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2권] 70회 - 물이 담긴 잔
루나는 달구어진 못에 배꼽을 뚫린 기분이었다. 통증은 뇌수를 완전히 뒤덮어서 지금 그녀는 장님이자 귀머거리였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붙잡히기까지 피카니와 하딘도 싸우고는 있었다. 총성이 들린 순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공작원을 몸으로 가려주고 뒤로 돌았다. 자객들이 이쪽을 향해 권총을 겨누려하자 두 남자도 고민하지 않고 뽑아서 쏘았다. 하딘은 교본대로 정확하게 자세를 지켜서 쐈고 피카니는 리볼버를 뽑자마자 허리춤에 대고 패닝해서 쐈다.
한 순간에 두 남자와 네 자객은 총알이 없어질 때까지 서로 쏘았다.
하딘은 한 명을 맞췄고 피카니는 둘을 맞췄다. 하딘이 맞춘 놈은 머리에서 핏물을 쏟으며 뒤로 쓰러졌다. 피카니와 하딘은 몸통에 총을 맞고 쓰러질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견뎠다. 루나를 붙잡아서 방패로 삼은 녀석에게는 총알이 스치지도 않았다.
총성을 듣고 주변에서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세 명의 자객들은 땅에 쓰러진 자신들의 동료를 내버려두고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총에 맞지 않은 놈은 루나를 들쳐 매고 있다. 피카니와 하딘은 애써 신음을 삼켜가며 장전을 하려 했지만 손이 떨려서 총알이 계속 땅으로 떨어졌다. 하딘은 권총에 총알을 하나 집어넣고 고개를 쳐들었으나 이미 상대는 눈밖에 있었다.
“루나! 루나...! 빌어먹을!”
피카니가 쇳소리 섞인 절규를 지르며 흙을 움켜쥐었다. 하딘도 분노와 고통 때문에 숨이 거칠어지고 몸이 떨렸다. 두 남자 뒤에서도 고통에 젖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런!”
하딘이 그 소리를 듣고 뒤를 다시 바라보았다. 텐트 입구에 쳐져있던 천에 피로 살짝 젖어있었다. 자신들의 피가 아니었다. 그가 소리 질렀다.
“레모니 소위! 내 말 들리나! 레모니 소위!”
안에서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가 몽롱했다.
“괜찮아요... 지켜주신 덕에 어깨만 살짝 스쳤... 윽... 어지러워...”
하딘은 맞은 곳을 부여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피카니도 그를 따라가듯 일어나려하자 하딘이 외쳤다.
“넌 여기에 있어!”
피카니는 말을 듣지 않고 일어났다. 그는 아픔을 참느라 고개가 떨렸고 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루..루나가 저기에 있는데...”
자객들이 달아난 방향에서 계속 총성이 들리고 있었다. 이곳의 병사들이 싸우고는 있는 것 같으나 총성은 끊이질 않았고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자객들이 안 잡혔다는 뜻이다.
“내 말이 가장 빠르니까 여기 있어!”
하딘은 비척대는 빠른 걸음으로 피카니를 버려두고 갔다. 하지만 노력만 가상했다. 그는 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무리 정신력을 쥐어짜도 피카니도 엉덩방아를 찧는 게 고작이었다. 갈 곳 없는 마음 때문에 가느다란 탄식이 이빨 사이로 나왔다.
“그흐.. 그흐으으윽!”
등 뒤에서 레모니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파스낙은... 파스낙은 반드시...”
목소리가 아까보다 가늘어져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피카니는 몸을 뒤로 누이고 팔꿈치를 땅에 대었다. 그가 다급히 천 너머로 그녀에게 물었다. 윤곽을 보건데 레모니도 피카니하고 비슷한 자세로 쓰러지다시피 땅에 붙어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피가 천 아랫단을 적셨다.
“뭐? 방금 뭐라고?”
“파스낙... 저녁에 영화관...”
말의 마디가 계속 끊어져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피카니는 상대의 의도를 깨달았다, 어찌됐건 당장 할 일은 일어나서 다시 쫓는 거였다. 마침 저 앞에 피에르와 위생병들이 여기로 오고 있었다. 레모니는 저들이 지켜주겠지.
하지만 피카니는 갱단들과 싸울 때 총에 맞고 온 참이다. 구멍은 루나의 마법카드로 메꿨지만 총알이 몸속을 헤집어놓은 상처는 그대로였다. 거기에 총알이 또 박혔으니 정신력만으로 어떻게 할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피카니는 땅으로 주저앉고 흐리멍덩해진 눈으로 의식을 잃었다.
다른 곳에서는 병사들이 자객들을 쫓았다. 병사들도 상대를 붙잡으려 힘썼지만 주변이 모조리 텐트여서 총을 꺼내지 못했다. 뛰는 게 고작이다. 다들 굶주리고 항상 지쳐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자객들은 피를 흘려가면서도 힘껏 달렸다. 저들도 필사적이었다.
뒤처지기 시작한 병사들을 아비투스와 카르델이 앞질렀다. 둘 다 손에는 산탄총과 소총이 들려있다. 자객들이 달리는 와중에 장전한 권총을 뒤로 쏘자 두 사람은 엎드렸다. 아비투스는 산탄총을 겨눴지만 루나에게 산탄이 맞을지도 몰라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급하게 달려온지라 그는 지금 슬러그 탄하고 권총이 없었다.
그 와중에 루나를 들쳐 업고 달아나던 쪽이 허리춤에서 뭔가 꺼내고 땅에 팽개쳤다.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돌덩어리였다. 그리고 자객들이 휘파람을 불자 저편에서 말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제대로 훈련 받은 말 같았다. 엎드려 있던 카르델은 소총의 조준경에 눈에 대고 숨을 참았다. 조준경의 십자선에 루나를 업고 있는 자객이 겹쳐지자 카르델은 방아쇠에 걸어둔 검지에 힘을 줬다.
방금 자객이 집어던진 돌덩어리에서 불타듯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땅에 선을 그리듯이 수평으로 번쩍였다. 곧 빛이 닿았던 땅에서 벽이 흙먼지를 흩뿌리며 높게 솟아났다. 카르델이 쏜 총알은 그 벽에 막혀버렸다.
“뭐?!”
아비투스가 외쳤다.
“일단 서둘러!”
두 남자는 당황했지만 바로 일어났다. 벽은 좌우로 길게 뻗어서 돌아서 가면 시간을 너무 잡아먹혔다. 아비투스가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서 바로 앞으로 달려가기에 카르델은 따라갔다. 자객들이 지금쯤 말 위로 올랐을 거라고 생각하면 눈이 뒤집혔지만 둘은 억눌렀다.
아비투스가 들고 있는 산탄총의 개머리판으로 벽을 치자 겉에 금이 갔다. 삼각형 모양이 나게 겉을 얼추 부수고 그가 주먹을 쥐었다. 아비투스가 들짐승처럼 고함을 지르며 균열 가운데로 주먹을 지르자 벽에 사람 머리만한 구멍이 뚫렸다. 카르델은 곧바로 그 구멍에 총을 집어넣고 벽 너머를 겨눴다.
그가 쏘았다. 노리쇠를 당기고 또 쏘았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노리쇠를 당기고 다시 조준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방금까지도 침착하던 카르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흘렀다.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비투스는 동료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만히 입 다물고 기다렸다.
카르델이 구멍에서 총을 꺼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참다못한 아비투스가 말했다.
“어떻게 됐어?”
“첫발은 제일 뒤에 있던 녀석 몸에 맞았고. 다음 총알은 다른 놈이 타고 있던 말에 맞았어. 죽었는지는 가서 살펴봐야 해.”
“마법사님을 잡고 있던 놈은?”
초조해하는 얼굴로 아비투스가 재촉했다. 카르델이 뜸을 들이고 분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법사님만 피해서 맞추기에는 너무 멀었어. 만에 하나 제대로 맞췄어도 마법사님처럼 연약하신 분이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면 큰일 날수도 있어. 총까지 맞은 상태였고.”
아비투스는 이를 악물고 벽에 애꿎은 주먹만 날렸다. 벽에는 금이 가고 주먹에는 피가 났다.
◆
[도시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일지를 쓴다.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샤키 언니가 잡힌 뒤로 나하고 레스는 몇 시간째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 숨어서 돌아다니는 요령을 연습할 겸 우리들만의 힘으로 정보를 모았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방금 식당에서 말상대를 찾고 있는 아저씨를 하나 만나서 레스가 맥주를 사줬다. 왜 나이 먹은 사람들은 하는 말이 조리가 없고 했던 말을 반복해서 듣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어린아이 모습인 게 한이다. 제기랄, 고향에서는 보드카를 물처럼 마셔댔는데 고작 위스키 한잔에 뻗어버리다니. 난민으로 지내면서 몸보신을 안 했던 후폭풍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여하튼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여럿으로부터. 주민들은 경찰과 연방보안관을 믿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면 어쩔 수 없겠지. 나도 난민촌에서 지내던 시절에 그랬다. 하지만 거리의 분위기가 내가 지내던 곳하고 비슷한 걸로 보아 타락하지 않은 경찰도 꽤 있을 거다. 아마 경찰들 내부에서도 알력 다툼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어느 쪽이든 우리 편은 아니겠지만.
그러고 보니 헤리엇 리퍼 씨는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여유가 생기면 선물 해준 망토를 멋진 권총으로 보답해주고 싶다.
레스는 연기력이 형편없지만 자기감정은 잘 다스린다.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는 한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내가 본 사람 중에서 레스보다 자기 자신을 잘 지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능력이 좋다면 다른 선택지도 많았을 텐데 왜 용사나 보안관이 되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현상금 사냥만 하면서 살아도 전설로 남을 텐데. 도대체 명예가 무엇이라고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여하튼 나는 아주 심란하다. 당장 우리들은 한가롭게 식당에서 평범한 사람인 척 시간을 때우고 있지만. 내가 마침표 하나를 찍는 순간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 카우보이에게 붙잡힌 샤키 언니는 괜찮을지도 걱정된다. 이제부터 내 손에 모든 것이 걸렸다.]
“괜찮아?”
레스는 탁자에 올려놓은 자신의 총잡이 모자에 손을 얹고 아자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자리는 자신의 수첩에 같은 글자를 연필로 반복해서 끼적이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그냥. 그래요. 슬슬 이런 상황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당신은 어떻게 항상 침착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만 가다듬었다. 말하기 싫은 건지, 대답을 고민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자리는 갑자기 피곤해져서 하품을 길게 뱉고는 식당을 한 번 둘러보았다. 딱히 의미는 없었다. 레스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잔에 담긴 물이라고 비유해보자. 듣고 있어?”
아자리는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네.”
“평소에 잔에 담긴 물은 수면이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지. 환경이 바뀌거나 사건이 생기면 물은 끓거나, 얼음이 되거나, 흔들려서 넘치기도 하겠지. 마음과 감정이란 게 그렇잖아.”
“그렇죠.”
“그리고 사람마다 그 물을 담고 있는 잔의 생김새가 다르지. 형태는 중요하지 않아. 잔은 커도 좋고 작아도 좋아. 어쨌든 담겨있는 건 그냥 물이니까. 그저 나 자신에게 할당된 물. 이제부터가 핵심인데. 이게 정확한 비유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레스는 심호흡을 하고 식당의 천장에 돌아가는 실링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그녀에게 내리꽂았다.
“나의 잔에는 뚜껑이 덮여있어. 수면하고 완벽하게 맞닿을 정도로 낮게 덮인 뚜껑이.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의 물은 그 뚜껑이 제한해둔 그 모습을 그대로 있지. 열을 가해도 끓지 않고, 냉각해도 얼음이 안 되고, 잔이 넘칠 정도로 격하게 흔들려도 물은 뚜껑을 못 넘어가.”
중간부터 감을 잡은 아자리가 손을 넌지시 들고 끼어들었다.
“내면에 어떤 한계점이 있어서 감정이 심각해지려는 걸 막는다고요?”
“심리학이라는 책에 의하면 그게 방어기재라고 불리는 거래. 나는 어떤 심각한 일이 있어도 자동으로 침착해져. 피카니한테 배신당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마저 들 더라고. 그렇게 살아왔어.”
아자리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저희 영지에 도착하면 제 연구실에서 일하지 않을래요? 피실험자로.“
“돈 벌 곳이 있으면 좋지.”
시큰둥하게 그가 대꾸했다. 이 이야기는 됐다는 의미로 아자리가 손짓을 하고 물을 홀짝 마셨다. 그 물 잔을 보고는 문득 그녀가 물었다.
“그 마음에 덮여있던 뚜껑을 깨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 있어요?”
“사실,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어. 한계를 못 참고 모든 것이 폭발해서 끓어 넘친 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투로 레스가 술술 말했다. 발음도 또박또박 정련했다.
“그래서 뭘 했나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에게 결투를 걸었어. 승패는 정당하게 겨뤘지. 나는 손님에게 무례를 가한데다 부족을 위험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묻고 추방당해야만 했지.”
[레스로부터 추방당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 오래전에 단 한 번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솔직히 살인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딱 한번만 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쫓겨난 부족을 위해서 용사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왜 사람을 안 죽이려 하는지. 질문은 나중으로 미루자,
건 그렇고 지금 나는 잡화점에 들어와 있다. 들어가기 전에 바운서에게 일정량의 금액을 보여줘야만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노골적으로 불친절한 가게다. 그래도 다운타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이라고 한다. 언제 도망칠지 모르니 여기서 준비물을 구하자고 했다.]
레스가 물건을 고르고 있는 동안 아자리는 창고나 마찬가지인 가게를 둘러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셔츠 위로 검은색 조끼와 갈색 가죽 장갑을 끼고는 아자리에게 보여주었다. 튼튼해보였고, 또 치수에도 맞았다. 아자리도 진심을 담아서 어울렸다고 말했다.
“제대로 한물 간 사람 같아요.”
“하지만 유행은 무조건 한 바퀴 돌아가잖아.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나는 잠재적으로 시대를 앞서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니냐?”
“방금 그 말은 제 일지에 넣어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