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3권] 82화 - 공리주의
레오포드는 무안한 얼굴로 잔 밑바닥만 구멍이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자네들이 찾고 있던 톤토도 수집된 신세야. 나, 자네들 친구 그리고 톤토까지 모두 같은 놈에게 잡혀 있는 거지. 갇힌 곳도 같고.”
머리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레스가 그에게 점잖이 물었다.
“우리더러 이제 어쩌라고?”
“듣고 싶어 할 테니 말해줬네. 앞으로 할 일까지 굳이 내가 말해줄 필요가 있나? 뻔한데.”
레스와 피카니는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내 두 사람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욕지거리를 작게 중얼거렸다. 혼란스러워하는 일행들을 위해 여태껏 잠자코 있던 윈프리가 나섰다.
“하얀 모자. 레오가 자네들을 속일 이유는 없어.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귀찮게 이야기보따리 펼칠 필요도 없었겠죠. 예. 압니다.”
단테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네요? 우리는 샤키를 되찾고. 그쪽은 톤토를 찾고.”
참 먼지만 한 희소식이었다. 아자리가 말했다.
“까짓거 벽 좀 부숴버리고 꺼내면 그만이지. 교도소는 어디에 있죠?”
언젠가는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는데도 레오포드는 그답지 않게 말하기를 주저했다. 시간이 끌릴수록 일행들은 예민해졌다. 그는 뺨을 몇 번 긁적이다가 허공을 가리켰다. 거기엔 천장 모서리 밖에 안 보였다. 레스가 힐난하는 눈짓을 했다.
“뭐, 탐정들끼리 하는 농담 같은 건가?”
“거기는 보안관 집무실 위쪽에 있어.”
“위쪽?”
단테하고 윈프리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쩍 벌렸다. 그대로 말없이 굳어만 있기에 피카니가 대신 설명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질려 있었다.
“중앙청사를 말하는 거야.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
마무리는 레오포드가 지었다.
“24층. 상공 90m 정도 되지.”
◆
한나절 이상을 약에 취한 채 잠만 잤던 샤카자이아는 좀이 쑤셔서 죽을 거 같았기에 간단한 운동과 스트레칭에 몰두하고 있었다. 몸을 어느 정도 움직이고 창 바깥을 봤다가 놀란 가슴도 진정시키고 나니 잊고 있었던 허기와 갈증이 뒤늦게 찾아왔다. 유치장 안에 먹을 건 없었으나 다행히 물이 담긴 유리병이 베개 머리맡에 자리끼로 놓여 있었다. 물이라도 씹어 마시면서 그녀는 생각에 빠졌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람. 와시추(백인)들 생각은 알 수가 없어.’
멀리서 인기척이 났다. 콘크리트 바닥을 때리는 구둣발 소리와 작은 바퀴가 굴러가면서 삐걱거리는 소리도 났다. 곧 그녀 앞으로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손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을 맞이해주던 여인인데 샤카자이아가 그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엘리베이터 걸은 뚜껑이 덮여있는 커다란 은쟁반을 손수레에서 꺼내고 철창 밑의 작은 틈으로 샤카자이아에게 건넸다. 샤카자이아는 은쟁반을 무시하고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상대는 침묵을 지키다가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
“견디세요.”
담백한 말투였지만 살짝 이쪽을 동정하는 기미도 느껴졌다. 상대는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고 샤카자이아의 의문은 커졌다.
은쟁반에 덮여있는 뚜껑을 들어 올리니 식욕을 돋우는 냄새와 함께 요리가 나타났다. 대구살에 밀가루 옷을 입혀서 녹인 버터로 바싹하게 익혔고 옆에는 와인을 넣어서 두툼하게 빚은 소시지도 곁들여졌다. 음료로는 거품이 사뿐하게 오르는 사과주가 와인 잔에 담겨있었고 후식으로 포도알과 봉봉 초콜릿까지 있었다. 그녀는 먹어도 될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허기가 졌어도 잡혀 온 신세에 이런 대접을 받으면 누구든 겁이 나리라.
포크로 요리를 작게 조각내서 먹어보니 이상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뒤로는 생각 없이 배를 채웠고 접시를 절반쯤 비웠을 때 헨리 플러머 연방 보안관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쓰고 있는 안경에는 먼지 한 톨 없다.
“입에 맞나?”
양 손바닥을 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샤카자이아는 본능적으로 속이 느글거렸다. 가뜩이나 빈속에 기름진 음식이 들어간 참이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무 적어.”
그녀가 먹은 것은 접시 꾸미기까지 신경 쓴 정찬 요리라서 접시만 컸지 양은 한 입 거리였다. 굳이 시간 들여서 먹은 까닭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플러머가 손가락을 하나 펼쳐 올리며 짐짓 가르치는 투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작품과 평범을 구분하는 거지. 생선은 수백 킬로미터 바깥에서 수조에 산채로 담아왔고 다섯 가지 향신료는 바다 건너 땅으로부터 왔지. 요리사는 역사가 백 년 넘은 식당의 주방장 출신이고. 일축해서 그 한 접시에 시대의 정수가 담겼단 거야. 자연현상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자연은 흉내 못 내는 그런 것 말이야. 당신들이야 절대 이해 못 하겠지만 작품이란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순수한 한 방울 같은 거라 비율이 틀어지게 되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샤카자이아는 더 참고 들어줄 수가 없어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내가 먹는 양이 많다고 돌려서 말한 것뿐이다.”
“흠…. 어험. 그렇겠지. 나도 잘 먹는 사람이 좋더라.”
쭈뼛대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며칠 전에 레스한테 배웠던 어떤 공용어휘가 떠오르고 있었다. ‘자, 찐따는 글자로 이렇게 쓰는 거야.’ 샤카자이아는 남은 요리를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 가까이 가서 플러머와 마주 보았다. 자기 목에 걸려 있는 이상한 목걸이를 가리키며 그녀가 물었다.
“네가 걸어둔 건가?”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는 마. 일종의…. 장미의 줄기에 난 가시를 다듬은 거지.”
그녀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미가 뭐야?”
“오우!”
플러머는 괴이쩍은 소리를 내며 딴 곳을 바라보고 몸을 움츠렸다. 샤카자이아의 마음속에서는 본능적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불쾌함이 또 울렁였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플러머는 자기 혼자 신나서 연달아 지껄였다.
“얼음으로 만든 종이 위에 물로 쓰인 책! 사람들은 너희들을 두고 교육과 갱생이 필요하다고들 하지.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낭비하고 원시 그대로 발전 없이 방종 하는 이교도라고. 그거야 사실이지만 나는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자 해. 참고로 난 슈슈니에 관심이 많아.”
잠깐 뜸을 들이고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날 여기로 데려온 와시추나 불러다오. 그들하고 얘기하겠다.”
샤카자이아도 피카니 일행이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은 몰랐다.
◆
레스는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레오포드가 보이질 않아 그가 일행들에게 물었다.
“그 양반 어디 갔어?”
“할 일이 있어서 가본데요.”
아자리가 대답했다. 레스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근처에 삐딱하게 섰다.
“남기고 간 말은 따로 없고?”
“저희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던데요.”
“흠.”
레오포드가 대체 어디까지 꿰뚫어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레스 일행과 피카니 일행이 대립하고 있다는 건 눈치챈 모양이다. 피카니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레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피카니가 넌지시 말했다.
“할 일에만 집중하자. 앉아봐.”
“아, 썩을.”
“심정은 이해하지만 나도 초조해! 마법사님은 한시가 급하다고!”
그는 혀를 차면서 피카니 옆에 앉았다. 나머지 일행들은 두 남자의 대화에 집중했다.
“연방 보안관은 어떤 놈이야?”
“헨리 플러머. 나도 한 번 밖에 안 만나봤어. 수소문하면서 들은 거라고는 골상학과 우생학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거야. 성실하다는 평판은 전혀 없었지.”
단테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머리 아프네.”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던 시절에는 인종 간의 우열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며 학문으로 정립한 적도 있었다. 두개골의 형태로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던 골상학은 우생학과 연관되어 인디언 같은 소수민족이나 흑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정당하게 차별하는 근거로 응용되었고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윈프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난 조금 알아. 보안관이나 장교 중에 안 그런 놈이 얼마나 있겠냐만 원주민들을 심하게 대하던 거로 유명했어. 아무래도 지금은 그 가학적인 성향이 다른 쪽으로 비틀린 모양이네.”
이번에는 아자리가 입을 열었다.
“중앙청사에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밤이 됐으니 절반 이상은 집에 갔겠지만 그래도 서른은 될 겁니다.”
“그리고 무고한 사람도 있겠죠. 싸우게 되면 그게 제일 골치네요.”
다시 레스가 말을 받았다.
“싸우지 않고 거기까지 몰래 갈 방법은?”
“올라갈 방법은 계단 아니면 엘리베이터야. 당당하게 엘리베이터로 갔다가는 당연히 들킬 거고 계단으로 갔다가 누구랑 마주쳐도 끝이야. 힘도 들 거고.”
“위로 24층, 아래로 24층. 싸우기도 전에 기운 다 빠지겠네.”
“그리고 빼낼 사람이 둘이나 돼. 레오포드가 거기로 돌아갔다면 셋이고. 그만한 인원으로 어떻게 몰래 빠져나가지?”
“파스낙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고.”
그때 발상 하나가 피카니의 뇌리를 세차게 쳤다.
“전하…! 그게 아니라 아자리양…. 거기까지 날아가서 한 사람씩 꺼내오면 어떻습니까? 아니면 저희를 거기로 끌고 가던지.”
레스도 그 의견에 말을 거들었다.
“현실적으로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거 같다.”
그녀는 눈을 굳게 닫고 겸허하게 답했다.
“나 날 줄 몰라요.”
“전혀? 전혀 못 날아?”
“나 비행 마법은 매번 낙제했어. 애들이 날 ‘별똥별 아자리’라고 불렀지.”
윈프리가 끼어들었다.
“게다가 90m 높이의 건축물이라면 근처에 난기류도 불 거야. 아가씨가 지팡이에 다 큰 남자를 태우고 안전하게 날아다니기는 불가능해.”
“아 환장하겠네 정말!”
레스는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바에 처박았다.
◆
플러머의 수다는 끝이 나질 않았다.
“역사는 교훈을 많이 줘. 모든 학문의 뿌리가 그 안에 들어있지. 지금으로부터 무려 수천 년 전에도 고대의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이 건물만큼 거대한 돌무덤을 짓고, 심지어 전기 뱀장어와 전기메기로 안마도 했다더라고. 놀라운 일이지 한참 전에 멸망했지만. 여하튼 비록 지금 멸망하긴 했어도 그 고대인들은 수천 년 전에 사막에서 버젓한 문명을 일궈냈어. 사쿠라비의 사막 어딘가에서 유적들이 아직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는데 나중에 같이 가보면 좋겠네.”
“재밌겠군.”
샤카자이아는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그녀는 한참 전부터 체념하고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이야기들도 듣다 보니 아주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일단은 견문도 넓히고 싶어서 시작한 여행이니까.
그는 목소리를 한 단계 내리깔고 어투를 진지하게 바꾸었다.
“그들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확신하는데 분명 백인이었을 거야. 가벼운 연역적 도출만으로도 나오는 결과지. 그 근거는 지금 시대의 모든 백인이 전례 없는 진보된 문명과 사상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식민지에 있는 그 외의 것들은? 예외 없이 뒤떨어져 있거든. 주제를 조금 바꿔서, 비록 끝물이었지만 나도 엄연히 개척의 시대를 이끌어가던 사람이야. 내게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지. 분명 주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은 순간에 만들어주셨을 텐데 왜 지금은 다들 평등하게 발전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너희 족속들은 풍요롭기 그지없는 저 모든 땅을 갖고도 수천 년 전의 사막보다 나을 게 없지? 분명 두개골 속에 나타나는 어떤 특정한 돌출 부위 때문일 거야. 이 또한 증명될 거고.”
“공용어는 잘 모르니 쉬운 말로 해다오.”
사실 샤카자이아는 전부 알아듣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순박한 편이라지만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진지하게 상대 안 해주는 편이 상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플러머는 그녀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어지간히 속에 품고 있던 개똥철학을 자랑하고 싶은 기회가 간절했던 모양이다.
“일부 겸손 떠는 소위 ‘불편하신’분들은 우리가 옳지 못하다고들 해. 존중받을 인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 마치 여성참정권처럼. 하지만 우리가 없었어도 너희들에게 타고 다닐 품종 개량된 말이 있었을까? 소총 없이도 모두를 배불리 먹일 만큼 들소를 잡을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들은 우스갯소리로 승자만이 정의로 남는다고들 하는데, 아냐. 정의이기 때문에 강한 거고 승리하는 거야.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 우수하게 만드는 진보가 진정한 정의지. 그 과정에서 마찰이 있더라도 말이야. 자연을 정복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으니까.”
“자연을 정복해?”
샤카자이아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도 그렇게 말했잖아? 저 자연과 토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그럼 소유주가 없으니 당연히 우리가 들어와서 살 권리도 있지. 다시 역사적 관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족속은 다 자기 세력 안에서 노예를 만들고 자기만의 제국주의를 해왔어. 왜 우리만 나쁘다는 거야? 심지어 너희들도 부족들끼리 싸우잖아. 그냥 인간의 원죄일 뿐이지 그게 뭐가 잘못이라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게 결국 근본적인 구원이거늘. 경전에도 적혀있는데.”
더는 참을 수 없는 궤변에 샤카자이아도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하나만 물어보자.”
“물론.”
“우리는 자연에 정복당했고. 너희들은 자연을 정복하겠지.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건가?”
“아. 걸맞지 않게 똑똑하군.”
그는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럼 너희들 자기 자신은 언제 정복할 건가? 만물의 이치와 자연을 정복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쉬울 텐데. 자신을 더 좋게 만드는 게 더욱 근본적인 구원 아닌가? 하다못해 이 도시에 있는 갱단들부터 먼저 정복을 하던가.”
플러머는 애써 익살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럼 나 같은 보안관이나 경찰들의 밥줄이 끊기잖아.”
“계속 홀로 말하느라 고될 테니 보답으로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하나 전수해주겠다.”
샤카자이아가 자진해서 말을 잇는 건 처음이어서 플러머는 살짝 기대했다.
“그게 뭔데?”
“말 많은 남자는 여자한테 인기 없어.”
◆
아자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피카니하고 레스가 가게 맞은편에 있었다.
“레스. 코코아 마셔요. 그만 안으로…. 당신 담배 피워?!!”
“간 떨어질 뻔했네.”
레스는 입에 물고 있던 꽁초를 손으로 들고 밑으로 내렸다. 바로 옆에는 피카니가 맞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자리는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질 않았다.
“여태껏 피운 적 없었잖아?”
“오래전에 끊었고. 즐기는 편도 아니다만 지금은 이거라도 없으면 못 버티겠어.”
말이 끝나는 순간 레스가 피우고 있던 꽁초가 저절로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아자리에게 날아갔다. 그녀는 바로 그것을 짓밟았다.
“감히 내 앞에서 이딴 걸 피우다니….”
“야! 이놈 거는 왜 안 뺏어?”
피카니는 태연히 연기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아자리는 레스를 무시하고 하던 말이나 했다.
“어쨌든 슬슬 들어와요. 아직도 답이 안 나오지만. 일단 쉬어야 뭐라도 하죠.”
레스가 날숨을 한 번 길게 뱉고 손짓을 해가며 말했다.
“그거라면 우리끼리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뭘 어떻게 해요?”
피카니가 피우고 있던 꽁초를 짓밟았다. 아직 한참 더 피울 수 있었지만 아자리가 신경 쓰여서 미리 끈 것 같았다.
“같이 다니던 시절에 몇 번 써먹은 수법이 있습니다. 레스도 동의했고요.”
방법이 떠올랐다면 다행이지만 아자리는 바로 걱정이 들었다.
“뭘 할 건지는 둘째치고. 정말 괜찮겠어요 레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사적인 감정은 도움 안 된다는 거 저도 알지만, 당신 앙금이 남았을 거 아니에요? 게다가 아까 곱빼기로 쌓였을 거고.”
피카니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레스는 실눈을 뜨다가 잠시 후에 대답했다.
“모두를 위해서야. 너, 단테, 샤키. 모두 각자 역할을 다했기에 여기까지 왔던 거야. 나도 할 일 해야지.”
그때 단테가 안에서 뭔가를 가득 들고 나타났다. 그가 레스에게 다가오고는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난 괜찮아. 다들 그 소리네.”
단테가 가져온 것은 레스가 평소 입고 다니던 옷가지들이었다. 유목민 자수가 새겨져 있는 폰초 망토, 머리에 두르는 터번. 그리고 오늘 잡화점에서 산 검은색 조끼. 레스는 어설프게나마 변장으로 걸치고 다니던 외투와 모자를 벗어 던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슬슬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아자리는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피카니가 망토를 걸친 레스의 어깨에 손을 턱 걸치고 말했다.
“체포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