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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화 〉[3권] 85회 - 노마드의 맹세 (85/188)



〈 85화 〉[3권] 85회 - 노마드의 맹세

다른 사람은 없었다. 사치가 4면에 물결치는 복도를 걸을수록 둘은 계속 심란해졌다. 눈이 닿는 곳마다 색이 현란한 벽지와 양탄자뿐이니 선물 포장지에 갇히는 기분이다. 이렇게 취향이 노골적으로 엿보이는 놈한테 샤카자이아가 벌써 나쁜 짓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레스는 걱정도 됐다. 이제  남자는 보안관 사무실 바로 앞에 섰다. 피카니는 손을 들어 올리고 문을 두드리기 직전에 레스와 마주 보고 눈빛을 교환했다. 계속 마주보기는 했는데 서로 자기가 무슨 의도를 받고 있는지 알아먹지는 않았다. 중요한 순간 직전이니 피카니는 뭔가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말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곧 서로 쓸데없는 짓이란 결론에 동의하고 같이 고개를 말없이 저었다. 피카니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플러머 연방 보안관이 바로 보였다. 자리에 앉아서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깍지 낀 손을 입에 대었다. 보통은 인사를 나누던가 자리에 앉으라는 식으로 치레를 갖추기 마련인데 보안관으로부터는 한없는 의심이 담긴 추궁의 시선만 왔다. 피카니도 무슨 불만이냐고 말하듯 상대를 째려보았다. 그 신경전 속으로 레스가 손에 걸린 수갑을 흔들며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보안관은 손의 깍지를 풀고 책상을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레스를 째려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바로  소문의 사쿠라비인가. 수배서보다는 잘생겼군.”


“여기 온 지 이틀 밖에 안 됐는데 무슨 소문?”

“여기는 평소에도 바쁜 곳이지만 요즘은 특히나 이상한 일이 많았지.”

플러머가 자연스럽게 피카니를 바라보며 화제를 바꿨다.


“현상금 수령 말인데. 계좌 송금하고 현찰 중에 어느 쪽이 좋은가?”


“언제나 현금이 최고지. 당장 금화로 받았으면 하는데.”


어차피 피카니는 지금 계좌를 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플러머는 작은 코웃음으로 목을 가다듬고 삐딱하게 섰다. 묘하게 상대를 깔아보는 인상이었다.


“지금 당장이라? 자네 정말 현상금 사냥꾼 맞나? 금액이 높을수록 신원 절차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모르는군. 이 업계를 소설로 배운 거 같은데.”


“물론 댁한테 이놈을 어떻게 붙잡았는지 한참을 떠들어야겠지. 그리고 나랑 이야기하다 보면 댁은 무조건 돈을 줄 수밖에 없을 거야.”

“무슨 뜻이지.”

“당신 야만인들한테 관심이 많다며? 나머지는 둘만 있을  말하는 게 그쪽도 좋겠지?”


피카니는 의뭉스러워 보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상대는  말을 듣고 속을 알 수가 없는 오묘한 무표정만 지키고 있다가 주머니를 옷 주머니에 집어넣고 거만하게 말했다.


“그놈 데리고 따라와.”

플러머가 등을 돌리고 사무실의 반대편 문으로 향하자 피카니와 레스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그들이 기대했던 흐름이었다. 두 사람이 뒤를 쫓아가자 플러머가 입을 열었다.

“보통은 체포하면 시내 교도소로 보내는데 이번에는 특수한 놈이기도 하고 시간도 늦었으니 급한 대로 내가 직접 처리해주지.”


피카니는 시치미 떼고 대꾸했다.

“내   아니야. 감옥에 가두든 닭장에 가두든.”

방을 나와서 복도를 따라 다다른 곳은 또 다른 승강기였다. 주변 정황을 보아하니 보안관 혼자서만 쓸 용도로 놓인 승강기로 보였다. 레스는 왜 방금 자신들이 타고 왔던 승강기에는 24층으로 향하는 버튼이 없었는지 이해했다. 보안관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땡 하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승강기가 위로 향하자 레스는 불현듯이 속이 울렁거렸다.

“기분이 이상해.”

피카니가 짓궂게 말을 걸었다.

“왜. 멀미하냐?”

“그런 가봐.”


이번에는 플러머가 말했다.


“유목민이 겨우 이 정도 진동으로 멀미를 한다고?”

레스가 투덜거렸다.

“말 타는 거랑 하늘로 솟구치는 거랑 종류가 같겠냐고.”

“참 재밌는 친구구먼.”


문득 깨달음 하나가 레스의 뇌리를 세차게 때렸다. 생각해보니 여기 사람들 기준으로는 샤카자이아 같은 원주민만이 아니라 자기 같은 유목민도 야만인에 속했다. 인제 와서 깨달은들, 아니면 미리 알고 왔든 상관은 없었지만 신경 쓸게 늘어나니 레스는 괜히 더 메스꺼워졌다.

보안관의 뒷모습은 무방비해 보였다. 피카니가 레스에게 곁눈질로 당장 싸울 건지 물었고 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구해내야 할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데 성급하게  수는 없었다. 피카니도 심중을 이해하고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24층에 왔다. 당장은 아무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복도만 보였다. 플러머가 뒤를 돌며 레스를 삿대질했다.

“수갑은 그놈한테 채우고 이리 내놔. 얘기 좀 나눠야겠군.”

피카니는 자기 손에 걸려있는 수갑을 풀면서 생각했다. 중요한 순간이다. 지금 당장 싸울 수도 있다. 주변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피카니는 계속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결국 레스의 손에 수갑을 완전히 채웠다. 피카니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난 어디서 기다려?”

플러머가 복도에 난 문 중에서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뭐,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흠.”


피카니는 의미를 묻지 않고 흘려넘겼다. 레스는 그대로 플러머에게 떠밀려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 두 개와 탁자만 덩그러니 놓인 갑갑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문이 닫히자 레스는 이제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됐다. 이제는 홀로 남은 피카니가 주어진 기회를 잘 써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플러머가 먼저 자리에 앉으며 레스에게 손짓했다.

“앉아.”

그는 느릿하게 시간을 들여 보안관과 마주 앉았다. 수갑을 찬 양손은 탁자에 올렸다. 둘은 한동안 노려보기만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플러머는 뜸 들이는 걸 그만두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서 탁자에 놓았다. 방이 너무 조용해서 그 떨그럭하는 소리조차 소음이었다.

“자기소개는 건너뛰고. 왜 파스낙이 널 원하지?”

“그게 누군데?”

레스는 시간을 질질 끄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당연히 플러머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는 유화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생기 없는 눈으로 레스를 노려보았다.


“정신이 없어서 아직 모르는 거 같은데 자네 지금 잡혀 왔어.”


“나하고 그놈 사이에 댁이 무슨 상관이야.”

“왜냐하면 난 보안관이고 파스낙은 나쁜 놈이니까. 무슨 짓을 저질렀지?”

“날 취직시켜준다더라고. 거절했어. 그게 다야.”


“영화관을 반쯤 부순 건?”

“어쩌다 보니까. 그래서 파스낙이 나한테 열 받은 게 아닐까.”

플러머는 팔짱을 끼고 한쪽 눈을 치켜떴다.

“같이 다니는 여자애는 어디로 갔나.”


샤카자이아만 생각하고 있던 레스는 미처 예상을 못 하고 놀라서 대놓고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아자리에 대해서 완벽하게 모른  해봤자 상대의 화만 돋울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둘러대야만 했다.

“헤어졌지. 말  해도 알겠지만 난 잡혔잖아.  달아났어.”

“이 도시에는 무슨 용건으로 왔지?”

“지나가던 길.”

“지나가던 길에  많이도 저지르는군. 결투장, 영화관, 전차, 파스낙. 그리고 애꿎은 사람 바지도 벗겨버리고. 오늘 너하고 일당들 때문에 도시가 발칵 뒤집혔어. 널 쫓는 사람도 좋은 놈부터 나쁜 놈까지 다양하시고. 너 같이 이상한 놈은 처음 보는군. 넌 대체 누구야?”


“술김에 사고 쳐서 꼬인 인생 일일이 듣고 싶진 않을걸.”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겠다.”

플러머는 시간을 세듯 손끝으로 탁자를 규칙적으로 천천히 때렸다. 피카니가 어떻게든 해줄 때까지 버티기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레스는 점점 초조해지고 속이 쪼그라들었다. 지나치게 말을 돌리면서 대화를 받아주지 않으면 상대는 자신을 내버려 두고 피카니에게 갈 거다. 소강상태가 길어질수록 플러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떠날 것 같았다. 레스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레오포드하고 만났다.”


예고 없이 날라온 말에 상대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언제?”


“몇 시간 전에. 그 사람이  친구가 여기 있다고 말해줬어.”


지나치게 과감하지는 않았을까 걱정됐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생각할 게 많아진 상대방은 표정이 한결  진지해졌고 탁자를 때리는 손가락은 빨라졌다. 플러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이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무슨 생각으로 꺼낸 말이지?”

“거래하고 싶어. 신뢰의 의미로 이 수갑을 풀어준다면 아는 대로 모조리 말할게.”

“아주 재밌군.”


플러머는 숨을 한  크게 들이마시고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있었어. 바다위윤의 3가지 맹세가 뭔지 알려주겠나.”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으나 레스는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손님을 환대하는 밀마스티아. 자비를 베푸는 나나와떼. 복수를 행하는 바달.”


“만일 복수해야  상대가 자비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바달하고 나나와떼 중에 어떤 게 우선시 되지?”

문득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자비를 베풀어야지. 아무리 죽일 놈이라고 해도.”


“그걸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있기는 하나?”


“누군가는 하겠지. 맹세는 절대적이야. 당신도 보안관이 됐을 때 선서를 했을  아냐.”

“물론 맹세는 절대적이지. 종이 위에서만. 난 너희 족속들이 싫어.”

“방금 뭐라고?”


“내 가문은 많은 곳을 탐험하고 수많은 야만인에게 문명의 가치를 알려줬다. 섬겨야 할 진짜 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고. 쓸모없이 방치된 자원을 제대로 써주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 우열이 무엇인지도 알려줬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만성을 포기 못 한 부족들도 제법 되는데 개중에 너희들이 최악이었지.”

“가족 중에 험한 꼴 당한 사람이 있었다면 유감이야.”

자기 민족을 향한 사적인 감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대화가 다른 곳으로 새는 것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상대가 아무 생각도 없이 이러는 게 아니란 직감이 들었다. 플러머가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이상한 교리 때문에 여자가 살갗을 보이면 돌로 팰 정도로 평등 의식이 아주 개판이라지. 동성애자는 사형이고. 돼지고기하고 술도 못 먹고. 그렇게 독실한 주제에 틈날 때마다 도적 때로 변하지. 일생을 더러운 초원과 사막에서 무법자처럼 떠돌고.”


“난 종교 없어. 돼지고기도  먹고.”

플러머가 자리에서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그 기세가 마치 먹구름이 움직이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는 거 같았다. 이유는 몰랐으나 레스는 마음의 각오를 했다. 육감이 그에게 경고했다.


“네가 그렇게 날쌔다며? 날라오는 총알을 피하거나 튕겨내고 혼자서 몇 명이 달려들어도 먼저 뽑아서 쏠 수 있다고?”


플러머가 탁자의 옆을 빙 돌아서 다가왔다. 한 손은 탁자에 놓고 움직이면서 겉을 쓸었다. 레스가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주먹이 레스의 팔뚝에 내리꽂혔다. 정신이 들고나니 팔뼈가 부서졌다는 정보가 뇌에 도착했고 탁자에 주먹이 닿았던 곳은 박살이 나서 구멍이 나 있었다.


“가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지 못할 괴력이었다. 플러머는 레스의 머리채를 붙잡아서 탁자로 내리치고는 소리질렀다.

“아무래도 총이 있어야만 빠른가 본데! 역겨운 새끼가. 기어도 모자랄지언정 감히 네깟 냄새 나는 깜둥이가 거래를 청해?!”

플러머는 그대로 레스의 머리채를 붙잡고 탁자에 처박았다. 레스가 고통으로 헐떡이는 동안 플러머는 흐트러진 옷깃을 매만졌다. 다시 정신을 차린 레스는 다친 쪽이 오른팔이라는 섬뜩한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마지막 기회다.  정체가 뭐야? 여기에는 뭐하러 왔어?  파스낙이 널 쫓지? 너하고 같이 다닌다던 여자애도 정체가 뭐야?”

플러머가 점잔 떠는 목소리로 다시 레스의 머리채를 부드럽게 움켜쥐며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레스는 힘이 빠져서 그 손길을 따라 꼭두각시처럼 몸이 올라갔다. 겨우 목을 가다듬고 레스가 대꾸했다.

“진짜 미안한데…. 너무 아파서 뭐라고 했는지 안 들려.”

상대는 레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대로 머리를 다시 탁자로 처박았다. 고통과 현기증으로 윙윙거리는 귓가에 플러머가 입을 바짝 대고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귀로 들어간 목소리가 반대쪽 귀로 튀어나올 기세였다.


“넌 누구야! 뭐하러 왔어! 왜 사람들이 널 쫓는 거야! 계속 헛소리하면 네 해골이 어떻게 생겼는지 봐야겠다. 사쿠라비의 해골은 처음이니 아주 재밌는 경험이 되겠지!”


몽롱해진 정신 속에서 레스가 이성을 쥐어 짜내어 꺼낸 최선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난... 용사야. 같이 다니는 여자애는 마왕이고. 그리고 용사가 우리 뒤를 쫓고 있지.”

그 말을 듣고 잠시 후에 플러머는 중얼거렸다.

“쯧. 나답지 않게 흥분해서 머리를 너무 때렸나.”

그대로 손을 놓자 레스는 탁자 위로 몸이 고꾸라졌다. 차라리 마음 놓고 정신을 잃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직 할 일이 남았기에 레스는 계속 견뎠다. 그런 노력은 안중에도 없이 플러머는 레스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이번에야말로 레스는 혼절하고 말았다. 플러머가 그의 얼굴을 때리면서 물었다.

“여보세요? 들리세요?”


다시 정신을 차린 레스는 이제 오른쪽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픔을 느꼈다. 진땀을 흘리며 덜덜 떨고 있는 그를 향해 플러머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복합골절은 아주 치명적이지. 특별한 치료가 없으면 일생 내내 오른손은 못쓰게 될 거다. 나중에 다시 볼 때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하시게나. 과연 다음에 만날 때도 그 잘난 맹세가 적용되는지 보자고.”


플러머는 그대로 레스를 방에 내버려 두고 바깥으로 나왔다. 곧 바깥에서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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