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2화 〉[2권] 72회 - 깨끗한 손은 필요없어 (72/188)



〈 72화 〉[2권] 72회 - 깨끗한 손은 필요없어

스피커에서 흐르는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와 함께 검은 화면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하늘의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직 땅 위에는 주님의 손으로 빚어진 인간과 자연만이 존재하던 때였다. 타락한 천상의 존재들은 땅으로 내몰리고도 이내 그들끼리도 빛과 그림자처럼 쪼개졌다. 그것만으로도 저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주님의 업적을 모방하여 자신들을 본 따서 피조물을 낳았으니 그 결과물이 저들이다.]

그리고 화면에 온갖 종류의 마족들의 그림 나타났다. 고블린, 오크, 엘프, 난쟁이, 페어리, 하피, 라미아, 코볼트, 수인들. 그 외에도 수많은 소수 종족들을 묘사한 그림들이 스쳐지나갔다. 화면이 깜깜해지더니  위로  글자만 떠올랐다.

[타락한 조물주들은 자신들을 대신할 족속을 따로 만들었고  으뜸은 마왕이었다.]


레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팝콘으로 배를 채우며 곁눈질로 파스낙을 노려보았다. 자기 시선을 눈치 챌  있을 정도로 그리했다. 파스낙은 일단 계속 보라는 듯 눈짓으로 대답했다.

[저 자연을 거스른 이물들을 감히 어찌 인간이 당해냈으랴? 하지만 단  명, 인간을 위해 직접 땅으로 내려온 천상의 존재가 있었다.]


검은색 화면 위로 글자가 사라지고 검은색  위로 꽂힌 하얀색 검이 꽂힌 그림이 나타났다. 그림은 곧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더니 갑옷을 입은 어느 남자가 땅에 꽂힌 검을 뽑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자의 얼굴은 투구로 가려져서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다. 레스는 그제야 조금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파스낙도 나란히 같은 화면을 보면서 대꾸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거야. 그림 수십 장을 이어서 연속으로 보여주는 기법이지.”


 동안 화면 위로는 갑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들의 동료와 함께 모험을 겪는 모습이 간략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가 노골적으로 마왕을 묘사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순간 자막이 떠올랐다.


[용사는 모든 것을 헌신했지만 싸움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암전된 화면 위로 다시 땅에 꽂힌 검이 나타났다. 검은 다른 남자에 의해 뽑혔다. 남자가 그것을 휘두르는 장면이  번 스쳐지나가자 다른 세대의 용사에게 검이 전달되는 과정이 현학적으로 묘사되었다.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일련의 과정들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체를 갖추더니 네 명의 사람으로 변했다. 검은색 화면 위에 하얀색 윤곽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대마도사 켈커트리, 길잡이꾼 아슈타쿰, 성녀 유니아, 그리고 최후의 용사 아더. 그들의 여정을 마지막으로 184년이 흘렀고 마왕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천둥과 같은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난데없이 실사 화면이었다. 화면에는 화려한 정복을 입은 뿔 달린 어느 마족이 지휘봉을 쳐들고 병사들의 행진을 마중하는 모습이 나왔다. 지금 시대의 마왕과 마왕군들이었다.

레스가 중얼거렸다.

“뭐야? 마왕이 저러고 있는 걸 어떻게 찍은 거지?”


“저 마왕은 분장해서 꾸민 배우고 병사들도 가짜라네 순진한 친구야.”

“아.”

화면은 전쟁 때문에 생긴 폐허와 굶주린 피난민들을 찍은 사진들을 비추었다.

[하지만 저들은 돌아왔다. 악은 불멸이고 남은 것은 우리들뿐이다. 그렇게 모두들 절망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황야에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더니 파묻혀있던 낡은 칼이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어떤 청년이 꺼내고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청년이 대장장이를 향해 뭔가 말했다. 무성영화였으니 대사는 들리지 않았고 대신 한 박자 늦게 검은색 화면 위로 하얀색 자막이 떠올랐다.

[이 칼을 녹여서 총을 만들어주시오.]


대장장이가 청년에게 이름을 묻는다.


[그대는 누군가? 이 칼을 어디서 찾았나?]


청년이 입을 뻐끔거리며 대답했다. 레스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으니까.


[내 이름은 피카니 홀리데이.]

‘그 녀석 그 사이에 영화도 찍었구나.’


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영화는 거기서 끝났다. 영사기가 멈추고 불빛도 꺼져서 영사막 위로는 그림자만 엉켜있었다. 레스의 눈으로도 좋은 결말은 아니었다. 그가 파스낙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가 다야?”

“여기까지가 다야. 여기까지만 만들어졌지. 자네는 방금 돈 주고도 못 보는 귀한  본거야.”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제국이 선전용으로 만든 거야. 황무지 출신인 우리 용사님의 출신을 변명도 하려고 말이지. 내가 같이 손에 넣었던 각본에 의하면 용사가 나중에 사실은 권모술수에 휘말려서 억울하게 황무지로 쫓겨난 귀족이자 용사의 혈통이었다는 설정으로 나온다는군.”


레스는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를 않아서 복잡한 얼굴로 팝콘만 씹었다. 더 먹자니 목이 매여서 그는 팝콘 통을 팔걸이에 달린 수납공간에 놓고 양손을 모았다. 파스낙이 말을 이었다.


“뜸은 이쯤 들이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 무엇을 바라고 날 만나러왔나?”

레스는 바로 즉답했다.

“날 써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래. 그렇군. 돈 문제를 겪고 있나?”

“아니.”

“그렇다면 복수인가?”


레스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파스낙이 그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말했다.

“그쪽이 진짜 용사라는 건 알고 있어. 자네하고 싸웠던 마왕의 친위대를 만나봤거든.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오늘 직접 보니  이야기들이 납득되는군.”

무표정한 얼굴로 레스가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어?”


파스낙은 혀를 찼다.

“일일이 말하면 너무 많은데.  알고 있다고 쳐둬. 실제로도 거의 그렇고.”


“그렇군.”


저쪽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지만 이쪽은 거짓말을  한다니. 그 점이 레스의 마음에 크게 걸렸다. 비밀 중 하나가 벌써 들통 난 순간부터 레스가 느끼고 있는 부담감은 상당하였다. 파스낙이 스스로 뱉은 말대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기왕 편안한 자리에 왔으니 잡담 좀 나눠 봐도 될까.”


레스는 일단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파스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올리며 손짓을 했다.


“얼마든지. 나도 손잡을 사람하고는 친해지는 게 좋거든.”


“왜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지?”

그가 미소 지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어. 그쪽이 먼저 생각해봐.”

레스는 이런 종류의 화법을 좋아하지 않아서 표정이 굳었다. 딱딱한 말투로 레스가 말했다.


“돈?”

“아니, 돈 걱정 없이 살게 된지는 오래됐어.”


“권력?”


“거의 비슷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아.”

파스낙은 주먹을 입가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목을 가다듬고 그가 말했다.


“나 같은 위치에 서면 통상적인 욕망하고는 거리를 두게 돼. 우듬지에는 새들이 둥지를 틀지 않는 법이지. 돈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가 부족해지는지 알아 데스페라도?”


“아니.”

“신뢰가 사라지지. 친구하고 가족이 사라져.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결핍되지. 그것이 없는 삶은 마치 멸망한 세상에 홀로 살아남은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어 데스페라도?”

“그쪽을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인상이기는 하더군.”

서로 숨만 고르고 아무 말이 없었다. 파스낙이 뒤늦게 자기 차례를 받았다.


“그래 맞아. 나는 외로운 사람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오래 터놓고 지낸 친구라면 있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을 만한 상대는 아니야. 검술에 보통 미쳤어야 말이지...”


“무슨 소리야?”


파스낙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둘러대는 말투를 썼다,


“실례. 나도 모르게 딴 길로 샜군. 어디까지 했더라. 아, 내가 왜 이곳을 지배하고 있냐고? 앞서 말할 게 있는데  이곳의  같은 게 아니야.”


“그럼 뭐야?”


“나는 그저 양치기 비슷한 존재야 데스페라도. 가축들에게 뜯어먹을 풀이 어디 있는지 안내해주고. 밤이 되면 가축들을 축사로 데려갈 뿐이지. 실제로 내가 진정으로 지배하고 있는 건 내 몸뚱이하고 이 영화관이 전부라네.  도시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들의 것이야.”

“그렇군.”


레스는 시선을 저 앞에 두고 생각을 정리했다. 영사막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거기에 뒀다. 파스낙은 소용돌이치는 눈동자를 레스에게 꽂아두고 미동도 안 했다. 레스는 생각을 오래 하면 파스낙에게 마음을 읽힐 거라는 생각에 느긋이 있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할 말을 가다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었지. 네가 양치기라면. 뭐라고 할까. 그들에게 풍족한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파스낙은 한쪽 입가를 길게 내렸다.


“우리들의 대화가 딴 곳으로 새고 있어 데스페라도. 하지만 상관없겠지. 들어봐. 가축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참 평화로운 존재들이야. 먹고, 자고, 싸는 것만 걱정하는 놈들로만 보여. 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들은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 목장 속의 양떼들만 해도 각자 무리를 짓고 수컷들은 암컷을 두고 싸워. 인간이나 가축이나 다를 바가 없지.”

파스낙이 갑자기 정색하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양치기가 그딴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던가? 양치기가 그놈들의 짝짓기 경쟁이나 서열 싸움에 간섭을 하느냔 말이야.”


그 한 순간에 파스낙의 목소리와 눈 속에서 광기 섞인 감정이 느껴졌다.


“안 하지.”


레스는 그 말을 듣고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위기의 순간에 치솟는 집중력이 아니었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파스낙은 심호흡을 한 번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순전히 여기가 좋아서 살고 있다네. 내가 살던 곳에는 과학 기술이 형편없어서 지내기에는 너무 따분하거든. 우리들은 마법에 너무 의존했어. 언제까지고 인간들에게 앞설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자만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고. 물론 전쟁에서 진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지만.”

말을 마치고는 그가 레스를 노려보며 씩 웃었다. 레스가 말했다.

“당신들 입장에서 나는 마왕을 붙잡은 원수일 텐데.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군,”

“아레이스타 비온 블러디아는 무능한 놈이었어. 무능한 마왕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야. 그리고 때로는 무능한 용사도 있었지. 하지만 자네 같은 경우는 유일해. 여태껏 용사 중에 ‘왕관 없는 왕’은 없었지. 친위대하고 마왕은 어떻게 쓰러트렸지?”


왕관 없는 왕이란 핏줄의 도움이나 계승 받은 특별한 도움 없이 자신만의 힘으로 업적을 세운 이를 뜻한다. 레스는 조금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그때는 총알이 넉넉했어.”


“하. 하. 하하. 뭐, 그렇다고 치지. 이젠 내가 좀 물어보자고.”

파스낙의 얼굴에는 레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어이가 나간 기색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물론 그래야지.”


“자네는 어째서 사람을 안 죽이나? 그쪽하고 싸우다가 죽은 친위대도 없었고, 오늘 하루만 해도 결투장에서 바람돌이를 결국 죽이질 않았지. 왜?”


레스는 눈을 감고  번 심호흡을 했다.

“나는 맹세를 했고. 책임이 있어.”


“그럼 한 번도 누굴 죽인 적이 없나?”


“오래 전에 결투를 했어. 그날의 살인을 마지막으로 남기겠노라 맹세했지.”

“낭만적이로군. 하지만 책임이 자네를 지켜주지는 않아.  위한 맹세인가?”


“언젠가 다시 만날 사람이 있어. 바다위윤은 맹세와 명예를 지킨다.”

그리고 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뜻을 눈빛으로 내보였다.  순간 파스낙도 그 시선을 받고 송곳에 찔린 듯 몸을 움찔거렸다. 이 흐름에 올라탈 때라 생각하고 레스가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통성명을 안 했어. 레스 알 하자르라고 해.”


“파스낙 리차트라. 하지만  이름은 이미 다 알고 왔을 테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왜냐하면 자네와 아자리아가 어젯밤에 금은방을 턴 이야기를 다 들었기 때문이지. 여기로 오기 전에 아자리아가 나에 대해서 대강 말해줬을 테고. 아닌가?”


레스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으려 바짝 곤두세웠다. 기껏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거늘 부질없어졌다.


“금은방의 습격자는 머리에 터번을 쓴 기가 막히게 재빠른 총잡이와 마녀 모자를  여자아이였다지. 같은 날에 레스 알 하자르와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의 수배서가  도시에 뿌려졌고. 이것에 대해서도 풀어볼 이야기가  많다는 예감이 드는군.”


레스는 이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때 부린 객기가 여기까지 영향을 끼칠 줄이야. 레스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금은방을 털지 않았어.”

“나도 알아. 여하튼 통성명은 끝났으니 이제  하면 되나. 그래. 내가 방금 질문을 마쳤으니 이번에는 그쪽이 질문을 할 차례로군. 해보게 데스페라도.”


“마족하고 인간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면 어느 쪽으로 가겠어?”


“풉!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파스낙은 뜬금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레스로서는 나름대로 그의 속을 떠볼 의도로 던진 질문이었다. 파스낙은 상영관이 웃음소리로 가득해질 정도로 실컷 웃다가 대답했다.


“날 차별주의자로 만들 생각이야?  종족 따위로 편을 가르지 않아. 나는 지극히 공정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네. 아까도 말했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신뢰야. 신뢰가 세상의 전부지.”

그가 양손으로 좌우로 뻗는 손짓까지 더하면서 말했다. 레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전혀 없는 건가?”

파스낙은 고개를 까닥이다가 팝콘을 입으로 던졌다. 우물거리면서 그가 대답했다.

“인간? 쓰레기야. 마족? 쓰레기야.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원주민들? 그들도 쓰레기야. 우리 모두 쓰레기야 데스페라도. 그래서 우리 모두 평등하다네. 전쟁은 쓰레기들이 벌이는 일종의 명절 행사 같은 거야. 그동안만큼은 모든 종족이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화목해지지.”


레스는 그 말을 듣고 어금니를 악물다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도?”


“사람의 삶은 원래 타인의 죽음으로 만들어지는 거야.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먹은 음식 중에 누군가의 죽음이 없었다고 정말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어?”


파스낙은 여전히 팝콘을 씹고 있다. 레스는 상당한 체력을 들여서 다시 침착해졌다. 그리고 깊이 감명 받았다는 듯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내가 찾아왔던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아주 완벽해.”

파스낙은 팝콘 통을 옆에 두고 레스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마침내 본론이로군. 무엇을 원하지 데스페라도?”


“파스낙 씨.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와 연결점이 있어. 그리고 피카니 조슈아 홀리데이하고도 연결점이 있지. 그들 사이에는 내가 있어. 나와 악수를 하면 당신은 그 둘에게 닿을 수 있는 수단이 생기는 거야. 그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지.”

레스는 당당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파스낙은 표정 없는 얼굴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레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라면 아자리아가 어떤 존재인지도  테니 설명은 생략하겠어.”


“뭘. 원하지?”

파스낙이 레스를 째려보았다. 목소리는 타자기의 좌판을 내려치듯 딱딱 끊어졌다.

“내 원주민 친구가 핑커튼에게 붙잡혔어.  힘만으로는 구할 길이 막막해. 내가 원하는  친구들과 함께 이 도시를 무사히 나오는 거야.”


파스낙의 얼굴에는 신뢰도, 의심도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주 소박한 부탁이로군. 그 대가로 내가 얻는 건 뭐지?”

레스는 파스낙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현직 용사를 붙잡아서 네 앞으로 데려오겠다.”


“오.”


“그리고 만일 우리들에게 투자를 더 해준다면 차기 마왕과의 연줄도 덤으로 생길지 모르지.”

“호오.”

파스낙은 레스에게 두었던 시선을 자신의 양손으로 옮겼다. 마치 기계식 계산기가 작동되듯 그의 손가락이 하나씩 까닥까닥 움직였다. 고개 숙인 그의 옆얼굴로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그림자가 졌다. 10초 정도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야. 그리고 실리적이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당신은 신뢰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사막 민족들이 계약에 철저하다는 건 나도 익히 들었지. 제안들도 아주 합리적으로 느껴져. 아주 좋아.”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

레스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무엇보다 자네는 그냥 보내기에는 아쉬워.”

“그 말도 들으니 기쁘군.”


파스낙은 팔걸이에 양손을 올리고 팔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양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뢰라는 건 거저 생기지 않는 거야. 피카니에게 배신당한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한 순간에 변절하는  사람이지.”


“맞아.”

파스낙이 천장을 향해 삿대질 하듯 검지를 쳐들었다.

“내 제안은 딱 하나야.”


그리고 양손을 번쩍 들더니 박수를 짝하고 크게 쳤다. 레스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파스낙이 검지로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앞을 보았다.

그곳에 펼쳐져있던 영사막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파스낙이 친 박수소리를 듣고 영화관의 직원이 기계장치로 올리고 있는 거리라. 영사막 뒤에는 빈공간이 있었다. 어둑해서 앞이  보이질 않아 레스는 앉은 자리 그대로 몸만 앞으로 기울여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곳에는 피로 물든 옷을 입은 파란 머리의 여자가 의자에 묶여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흘린 눈물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은 그대로 말라서 굳어있었다. 비록 이름은 몰랐으나 레스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멀어서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 의사가 필요한 상태임은 분명했다. 그녀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저 여자를 죽여.”


무생물처럼 물기 없는 시선으로 레스가 그를 올려다보자 파스낙이 팝콘 통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말했다.

“깨끗한 손으로 나하고 악수할 생각 마.”

그는 태연히 팝콘을 한줌 쥐어서 입으로 털어 넣었다. 레스를 내려다보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