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2화 〉[2권] 62회 - 그 남자의 고질병 (62/188)



〈 62화 〉[2권] 62회 - 그 남자의 고질병

관중들은 진짜로 새로운 도전자가 외투를 펄럭이며 나타나자 흥분해서 함성을 질렀다. 비록 그 도전자는 패기 넘치는 용자라고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절실한 기색이 몸짓에 드러났고 얼굴은 복면으로 가려져서 수상했지만 좌우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니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열광했다. 사회자는 확성기를 입에서 때고 레스와 대면했다. 그는 진짜로 자원하러 오는 멍청이가 있을 줄은 몰라서 표정에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참가하겠다는 건가? 진짜로?”

“달리 뭐가 있겠소.”

레스는 어떻게든 정체를 들키면  된다는 일념 때문에 평소에 쓰지 않는 말투로 바꾸고 목소리도 잔뜩 내리깔았다. 사회자가 그의 복면을 가리켰다.

“그건 왜 쓰고 있는 거야?”

“신비주의.”


급하게 달려온 터라 적당한 변명거리를 준비하지 못해서 레스는 떠오르는 대로 지껄였다.

“지금 장난해?”


사회자는 마음 같아서는 레스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흥분해버린 군중들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기 생각만으로 결정하면 안 되겠다는 판단에 그는 천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클랜턴 갱단의 두목이 상류층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두목도 비슷한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었는지 사회자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두목이 옆에 있던 자신의 하수인에게 뭐라 속삭이자 하수인은 곧바로 사회자한테 달려왔다.


“분위기 망치지 말고 그냥 받아주랍니다.”

그렇게 속삭였다. 사회자는 두목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확성기를 들어올렸다.

“새로 나타난 이 의문의 사나이에게 큰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곧  번째 경기가 시작될 터이니 이 의문의 사나이에게 걸고 싶으신 분은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레스는 관중들의 야만적인 시선 때문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본인은 딱히 의도하지 않았지만 얼굴을 가린 복면 위로 드러난 찡그린 눈매가 사람들에게는 전형적인 총잡이의 우수 넘치는 눈빛처럼 그럴싸해보였다. 하지만 딱히 레스에게 돈을 걸려는 사람은 없었다.

갱단원 몇 명이 그에게 와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지시에 따르기 전에 레스는 일행들을 보고 싶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계속 둘러보다가 마침내 레스는 그들을 찾아냈다.


아자리는 제페토하고 윈프리와 같이 울타리에 기대고 있었다. 아자리의 손에는 콜라와 핫도그가 들려있다. 이쪽을 걱정하는 눈치는 티끌만큼도 없다.

“나중에 두고 보자...”


레스는 들짐승마냥 복면 아래로 목울대를 울려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편 도시의 북쪽 지역에는 웬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도로 위에서 말을 천천히 몰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가죽 외투는 너무 낡아서 끝자락이 종이처럼 얇았고 모자는 찌그러졌다. 하지만 타고 있는 말은 몸집이 크고 건강해보여서 어울려보이질 않았다.

남자가 걷고 있는 길거리의 분위기도 그가 입은 옷만큼 궁상맞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배급 때문에 가족들을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미리 줄을 서서 자리를 지켰다. 거지들은 들개들보다 못한 꼴로 구걸하는 깡통조차 없이 시체처럼 절망에 잠겨있다. 어느 건물 앞에서는 오랫동안 세탁하지 못한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제발 통조림 2개만 부탁하네 젊은이. 어미는 젖이 안 나오고 애는 열이 나기 시작했어.”

중년 남자를 상대하고 있는 갱들의 옷에는 곳곳에 화려한 술이 달렸고 부츠의 뒤꿈치에 달린 박차는  닦여서 윤이 났다. 세 갱단원은 온갖 생필품들을 늘어놓은 가판을 지키고 있었는데 주민들은 그들이 무서워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향해 눈길조차 보내지 못했다.


그들 중 하나가 노골적으로 상대해주기 귀찮다는 얼굴과 함께 중년 남자를 때리듯이 밀쳤다.


“나도 온정이 있는 사람이라 어지간하면 봐주고 싶거든? 그럼 가격의 절반이라도 가져와야할 거 아니야! 어디서 빈손으로 와서 진상은!”

“하지만 통조림 하나에 40 탈레르라니...”


“탈레르라고 했냐?! 당장 돈도 안 가져온 주제에 탈레르? 그딴 휴지조각을 어디에 쓰라고!”


갱이 그렇게 악을 지르며 중년 남성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중년 남성이 애달픈 모습으로 쓰러졌고 주민들은 다들 눈을 돌렸다.


천천히 말을 몰던 남루한 차림의 사내는 어느덧 그곳에 닿았다. 걷어차인 중년 남성은 훌쩍이면서 사내의 옆을 지나갔다. 갱들은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눈살을 찌푸리고 째려봤다.

사내는 그런 불친절한 환대에 개의치 않고 말을 세운다음 넉살맞게 인사했다.


“안녕하신가.”

“지나가는 길이라면 어서 가시지.”

“롱 라이더스라는 갱단에 들어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지?”

갱들은 그 말을 듣고 말없이 서로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태도를 보아하니  알고 왔으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갱들은 상대가 창피해하라고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농담  번 해봤어.”


“우리 일원이 되려면 뭐가 있어야하는지 알고 있나 아미고(친구)?”


“글쎄. 뭐지? 정말로 꼭 알고 싶군.”

사내는 명랑하게 한 박자씩 또박또박 발음해서 대꾸했다. 그 말투가 갱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땅에 대고 겨누었다.


“그게 뭐냐면. 자리가 있어야 들어오던가 하지!”

다른 갱들도 권총을 꺼내고 땅에다가 총질을 해댔다. 남자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서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모습을 보면서 다들 한바탕 비웃었다.


튼튼하고  쌘 말이라 한 번 날뛰니 몸을 가누기 어려웠지만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버티다가 팔을 뻗어서 길에 있는 가로등을 붙잡았다. 그대로 손에 힘을 주고 등자에서 발을 빼내자 말은 주인만 남기고 저편으로 가버렸다. 그는 한 손의 악력만으로 가로등을 붙잡고 허공에 매달린 채 몸에 남은 관성으로 봉춤을 추듯 빙글 돌았다. 마침 근처에서 대패질을 하고 있던 어느 목수와 눈이 마주쳐서 남자는 남은 손으로 모자를 살짝 벗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목수는 관을 만들고 있었다. 늙은 남자였는데 이 동네에서 일어난 꼴을 여러  봐왔는지 다른 주민들처럼 소심한 기색 없이 때 묻은 의연함이 눈에 띄었다.

“그래.”

그렇게 말하고 상대는 대패질하는 자기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남자는 가로등을 붙잡은 손에서 힘을 살짝 빼고 땅으로 스르륵 내려왔다.


“왜 이런 곳에서 관을 짜고 계십니까?”


“요즘 필요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갱들이 자주 사가나요?”

“놈들한테는 팔고. 시민들에게는 그냥 주지.”

늙은 목수는 남자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한 거 같아서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이 도시에서 나가게. 놈들은 경찰한테까지 총을 쏘는 놈들이야. 세력이 너무 커서 연방보안관도 놈들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하고 있어.”


남자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관을 골고루 덮은 자신의 수염을 한  쓰다듬더니 그는 품속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다. 그걸 자기 입에 물리고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며 남자는 말했다.


“지금 저기 저 친구들이 경찰한테 총을 쐈다고요? 그럼 일단 수배령도 내려져있겠군요?”

“그래. 그게 왜?”


피카니는 자신의 바지에 성냥을 긋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고 뱉으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읊조렸다.

“관 3개 준비해주세요.”





참가자들이 모여서 대기하는 곳에서 레스는 싸구려 의자에 앉은 채 모자를 벗고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기운 없는 목소리가 그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숙취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네.”

자신의 차례가 온 참가자들이 결투장으로 향했다.  총잡이가 밧줄을 붙잡고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자 사회자가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청 코너는 쇼생에서 온 화약의 신사! 드푸아 마르탱! 그리고 홍 코너는 황무지에서 태어나 자란 정통 총잡이! 데이브!”

아자리는 사회자의 해설과 관중들의 환호를 귓등으로 흘러 넘기며 묵묵히 아침밥을 먹었다. 결투장으로 내려온  총잡이들은 자신의 옷깃을 가다듬고 엄숙히 자리에 섰다. 그들이 타고 내려왔던 밧줄을 위에서 거둬가자 선수들은 이제 결판이  때까지 결투장에서 나갈 수 없게 됐다. 제페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자리에게 물었다.

“내가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정말  형씨한테 몰빵 하는 게 좋았을까? 오늘은 천하의 ‘바람돌이’까지 직접 나섰는데?”

“‘바람돌이’가 누군데요?”

아자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핫도그를 우물거렸다.


“그놈은 진짜 괴물이야. 인간의 몸으로 넘볼 수 있는 반사 신경의 극한에 이르렀어.  번도 진 적이 없지! 아무리 그 형씨가 잘 쏜다고 해도...”

윈프리가 그의 말을 끊고 대신 설명해줬다.

“어제 내 가게에서 행패부린  친구 말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아자리는 피식 웃었다.


한편 가만히 있는 레스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이다. 레스는 ‘바람돌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튜니티라고 적어놨더군. 진짜 이름 아니지?”

어느 정도 변장을 하고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기는 했으나 ‘바람돌이’는 레스를 알아챘다.  정도 눈썰미는 갖고 있다는 점에서 레스는 속으로 상대를 조금 인정해주었다.


“문제  것도 없잖아.”


“가볍게 생각하면  된다고 친구. 너의 애미랑 애비가 무덤을 어떻게 찾아오겠어?”


레스는 상대의 도발을 담백하게 받아넘겼다.

“걱정은 고맙지만  가족이 없어서 괜찮아.”

‘바람돌이’의 한쪽 눈가와 입 꼬리가 씰룩하고 떨렸다.

한편 결투장에서는 악단들이 나팔과 트럼펫으로 신나게 음악을 불었다. 결투를 기다리고 있는 두 총잡이는 각자 자신의 모자를 고쳐 잡고 옷자락을 옆으로 치웠다. 관중들은 음악 소리와 함께 그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자리가 일행들에게 물었다.


“음악은  필요하죠?”

제페토가 대답했다.


“총잡이들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어야지. 음악이 끝나면 심판이 공포탄을 쏴서 신호를 보낼 거야.”

총잡이들은 권총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정신을 가다듬었고 관중들은 서서히 사그러드는 음악 소리와 긴장감을 즐겼다.

아자리는  한발 쏘고 끝나는 권총 결투를 구경하느니 복싱처럼 치고받는 싸움이 더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온갖 규정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스포츠 경기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이 살벌한 공기는 분명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가 없는 즐거움이었다.

트럼펫 솔로가 마지막 가락을 길게 끌었다. 마지막 순간을 예상할  있도록 연주자는 서서히 음색을 작게 낮추었다. 마침내 음악 소리가 멎어버리자 심판이 공포탄을 쏘았다. 두 총잡이가 총을 꺼내는 동시에 승부가 갈렸다. 여태껏 쌓여온 긴장감이 한 번에 터지자 관객들의 환호성이 땅이 울렸고 함성에 짓눌리듯 패자는 땅으로 쓰러졌다.

승자는 데이브라는 사람이다. 그는 위에서 내려준 밧줄을 붙잡고 자기 힘으로 올라갔고 패자는 대회 주최 측에서 보낸 사람들에 의해 물건처럼 단단히 묶여서 옮겨졌다. 살아있는지는 여기서  수가 없었다. 아자리가 말했다.

“만일 결투에서 서로 총을 못 맞추면 어떻게 되나요?”

“그럴 때는 위에서 칼을 던져줘.”


윈프리가 대답했다.


“몇 개 던져주죠?”


“하나.”

결투장 정리가 마무리되자 사회자가 다음 차례를 소개했다.

“자! 이 순간을 기다려오신 분들은 어서 화장실을 다녀오시라! 우리 클랜턴 갱단 최고의 총잡이 ‘바람돌이’ 하라스가 나오시노라!”


‘바람돌이’는 인기가 대단한지 주위의 공기가 배로 뜨거워졌다. 제페토는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벌써? 평소라면 가장 마지막에 나와서 피날레를 하는 역할인데?”

윈프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니까.”


‘바람돌이’ 하라스는 부름에 응하고 자리를 떠나기 전에 레스를 째려보면서 말했다.

“다른 놈이 널 쏴버리면 분이  풀릴 거 같군.”

레스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태연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차케라(고마워).”


자기가 못 알아듣는 말로 대답하자 하라스의 관자놀이에서 핏대가 선명히 솟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아 보이지만 결투장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레스는 다시 자기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직도 숙취 때문에 괴로웠다.

“이거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관중들의 열렬한 성원과 함께 하라스는 사회자 옆으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소란이 진정되자 하라스는 사회자의 귓가에 대고 뭐라 말했다.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확성기를 다시 들어올렸다.


“다들 알다시피 저번 우승자는 자신에게 대적할 사람을 대회마다 딱 한 번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가 고른 상대는 의문의 사나이입니다!”

제페토는 머리를 움켜쥐고 낮게 절규했다.


“끝났어! 본전이라도 건지기를 바랐건만 이제 끝이라고!! 우읍?!”


아자리는 짜증나서 그의 입에 팝콘을 한줌을 쑤셔 넣어서 닥치게 만들었다.


레스는 초췌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결투장으로 향했다. 숙취도 안 풀렸는데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고 아침밥까지 못 먹었으니  상태는 최악이었지만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이 있을 리가. 그나마 얼굴을 가린 복면 덕분에 표정이  보여서 다행이었다.


갱단원 중 하나가 레스에게 총알을 하나 주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때가 되면 뽑아서  발만 쓰는 거다. 알아들었어?”

“그래.”

레스는 자신의 권총에 방금 받은 총알을 집어넣고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몸수색을 받았는데 그동안 시선을 위로 올리니 자신의 일행들이 보였다. 다들 평화로운 얼굴로 팝콘을 먹고 있어서 그 모습을 보고 레스도 힘이 났다. 긍정적인 힘은 아니었다.


“크르르르르...”

하라스는 어차피 같은 갱단 소속이라 그런지 몸수색은 받지 않았다. 레스와 하라스는 밧줄을 붙잡고 결투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땅 위에 나있는 표시 위로 발을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레스는 하라스가 권총 손잡이를 미리 쥐고 있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미리 잡고 있어도 돼?”


“불만 있냐? 규칙이다. 서로 같은 조건에서 시작해야 하니까.”


레스는 어깨를 한  들어 올렸다가 숨을 크게 내쉬고 팔을 축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걸 무슨 결투라고...”

“아까부터  이리 구시렁거려?!”

그들이 있는 구덩이 위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보통 대회에 참가한 총잡이들은 지금 순간에 말없이 살기 넘치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이겠지만 레스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 자기 할 말을 하느라 바빴다.

“미안한데 미리 해둘 말이 있어!”

음악 연주에 묻히지 않으려고 레스는 목청을 높였다. 본래 성품이 다혈질이었던 하라스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맞서서 같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결투 중인 거 알기는 하는 거냐?!”


나팔과 트럼펫은 부지런히 자기가 낼 소리만 내고 있다.


“지금 내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너한테 무슨 일 생기더라도 용서해줘!”


하라스는 자기가 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뭐?!  몸 상태가  좋으니까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용서해달라고?!”

“그래! 제대로 알아 들은 거 맞아!”

“너 병신이냐?!”

진지하고 엄숙해야할 결투장의 분위기가 두 사람의 수다 때문에 점점 요상해지고 있어서 관중들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아자리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저놈의 자식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음악 소리가 잔잔해지면서 결판의 순간이 다가왔다. 레스와 하라스는 허리에 권총을 찼을  가장 빨리 뽑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라스도 일단은 총잡이답게 자잘한 감정을 잊어버리고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레스도 자신의 신조대로 뒤늦게나마 상대를 얕보지 않고 정신을 곤두세웠다.

제페토는 차마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아자리는 시선을 레스에게 꽂아두었다.

음악이 희미해지자. 심판이 공포탄을 쏘아 올렸다. 결판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자리는 눈이 아플 정도로 집중했지만 방금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소리 질렀다.


“세상에?!”

반사속도가 아무리 타고나더라도 현재까지 측정된 바로는 인간의 뇌가 소리를 듣고 인식하기까지 최소한 0.08초 정도가 걸리며 뇌가 근육에게 신호를 보내는 시간은 0.02초라고 한다. 즉 인간의 반사속도 한계는 약 0.1초인 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2010년에 측정된 빨리 뽑기 기네스 신기록은 0.252초로  중에 0.145초는 소리를 듣고 반응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하라스의 기록도 여기에 거의 근접한 0.155초였다. 하지만 레스의 반사속도는 인간의 한계점까지 닿아버렸기에 하라스가 총을 뽑고 겨누고 있었던 순간에 이미 방아쇠를 당겼다.


레스가 신호를 받고 쏘는데 걸린 시간은 0.21초, 그리고 다시 총집으로 되돌리기까지 0.32초가 걸렸다. 이 광경을 직접 보게 되면 총을 뽑고 쏘는 순간이 잔상으로만 보이게 된다. 아자리는 레스가 작정하고 제대로 자세를 잡으면 얼마나 재빠를  있는지 직접 보게 되어 소름이 가라앉질 않았다. 충격 먹은 건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는데도 결투장 주변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어?”

하라스는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자신의 집중력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자기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복판에 새로 생긴 구멍 주변에 붉은 무늬가 꽃처럼 활짝 폈고 하라스는 상처를 부여잡으며 고통에 헐떡거렸다.

레스는 하라스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 어쩔 수가 없었어.”


“뭐...?”

그가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반응했다.

“평소대로라면 권총만 맞출 수 있었어. 하지만 오늘은 숙취 때문에 맞추기 쉬운 쪽을 노릴 수밖에 없겠더라고.”

그 말에 하라스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권총을 들어올렸다. 레스는 깜짝 놀라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총에 맞았을 거다.


“지금 뭐하는 거야! 승부는 났잖아!”


“같이 죽자  개새끼야!”

관중들은 저번 우승자의 추태에 당황해서 웅성거렸고 클랜턴 갱단의 두목은 화병이 도져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두목 바로 옆에 있던 가면을 쓰고 우아하게 앉아있던 누군가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아자리가 힘껏 소리 질러서 주최 측에게 말했다.


“당장 말려요! 승패 불복에다가 반칙이잖아!”

하지만 하라스를 말리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같이 총에 맞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 동료를 쏘자니 마찬가지로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레스는 자기 목숨을 알아서 구하는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총알을 피하면서 레스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작작  하시지!”

지금 그의 권총에는 총알이 없으니 직접 다가가서 때려눕히거나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달아나야만 했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총알을 피할 방법이 없으니 달아날 생각이었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세 번째 총알을 피하면서 레스는 확신했다.


‘조준이 점점 정확해지고 있어! 제대로 겨눈 총알을 피하는  불가능하다고!’


뒤로 피해도 총에 맞고 앞으로 가도 총에 맞는다. 하라스도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피로 물든 자신의 이빨을 환히 드러내며 웃었다.

“아직 세발이나 남았다! 다음은 머리통에 박아주마!”


레스는 심호흡을 하고 하라스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예상 못한 상황에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하라스는 배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자신의 핏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당당하게 총을 양손으로 붙잡고 레스를 정확하게 겨누었다. 레스는 속으로 외쳤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레스는 들고 있는 권총의 방아쇠울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상대의 조준점과 시선, 그리고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상대가 호흡을 멈추고 손가락에 힘을 주자 레스는 자신의 권총을 들어올렸다. 하라스는 자기가 조준했던 곳에 정확히 레스의 권총이 나타나는 광경을 보고 놀라면서도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오리칼쿰을 때리는 깊고 맑은 소리가 구덩이에서 흘러넘쳐 관객들에게 닿았다. 관객석에서 경악으로 가득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금 총알을 튕겨낸 거야?!”

“대체 저놈 뭐야?!”

엄밀히 말하자면 레스는 상대가 바라보는 곳과 총이 겨눠지는 장소를 관찰하고 손가락이 움직이는 순간을 노려서 자신의 권총을 방패삼아서 들어 올렸을 뿐이다. 말이야 쉽지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으로는 그 순간이 너무 빨라서 총알을 보고 튕겨낸 거나 다름없었다. 제페토가 넋이 나간 얼굴로 아자리에게 물었다.

“네 친구 정말 사람 맞니?”


“...”

하라스는 놀라서 잠깐 멈칫거렸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조준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레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괴성과 함께 권총을 집어던졌다.

“으랴아아아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속은 역사상 처음 인력으로 날아가는 투척 무기가 되어 하라스의 머리에 맞았다. 상대는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받침대가 사라진 마네킹처럼 벌러덩 쓰러졌다.

대회주최자부터 관중들까지 멍청이처럼 입을 벌렸고 불편한 침묵만 사방에 휘감겼다. 그 와중에 레스는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위쪽을 향해 외쳤다.


“빨리 밧줄이나 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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