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3권] 74회 - 실용 예술
“누가 물어봤어?!”
레스도 아자리의 등장이 반갑기는 했으나 대사는 불만스러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못마땅했다. 아자리는 불평을 흘려 넘기고 파스낙이 서있던 자리로 눈을 돌렸다. 그녀가 벌인 난리 때문에 주변에는 온통 분진이 휘날렸고 벽에 묻혀있던 증기파이프까지 부서졌는지 물안개로 앞이 보이질 않는다.
아자리는 오랜만에 시원히 마법을 쏴서, 또 자신이 활약하고 있는 이 순간이 즐거운지 명랑하게 말했다.
“레스, 이런 상황에서 꼭 해보고 싶은 대사가 떠오르지 않아요?”
레스는 권총을 총집에 넣고 피카니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아자리는 정색하더니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 이리 말했다.
“해치웠나...?”
절대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 아자리의 입에서 나오자 두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모아 외쳤다.
“안 돼!”
사실 두 남자 모두 파스낙이 벌써 쓰러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여하튼 듣고 싶지 않았다. 아자리가 금기를 깬 대가를 치르듯 때마침 파스낙의 목소리가 화장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오. 전하, 가정교육을 다시 받으시죠. 여기가 남자화장실이라는 것도 모르십니까?”
아자리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단단히 잡고 태연히 대꾸했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목소리에는 억양이 없었다.
“내가 좀 밝히거든.”
상대적으로 위기를 더 많이 겪어온 레스와 아자리는 침착했으나 피카니는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파스낙은 아직 유령처럼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두 용사에 차기 마왕까지 같은 자리에 모였군. 거물들께서 다 같이 모이고는 고작 원하는 게 내 목숨이라니 참 아이러니 합니다 전하.”
“네 목숨 따위 관심 없어 파스낙! 네 변태 짓에도 상관할 생각 없어! 이제 결정해 파스낙! 이대로 우리들한테 두들겨 맞고 사로잡힐지, 아니면 점잖게 해결할지!”
아자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조그마한 몸집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할 정도로 박력과 기품이 뿜어져 나왔다. 레스는 아자리가 왕족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렸다,
“결국 어떻게든 제가 전하를 섬겨주셨으면 하는군요. 마치 저 남자가 그러하듯이.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를 담기에는 전하의 그릇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파스낙이 비꼬는 어투로 답했다. 아자리는 즉각 받아쳤다.
“레스는 나의 신하가 아니라 친구야. 그리고 너한테 진짜 친구는 하나도 없겠지!”
마지막 마디가 허공에 맺히자 레스와 피카니의 피부로도 상대의 당황한 감정이 느껴졌다. 살기가 담긴 침묵이 흐르더니 파스낙은 뜸을 다 들이고 말했다.
“곧 다시 보자고.”
그 말을 듣고 아자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세를 풀고 두 남자를 향해 말했다.
“녀석이 사라졌어.”
피카니가 물었다.
“우리를 이대로 놔주겠다는 건가? 아 전하, 제 말은... 그러니까...”
피카니가 어정쩡하게 말투를 고치려 하자 그녀가 양손을 들고 그를 말렸다.
“이제 와서 차릴 격식이 어디 있다고. 많이 다쳤나요?”
아자리는 지팡이를 피카니의 다친 곳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바로 멎었다. 피카니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고 말했다.
“스쳤을 뿐이지만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오질 않는군요.”
“이쪽은 굳이 뭐 하러 쐈어?”
레스가 아자리의 말에 대답했다.
“원래는 이놈도 같이 끌고 갈 생각이었어.”
아자리는 쓴 표정을 짓고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파스낙은 부하들하고 같이 돌아올 거예요. 이제 서두르죠.”
일행들은 화장실 바깥으로 향했다. 발밑에서 부스러기들이 또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와중에 레스가 물었다.
“좋은 생각 있어?”
아자리가 대답했다.
“오늘 끝장을 보기에는 장소가 안 좋아. 루나 씨 데리고 어서 나가자.”
레스는 일행들의 얼굴을 번갈아보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자리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고 반대할 부분도 없었다. 그가 피카니를 쳐다보면서 표정 없이 물었다.
“총알 있어?”
피카니는 군말 없이 안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냈다. 레스는 38구경 총알들이 6개씩 한 묶음으로 고무줄에 묶인 것을 두 개 받았다.
“나눠줄 건 이게 다야. 나도 이제 열 발 정도 남았어.”
자신의 권총에서 탄피를 꺼내고 총알을 집어넣으며 레스가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원.”
“누가 할 소리.”
피카니가 맞장구쳐주자 아자리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던졌다.
“그래도 막상 둘이 같이 있으니 보기 좋네요.”
레스와 피카니는 사이좋게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자리를 같이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색한 뒷맛을 남기며 두 남자는 닥친 일에 집중했다. 화장실을 나오고 복도를 나서자 모퉁이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고개를 내밀지 않아도 앞에 뭐가 있을지는 불 보듯 했다.
세 사람은 벽에 바짝 붙어서 서로 눈치를 봤다. 레스가 먼저 말했다.
“거울 갖고 있는 사람?”
피카니가 대답했다.
“없어.”
아자리도 대꾸했다.
“왜. 여자는 항상 거울 갖고 다니는 줄 알아?”
“알겠어. 괴물 아가리에 목을 넣어야겠네.”
레스가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가 머리를 내밀자 총알들이 우수수 날아왔다. 레스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는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이 조금 사라져있었다. 살짝 질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여섯 명. 좀 어떻게 해줄래?”
아자리가 말했다.
“그런데 지금 미리 알려둘게 있어요.”
“뭐.”
“요즘 푹 쉬기도 했고 지팡이도 있어서 평소보다 효율이 좋아지긴 했어요. 4배 정도.”
“그럼 보이는 대로 다 쓸어버려. 아니, 그렇다고 죽이지는 말고.”
마음이 다급해서 레스는 조잘거리는 말투로 재빨리 말했다. 아자리가 침착히 다시 설명했다.
“그래도 파스낙을 이길 확신이 안 들어. 그놈이 방심했을 때 제대로 한방 먹였는데도 녀석은 태연했어.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그놈이 나보다 고수야.”
그녀에게 온통 의지하고 있던 두 남자는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카니가 바로 현실을 직시했다.
“전하의 체력이 떨어지면 우린 끝장이야.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처리하자.”
저편에 있는 적들이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피카니는 권총을 왼손으로 쥐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들고 레스에게 뭐라 손짓하자 레스도 반사적으로 손짓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는 피카니가 움직였다. 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자리를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생각이시죠?”
피카니가 레스의 옷깃을 단단히 붙잡자 레스는 모퉁이 바깥으로 매달려서 총을 쏘았다. 이렇게 하면 몸을 최대한 적게 드러내면서 예상치 못하게 나타날 수 있다. 상대의 반격이 쏟아지기 전에 피카니가 아까 내린 그물을 건져 올리는 어부마냥 손아귀에 힘을 주고 레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권총에서 탄피를 하나 꺼내며 레스가 말했다.
“어깨를 맞췄어. 이젠 다섯이야.”
피카니가 물었다.
“할만 해?”
“아직 우리가 불리해.”
“다시 해보자고.”
아까 했던 것처럼 피카니가 레스를 붙잡고, 레스는 그 손에 매달려서 한발 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장본인들은 딱히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아자리의 눈으로는 남녀 한 쌍이서 춤을 출 때 남자가 여자를 끌어당기는 동작으로 보였다. 레스가 피카니에게 안기면서 말했다.
“이젠 넷이야.”
아자리가 물었다.
“둘이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피카니가 대신 답했다.
“총알 피해 다녔죠.”
아자리가 그 말을 듣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대로 굳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저쪽을 설득 해볼까요?”
남자들은 그녀에게 좋을 대로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자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맛보기는 여기까지다! 나갔을 때 보이는 놈들은 모조리 죽일 거다! 그리고 집까지 찾아가서 가족들은 물론이고 집은 태워버리겠다! 살고 싶다면 빠져라!”
그녀의 연설이 끝나도 새로 들리는 인기척은 없었다. 두 남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어보았다. 이번에도 총알이 날아와서 두 남자는 바로 숨었지만 아까보다는 저쪽의 반응이 확연히 느려져 있었다. 방금 동료가 일방적으로 둘이나 당한 것과 더불어서 아자리의 협박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내가...”
아자리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피카니가 재빨리 그녀의 입에 검지를 댔다. 그녀가 입술을 완전히 닫자 피카니가 왼손만 뻗어서 권총을 난사했다. 그리고 피카니의 제압사격과 함께 레스가 바깥으로 굴러나가고는 옆으로 누운 자세 그대로 권총을 양손으로 쥐고 연사했다.
그 뒤로 들려오는 건 사람들의 신음 소리였다. 레스가 몸의 반동으로 벌떡 일어나고는 어서 가자고 손짓했다. 아자리는 두 남자를 따라서 그제야 모퉁이 너머에 있는 상대들이 누군지 보았다. 경비원 복장을 한 남자들로 전부 팔이나 어깨, 다리에 총을 맞아서 쓰러져 있었다. 상처를 손수건으로 누르면서 솟아나는 피를 막기에 급급할 뿐 끝까지 싸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일행들은 겁에 질린 경비원들을 재빨리 지나쳤다. 가는 도중에 피카니가 말했다.
“파스낙의 수하들은 아니군. 그냥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
레스의 물음에 피카니가 대답했다.
“오늘 직접 봤으니까. 이정도로 쉽게 당할 놈들은 아니었어.”
레스는 그 말을 듣고도 별 감흥을 못 느꼈다.
“그래봤자 사람일 텐데.”
그들은 또 다른 경비원들과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카니와 레스가 상대보다 먼저 쏴서 제압했다. 레스는 팔하고 다리만 맞췄지만 피카니는 상대의 몸통에 맞췄다. 레스가 그걸 보고 면박을 줬다.
“죽일 작정이야?”
“난 지금 왼손이라고!”
아자리가 뒤에서 레스의 등을 찰싹 때렸다.
“뛰기나 해!”
일행들은 계속 움직였다. 벽에 달린 전구 그림자에도 흠칫거리던 피카니도 이제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서 같이 싸우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을 만난 뒤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진해져갔다.
이제 그들은 매표소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숨었다가 공격하기 딱 좋은 곳이어서 그들은 느린 걸음으로 각자의 무기로 사방을 살피면서 움직였다. 거의 다 지나갈 때쯤 아자리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많이 몰려오진 않네요.”
말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튀어나오더니 그들이 지나갔던 곳에서 총을 갈겼다. 일행들이 몸을 감출 곳이 없는 복도로 들어갈 때까지 꾸준히 참고 기다렸던 것이다. 총알들은 그들에게 닿지 않고 허공에 멈췄다. 아자리의 붉은 눈동자는 촛불처럼 빛났고 지팡이에서는 푸른빛이 감돌았다. 적들은 그래도 줄기차게 쐈고 그녀는 총알들에게 짓눌리듯 몸이 굽어갔다.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처지여서 피카니와 레스는 맞서 쏘기는커녕 상대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둘은 급한 대로 같이 아자리를 붙잡고 질질 끌어서 가장 가까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자리가 참았던 숨을 다시 쉬자 멈춰 서있던 총알들은 한꺼번에 다시 움직였다. 복도 저편으로 난 총알구멍에서 솟아오른 먼지와 나무 조각들을 보고 있자니 일행들은 새삼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 그녀가 말했다.
“켈커트리 씨 덕분에 살았다...”
“괜찮아?”
레스가 물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이상한 냄새 안나요?”
피카니가 자기 발에 닿는 상자를 보고는 대답했다.
“영화 필름 창고로군요. 위험하니 조심하십시오.”
“위험하다고요?”
“질산염과 합성수지로 만든 거라 불이 잘 붙습니다. 기름 먹인 종이만큼 잘 타죠.”
이러한 까닭에 아세테이트 필름이 개발되기 전까지 영화관에서 화재사고는 아주 흔했다. 한편 매표소 근처에 숨어있던 총잡이들은 포위망을 좁혔다. 서로 쏜 총알에 맞지 않도록 겹치지도 않게 몸가짐들이 짜임새가 있었다. 그들은 성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묶어놓기만 해도 그들이 이기는 싸움이었으니.
그런데 안에서 웬 금속 원통상자들이 튀어나오더니 그들 앞으로 굴러왔다. 총잡이들은 영문을 몰라서 그 금속원통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저걸 어째야겠다고 나서서 의견을 내는 이도 없었다.
“예술은 폭발이다!”
아자리의 외침과 함께 필름 원통이 폭발했다. 불이 붙은 필름들은 살아있는 뱀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고 총잡이들은 그곳에서 앞 다투어 달아났다. 그들이 차고 있는 탄띠와 들고 있는 권총에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꺄- 하하하하하! 봐라! 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한 순간에 전세가 뒤집어지자 아자리는 달아나는 총잡이들을 삿대질하며 미친 듯이 웃었다.
“이런 게 진정한 실용 예술이지! 다다이즘 따위는 엿 먹어라!”
레스가 떫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 오늘 따라 상당히 미친 거 같아.”
“마법사들은 원래 종종 그래. 어서 가자.”
그녀는 물 맞은 불처럼 평소의 차분한 말투로 돌아왔다. 피카니도 그 말을 거들었다.
“늦장 부려서 좋을 게 없어.”
가는 길에 레스가 피카니에게 속삭였다.
“진짜로 너희 마법사도 저러냐?”
“아니.”
“너희들한테 성질부리거나 그러진 않고?”
“전혀.”
레스가 아자리를 흘겨보고는 혀를 찼다. 아자리가 뒤처지고 있는 둘을 바라보며 외쳤다.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갈 길이 바쁘다고!”
“이미 다 왔다. 루나 씨는 저기 너머에 있어.”
그들 바로 앞에 윤기 나는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고급스런 문이 있었다. 위에는 상영관 번호가 적혀 있다. 피카니가 말을 듣자마자 냅다 안으로 들어가려해서 아자리와 레스는 기겁하고 그를 붙잡았다.
“왜?!”
그가 뒤집어진 목소리로 항의했다. 어지간히 루나가 걱정되는지 피카니의 눈빛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 것이 아니었다. 레스가 말했다.
“안에 또 누가 있을 거 아냐!”
“그럴 놈들은 이미 진즉에 다 만났어!”
피카니는 듣지 않고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묵직한 총성과 함께 안에서 총알 세례가 두꺼운 문짝을 박살내며 화산 폭발처럼 솟아나왔다. 레스와 아자리가 그를 붙잡고 밑으로 누르지 않았으면 못 볼꼴을 봤으리라.
일행들은 총알이 닿지 않는 곳까지 엉거주춤 기어가고 숨을 골랐다. 아자리는 총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 머리 위에서는 먼지도 훅훅 떨어졌다. 다들 말이 없는 와중에 총알세례가 멎자 피카니가 운을 뗐다.
“소리를 세어보니까 한 열 명 쯤 되는 거 같아. 전부 소총이랑 산탄총이고. 말인즉슨 방아쇠 압력이 높은 총이니까 정면으로 달려들어도 우리는 권총이니까 먼저 쏠 수 있어.”
레스는 피카니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아자리에게 말을 돌렸다.
“지금이야말로 네가 나설 때 같은데.”
“나도 알아요. 그런데 안을 날려버렸다가는 루나 씨도 무사하지 못 할 텐데.”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아자리는 시선을 위로 올리고 중얼거리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모자에 묻은 먼지를 턴 다음 머릿결을 매만지며 말했다.
“두 사람. 내 말 제대로 들어요. 확인했어요?”
레스는 물론 제정신이 반쯤 돌아온 피카니도 아자리의 말에 귀 기울였다.
“눈 위를 손으로 덮어요. 내가 괜찮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손 치우지 마요.”
그리고 아자리는 눈꺼풀을 닫고 지팡이를 양손으로 쥔 채 경건히 주문을 읊었다. 그녀의 지팡이에 세겨진 목각을 따라서 은은한 빛이 전구의 필라멘트처럼 맺혔다. 지팡이 끝부분을 구멍난 상영관의 문짝에 살짝 집어넣고 그녀가 외쳤다.
“리카인 데르피 익사티오 리브레!”
소리나 충격은 없이 눈부신 섬광이 지팡이 끝에서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뿜어져 나왔다. 태양계의 태양도 응달의 땅은 내버려두건만 아자리가 만들어낸 즉석 태양은 침략하듯 상영관의 그림자를 모조리 지워버렸다.
“눈이! 내 눈이이이!!”
“앞이 안 보여!”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가지각색으로 상영관에 퍼져나갔다. 아자리가 지팡이로 그들을 쿡쿡 찌르자 레스와 피카니는 벙 찐 얼굴로 상영관 안을 바라보았다.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상대방들을 레스와 피카니는 차곡차곡 쓰러트렸다. 두 남자가 싱글액션 리볼버의 총구를 위로 향한 채 탄피마개를 열고 엄지로 탄창을 경쾌하게 돌리자 안에서 탄피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그들은 지나가는 길에 손이 닿는 대로 쓰러진 이들에게서 총알만 가져가고 걸음을 재촉했다. 재장전을 하면서 레스가 아자리에게 물었다.
“파스낙은?”
“아무런 기척도 없어요.”
피카니는 아자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루나에게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