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2권] 71회 - 패를 뒤집을 때
아자리는 그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알아챘다. 레스의 등 뒤에 있는 한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다발을 한 장씩 넘겨가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레스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큰일 났어요.”
“왜.”
레스도 그녀에게 눈길 주지 않고 속삭였다.
“당신 뒤에 누군가가 있어요.”
아자리의 목소리는 굳어있었다. 레스는 안색 하나 안 바꾸고 이렇게 말했다.
“마침 잘 됐네.”
“네?”
“혹시 모르니까 너는 멀리 떨어져있어.”
아자리는 보존식들이 진열된 곳으로 발길을 돌렸고 레스는 주방 용품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현상금 사냥꾼은 들고 있던 수배서와 레스의 옆얼굴을 계속 번갈아보다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빛냈다. 현상금 사냥꾼이 레스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아자리는 진열되어 있는 육포에 코를 대서 냄새를 맡다가 가벼운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현상금 사냥꾼이 마룻바닥의 널빤지를 삐거덕거리며 레스의 바로 뒤에 멈춰 섰다. 레스는 지금 무쇠로 만들어진 스킬렛 프라이팬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다. 현상금 사냥꾼이 짓궂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드는 거라도 있으신가? 사쿠라비?”
아무리 변장을 해도 레스는 이곳에서 보기 드문 출신인지라 눈길이 끌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자리에게 갈 주목까지 그에게 쏠렸다. 레스는 떠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변 손님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두 남자들로부터 물러났다.
현상금 사냥꾼이 다시 말했다.
“뭐 도와줄 거라도 있을까?”
그가 입고 있는 외투자락을 뒤로 넘기며 손을 허리춤으로 올렸다. 레스는 들고 있는 프라이팬을 수직으로 고쳐 잡고 담백하게 대꾸했다.
“어, 맞아. 괜찮다면 무슨 속옷 입고 있는지 좀 보여주겠어?”
주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공기가 잠깐 굳어버렸다. 현상금 사냥꾼도 아주 잠깐 그 분위기에 멈칫하다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았다. 하지만 이미 레스가 프라이팬을 들고 몸을 돌리고 있었다. 권총은 프라이팬에 걸려서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레스는 상대의 머리를 향해 시원하게 휘둘렀다.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에 아자리는 괜히 자기가 더 아파서 움찔거렸다.
[레스는 그 현상금 사냥꾼이 핑커튼에서 온 탐정이라 생각하고 정보를 캐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쓸모없군.”
감정 없는 레스의 목소리에 상대는 덜덜 떨었다. 현상금 사냥꾼의 관자놀이에는 작은 혹이 솟아있다. 그는 지금 양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있다. 레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의 벨트를 허리춤에서 뽑아버렸다. 현상금 사냥꾼의 바지가 장막처럼 훌러덩 걷히고 빨간색 속내의가 드러났다. 레스가 게슴츠레 노려보면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10초 준다.”
상대는 바지가 벗겨진 채 빨간색 속옷을 자랑하면서 허겁지겁 가게를 뛰쳐나갔다. 바깥에서 그 모습을 보고 행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여기까지 들렸다. 아자리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에 들린 벨트와 바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바지는 왜 벗긴 거예요?”
“내 말 믿어. 이편이 확실해.”
“전에도 해봤다는 듯이 말하네.”
“그럼.”
[빼앗은 권총은 가게 주인한테 그냥 줬다. 손에 넣은 22구경 총알들은 내 차지가 됐다. 조끼는 제대로 값을 내고 샀다.
다행히 이번에 만난 현상금 사냥꾼은 별거 아니었지만 마음 놓고 돌아다니기는 어려워졌다. 우리가 못 이길 상대가 나타날 일은 없겠지만 소문이 퍼지면 돌이킬 수가 없다.
도망은 그만두고 핑커튼 사무소로 쳐들어가자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언니가 그곳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목숨이 걸린 도박판이니 쉽게 움직이질 못하겠다. 결국 조용히 힘을 아끼기로 레스하고 동의했다. 미안해 언니. 우리들 힘만으로 구해내고 싶었는데.
파스낙을 만나러 가는 것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파스낙은 적의 적이니까 그하고 만나는 쪽이 조금이나마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은 단단히 먹자.]
◆
해가 지고 어둠이 올랐다. 게임을 시작하고 패를 뒤집을 때가 됐다. 레스는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골목에서 검지에 방아쇠울을 걸고 권총을 빙글빙글 돌렸다. 영화관은 골목 오른쪽 저편에 바로 있었다. 명상하듯 초점 없는 눈으로 한참을 그렇게 총을 돌리다가 레스는 마술처럼 순식간에 총을 허리춤에 꽂았다. 어둠을 향해 그가 말했다.
“연습은 이제 됐어. 그만 나와 봐.”
마치 농축되어 있던 안개가 걷히듯 어둠 속에서 뭔가가 일렁이더니 아자리가 망토를 펄럭이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레스는 그 모자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았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니 좋기는 한데 꼭 써야겠어?”
“전에 말했잖아요. 마법사들의 힘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역시 이걸 써야지 마음이 놓여요.”
“다른 말로는 폼 잡지 않으면 힘이 안 난다는 거구만.”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는 걸로 대꾸하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어땠어요? 기척이 전혀 안 느껴졌나요?”
“나한테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였다만 다른 마법사한테도 통할까?”
아자리가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쥐고 있는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라면 쉽게 들키겠지만 켈커트리 씨가 도와주니까 조심하면 괜찮아요.”
안심하고 듣고 넘기기에는 모호하게 느껴져서 레스가 손짓을 해가며 물었다.
“말인즉슨?”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된다고요. 보통 사람들 숨듯이 조심하면 마법사라도 눈치 못 채요.”
아자리는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손을 대고 팔꿈치로 망토를 들어올렸다. 그는 권총을 가지고 노는 동안 꺼내두었던 총알들을 총에 다시 집어넣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계획이랄 것도 없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해보자. 내가 파스낙이랑 이야기를 나눈다. 너는 그동안 계속 숨는다. 협상이 잘 안 되면 네가 나타나서 날 구해준다. 맞지?”
말마디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스는 그것만으로는 마뜩치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한테 귀띔해줄만한 거 없어? 그 녀석에 대해서 알아둘 거라던가?”
“흐으으으음... 아. 거짓말하면 안 돼요.”
그가 왼쪽 눈을 반쯤 감았다.
“거짓말하면 바로 알아챌 정도로 그 녀석 눈치가 빠르다는 거야?”
“파스낙만한 실력자라면 독심술을 쓸 수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레스는 독심술이라는 말을 듣고 턱을 떨궜다.
“지금 농담하는 거지? 게다가 마법을 쓰려면 입으로 주문을 외워야 하잖아? 설마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일일이 그러고 있겠어?”
“쿠드라크는 필요 없어요. 파스낙의 종족은 입으로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대상을 바라보면서 생각만 해도 마법을 쓸 수 있어요.”
“그거 엄청난 장점 아니야?”
“엄청나죠.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총을 뽑지 않고도 총을 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한참을 뜸들이다 간신히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더러 거짓말 하나 섞지 말고 심리전을 하라는 말이지.”
“독심술이라고 해도 마음 깊숙이 들어가서 읽어내는 건 아니에요.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만. 당신 집중하는 거 잘 하잖아.”
레스는 오른쪽 눈도 반쯤 감았다.
“참 빨리도 말해준다.”
“미안. 하지만 이러다간 영화 상영에 늦어요.”
“오냐.”
“너무 걱정마세요. 내가 지켜줄게요.”
그리고 아자리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마법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제 레스는 자기 자신과 세상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가다듬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어제 영화관 앞을 지나쳤을 때 봤던 호객꾼과 곡예사들은 지금 보이지 않았다. 섬세한 황동조각으로 가득한 화려한 문을 양손으로 밀면서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저절로 슬쩍 열리더니 순식간에 닫히는걸 보아 아자리도 알아서 잘 따라오는 듯 했다.
영화관의 실내는 무척 정성들여서 꾸며져 있었다. 벽지는 금빛과 검은색이 섞인 섬세한 무늬로 가득하고 천장과 벽에 달린 전구들은 빛이 조절되어서 절묘하게 어둑했다. 바닥의 카펫은 푹신하고 쓰레기 한 점 없다. 게다가 공기도 따듯했다.
물품을 보관하는 곳은 들어오자마자 바로 눈에 보였다. 그는 갖고 있던 더플백을 장에 쑤셔넣었다. 안에는 자잘한 물품들과 샤카자이아의 장궁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매표소로 갔다.
대리석 무늬 선반에 돈을 올리고 레스가 유리칸막이 너머에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마지막에 상영하는 영화로. 자리는 상관없어요.”
“어떤 영화의 마지막 상영이요?”
“아무튼 제일 늦게 하는 걸로.”
직원이 자신을 추궁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레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 내가 증표를 갖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잃어버렸어요.”
“아.”
직원은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밑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더니 표를 한 장 내밀었다. 그리고 레스가 올려놓은 돈을 가져갔다. 상대가 내밀어준 영화표는 먹물에 담갔다가 건져 올린 것처럼 시커멨다. 레스는 입술 끝부분을 깨물면서 받은 표를 노려보다가 갈 길을 갔다.
화려한 유니폼을 입고 복도에 서있는 직원이 그가 들고 있는 칠흑 같은 영화표를 보더니 가야할 상영관을 양손으로 정중히 가리켰다. 그쪽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혹시 이곳에 처음 오셨습니까?”
“문제 있나요?”
“다름이 아니고 이곳에는 복잡한 사정으로 여러 손님이 드나듭니다. 지금 시간대에는 특히나 그렇죠. 그래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당황하지 마시고 영화만 즐기시면 됩니다.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어조를 살짝 높이면서 레스가 말했다.
“예기치 못한 일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화장실에서 피가 흥건한 현장을 보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저희들을 불러주세요.”
레스는 정색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덤덤히 다시 말했다.
“힘든 일에 종사하시는군요.”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마지못해서 레스는 모자챙을 기울여 상대의 말에 반응해주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초저녁 하늘처럼 어둠과 빛이 절반씩 있었다. 아늑하게 손질된 공간 속에 50명 정도 들어갈 좌석들이 줄줄이 깔렸고 앞자리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졌다. 사람은 아무도 없다.
레스는 만에 하나 일이 생기면 도망치기 편하게 가장 뒷자리에 앉을지 고민하다가 그냥 가장 좋은 자리를 골랐다. 상영관 중앙으로 가서 쿠션에 몸을 쑤셔넣고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아자리는 제대로 따라왔는지 신경 쓰였지만 이제 와서 알아낼 방법은 없다. 여하튼 의자는 푹신했고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좋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다 같이 그냥 놀러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손깍지를 무릎에 얹고 눈을 감은 채 얌전히 기다렸다. 5분가량 지나자 뒤에서 영사기가 움직이는 딱딱한 소리와 필름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인기척이 다가왔다. 레스는 침을 삼키고 가만히 저 앞만 쳐다보았다. 영사막에는 회색 불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바로 옆에 오자 레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버터랑 캐러멜 골고루 섞어왔네.”
가면을 쓴 남자는 팝콘이 가득담긴 통을 두 개나 양손으로 껴안고 있었다. 코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확 들어왔다. 레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팝콘 통을 두 손으로 받았다.
“어... 고마워.”
“좋은 밤이야 데스페라도.”
그는 자기 몫의 팝콘 통과 함께 레스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모자와 가면을 벗고 뒤로 휙 던지고는 팝콘을 한줌 쥐어서 입에 털어넣었다. 단 걸 좋아하는지 그의 팝콘들은 모두 캐러멜 맛이었다. 레스는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점은 본래 희어야할 흰자위가 검은색이라는 사실이다. 눈동자는 소용돌이 모양에 옥색이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레스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청년이었다. 눈매는 날카로운 연필로 소묘한 것처럼 얇고도 선명했다. 소용돌이치는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흐릿하고도 서늘하게 빛났다. 남자치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귓가를 살짝 덮었고 머리색은 아자리처럼 밤하늘처럼 짙은 검은색이었다. 얼굴에는 머리칼 한 가닥이 이마부터 콧잔등까지 새하얀 피부위에 붓으로 길게 획을 칠한 것처럼 내려와 있었다. 그 외에는 전형적으로 골격이 가는 미청년이었다. 입은 옷도 깨끗하고 다림질만 잘 되었을 뿐 사치부리지 않은 평범한 정장이었다.
그가 씹던 것을 삼키고 레스에게 물었다.
“영화본 적 있나?”
“아니. 처음이야.”
“앞으로는 영화가 예술의 큰 축을 담당할 거야. 내 영화관에서 첫발을 떼다니 영광이군.”
“예술은 잘 모르는데.”
그가 코웃음을 치고 말을 이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지. 어렵게 생각할 거 있나.”
영사막 위로 펼쳐진 흑백 화면에 숫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5. 그리고 4. 마지막으로 1이 나오자 화면이 까맣게 꺼지더니 영화가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