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2권] 69회 -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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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리와 레스는 윈프리의 바에서 꾸벅거리면서 일행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바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서 둘은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단테가 바깥에서 다급한 얼굴로 유리창을 두드리며 입을 뻥긋 거리자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왔다. 윈프리도 심상찮은 일임을 알았으나 따라가지는 않았다.
곧 두 사람은 단테를 따라서 샤카자이아와 히콕이 싸웠던 골목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다. 흔적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약병 2개가 전부다. 단테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내를 토로했다.
“어떻게든 할 일만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했던 건데... 내 탓이야...”
아자리하고 레스는 그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단테와 샤카자이아가 한 일에 비하면 그들이 일으킨 소란은 어마어마했으니까. 아자리가 어두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언니를 어디서 찾죠?”
레스는 땅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주워서 냄새를 맡아보고는 아자리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알아?”
아자리는 냄새를 맡아보고는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안단시움 용액이잖아! 콜록! 죄송한데 그거 어서 치워주세요.”
그가 유리조각을 멀리 집어던지고 말했다.
“이게 뭔데 그래? 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모든 종류의 특수능력을 방해하는 성분이에요. 초능력이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 없지만 저 같은 마족들에게는 치명적이죠. 굉장히 귀한 건데.”
그 말을 듣고 레스는 진지하게 생각에 빠졌다. 단테는 어쩔 줄 몰라 의미 없이 맴돌았다.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아자리를 향해 레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핑커튼도 많은데 하필 이 양반 혼자서만 공격해온 건 이상하지 않아? 피카니 일행이 근처에 없던 것도 미심쩍고.”
아자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도 나름 곤란한 상황일지도요. 우리한테만 집중할 여유가 없나보죠.”
“샤키만 붙잡히지 않았으면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을 텐데. 아. 미안. 이러니까 샤키가 우리한테 민폐 끼친 것처럼 들리네.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레스가 중간에 헛기침을 하고 자신의 말을 고쳤다. 단테가 슬그머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이제부터 어쩌면 좋죠.”
그 말을 듣고 레스는 아자리를 바라보았는데 그녀 또한 그에게 의견을 구하는 눈치였다. 씁쓸해하는 얼굴로 레스가 말했다.
“서로 잠깐 이별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아자리. 우리가 딴 돈이 얼마나 되지?”
아자리는 눈치 빠르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순금 주화를 넉넉하게 쥐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눈에 휘둥그레진 단테에게 그녀가 설명했다.
“요 며칠간 저희를 위해서 수고해주신 값이에요.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자세히 말해드릴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제부터 난리가 날 거예요. 잠잠해지면 다시 만나고. 그럴 수 없다면 서로 추억으로 남아요.”
너무 놀라서 단테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만 위 아래로 움찔거리다가 그가 겨우 말했다.
“그런데 이 돈은 대체 어디서?”
레스가 떫은 얼굴로 손짓을 해가며 둘러댔다.
“그건 다음 이야기로 남겨두고. 제페토가 네 마차를 완전히 새로 만들어주고 있어. 값은 이미 치렀으니까 다시 못 만나면 하던 일로 돌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털털하게 말했다. 고마운 소리였지만 단테는 질문을 참지 못했다.
“또 뭔 짓을 하고 온 겁니까?”
아자리와 레스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로 대답을 미뤘다. 마지못해서 아자리가 말했다.
“음... 그것도 나중의 이야기로 남겨둬요.”
여기서 이야기를 끊자는 의미로 그녀가 손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저도 여러분들을 도와줄 수 있어요. 가령 들면... 여기 도시 지리를 안내해준다던가.”
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댁은 충분히 휘말렸어. 안전히 있어주는 게 돕는 거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겨우 두 분이서 싸우시겠다고요?”
“나 혼자서도 그래왔는데 새삼스러울 거 있겠어.”
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게 무슨 의미로 청하는 악수인지 단테는 이해했기에 주저했다. 괜찮다며 레스가 인자한 얼굴로 눈짓을 보냈다. 주저하다가 단테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레스의 오른손을 잡았다. 아자리도 그 손을 같이 잡았다. 셋은 서로에게 감싸여진 자신들의 손을 흔들고 시선을 나누었다. 단테가 초조해하는 목소리로 둘에게 부탁했다.
“샤키를 꼭 구해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맹세할게.”
아자리도 눈을 날카롭게 뜨고 말했다.
“다시 만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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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니 일행들은 같은 텐트에 모여서 총을 닦거나 눈꺼풀을 붙이면서 쉬었다. 하딘은 이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텐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다들 고개를 들었다. 루나가 초췌한 얼굴로 텐트 안에 고개를 내밀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눈을 떴어요.”
일행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난동이 헛수고는 안 됐으니까. 하지만 루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루나가 하딘과 피카니를 번갈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만 와주세요. 설명은 가면서 할게요.”
두 남자는 군말 없이 잽싸게 움직였다. 바깥에는 여전히 시큼한 죽음의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가며 하딘이 물었다.
“그 공작원에게 걸린 저주는 이제 완전히 풀린 겁니까?”
루나가 아기 새 울음소리처럼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실패했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썼는데 다행히 그건 통했어요.”
이번에는 피카니가 물었다.
“하여튼 살려내기는 한 거죠?”
“네. 일단은요. 자세히 말하자면 길어지지만 일단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어요.”
몇 분가량 더 걸어가니 못 보던 텐트가 새로 보였다. 그 텐트 주위로는 주술적인 용도로 세운 것으로 보이는 그림과 잡동사니들로 둘러싸여있었다. 루나가 멈춰 서자 둘도 멈춰서 가만히 그녀의 설명을 기다렸다. 루나가 말했다.
“‘돌아온 탕아’에 당하고 시간이 너무 지나서 저 혼자서 저주를 풀기는 무리였어요. 그래서 미봉책으로 일종의 성역을 만들어줬죠.”
하딘은 바로 이해했다.
“즉. 그 공작원은 마법사님이 만들어준 저 공간 안에 있어야만 안전한 거군요?”
“네. 저주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하면 증상을 막을 수 있어요.”
피카니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굉장히 과로하신 거 같은데 어서 쉬러가세요.”
루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사람이 여러분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해요.”
하딘이 자신과 피카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희 둘 다 말입니까?”
“꼭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피카니 씨도 같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잖아요. 텐트 입구 바로 앞에서 멈춰주세요.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명목상으로는 루나와 피카니 모두 그의 지휘를 받는 부하가 아니었기에 하딘은 그 결정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반감이 들기는 했지만 하딘은 말싸움하기 싫었다. 그는 루나를 향해서 알겠다는 뜻으로 목례만 했다.
두 사람은 그녀를 향해서 목례를 하고 공작원이 머물고 있는 텐트로 향했다. 피카니는 하딘에게 첫마디를 양보하듯 옆으로 조금 비켜섰다. 텐트 입구는 얇고 하얀 천으로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안에는 촛불로 향을 피우고 있는지 장막 너머로 불빛과 감미로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하딘이 목음 조금 가다듬고 운을 뗐다.
“몸은 괜찮아졌나?”
안에 누워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키자 장막으로 그림자가 비춰졌다. 윤곽으로는 체격이 가늘고 작은 여인으로 보였다. 병상에 오래 누운 탓에 많이 여위기도 했을 것이다. 상대는 어떻게든 힘을 쥐어짜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장막 너머로 촛불을 등지고 공작원의 그림자가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그 윤곽을 보고 두 남자는 조금 놀랐다. 상대의 머리에는 고양이의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동물 귀가 달려있었다.
공작원이 말했다.
“고양이 여자 처음 보십니까?”
여자 목소리다. 공용어 실력은 인간들하고 구분이 안 가게 능숙했고 발음은 혀가 조금 짧으면서도 말꼬리가 노래 부르듯 살짝 말려있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애교 떠는 말투로 들리기도 했다. 두 남자에게는 상대의 윤곽만 보였지만 저 고양이 여자는 그들의 감정을 읽어낼 정도로 눈썰미가 대단한 모양이다. 하딘이 말했다.
“그쪽의 종족에 대해서 듣지 못했었네. 특별한 의도는 없었지만 실례했군.”
“저를 제국으로 데리러 오셨습니까?”
하딘은 설명할 것이 태산이겠다는 걱정에 이를 조금 악물었다.
“아니. 사실 우리는 지나가던 길이야. 일단 서로 정식으로 통성명부터 하지. 헨리 웨슬리 하딘 대위다. 옆에 있는 이 친구는 그냥 내 부하니까 신경 쓰지 말게.”
피카니는 그 말에 맞장구치듯 쓰고 있던 모자를 손으로 기울였다.
공작원도 자신을 소개했다.
“레모니 타티아나. 공식 계급은 욜스카 공화국 중앙정보부 소속의 소위입니다.”
“레모니 소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왔네.”
그녀는 입가에 주먹을 대고 몇 번 기침을 했다.
“처음에는 저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만 드리려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던 길에 저를 구해주셨다니 보통 분들이 아니로군요.”
“재촉하긴 싫지만 핵심만 말해주지 않겠나. 느긋할 여유가 없다네.”
“그렇겠죠. 파스낙이 아직도 살아있으니까.”
확실히 기억해둔 이름이어서 하딘은 눈을 크게 떴다. 피카니도 아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숨을 죽이고 대화에 더욱 집중했다. 레모니가 말을 이었다.
“저는 옛 동료를 여러분에게 팔 겁니다. 또 그래야만 하고요.”
◆
레스와 아자리는 짐을 갖고 1층으로 내려왔다. 윈프리는 그들을 보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아자리는 귀티 나는 몸짓으로 우아하게 허리까지 숙여서 작별 인사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편히 쉬었다갔어요. 혹시 여기로 저희들을 쫓으러 온 사람이 있다면 아는 대로만 전부 말해주세요. 어차피 저희들은 계속 달아날 거니까요.”
“조금이라도 내가 도와줄 건 없겠니?”
도움이야 무엇이든 절실했지만 아자리는 무엇을 부탁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레스가 짐들 속에서 자신의 소총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맡아서 숨겨주시겠습니까.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처리하세요.”
윈프리가 의아애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친구가 붙잡혀버렸다면 무기가 필요할 텐데?”
“눈에 너무 띄고 무거워요. 가방에 넣을 자리도 없고요. 저는 이거면 충분합니다.”
말하면서 레스는 자신의 리볼버를 오른손 엄지로 톡톡 쳤다. 샤카자이아의 장궁하고 아자리의 마법 지팡이는 더플백에 들어있었다. 윈프리는 그의 소총을 손으로 쓸다가 개머리판에 새겨져있는 문구에 손끝이 멈췄다.
“이건 무슨 뜻이지?”
“비나예 야하니. 상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존재들이라네요. 최후에는 결국 자기들끼리 손 쉽게 죽이면서 한 순간에 멸족했다고 합니다.”
쓴 웃음을 지으며 윈프리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세상의 우리들하고 크게 다르지도 않군 그래.”
레스는 숨을 한 번 길게 뱉고 몸을 돌렸다.
“옛 이야기에서 예언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두 사람은 미련이 더 길어질까 무서워 마지막으로 허리 숙여 그녀에게 인사하고 바깥으로 서둘러 나왔다. 이제 완전히 서로만 남았다는 생각에 아자리는 설레면서도 무서웠다.
무작정 도시 안쪽으로 향하면서 아자리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 어찌할까요?”
“객관적으로. 우리는 절망적이야.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총알은 4개뿐이고.”
현실을 직시하기는 싫었지만 아자리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허풍 부렸지만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저 혼자서 전부 상대할 자신은 없어요.”
따져볼수록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수적으로도, 힘으로도 밀렸다. 하지만 아직도 태연한 표정을 짓는 레스의 얼굴이 아자리의 마음을 지탱해줬다. 그것이 설령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보고 있으면 아자리는 절로 용기가 났다.
레스는 뜸들이기를 멈추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가 우뚝 멈추더니 하늘 저편을 가리켰다.
“저쪽에는 인류 연방이 있고.”
이번에는 아까 가리켰던 곳의 반대편을 삿대질했다.
“이쪽에는 마족 연합이 있지.”
그리고 자신들이 서 있는 땅을 가리켰다.
“그 중간에는 우리들이 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어. 지금은 누군가의 편을 들 때야. 저녁에 영화관으로 가야겠어. 이 도시의 지배자에게 피카니에 대해서 고자질한 다음, 도와달라고 구걸이나 해볼까봐.”
“구걸?”
아자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들은 말을 돌려주었다. 듣고 있는 사람까지 기분이 비참해지는 소리를 레스는 참 당당하게 말했다.
“선택지는 무수하지만 그게 최선 같아.”
그들은 다시 걸었다.
무슨 뜻인지는 아자리도 알고 있었다.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최선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니어서 말로 안 꺼냈을 뿐이다. 굳은 얼굴로 아자리가 말했다.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가 없었는데. 당신이 먼저 자처해주는군요.”
“우리 마음이 그 정도로 잘 맞는다니 잘됐네.”
레스는 아자리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자기 마음하고는 관계없이 그의 넉살맞은 태도에 감정이 전염되듯 그녀도 왠지 모르게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아자리가 말했다.
“파스낙은 분명 악마 같은 놈일 거예요. 당신처럼 고결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오. 전하. 제가 악마를 한두 번 봤겠습니까. 기분은 더럽겠지만 할 수 없지.”
입가를 잡아당기고 그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지옥에서는 도움을 청할 대상이 악마 밖에 없잖아. 샤키까지 건드렸으니 피카니하고 결판을 낼 거야.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손 더럽힐 각오로 상대의 수준에 맞춰줘야지.”
목소리는 벽돌처럼 딱딱하고 또렷했다. 평소 그대로 낸 말투 속에 담겨져 있는 그의 감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아자리는 긴장해서 레스가 있는 방향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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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붙잡히기 전부터 자기 마음대로 이 도시를 주물렀다고?”
하딘이 레모니에게 되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시장하고 연방보안관까지 그의 아래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제 딴에 자기들이 파스낙을 이용한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피카니가 중얼거렸다.
“일일이 상대하다가는 끝이 없겠어. 그냥 지원요청이나 부르고 우리 할 일로 돌아갑시다.”
하딘이 피카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끊었다.
“자네는 가만히 있어. 하던 말로 돌아와서. 레모니 소위 방금 자기 동료를 팔아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는 건 무슨 뜻이지?”
“그가 죽지 않으면 무시할 수 없는 희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제 목숨 줄을 그가 쥐고 있습니다. 제 몸에 걸려있는 속박은 그가 건 것입니다.”
루나는 주변에 깔아둔 마법 장치들을 돌보거나 멍을 때리며 지냈다. 피카니와 하딘이 민감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어서 주위에 보초들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있었다. 그래서 텐트 주변은 마치 다른 공간처럼 휑했다.
레모니가 계속 말했다.
“파스낙은 수하들을 일벌처럼 거느렸고 본인 스스로도 마족들 중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입니다. 저 또한 그의 밑에 있었지요. 물론 다른 수하들도 저처럼 목줄이 채워져 있습니다.”
“마왕의 개인요원이 어째서 욜스카 소속의 공작원을 사적으로 부리고 있지?”
사소한 점 하나 놓치지 않는 하딘의 태도에 레모니는 감탄한 듯 고개를 조금 추켜올렸다. 조금 뒤에 그녀가 답했다.
“조국이 절 마왕에게 팔았습니다. 마왕은 절 파스낙에게 줬죠. 사적이고도 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들어주실 가치는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아서 하딘은 안쓰러워하는 말투를 써줬다.
“그래. 왜 전향하러 왔는지도 단박에 짐작이 가는군.”
그때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던 루나의 눈에 병사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모두 넷이었다. 그들은 다른 병사들이 의래 메고 다니는 소총 대신 허리춤에 권총만 차고 있다. 사병들이 권총을 들고 다니는 일이 없어서 루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루나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여기는 지금 접근이 제한된 곳인데...”
갑자기 병사들 중 하나가 권총을 꺼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배를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