소문을 퍼트리지는 않아. 체면이 있으니까.”
레스는 그 말을 듣고 겨우 희망을 싹 틔웠다.
“그럼 괜찮은 걸까요?”
“들키지만 않으면. 적당히 변장하고 다닌다면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보다는 어제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볼까. 왜 목욕탕이 운영을 안 하는지 알고 싶었지?”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설명을 시작했다.
“최근에 싱크홀이 발생하고 있어.”
“싱크홀?”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윈프리가 말을 이었다.
“땅이 갑자기 푹하고 꺼지는 현상이야. 이 도시가 사용하는 물은 모조리 지하에서 나와. 최근에 땅 위로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칠하면서 땅으로 들어가는 빗물은 줄어들고 사람들이 쓰는 수량은 늘어만 가니 땅 속에 빈공간이 생겼어. 그 빈 공간 위로 시설들이 겹겹이 쌓여서 지반이 무게를 못 버티고 붕괴하면 말 그대로 땅이 사라져버리는 거지.”
아자리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래서 목욕탕부터 영업을 중지시킨 건가요?”
윈프리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런다고 별로 티도 안 나는데 말이지. 그보다는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도록 수도시설을 개량하거나 공장을 멈춰야하는데.”
샤카자이아는 다소 복잡한 얼굴이었다.
“역시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풍요를 누리면 정령이 천벌을 내리는 건가.”
윈프리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어서 눈웃음을 지었다.
“천벌이라. 싱크홀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연재해니까 맞는 소리야. 너희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니?”
일정을 정하는 건 단테가 도맡고 있어서 다들 그를 쳐다보았다. 단테는 자신의 정수리를 벅벅 긁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나마 자유로운 사람이 저하고 샤키 양이군요. 상인 길드로 가서 적당한 일감을 찾고 노잣돈을 벌어봐야겠습니다.”
레스가 단테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는 어쩔까?”
“알아서 하시죠. 갑시다 샤키.”
아직 화가 안 풀렸는지 단테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와 아자리는 할 말이 없어서 단테와 샤카자이아가 가게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참선하듯 가만히 있었다. 예배당처럼 조용해진 가게 속에서 아자리가 윈프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가 뭐 도울 거라도 있을까요?”
“가게 청소 도와주면 위스키 한잔은 줄 수 있어.”
두 사람은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허무한 웃음소리를 냈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둘은 청소도구를 챙기고 윈프리를 도왔다. 일단 가구에 쌓여있던 먼지들을 모두 치우고 바닥을 쓸 차례가 됐다. 다 같이 빗자루 질을 하면서 윈프리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오전에는 가게 문을 안 여니까 나하고 어디 구경이라도 가보지 않겠어?”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레스가 대꾸했다.
“무슨 구경이기에?”
“클랜턴 갱단이 주최하는 결투 대회가 곧 열려. 별에 별 총잡이들이 그곳에 몰리지. 어제 내가 한 번 언급하지 않았나?”
잘 생각해보니 술에 곯아떨어지기 전에 들었던 기억이 나기는 했다. 레스가 입을 열기 전에 아자리가 먼저 말했다.
“보고 싶기는 하지만 어제 그 난리를 쳐놓고 괜찮을까요?”
“물론 변장은 하고 가야지.”
뒤늦게 레스가 미처 못 한 말을 뱉었다.
“저도 여기 놈들 수준이 궁금하지만 얌전히 지내고 싶습니다.”
윈프리는 한쪽 볼을 부풀리면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발상 하나를 떠올리고 제안했다.
“그럼 이건 어때. 거기서 내 경호원 역할을 해주는 거야. 나하고 같이 가주면 숙박비를 한 사람 몫까지 깎아줄게. 어차피 여기서 하루 이상 더 묵어야 하잖아?”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처지여서 레스와 아자리에게는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윈프리가 그들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지 의심도 들었다. 레스가 바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
“혹시 절 그 결투장에 참가 시킬 생각이십니까?”
“강요는 안 해.”
“아무리 제가 겁이 없어도 그러고 싶지는 않군요.”
아자리가 말을 꺼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돌린 눈치다.
“레스. 그냥 같이 가주기만 해줘도 숙박비를 깎아준다잖아요. 우리 둘 다 마침 구경하고 싶은 참이고 그냥 가보죠. 지금 말고도 앞으로 변장하고 돌아다닐 일도 많으니 몰래 돌아다니는 연습한다 생각해도 좋고.”
그렇게까지 이유를 붙이고 나니 레스도 마음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해서 어떤 상황이라도 정당화를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빗자루 질을 완전히 끝마칠 때까지 잠자코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마음을 돌렸다.
“그럼. 혹시 저희들 몸에 맞는 옷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윈프리는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돌아왔다. 두 사람은 그녀가 가져온 소품들을 신중히 살펴가며 나름대로 다른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다.
레스는 여태껏 걸쳐왔던 망토를 벗고 다른 남자들이 흔하게 입는 외투로 갈아입고 챙 달린 총잡이 모자를 머리에 썼다. 치수가 조금 헐렁해서 그에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무개성한 모습 덕분에 변장하겠다는 본래의 목적에는 얼추 맞았다.
아자리는 머리카락에 포마드를 발라서 모조리 뒤로 넘겨버리고 신문팔이 소년들이 즐겨 쓰는 캡 모자를 썼다. 뒤로 넘겨서 뭉친 머리카락을 모자로 눌러버리자 뿔이 거의 가려졌다. 그리고 평소에 걸치고 다니던 보라색 케이프 대신 가죽 재킷으로 갈아입었고 치마도 바지로 바꿨다. 단장을 마치고 나니 그럭저럭 남자아이로 보였다.
윈프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화장품으로 두 사람을 꾸며주고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레스는 더 늙어졌고 아자리는 더 어려졌다. 윈프리가 자신의 외출용 외투를 옷걸이에서 꺼내며 말했다.
“그럼 동네 구경하러 갈 준비 됐나?”
“잠깐만요.”
아자리는 양해를 구하고 바에 올려놨던 돈들을 챙겼다.
“아무래도 돈은 직접 들고 다녀야죠.”
그들은 가게를 나오고 골목을 걸었다. 길은 더럽고 유리창들은 금이 가있었다. 아자리는 제국에서 여태껏 지내왔던 난민촌이 생각나려하고 있었다. 그 생활로부터 벗어난 지 겨우 1주일도 안 됐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마음 변화 때문에 아자리는 잡담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전에는 이런 가난한 동네에서 의사 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었죠.”
“의사? 어머, 너 마법사인가 보구나. 그 고깔모자는 장식이 아니었구나?”
레스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자리가 예전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그도 괜히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려했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 마법가게가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는 상황이 어떤가요?”
윈프리는 잠깐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가게 주인은 오래전에 갱들한테 끌려가고 소식이 없단다. 이름은 톤토야.”
“톤토? 어감이 특이한데 혹시 원주민인가요?”
“이 도시가 세워지기 전에 여기서 원래 살던 부족의 주술사였지. 좀 특이한 사람이지만 근본은 착하단다.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죽이거나 아프게 하지는 않겠지만 대체 갱들이 톤토에게 뭘 시키려고 데려갔는지 모르겠어.”
“곤란하네. 여기까지 온 김에 가게를 들르고 싶었는데.”
생각 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그들은 목적지에 다 왔다.
아무것도 없는 도시 외곽의 널찍한 허허벌판에 사람들이 와글거렸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해도 150명은 넘어보였고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걸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차려 입은 사람도 있었다. 인파들을 지나서 사람들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자 결투장이 눈에 보였다. 레스가 말했다.
“대체 저게 뭐야?”
작은 집 한 채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 법한 거대한 구덩이가 그들 앞에 있었다. 깊이는 대략 8미터 정도였고 구덩이의 가장자리는 널빤지를 세워서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을 했다. 저만한 크기의 구덩이를 파내려면 흙을 족히 수천 톤은 파내야 했다. 아자리는 보자마자 저게 어떻게 생겼는지 눈치 챘다.
“저게 바로 싱크홀로 생긴 거군요?”
윈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는 여기에 건물이 하나 세워질 예정이었는데 도중에 땅이 무너져버렸어. 다시 구덩이를 메꾸는 것도 결국 돈이라서 방치되고 있었는데 갱들이 결투장으로 재활용한 거야.”
일행들이 섞여있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구덩이 반대편에는 행사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결투 대회에 참가하는 총잡이들로 보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만의 방법으로 긴장을 풀었다. 어떤 사람은 팔굽혀펴기를 하는가하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감에 넘쳤고 누군가는 얼굴에 절망이 가득했다.
레스가 윈프리에게 물었다.
“무슨 이득이 있어서 총잡이들이 여기에 참가하는 겁니까?”
“이건 갱단들의 입단심사도 겸해.”
“입단 심사?”
아자리가 시선을 향한 곳에서는 갱단원이 칸막이 좌석에서 판돈을 받고 증서를 끊어주고 있었다. 내기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분위기도 경마장하고 비슷했다. 윈프리가 계속 설명했다.
“이제 총잡이들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건 알지 하얀 모자?”
“먹고 살기 좋은 직업은 아니죠.”
“총잡이가 고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그중에 제일 인기가 좋은 건 장래가 유망한 갱단에 들어가서 한몫 잡는 거지. 저 앞의 개척지에서 방황하고 있던 별에 별 총잡이들이 여기 죄악의 도시로 몰려와서 너도나도 갱단에 들어가겠다고 난리야.”
“그러니까 저 참가자들이 모두 입단 희망자라고요? 상위권에 들어가면 조직의 일원이 되고?”
“전부 입단 희망자는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흥을 돋우기 위한 총알받이로 끌려 온 사람도 있지.”
아자리가 감상평을 덧붙였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네요.”
“하지만 어쩌겠니. 싸움 구경보다 재밌는 건 없는 걸. 저쪽에 가면 쓴 사람들 보이니?”
윈프리가 가리킨 곳에는 결투장을 가장 구경하기 좋은 위치에 나무로 만든 관람석들이 계단처럼 여러 단으로 쌓여있었고 그 위에는 고급스러운 천막이 처져있었다. 그 천막 아래로 다양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면은 무도회에 쓰고 갈법하게 화려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트립’ 지구에서 온 상류층들이야.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니 저렇게 은근슬쩍 구경하러 오시는 분들도 많지. 클랜턴 갱들은 저기까지 손이 닿고 있어.”
아자리는 인상을 팍 썼다.
“여기서 싸우다가 다친 사람은 제대로 치료해주나요?”
“이미 알고 있잖니.”
갑자기 대회를 기다리고 있던 참가자들 중 누군가가 기회를 보고 달아나려고 했다. 도망치려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 평원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으나 곧 갱단원으로 보이는 총잡이가 권총으로 한 방에 쏴서 쓰러트렸다. 쓰러진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중 태반은 분위기에 휩쓸려 총잡이의 솜씨에 감탄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상류층들은 환호까지 보냈고 그 갱단원은 보답으로 정중하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레스는 방금 총을 쏜 갱단원을 간신히 알아보았다.
“저 녀석 어제 가게에 있던 놈이야. 샤키한테 겁먹고 달아났던 녀석.”
목청 큰 사회자가 확성기에 입을 대고 고래고래 외쳤다.
“참가자 중 하나가 과음을 하다가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잊어버린 거 같습니다. 하하하. 곧 다른 후보를 데려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혹시 참가를 자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 또한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아마 갱단은 방금 도망치려던 사람처럼 억지로 데려 온 사람을 예비용으로 더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레스는 이를 빠득 갈았다.
“총도 뽑지 않은 상대의 등을 쏴버리고도 총잡이라고?”
“이게 현실이야 하얀 모자.”
윈프리도 씁쓸하게 말했다.
아자리는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구역질나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봤으니 슬슬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참에 그녀는 순간 아는 얼굴을 찾아냈다.
“레스? 레스! 제페토 씨야! 저기 제페토 씨가 있어!”
레스와 윈프리는 깜짝 놀라 아자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페토는 각오로 가득한 표정과 함께 칸막이 칸으로 가서 판돈을 한가득 걸고 있었다. 레스와 아자리는 주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밀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레스가 악귀 같은 기세로 달려들며 소리쳤다.
“제페토! 제페토! 그 돈 뭐야! 우리 돈 아니야?!”
제페토는 예상하지 상황에 당황하고 도망치려다가 판돈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는 할 말을 못하고 계속 더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이건 그 사정이 있어! 들어봐! 정말이야!”
아자리는 자기와 거의 키가 비슷한 제페토의 멱살을 붙잡고 그 작은 몸집에서 나왔다고는 믿지 못할 괴력으로 상대를 흔들었다.
“당장 환불해요! 환불하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제페토가 건 판돈은 그들이 어제 지불했던 선납금이 분명했다. 그가 돈을 날려먹고 파산하는 건 일행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노름의 흥망에 마차가 걸려있었다. 칸막이 칸에서 일하고 있던 갱단원은 이런 광경이 익숙하다는 듯 편안한 말투로 그들에게 말했다.
“기차는 이미 떠났어. 지금 참가자 하나가 비어버렸으니 판돈을 옮길 수는 있지만 이제 와서 뒤로 뺄 수는 없다고.”
레스와 아자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지고 싶었다. 제페토는 죄 지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머릿속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얌전히 이대로 지나가기를 바랬다. 그리고 윈프리는 자기가 기대하던 순간이 본의 아니게 찾아와서 은근슬쩍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제 그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회자가 그 순간을 재촉하듯 다시 확성기를 들고 고함을 질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만일 여기서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희가 준비해온 또 다른 후보자가 저 빈자리로 들어오게 됩니다. 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솜씨와 용기를 시험할 분 없으십니까?!”
레스는 호주머니에서 스카프를 꺼내고 얼굴에 복면을 두른 다음 냅다 뛰었다. 그대로 울타리 경계선을 훌쩍 넘고 사회자에게 달려갔다. 아자리는 쓰고 있는 모자가 뿔에 찔려서 구멍이 날정도로 잡아당기며 절규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어? 잠깐만.”
그녀는 갑자기 평정심을 되찾고는 칸막이 칸에 있는 갱단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퇴장한 참가자한테 걸려있던 배당이 얼마나 되나요?”
“제일 높아. 척 보면 알잖아. 겁쟁이 티가 나서 아무도 안 걸었어.”
아자리는 자기가 갖고 있던 돈을 모두 상대에게 내밀면서 덧붙였다.
“이거하고 방금 이 아저씨가 걸었던 돈들을 모조리 저 사람에게 걸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