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3권] 91회 - 활잡이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샤카자이아는 당황해하는 레스를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흥분이 가라앉은 그는 자신의 친구가 한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했다. 레스는 목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깜빡했던 존중을 담아서 말했다.
“미안.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해야겠지.”
그녀는 만족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랫사람을 대하는 사람처럼 조금 거드름피우는 태도로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레스는 멋쩍게 입가를 조금 씰룩이다가 욱신거리는 자기 오른팔이나 주물렀다.
서로 입을 닫고 가만히 있으니 두 사람은 저절로 자기 생각하고 대화하게 됐다. 샤카자이아는 한결 맑아진 머리로 여태 들었던 것들을 다시 되새겨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물었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한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거 아닌가?”
레스는 아직도 자기 오른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가 잽싸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게. 평소라면 왼팔도 부러졌을 텐데.”
“그런 뜻이 아니야. 너희들은 레오포드 씨 덕분에 여기로 왔잖아. 파스낙이 정말 그럴 줄도 예상 못 할 놈일까?”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 그의 얼굴에 심각한 표정이 서렸다. 레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오포드 씨가 우릴 속였단 거야?”
“그랬으면 애초에 너희들이 날 구해주지도 못했겠지.”
대체 무슨 소리냐고 불평하려다가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이상하긴 하네. 다른 탐정도 차고 넘치는데 왜 하필 자길 가장 싫어할 사람에게 맡겼담?”
“내 생각엔 파스낙이 너희들을 유인하려고 레오포드 씨를 꺼낸 거 같아.”
불안함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눈덩이처럼 몸을 불렸다. 레스는 그녀의 말을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토론할 필요가 있었다.
“파스낙이 그 사람을 이용해서 우릴 여기로 끌어낸 거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그래.”
“왜? 왜 녀석이 그럴 필요가 있어?”
“파스낙은 레오포드 씨가 너희들을 찾아서 데려오길 바란 게 아니야. 어떤 형태로든 너희들이 움직일 동기가 생기길 바란 거지. 그 사람한테 쫓겨서 달아나던가, 아니면 지금처럼 정보를 받아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을 깨닫게 하거나. 너희가 어디로 향할지는 상관없어. 숨는 걸 그만두기만 하면 돼. 자기가 빨리 찾을 수 있게 말이다.”
“레오포드 씨가 어떻게 했을지 그놈이 어떻게 예상해?”
“예상할 필요가 없어. 놈은 놈대로 일하면 그만이고 레오포드 씨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어도 놈은 손해 볼 게 없다. 녀석에게 있어서 아쉬울 거라곤 너희를 찾을 시간뿐이다.”
심각한 와중에 샤카자이아는 찻잔에 물을 따르고 레스를 흉내 내서 티백을 넣어보았다. 레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왼손으로 붙잡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샤카자이아의 논리에 반박해보려고 해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그녀가 말한 가능성이 압도적이었다.
“그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자면. 이 도시에 있는 갱들이 얼마나 되지? 100? 200? 그것들이 여기로 깡그리 몰려오는 건가?”
“분명히.”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레스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우리 때문에 그럴까.”
“너랑 아자리, 그리고 금발 머리가 오늘 몇이나 쓰러트렸지? 파스낙에게 굴욕을 준 게 누구고? 나라도 적당히 하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손이 닿는 대로 끌어모아 두들겨 팰 거다.”
샤카자이아는 자기도 모르게 괜히 흥분해서 말하는 기세가 높아졌다. 안 그래도 인상이 날카로운 편인데 그 때문에 레스는 한순간 그녀에게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샤카자이아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몇 박자 뜸을 들이고 그가 말했다.
“그렇구나.”
“응.”
아까의 모습이 뭐였냐는 듯 샤카자이아는 시치미 뚝 떼고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차분한 얼굴로 복구되어 있었다. 그녀가 찻잔을 들고 홀짝이는데 처음 마셔보는 홍차가 흥미로운지 오묘한 표정이 입가에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난리를 쳤다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군.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다.”
레스는 천장을 보면서 숨을 길게 내쉬고 눈을 한 번 까뒤집었다.
“그런데 내 경험상 안 좋은 일들은 항상…”
사람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무언가가 침입해왔다.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 들려온 것은 미세했으나 문명 세계 바깥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그 꺼림칙한 소리를 분간 못할 수는 없었다. 방금 승강기가 움직인 게 분명했다. 샤카자이아는 차를 마시던 그 자세 딱 그대로 굳었고 레스는 뒤늦게 뱉은 것을 마무리했다.
“말이 씨가 되거든.”
나쁜 징조라는 보장은 없으나 좋은 예감보다는 불길한 예감이 정확하기 마련이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잘못한 건가?”
샤카자이아는 정색한 얼굴로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서둘러 승강기 쪽으로 향했다. 샤카자이아가 승강기의 문가에 귀를 바짝 댔다. 레스는 긴장으로 몸이 옥죄니 안 그래도 아픈 팔이 더 아파졌다. 그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샤키. 재촉하긴 싫은데 뭐 좀 알아냈어?”
“전혀.”
레스가 애써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보았다.
“그냥 다른 사람이 쓰는 걸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자리가 왔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샤카자이아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지는 걸 보아 낙관은 무책임한 짓이 될 전망이었다. 그녀는 이미 싸울 각오로 만반이었다. 이제 레스도 승강기가 거의 온 걸 알았다. 시위에 화살을 걸면서 그녀가 말했다.
“뒤에 있어.”
두 사람은 승강기가 보이되 여차하면 몸을 가릴 수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레스는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까 머스킷 총이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보호만 받아야 한다는 자기 신세가 한심했다. 할 거라곤 앞만 볼 수밖에 없는 그녀 대신에 주변을 살필 뿐이다. 샤카자이아는 승강기를 겨누고 조각상처럼 굳었다.
둘은 다가오는 소리에 맞춰서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문이 열렸을 때 안에서 미리 바깥을 겨누고 있던 일당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큭!”
샤카자이아는 당기고 있던 시위도 놓지 못하고 몸을 숨겼다. 평소라면 먼저 반응할 자신이 있었으나 지금 그녀는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아봐야만 했었다.
“앞에 네 명이다.”
샤카자이아가 조금이라도 몸을 꺼내려 하면 일당들이 바로 쐈다. 다시 숨은 그녀를 향해 상대방이 비웃음을 보냈다.
“네가 그 야만족이냐?”
“우린 방탄복을 입었단다 순둥이!”
“순순히 나와! 우리 두목이 아직 관대하실 때 말이야.”
“화살로 어디 열심히 싸워봐라!”
도발은 가볍게 흘려넘기고 그녀가 침착하게 속삭였다.
“더 다가오질 않는군.”
복도는 협소하고도 짧다. 그들과 저들이 둔 거리는 10m도 되질 않았다. 일당이 허공에 한 발 쏘고 다시 외쳤다.
“거기 뒤에 숨어 있는 거 다 안다 사쿠라비! 여자 궁둥이에 그만 숨고 사내답게 나와!”
레스가 그녀의 등을 쿡쿡 찌르고 물었다.
“곡사로 맞출 수 있겠어?”
샤카자이아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무리야. 여긴 너무 좁아.”
저쪽이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빈틈이 안 생기게 한 명씩 순서대로 했다. 어떻게든 반격하기 더 좋은 곳은 없을까 레스도 주변을 살펴봤지만 둘이 숨어 있는 휴게실을 뛰쳐나오면 당장 숨을 곳이 없었다. 더 갈 곳이라고는 연방 보안관의 집무실뿐인데 그럼 꼼짝없이 공격을 받는다.
레스가 샤카자이아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조용히, 동시에 끌로 새기듯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저 자식들 나한테 총이 없는 걸 몰라. 분명 너보다 나한테 눈길이 더 끌릴 거야.”
“무슨 생각하는 거냐?”
그녀는 목소리가 커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뒤쪽으로 뛸게. 기회를 노려.”
“미쳤어?! 다쳤잖아!”
“팔만 다쳤지 다리는 멀쩡해.”
물론 허세였다. 레스는 여태껏 쌓인 피로 때문에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일당들은 둘이 나누는 대화를 알 수 없었으나 쑥덕거리는 걸 알고는 있었다.
“계속 이렇게 죽치고 있으시겠다? 우리야 상관없어. 발이 묶여봤자 손해 보는 건 너희라고.”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시간을 끌어봤자 곧 있으면 승강기로 사람이 더 올 것이다. 내키지는 않았으나 샤카자이아도 마음을 다잡고 레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냈다. 왼손에 2개를 쥐었고 입에는 2개를 물었다. 그리고 걸리적거리지 않게 몸에 묶어둔 화살집을 풀었다.
‘너만 믿는다’나 ‘부탁한다’ 같은 말을 해봤자 마음만 어지럽힐 테지. 레스는 샤카자이아가 준비를 마쳤음을 알고 움직였다. 일당들이 모습을 드러낸 레스를 보고 흥분했다.
“저기 저놈! 다리를 쏴! 살려서 데려오랬어!”
협소한 복도에 귀청 찢는 화약 소리가 공명했다. 화려한 벽지는 쓰레기가 되고 격정은 혈관을 태웠고 반동과 충격이 사방에 난무했다. 망토를 펄럭거리며 달리던 레스는 집무실 바로 앞으로 몸을 던지고 바짝 엎드렸다. 정말 레스가 쓰러진 건지 알기 위해, 그저 거리를 좁히고 싶어서 일당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오자 샤카자이아가 튀어나왔다.
승부가 한순간에 결정되듯 사냥꾼과 사냥감 또한 종잇장 하나 차이로 갈리는 법. 일당들은 고작 활과 화살 따위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녀에 대해 순간 잊고 있었다. 그들 바로 앞에서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0.4초
푹. 바로 앞에 있는 놈에게 명중. 화살은 방탄복을 간단히 뚫어버렸다. 철벽같았던 그들의 자신감이 한순간에 설탕 공예품으로 변한다.
0.7초
앞에 있던 놈을 어깨로 밀치고 손에 미리 쥐고 있던 나머지 화살을 시위에 건다. 쏘기까지의 동작은 한 번이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화살은 현악기에서 흐르는 선율처럼 가벼웠고 시위가 퉁기는 소리는 타악기처럼 경쾌하다. 두 번째 화살이 다음 희생자에게 박히고 나서야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제야 총구를 그녀에게 향한다.
1.5초
샤카자이아는 누군가가 힘껏 던진 고무공처럼 벽을 걷어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협소한 곳에 서로 부대끼느라 조준이 어려워 일당은 곡예를 부리는 그녀를 미처 맞추지 못한다. 그녀는 떨어지면서 다리를 장작 패는 도끼처럼 휘둘러 상대가 든 산탄총을 걷어버렸다.
3초
가장 뒤에 있는 놈이 동료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리볼버 패닝을 한다. 샤카자이아는 방금 무기를 잃어버린 놈의 멱살을 한 손으로 간단히 잡아서 들어 올리고는 방패로 삼았다. 방탄복은 입고 있는 희생자와 샤카자이아를 충실히 지켰다. 그녀는 턱에 힘을 풀어서 물었던 화살을 활과 시위 사이로 자연스럽게 떨어트렸다.
3.4초
화살이 바람을 찢는 소리가 총알이 내는 것보다 섬뜩했다.
숙련된 사수가 짧은 활로 낼 수 있는 연사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총이 보편화 되어 양궁을 빼고 궁술이 사라져서 현대에 맥이 끊어졌을 뿐 실전성은 충분히 증명됐다. 문헌에 따르면 활잡이들은 3발의 화살을 2초 만에 쐈으며 실력이 좋을수록 그 간격은 더욱 짧았다고 한다.
일당 중 세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하고 고통만 느꼈고 나머지 하나는 공포만 느꼈다. 인간방패로 쓰였던 놈이 마지막 생존자였다. 샤카자이아의 숫돌로 갈아낸 것 같은 눈을 보자마자 녀석은 꼴사납게 주저앉았다.
“히야아아악!”
그녀는 쓰레기 치우듯 활로 머리를 후려쳐 싸움을 끝냈다. 무턱대고 살려달라는 저들의 아우성을 무시하고 샤카자이아는 박힌 화살을 뽑아버렸다. 그때마다 도살장에서나 흔하게 들리는 소리가 났다. 뽑아낸 화살들을 세차게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 서둘러서 레스에게 달려갔다.
“안돼.”
레스의 어깨, 옆구리, 왼쪽 종아리, 그리고 등에 핏자국이 나 있었다.
“조금 긁혔어.”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를 위해 레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려다가 다시 엎어졌다. 뒤끝 많은 사람처럼 그가 기어가는 소리로 재차 말했다.
“등에 박힌 건 산탄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샤카자이아는 서둘러 일당 중 한 놈의 겉옷을 벗기고 북북 찢어서 붕대를 만들었다. 그녀가 레스의 몸을 바로 누이고 핏자국이 난 곳을 단단히 싸매면서 물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공용어 억양으로.
“맞은 게 산탄인지 어떻게 알아?”
“그냥 경험으로….”
“웃기지도 않아 정말!”
레스는 거의 들어 올려지다시피 부축을 받아서 일어났다. 샤카자이아는 싸우면서도 짓지 않았던 초조한 얼굴이다. 그런데 이제 어쩌면 좋을지 갈피가 안 잡혔다.
“레스. 이제 어떻게 해?”
“계단으로!”
정말 긁혔을 뿐인지 아니면 이제 고통을 못 느끼는지 레스는 절룩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샤카자이아는 그를 부축해주거나 업어주고 싶었으나 누군가는 무기를 들어야만 했기에 꾹꾹 참았다. 이제 둘은 계단 앞에 왔고 또 다른 갈림길에 마주쳤다.
“올라가 내려가?”
레스는 고민에 빠져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들려온 인기척이 그들의 생각을 가로질렀다. 아래쪽으로부터 울려서 올라온 것이다. 선택의 여지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