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2권] 63회 - 지배자
결투장은 정리되고 있었다. 총에 맞은 하라스는 응급처치를 받았고 레스는 온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밧줄을 붙잡고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사기꾼!”
“이 새끼들아 내 돈 돌려줘!”
“꾸미고 친 거 훤히 보인다!”
레스도 사람인지라 야유를 듣고 기분이 불쾌했으나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중얼거렸다.
“실력으로 소문나느니 사기꾼으로 알려지는 게 차라리 낫겠지.”
사회자는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해보았다.
“우리 ‘바람돌이’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 방금 못 볼 꼴을 보여드리고 말았습니다... 그... 곧 있으면 다음 경기가 진행될 터이니 다들 자리에 앉아서 진정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은 불에 기름만 뿌린 꼴이었다. 폭풍 같은 사람들의 고함이 노성이 끓어올랐고 갑자기 군중들은 한 입으로 모아서 이렇게 외쳤다.
“저놈의 복면을 벗겨!”
“벗겨! 대체 무슨 놈이야?!”
레스 주위에 있던 갱단원들이 그 말을 듣고 이쪽으로 시선을 슬금슬금 옮겼다. 마침 갱도 레스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참이다. 아자리가 손깍지를 쥐었다가 피면서 중얼거렸다.
“여차하면 한방 쏴야겠군.”
제페토가 옆에서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아자리는 무시했다. 레스는 소란이 알아서 가라앉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째려보기만 해도 쫓아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힌 건 시간이 아니라 벼락이었다. 갑자기 경기장 한복판으로 굵직한 번개와 섬광이 수직으로 내리꽂히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구름 없이 맑은 날에 일어난 비현실적인 광경에 다들 입이 닫혔다. 레스는 아자리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추하군.”
속삭이는 목소리가 모든 사람들의 귓가에 선명히 들렸다. 아자리하고 레스한테도 예외 없이 그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공정한 승부였다. 추태는 저놈이 부렸는데 왜 모욕을 승자가 받아야하지?”
상류층이 앉아있던 특등석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서서히 걸어왔다. 레스만큼 키가 크고 체격도 훤칠한 사내였다. 그는 체형에 맞춰서 재단된 연미복을 입고 있다. 얼굴을 가린 가면은 장식이나 그림 없이 숨구멍과 눈구멍만 밋밋하게 뚫려있어서 보고 있자니 소름끼쳤다. 손에는 길쭉한 지팡이를 들었다.
“모두들 부끄러운 줄 알도록. 허락할 때까지 입을 다물어라.”
마치 그 말에 따르듯 관중들은 기침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아자리는 그 순간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속삭였다.
“이 느낌은 분명...”
가면을 쓴 청년은 레스의 앞에 멈춰 서서 두 손을 지팡이에 모아 땅을 찍었다. 마치 비둘기 사이에 있는 백로처럼 청년은 여태껏 이 도시에서 봐온 그 누구하고도 분위기가 달랐다. 레스는 본능적으로 그를 경계했다.
“방금 굉장히 멋졌네. 추하지 않았어.”
청년의 목소리는 귓가에서 들리지 않고 가면 너머에서 오고 있었다. 방금 귓가에 들린 목소리는 마법의 일종이었고 지금은 평범하게 말하는 거라고 레스는 직감했다. 그가 말했다.
“고맙군.”
“만나서 반갑네.”
관중들은 아직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치 도서관처럼 조용하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전 우승자를 쓰러트렸으니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지. 하지만 자네는 딱히 갱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로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거겠지.”
사실은 돈 때문에 엉겁결에 들어온 거지만 굳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그만두고 나가도 될까? 상금만 받으면 날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어.”
가면 너머로 청년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후훗. 어차피 더 이상 그쪽하고 붙으려는 사람도 없으니까 상관없어. 그 정도쯤이야 내 말만 들어준다면 별거 아니지.”
“그게 뭔데?”
“복면을 벗어.”
◆
상인길드의 규모에 걸맞게 왕래하는 사람들은 수가 많았다. 마차들이 건물 뒤편으로 들어가고 또 나왔다. 저 우뚝 솟은 시청 건물이 도시의 뇌라면 이곳은 도시의 심장이다. 어제만 하더라도 아무 느낌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하딘은 지금 저곳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중에 갱과 내통하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였다. 자발적으로 손잡은 이도 있을 거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을 가진 자도 있겠지.
길거리에는 할 일 없이 건물 벽에 기대어서서 시간을 때우는 남자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일하던 곳이 문을 닫아서 갑자기 직장을 잃어버린 실직자들이었다. 전쟁 중에는 흔한 일이다. 하딘 대위와 히콕은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서 상인길드 쪽을 계속 째려보고 있었다. 하딘이 히콕에게 물었다.
“검문소에서 들은 게 확실한 건가? 거기를 지나갔던 여우 수인과 다크엘프가 상인길드에 소속되어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불을 안 붙인 파이프를 묘기하듯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상대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다시 만난 히콕은 전에 봤던 무법자 복장 대신에 중절모와 트렌치코트로 갈아입고 왔다. 변이해버린 눈동자를 빼면 외모적으로 큰 개성이 없는 남자라 새로 입은 옷이 잘 어울렸다. 하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는 캐 물을 겨를이 없어서 넘어갔는데 지금 들어둬야겠군. 우리들은 어떻게 쫓아왔지?”
“주둔지로 가서 물어봤어. 거기서 댁들의 인상착의를 듣고 도시로 향했다는 사실도 확인했지. 그리고 몇 시간에 걸쳐서 계속 물어보며 온 도시의 호텔을 다 뒤지고 다녔어.”
“탐정들의 추적에는 특별한 통찰력이 필요한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보니 시시하군. 마술의 속임수를 알아낸 기분인 걸.”
히콕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고 말했다.
“환상을 품는 거야 자유지. 하지만 조 레오포드는 달라. 그 사람은 진짜 추적꾼이야.”
“그럼 뭐하나. 행적이 묘연한데.”
두 남자는 벽에 기댔던 등을 잠깐 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건물 벽에 닿았던 등이 싸늘해서 옷감이 살에 박힐 것 같았다. 히콕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사 나리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당신 부하들하고 아씨는?”
“따로 움직이고 있다. 나머지는 말 못해.”
“내버려둬도 되겠어? 희망의 상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리가 터질 텐데.”
“여태껏 우리들에게 계속 끌려 다니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더군. 솔직히 나도 그때 들은 방법이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용케 허락해줬군.”
“허락이고 자시고 나는 그 녀석의 상관도 아니야. 일단 만일을 위해 내 부하들이 뒤를 지켜주고 있기는 해.”
“아하. 그래서 지휘관이 직접 나랑 같이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는 건가.”
“뭐든 직접 뛰는 게 제일이지.”
여기서 대화를 끊고 두 남자는 계속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곳만 바라보며 몸속에 피로를 부지런히 쌓았다. 시계를 꺼내서보고 싶을 정도로 따분해졌을 때 마침내 그들 눈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히콕이 말했다.
“그 다크엘프다.”
사냥 모자를 쓴 여우 수인 뒤로 후드를 쓴 키 큰 여자가 총총 걸음으로 따라다녔다. 비록 귀하고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샤카자이아의 훤칠하고 가느다란 체격은 한 눈에 구분이 갔다.
“저번에는 예쁘다고 우습게봤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히콕의 목소리에서 사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하딘도 부하들과 함께 덤비고도 그녀에게 진 적이 있어서 속으로 조금 찔렸다. 당장 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레스하고 아자리아도 나타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상인길드처럼 눈이 많은 곳에서 다크엘프를 상대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저들이 볼일을 마치고 건물을 나오면 뒤를 잡는 게 더 효율적이기도 하다.
시계를 보니 그 뒤로 15분이 지났다. 두 남자는 의외의 인물을 보았다.
“연방보안관?”
하딘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헨리 플러머가 자신의 수행원까지 이끌고 상인길드로 들어가고 있었다. 보안관이 여기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우연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히콕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싸울 일에 대비해서 자신의 벨트에 약병들을 꽂았다.
◆
롱 라이더스 갱단원들은 아직도 좌판을 지키고 있었다. 아까 쫓겨났던 피카니가 정신을 못 차리고 이쪽으로 다시 오는 모습을 그들은 보았다. 마침 심심하기도 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갱단원들은 가만히 기다려줬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들이 말을 걸었다.
“이봐 형씨. 우린 그쪽 같은 놈은 필요 없어. 가서 말이나 가져오시지.”
“아까 달아난 말을 완전히 잃어버렸나봐.”
“하하하! 굉장히 좋은 말이었는데 이제야 주인감이 아니란 걸 알아본 게지.”
피카니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들고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온 건데. 지금 내 말의 기분이 아주 별로야.”
“허?”
“방금 너희들이 자기 발을 향해서 마구 쐈다고 엄청 화가 나있어.”
갱단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일 연장자가 일행들을 대변해서 말했다.
“어이, 지금 장난치자는 거야?”
피카니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손짓까지 더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나는 물론 자네들이 한 일을 이해해. 남자들의 세계가 다 그렇잖아. 하지만 내 말은 이해를 못하더라고. 암말이거든.”
그들은 황당해서 비웃음조차 안 나왔다. 연장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여기 온 거야?”
“만일 여기서 다들 사죄를 해준다면 내 말이 알아듣도록 이야기를 전해 줄텐데.”
“아하하하하하!”
뒤에 있던 두 갱단원은 폭소했지만 연장자는 피카니에게서 심상찮은 공기를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피카니가 자신의 옷자락을 옆으로 들추고 허리춤에 단 권총을 드러냈다. 그의 벨트에는 원래 사용하던 자동권총 대신 황무지 총잡이들이 애용하는 38구경 리볼버가 꽂혀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험악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비웃다니 예의들이 없군.”
생물체들은 감정변화에 따라 몸의 채취가 달라진다. 개과 동물처럼 후각이 극도로 발달한 생물들은 이러한 생리 작용까지 감지해서 근처에 적들이 자신에게 향하는 살기를 감지하기도 한다. 인간의 유전자 안에도 미약하게나마 본능적으로 이러한 냄새를 구분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일상생활 중에 우리들도 공기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갱단원들은 그러한 이유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멈추고 바싹 긴장했다. 초식 동물들이 포식자의 존재를 감지하듯이.
피카니는 그들을 한 명씩 차례대로 째려보았다.
“내 말은 누가 자기 뒷담 하는 걸 정말 싫어해. 누가 비웃기라도 하면 정신을 못 차리지. 이제 정중히 부탁하겠는데, 누가 먼저 사죄를 할 거지?”
살기와 권총. 갱단원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나마 이러한 상황에 익숙했던 연장자는 목 안에 고여 있던 가래침을 퉤 뱉으며 긴장감을 견뎌보려 했다. 마치 누가 바이올린의 현을 높은 음계만 골라서 긁는 것 같은 이명이 들릴 정도로 신경이 곤두섰을 때, 피카니가 눈짓을 했다. 아래쪽에서 위로. 마치 먼저 뽑아보라고 도발하듯이. 피카니가 마치 신호라도 보내듯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집어던지자 다들 움직였다.
피카니의 손은 벼락이었고 총성은 천둥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리볼버를 쥐고 왼손으로 리볼버의 공이를 연달아 때렸다. 갱단원 중에서 총을 뽑아보기라도 한 건 연장자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손만 어설프게 더듬다가 쓰러졌다. 각자 다른 자세로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한 명은 뒤로 누웠고, 한 명은 앞으로 쓰러지면서 좌판 위를 자신의 피로 칠갑을 했다. 연장자는 이마 한가운데를 뚫려서 흉한 꼴로 널브러졌다. 그가 가장 먼저 총에 맞았다.
피카니는 들고 있던 권총을 묘기 부려서 돌렸다가 총집으로 되돌렸다.
흉측한 광경인데도 근처에 있던 주민들은 그 시체들을 보고도 겁먹거나 눈을 돌리려는 이가 없었다. 은근슬쩍 기뻐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들이 갱들에게 얼마나 핍박 받아왔는지 피카니는 절로 짐작이 갔다. 갱단원들이 지키고 있던 좌판 뒤로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안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나왔다. 둘 중 하나가 피투성이 현장을 보고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 개새끼가!”
상대는 바로 권총을 꺼냈지만 이번에도 피카니는 순식간에 맞서 쏘았다. 총에 맞은 갱단원은 계단을 피로 칠하면서 요란하게 아래쪽으로 굴렀다. 피카니는 남은 한 사람을 향해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을 겨누면서 물었다.
“댁은 어쩔 거야.”
“쏘지 마... 나는 총이 없어...”
“실례되지 않는다면 부탁 좀 들어주겠어?”
상대는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관은 저기 영감님이 만들고 있으니 이 친구들 잘 묻어주고. 두목한테는 나에 대해서 잘 얘기해줘. 만날 곳은 라이오트 27번가 ‘페일 라이더’. 기억했어?”
상대는 이번에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피카니는 피로 흥건한 현장을 뒤로 하고 길거리를 나왔다. 관을 짜던 노인은 경악해서 지나가던 피카니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가?”
그는 턱을 한 번 쓰다듬고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제가 실수했네요. 관 4개요.”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며 그는 유유히 걸음을 이었다.
◆
가면의 남자는 스카프를 벗은 레스의 맨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소리지만 가면 때문에 그가 자신의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수염만 깎아도 훨씬 나아지겠는데.”
주변의 관중들이 레스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이리저리 쏠렸다. 전용 좌석에 앉아있는 상류층들도 고개를 이리저리 뻗느라 난리였다. 스카프를 벗고 10초가량 지났을 때 레스가 말했다.
“이정도면 충분하신가?”
“그래. 다시 써도 돼. 자네 미남이군.”
상대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더니 레스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걸 낚아채서 확인해보니 섬세한 조각이 박혀있는 금빛 단추였다. 뒤집어가며 자세히 보니 도금이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 이게 무엇인지 레스가 눈빛으로 묻자 상대가 대답했다.
“만일 스트립에서 이용하고 싶은 시설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그걸 보여줘. 너무 대놓고 경찰들만 자극하지 않으면 편히 지낼 수 있을 거야. 더불어서 다른 갱단원들이 그쪽한테 시비를 걸어도 그걸 보여주면 알아서 비켜줄 거야.”
“왜 나한테 이걸 주지?”
첫인상부터 짐작은 갔지만 아무래도 이 가면의 남자가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인 모양이다. 더불어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 같았다. 레스는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곁눈질로 확인한 아자리의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 놓을 상대가 아닌 건 확실했다.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게. 자네는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어. 그만 가도 좋네. 마지막으로 선약 하나만 해주겠나.”
“그 정도쯤이야.”
빨리 여기서 나오고 싶어서 레스는 상대의 비위에 맞춰줬다.
“나하고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면 스트립에 있는 영화관에서 마지막으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와봐. 거긴 내 소유니까 증표만 보여주면 따로 티켓 끊을 필요는 없을 걸세.”
“따로 더 약속할 건 없고? 약속 시간이나 장소 같은 거.”
“영화관에 오면 저절로 만나게 될 거야. 도시에서 즐겁게 보내게 데스페라도(무법자).”
그가 주머니에서 또 뭔가를 꺼내서 그에게 던졌다. 이번에는 종이에 싸인 알사탕이었다. 그걸 들어 보이며 레스가 물었다.
“이건?”
“그냥 줘봤어.”
가면의 남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콕콕 찌르자 여태껏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군중들이 한꺼번에 말문을 터트렸다. 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금 받은 도금 단추와 알사탕을 허공으로 띄우고 다시 낚아채며 가지고 놀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행들을 다시 만나러 가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모두 괴물 보는 눈으로 알아서 길을 비켰다. 이거 또 변장을 바꾸던가 해야겠군. 걸어가면서 그리 생각하다가 레스는 배당금을 받는 곳에서 일행들과 합류했다. 제페토는 순금 주화를 한 움큼 쥐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아하! 아! 하하! 됐어! 이제 됐어! 우리 식구들도 다시 모을 수 있고 공방도 고칠 수 있어!”
갱들이 의외로 배당에 맞춰서 제대로 내줬나보다. 레스처럼 엄청난 역배당이 터져버리면 하우스 측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판돈만 그대로 돌려주는 게 보통이다. 아마 가면의 남자가 따로 갱들에게 압박을 가했으리라 레스는 예상이 갔다. 윈프리하고 아자리도 자기 몫을 챙겼다. 윈프리가 돌아온 그를 바라보며 안부를 전했다.
“방금 욕봤네.”
“이렇게 될 줄 알고 절 데려오셨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윈프리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레스는 그저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주체가 안 됐을 뿐이다. 그녀도 레스의 심정을 헤아리고 온화하게 말했다.
“휘말리게 할 생각은 아니었네. 오늘 이 도시의 지배자가 나타나는 날이니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아까 왜 바람돌이가 피날레에 등장하지 않고 굳이 이르게 출전했겠어?”
“그 가면 쓴 놈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만 자네 덕분에 바람돌이는 물론 클랜턴 갱단도 이 도시의 지배자에게 완전히 찍혔지. 어제 금은방이 털린 일까지 겹쳐서 갱단들의 균형이 흔들릴 거야.”
레스하고 아자리는 금은방을 털지 않았지만 자랑할 일도 아니어서 괜히 지적하지 않았다.
“이놈들 사정 따위는 관심 없어요. 아무튼... 무례하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결과론이지만 덕분에 우리 마차 선납금도 지키기는 했네요.”
그렇게 말하고 레스는 제페토를 살벌한 눈초리로 째려보았다.
“이제,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무엇인지 한 번 들어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