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3권] 73회 - 신경전의 종말
레스는 돌이 됐다. 가만히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굳혔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마음을 읽히지 않으려고 꾀부리는 걸로 보일지 모른다. 어떻게 해도 시간을 벌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죽어가는 여자와 역겨운 남자를 번갈아보고는 레스가 덤덤히 말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을 쏴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자네에게 배짱이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지.”
“겨우 그거 때문에 저 사람을 계속 저기에 놔두었어?”
“어디에 놔두던 내 마음이야. 내 앞에서 직접 맹세를 깨보라고 데스페라도. 중요한 순간에 손 더럽히기 싫어하는 놈은 나한테 필요 없어.”
파스낙은 레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죽어가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거잖아. 가책 느낄 필요도 없지. 이래도 내가 관대하지 않다고 말할 셈인가?”
이젠 더 이상 이야기를 끌 핑계가 떠오르질 않았다.
“까짓것 뭐.”
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자락을 옆으로 들추고 오른손을 권총 손잡이에 올려놓았다. 다행히 루나는 정신을 잃어서 이쪽을 알아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루나를 바라보며 뜸을 들다가 시선을 파스낙에게 옮겼다. 그리고 말했다.
“화장실 가야겠어.”
“뭐?”
여태껏 흐트러진 적 없던 파스낙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레스는 살인을 코앞에 둔 와중이었지만 덤덤히 자기 할 말이나 했다.
“다녀와서 처리하지. 심각해.”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파스낙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래도 레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봐 친구. 노골적으로 말해서 무방비한 여자를 쏘는 건 명예롭지 않아. 하지만 뭐. 나는 그런 거 버리러 왔으니까 신경 안 쓸 거야. 그래도 어느 정도 각오는 필요해. 영원히 남을 기억이 되겠지. 지금 이대로 쏴버리면 오줌 마려운 거 참으면서 여자를 죽였다고 영영 마음속에 남을 거라고. 그건 나한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상대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굳어있어서 레스는 쉴 틈을 주지 않으려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말하면서 양손을 좌우로 흔들면서 고개도 저었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내가 지금 다소 품격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있지. 그런데 너도 오줌 마려운 사람하고 악수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것도 세상의 운명을 바꿀 악수잖아?”
파스낙은 반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눈만 게슴츠레 뜨고 입을 반쯤 멍하니 열었다.
마음을 읽히지 않는 방법은 읽히기 전에 미리 다 말하는 것이다. 레스는 오로지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머리를 쥐어짜서 지껄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준비해놨던 언어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듯 했다.
“뭐, 정 허락을 안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랬다간 나도 앞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하겠지. 이야 그 친구 정말 지독하더라고. 영화 보는 내내 계속 참아가지고 지리기 직전이었는데 화장실 한 번 못 가게 해주더라니까. 기어코 다리를 꽉 오므린 채로 여자를 쏴죽이고 악수했죠. 전 애원했어요. 이제 좀 싸게 해줘. 흐음... 좀 야하게 들리네.”
그가 도중에 말투까지 바꿔가면서 수다를 멈추질 않으니 파스낙이 노골적으로 한쪽 눈가를 찌푸리고 대답했다.
“됐어. 됐다고. 빨리 다녀와.”
“고마워.”
“결투장에서도 한 번 봤지만 자네 진짜 주변 눈치가 없군 그래.”
외투 자락을 되돌리면서 레스는 대꾸했다.
“자주 들어.”
그는 빠른 걸음으로 상영관을 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스는 벽에 바짝 붙어서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피고는 가는 목소리로 살짝 외쳤다.
“아자리! 아자리!”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파스낙에게서 충분히 멀어지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아자리만의 사정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레스는 기다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비척이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이 급했다는 말은 진짜였다. 출신이 출신인지라 레스는 싸움에 대비해서 물을 넉넉히 마셔두었었다. 그리고 상영관의 아늑한 환경은 엄청난 배설욕구를 일으켰다. 그 생리현상이 아니었으면 파스낙을 설득시키지 못했으리라.
아까 복도에서 만났던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매표소에 있던 직원도 자리에 없었다. 영화관은 표면적으로 영업을 끝낸 모양이었다. 벽에 걸려있는 표시를 따라가며 레스는 간신히 화장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화장실 문턱에서부터 이상한 기척이 났다.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 같기도 했고 단단한 물체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레스는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움찔거렸지만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머리 한편에서는 아까 영화관 직원이 언급했던 말이 스쳐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지 마라.
“사장부터가 미친놈이라 정상인 곳이 없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레스는 소변기로 잰걸음에 달려가 바지춤을 내리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뱉었다. 소란의 근원은 레스에게서 멀리 떨어진 칸막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들은 흘려 넘겼다. 골치 아픈 일은 당장 자기에게 닥친 것만으로 족했기에 관심 갖기 싫었다.
그는 멍하니 벽을 바라보며 파스낙에게 들킬까봐 여태껏 마음 한편에 치워뒀던 고민들을 마음껏 중얼거렸다.
“저 자식이랑 친구 먹기는 진짜 싫지만 손을 잡으면 만사가 다 해결되겠지... 아니. 그건 아닌가. 믿음이 가는 놈도 아니었어.”
소란은 아직도 끊이질 않는다. 칸막이에 주먹 같은 게 닿았는지 저 안쪽이 쿵쿵거렸다. 레스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심호흡과 함께 계속 볼일이나 보았다. 그가 다시 혼잣말을 했다.
“일단 저 파란머리 아가씨부터 어떻게든 빼돌리고 싶은데 달리 방법이 없을까? 일단 구해내면 나중에 샤키하고 바꿀 수도 있고... 외모가 내 취향이라 사적으로 데리고 있으면 안 되냐고 부탁할까? 아니지, 그 자식은 거짓말을 알아보잖아. 빌어먹을 돌아버리겠네... 그나저나 아자리는 어디에 있는 거야.”
칸막이 안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던 이들이 문짝을 부수며 바깥으로 굴러 나왔다. 경첩이 부서지고 나무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레스는 그쪽으로 곁눈질 했다. 정장을 입은 신체 건장한 남자와 웬 복면을 쓰고 외투를 걸친 남자가 서로 엉겨 붙어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의 공격에는 살기가 담겼고 또 필사적이었다. 두 남자가 당황해서 싸움을 잠깐 멈추고 레스를 바라보자 그는 곁눈질하던 시선을 되돌리고 점잖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나갈게요. 하던 일 하세요.”
복면을 쓰고 있던 남자는 레스를 보고는 눈빛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 틈을 노려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상대의 목에 팔을 감싸서 졸랐다. 복면을 쓴 남자가 버둥거리면서 목 조르기를 떼어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동안 레스는 느긋이 볼일을 마무리하고 바지춤을 올렸다. 레스는 세면대에서 손까지 씻고 바깥으로 향했다. 복면을 쓴 남자가 그를 향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서 외쳤다.
“나나와...떼!”
레스는 그 소리를 듣고 얼어붙다가 정색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와서 자세히 보니 복면을 쓴 남자의 눈매와 체형이 무척 낯익었다.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남자가 레스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뭘 보고 있어! 저리 꺼져!”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갖 표정이 레스의 얼굴 위로 꿈틀거렸다. 복면을 쓴 남자는 아직도 저항했고 그 힘은 점점 약해져갔다. 잠깐 진공 같은 침묵이 주위의 공간을 한차례 휘젓자 레스의 권총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불을 뿜었다.
총알은 정장을 입은 남자의 어깨를 꿰뚫었다. 복면을 쓴 남자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상대의 관자놀이를 향해 두 주먹을 모아 철구를 던지듯 휘둘렀다. 남자는 기절하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카니는 거칠게 숨을 토하며 쓰고 있던 젖은 복면을 벗었다. 레스의 권총은 피카니를 겨누고 있다. 레스가 물었다.
“갖고 온 총은 어디 있어?”
피카니는 수상해보이지 않도록 느린 손동작으로 화장실 칸 안쪽을 가리켰다. 아까 그가 계속 소란을 피웠던 곳이다. 피카니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콜록... 레스.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물어볼게. 지금이라도 힘을 모으면 안 될까?”
“머리 아프니까 닥치고 있어봐. 안 그래도 복잡한데 너 때문에 더 심각해졌잖아.”
“여기에는 나 혼자 왔어 레스. 뻔뻔하게 들리는 거 알지만 네 힘이 필요해.”
못 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어지간히 절박한 모양이다. 말과 몸짓에도 거짓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절박한 건 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동정이 일었지만 그래도 레스는 권총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 파란머리 아가씨 구하러 온 거지?”
피카니가 그 소리를 듣고는 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
“루나에 대해 어떻게 알았어?”
레스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까 봤으니까. 그나저나 이름이 루나였구나.”
“여기 있다고?!”
피카니의 진심 어린 반응을 보고 이번에는 레스가 얼이 빠졌다.
“뭐야. 모르고 왔어? 그럼 대체 여기에는 왜... 아, 됐어. 집어치워. 양손 들고 천천히 일어나. 나랑 같이 누구 좀 만나러가자.”
“루나를 어디서 봤어?! 어떻게?!”
“그냥 일어나. 안 그러면 그 아가씨를 내 손으로 쏴죽이게 생겼으니까. 널 데려가면 어떻게든 다른 변명거리가 생기겠지.”
“뭐?!”
너무 많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피카니는 혼란에 빠졌다. 레스가 고함을 질렀다.
“됐으니까 하라는 대로 해! 나도 복잡해서 미치겠으니까.”
“날 누구한테 데려가겠다는 거야?”
“파스낙 리차트라.”
깊은 한숨을 뱉고 피카니가 힘겹게 말했다.
“그래, 너도 파스낙 때문에 왔구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어.”
레스는 묵묵히 들고 있는 권총으로 손짓해서 일어나라고 했다. 하지만 피카니는 온 마음을 담아 그 자리에서 그에게 호소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구해준 거야? 진심으로 날 팔아넘길 거라면 날 내버려뒀어야지.”
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카니는 계속 말했다.
“미안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부. 진짜 용사가 되어야할 사람은 너였어. 오늘 일이 다 끝나면 전부 폭로하겠어. 그것 말고도 원하는 대로 뭐든 하겠어! 그러니까 제발 같이 루나를 구해줘!”
“사랑에 빠졌군.”
들고 있던 권총이 레스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피카니는 정곡에 찔린 얼굴이었다. 피카니는 생각도 못했지만 차마 부정도 못했다. 마지못해 아주 소극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피카니가 대답했다.
“내게 과분하신 분이야. 부탁이야. 그 사람을 대신해서 나나와떼를 요청할게. 너는 맹세를 지키는 바다위윤이잖아! 방금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 사람도 구해줘!”
레스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간신히 그도 할 말이 떠올랐다.
“너희는 샤카자이아를 납치했어.”
“샤카자이아?”
“핑커튼에게 시켜서 끌고 갔잖아.”
그제야 피카니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가 말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바로 돌려보내줄게. 그 사람한테도 내가 직접 사과하겠어.”
그래도 레스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보다는 널 파스낙에게 넘기는 게 더 편해.”
“물론일세.”
갑자기 레스의 등 뒤에서 난데없이 파스낙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고개만 돌려서 보니 파스낙이 길쭉한 지팡이를 한 손으로 들고 땅에 짚은 채 다리를 꼬아 화장실 입구에 기대어있었다. 말을 잃어버린 레스 대신 파스낙이 다시 말했다.
“정말 내 앞으로 용사를 데려오셨군. 설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레스는 천연덕스럽게 몸을 반쯤 돌리고 대답했다.
“뭐, 날 잡으러 쫓아오던 놈이니 언제 만나도 이상할 일이 없지.”
이제 레스는 파스낙과 피카니 사이에 어중간하게 서있는 꼴이 됐다. 파스낙이 자세를 똑바로 잡고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본성과 실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 아주 잘 봤네. 이제 각오를 보여 봐.”
“무슨 각오? 난 뱉은 말은 지켰어. 용사를 산 채로 여기에 데려왔으니 이제 날 도와줘.”
레스는 거칠게 손짓하며 언성을 높였다.
“한 번 봐줬다고 기어오르기는.”
파스낙이 비웃듯 한쪽 입가를 비틀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싫다면 그쪽은 어쩌시게?”
“기껏 데려온 용사는 시체가 되겠지. 너도 그러길 바라진 않을 테지?”
“아니, 정확하게 그걸 원한 건데. 각오를 보이라고 했잖아.”
그가 느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레스는 잠깐 얼빠진 얼굴이 되다가 파스낙의 말을 이해했다.
“지금 농담해? 이놈은 살려서 데리고 있어야 쓸모가 있어.”
“제국의 선전용 꼭두각시 따위 관심 없어. 데리고 있어봐야 내가 뭘 얻는데? 힘? 돈?”
파스낙이 땅에 짚고 있던 지팡이를 레스에게 겨누며 말을 이었다.
“난 너를 원해. 정중히 부탁하겠는데 제발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게나.”
레스의 권총은 어느새 땅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땅으로 떨구고 눈동자만 움직여서 자신의 권총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피카니를 흘겨보았다. 귀로는 파스낙의 숨소리와 기척에 집중했다. 선의 상징이 저 앞에 있고, 악의 화신은 뒤에 있다. 어느 쪽이든 자기편은 아니다.
레스가 고개를 다시 들고는 파스낙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신뢰’에 대한 정의는 이상하군. 파스낙 씨.”
“혀 말고 손을 놀리게 데스페라도.”
“까짓것 뭐.”
레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 움직여서 피카니를 향해 쏘았다. 화장실 안에서 총성이 메아리치고 피카니의 짧은 신음이 흘렀다. 메아리가 가라앉자 파스낙이 말했다.
“빗맞았군. 아직 안 죽었네.”
레스는 침착하게 즉시 대꾸했다.
“나도 알아.”
그리고 권총을 파스낙에게 겨눴다. 첫발은 방아쇠를 당기고 두 번째는 공이를 때려서 속사했다. 두 번 쐈는데도 총성은 한 번만 들렸다. 총알들은 정확하게 상대의 양 무릎으로 날아갔다. 피카니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왼손으로 부여잡고 저 앞을 보았다.
파스낙은 그대로 서있었다. 그가 혀를 차서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결국 그리하시는가.”
파스낙을 향해 날아갔던 38구경 매그넘 탄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박힌 것처럼 허공에 떠있었다. 같잖다 못해서 안쓰러워죽겠다는 비아냥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파스낙이 아직도 허공에서 빙빙 돌고 있는 총알을 지팡이로 치자 거칠게 회전하는 금속에 나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총알은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덩그러니 떨어져서 굴렀다.
레스는 넋이 나가버렸다. 상황을 이해 못하고 반사적으로 권총의 공이를 왼손으로 당겼지만 격철이 움직이는 경쾌하고 메마른 소리만 공간에 퍼졌을 뿐이다. 총알이 바닥난 것도 잊어먹었을 정도로 당황한 것이다. 피카니는 자기 옆에 놓여있는 자신의 권총을 슬쩍 바라보고는 상처를 부여잡으며 눈치를 보았다.
파스낙이 지팡이를 위로 살짝 집어던지더니 중간 부분을 잡고 손끝으로 재주를 부려서 화려하게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나머지 총알의 머리가 레스 쪽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레스는 머리로는 알아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파스낙이 손가락을 튕겨서 경쾌한 소리를 내자 공중에 떠있던 총알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원래라면 레스의 몸에 박혔을 총알은 날아가던 도중에 궤적이 휘어지더니 화장실 천장에 박혀버렸다. 레스는 기겁했고, 파스낙은 이상하다는 듯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피카니는 어느새 자신의 리볼버 권총을 챙겨서 파스낙을 향해 난사했다.
하지만 총알은 이번에도 아까처럼 똑같이 파스낙의 앞에서 멈춰버렸다. 다만 이번에는 허를 찌른 덕인지 파스낙에게 거의 닿을 뻔했고 총알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와 힘겨루기를 하듯 덜덜 떨리고 있다. 여태껏 여유를 잃지 않았던 파스낙의 눈가는 긴장으로 팽팽해지고 어금니는 꽉 다물려있었다.
가식을 버리고 경멸을 담아서 파스낙이 말했다.
“이딴 건 내게 소용없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세요? 그럼 이거나 처먹어라.”
레스의 곁에서 종이 수백 장이 동시에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틀렸다. 마치 아지랑이가 수없이 겹쳐서 압축된 것 같은 광경이었다. 파스낙이 다급하게 들고 있던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뭐라 중얼거릴 때, 아자리가 뒤틀린 공간 속에서 나타났다. 지팡이를 저 앞으로 겨누며 그녀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고함을 질렀다.
“포르차 데르피 스포르티 칼레!”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잠깐 멀 정도로 부신 섬광과 함께 광선이 아자리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자 화장실이 뒤흔들렸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타일들은 박살나서 가루로 변했고 거울과 세면대도 유리조각과 세라믹 쓰레기로 아작이 나버렸다. 벽지에는 불이 붙었고 레스와 피카니는 귀가 먹먹해서 휘청거렸다. 아자리도 자기가 일으킨 난리 때문에 잠시 비틀거리다가 곧 체면을 되찾고 뻔뻔한 태도로 우뚝 서서 레스를 향해 말했다.
“일단 말해두는데 딱히 멋있어 보이려고 노린 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