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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화 〉[3권] 89회 - 임기응변 (89/188)



〈 89화 〉[3권] 89회 - 임기응변

레오포드가 앞장서자 나머지는 따랐다. 주변의  철창들을 돌아보고는 레스가 말했다.

“달리 잡혀 있는 사람은  없고요?”


“여기에는 없네.”

샤카자이아가 늑대에게 두던 눈길을 거두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톤토가 누구인가요?”


“내 오랜 주술사 친구. 혹시 해서 말하는 건데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몰라.”

그들은 철판과 징으로 단단하게 덮인 철문 앞에 멈췄다. 자물쇠에 열쇠를 집어넣으며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어떤 사람인지는 관심 없습니다.”


문을 열고 레스와 피카니는 안을 보았다. 두꺼운 띠로 머리를 두른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허공에 둥둥 떠다닌 채 이쪽으로 등을 지고 있었다. 레스는 과연 범상찮은 상대라고 확신했다. 가부좌를 튼 채 허공에 떠 있는 남자는 감방의 문이 열린 것도 의식하지 않고 꿋꿋이 가만히 있었다. 알아서 반응해주길 기다렸던 피카니가 참다못해 말을 걸었다.

“당신이 톤토요?”

“아니. 갇혀있는 톤토.”


톤토는 한쪽 다리만 땅에 놓고 팽이처럼 빙글 돌아 그들을 보았다. 얼굴에는 뭔지 모를 하얀색 분장이 가뭄이 난 땅처럼 쩍쩍 갈라질 정도로 두텁게 칠해졌고 눈가에서 턱까지 검은색 분장이 쭉쭉 그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길게 길러 여러 가닥으로 꼬여 있었다. 분장이 너무 진해서 이목구비는 눈에 전혀 안 들어왔다. 상의는 벗고 있어서 중년 남성이라는 것만 확실히 분간됐다. 피카니가 다시 물었다.


“좋아. 그럼 당신이 갇혀있는 톤토요?”


“아니. 이제 나오려는 톤토.”

근처에 늑대와 같이 기다리고 있던 레오포드는 이럴  알았다는  고래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피카니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으려고 하자 레스가 옆에서 속삭였다.

“진정해. 이런 거로 발끈하지 마.”


톤토가 다른 한쪽 다리도 땅에 놓고 이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자네의 ‘케모사베’를 여기로.”

그는 내뱉는  마디마다 계시를 내리는 듯 뱃속에서부터 들려오는 울림이 풍성했다. 다른 말로는 쓸데없이 분위기 잡는 사람 같았다. 피카니가 살짝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깔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요?”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그에게 속삭였다.


“‘케모사베’는 그러니까… 친구라는 의미다.”


그 말을 듣고 레스가 왼손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저요?”

톤토가 눈동자만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고는 한 박자 늦게 고개도 까닥였다.

“그대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피카니는 톤토를 더는 상대 하고 싶지 않은 눈치여서 레스가 대신 자리로 들어가며 말했다.


“절 기다렸다고요?”

갑자기 톤토가 다짜고짜 성큼 다가오더니 레스의 오른팔을 덥석 붙잡았다.


“꺄호오오옥!!”

레스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남자답지 않은 고음이 튀어나왔다. 샤카자이아는 너무 놀라서 굳어버렸고 피카니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딱 봐도 다친 거  보여?!”

“어라 잠깐만. 이젠 별로 안 아픈데.”


여태껏 꿈쩍도 안 했던 레스의 오른팔이 제구실을 되찾고 움직이고 있었다. 손끝이 떨리고 동작이 굼뜨긴 해도 치료된 건 분명했다. 레오포드가 설명했다.


“플러머가 망가트리면 톤토가 고치지. 그걸 계속 반복하다 보면 누구든 무너져. 그게 녀석 수법이었다네.”

톤토가 점잔빼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뼈는 얼추 붙었다. 그러나 무리했다간 더 심하게 덧난다. 그러니 살살 써야 한다.”

“살살 쓰라고요?”

“연필 정도가 한계다.”


레스는 다른 사람 팔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펴보다가 말했다.

“아무튼, 나가기나 합시다. 이제 나오려는 톤토.”


“필요한 것만 챙기고. 너희들은 분명 피가 썩어가는 사람을 구하려고 왔었지.”

피카니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을 크게 뜨고 레스를 바라보았다.

톤토는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가 갇혀있던 감방에는 그가 일할 때 쓰는 것으로 보이는 잡기들이 널려 있었다. 그가 가죽 가방에 주사기와 약병을 몇  집어넣고는 자신의 옷에 묶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레스가 물었다.

“기다렸다고 했었죠. 진짜로 우리가 여기로 올 줄 안 겁니까?”


“하나의 유리 파편 너머로는 반대편만이 아니라 굴절된 다른 면도 비치듯 관점은 하나가 아니다. 요령을 터득하면 과거의 그림자도 발자국처럼 읽어내고 미래도 저 멀리 다가오는 먹구름처럼 보인다. 그래서 무엇이든 미리 꿰뚫어 보고 대비할 수….”


톤토가 감방을 나오자마자 샤카자이아를 온몸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으아아아! 마토아카?!”

레스와 피카니는  저러는지 몰라 얼굴이 뚱하기만 했으나 샤카자이아에게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스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샤카자이아.”

“샤카자이아? 흠. 그래. 많은 것이 설명되는군.”

레오포드가 끼어들었다.

“나도 놀랐어.”


늑대도 동감한다는  끼잉하고 작게 울었다. 당연히 레스하고 피카니는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턱이 없었다. 피카니가 말없이 바깥쪽을 거칠게 가리키자 다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갈  레오포드가 말했다.


“구하러 와줘서 고맙기는 한데 이제 어쩔 계획인가?”


레스가 대답했다.

“거기까진 생각  했어요.”


샤카자이아가 레스를 바라보며 담백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톤토가 승강기의 버튼을 누르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가 양손의 검지를 위로 치켜들고 일행들의 시선을 끌었다.


“잠깐만. 문제가 있다.”

피카니가 짜증을 냈다.

“뭐. 불길한 미래라도 보입니까? 그런 거라면 저도 보입니다만.”


“이 승강기는 3명이 한계다.”


“허?”


“일행을 둘로 나눠야 해. 이 승강기는 보안관이 원래 청사진에는 없던 곳에 억지로 시공한 거라 굉장히 불안정하다.”

그때 벽에 걸려있던 전화기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진 단테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고 친절히 말했다.


“사탕 먹을 사람?”


그들은 방금 새로 세운 텐트 주변에 빙 둘러 모여 있었다. 아비투스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난 먹을래.”


카르델은 그에게서 사탕을 넙죽 받아서 입에 쏙 넣었다. 윈프리하고 히콕은 별말 없이 근처의 건물 벽에 기대어서 쉬었다.


새로 세운 텐트 안에는 가스 등불을 켜고 아자리와 하딘이 서로 대면하였다. 급한 대로 의자 삼아 가져온 나무 상자에 앉아서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자리가 헛기침을 하고 말문을 띄었다.

“제대로 말을 나누기는 처음이네요.”

“그날 밤에는 워낙 정신이 없었지요. 요전에 국경 지대에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뇨. 경고를 무시한  잘못이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어쩌다가 제1 황녀가 된 아자리아 비온 라프라스입니다.”

하딘도 그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벗어서 가슴에 대고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요즘 뒷북만 치고 있는 헨리 웨슬리 하딘 대위입니다. 저부터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전하.”


“예.”


“루나 님을 구해주신 일은 감사드립니다만 저흰 엄연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대로 곧장 전하만 데리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건 고려하고 계신 겁니까?”


“여러분들 힘만으로는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없을 텐데요. 맥심 건을 쓴다면 잠깐 달아날 수는 있겠지만 파스낙도 쉬이 놔주진 않을 거고요.”


“물론 힘들겠죠. 하지만 전하에게는 그만한 위험을 감내할 가치가 있습니다.”

“알려드릴 사실이 많아요.”


“말씀하십시오.”


아자리는 눈가를 비벼서 몰려오는 피로를 쫓아내고 입을 열었다.

“루나 씨에게 응급처치는 되는 대로 해봤지만 안심할  없어요. 총에 맞고 한나절 이상을 방치당하는 바람에 감염이 심각해요. 이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살을 찌워서 죽자사자 버티는 것뿐인데 연약한 여자가 해낼 확률은 거의 없어요. 저보다 뛰어난 전문가가 필요해요.”

“톤토인가... 혹시 루나 님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셨습니까?”


“조금은.”










조명이 하나만 켜진 극장의 무대 위. 의자에 꽁꽁 묶여 있는 루나에게 파스낙이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요즘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해. 대의 따위 신앙만큼 허무한 법이지. 정말  하나 지켜주지도 못하는 놈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 거야?”

루나는 기침을 터트리고 모기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협박해서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거군요.”

“나도 싫은데 경험상 어쩔 수가 없더라고. 어쨌든 그쪽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거절하면 출혈 과다로 이 자리에서 죽거나 감염으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겠죠.”

“어차피 정해진 답이지만 그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우리끼리 서로 통하는 게 많을 거야. 그 눈. 세상을 등진 사람의 눈이잖아.”


“살기 위해서 살인자가 되지 않겠어요.”

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열 받은 파스낙은 생각할 시간 좀 가져보라며 그분을 방치시켰죠. 그리고 저녁이  때까지도 마지막까지 루나 씨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요.”


아자리가 짧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녀는 하딘의 턱이 굳게 닫히고 팔짱을 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보았다. 하딘은 루나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을지 떠오르느라 이어갈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아자리는 다시 말했다.


“한시가 급하니 핵심으로 넘어갈게요.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해요.”


하딘은 할 말이 많았으나 상황이 복잡한 걸 알고 있었기에 질문을 신중히 골라야 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십니까.”

“연방 중앙 청사로 가야 해요. 사람들하고 무기를 있는 대로 다 모아서요.”


 말을 듣고 머릿속을 정리하던 하딘이 다시 물었다.


“설마 연방 보안관하고 싸워야 하는 겁니까?”

“이미 제 친구하고 피카니가 먼저 그쪽으로 갔어요.”

“맙소사 여태껏 어디 갔나 했더니 그쪽에 있었군.”


피카니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건지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며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인상을 구겼다. 그는 뒤늦게 아자리의 시선을 깨닫고 침착해졌다.

“그런데 전하의 친구라면 그 사쿠라비를 말하는 겁니까? 이름이 분명….”

“레스 알 하자르.”

“왜 전하의 친구와 저희 애물단지가 같이 톤토를 구하러 가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저희 마법사님을 구해드리려 하는 겁니까?”

“별  아니고 마침 거기에 당신이 팔아넘긴 저희 친구가 있거든요. 레오포드 씨도 있고.”

이때만큼은 아자리도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딘의 머릿속에서 조각나 있던 정보들이 연결되자 그는 들 낯이 없었다.






전화기의  소리는 멎을 기미가 없었다. 벨이 열 번째로 울렸을 때 레오포드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전화를 안 받으면 이쪽으로 사람을 올려보낼 거야.”


톤토가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화를 받을 수도 없잖아.”

옆에서 샤카자이아가 레스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게 뭐야?”


급한 와중에 저걸 설명해줘야 하나 레스가 고민하고 있는데 그동안 목울대를 가다듬고 있던 피카니가 수화기를 덥석 집고는 귀에 댔다. 갑자기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피카니를 지켜보기에 영문을 몰랐던 샤카자이아가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일... 우읍!”

레스는 허겁지겁 샤카자이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곧 피카니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래 수고가 많네. 다른 일은 더 없고? 흠. 으흠. 그래.”

피카니의 입에서는 연방 보안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레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서 얼굴에 감탄으로 차올랐다. 피카니는 성대모사와 해야 할 말에 집중하느라 이마에 맺힌 땀을 계속 소매로 쉴  없이 닦아야 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올려보낸 손님 말인데 역시 숨겨진 무언가가 있더라고. 무슨 뜻이냐고? 보면 알아.  내려갈 테니 별 탈 없도록 정중하게 모셔드려. 응? 무슨 일인지는 보면 안다고 두 번이나 말해야겠나?”

수화기를 거칠 게 돌려놓은 다음 피카니는 머리를 흔들어서 현기증을 쫓아냈다. 그가 일행들에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통했을까? 목소리는 그렇다 쳐도 말투에서 들켰을지도 몰라.”


레오포드가 대답했다.

“나쁘지는 않았는데 결과는 직접 봐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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