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3권] 92회 - 가장 높은 곳에서 (92/188)



〈 92화 〉[3권] 92회 - 가장 높은 곳에서



레스와 샤카자이아가 고생하는 동안 피카니와 다른 사람들은 별로 멀지 않은 골목의 어둠에 숨어있었다. 거리에는 총잡이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지나간 사람만 세어도 스물은 넘었다. 피카니가 중얼거렸다.

“도시 곳곳에 깔렸던 놈들이 전부 모이는군. 서둘러서 다행이다.”


톤토는 자기가 따로 챙겨왔던 염료와 맨손으로 골목 곳곳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피카니는 근처에서 톤토의 뒤를 봐줬다. 레오포드는 늑대를 껴안고 최대한 웅크려 있었다. 여태껏 참았던 기침이 나오려 하자 그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톤토가 그리고 있던  마치고 말했다.


“다 됐어 케모사베. 이제 소리를 질러도 바깥에선 우리를 눈치 못 채.”

레오포드는 기운이 너무 없어 눈도 뜨지 못했다. 피카니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뭐라도 해야겠는데요.”

대답은 레오포드가 대신했다.

“빨리 죽진 않을 거야. 타티아나 양도 그랬으니까.”

“파스낙만 쓰러트리면 다 해결되는 겁니까? 그 고양이 아가씨도?”

계속 앓는 소리를 내는 늑대에게 톤토가 다가가 털을 쓸어주며 달랬다. 레오포드는 심호흡을 하고 힘겹게 말을 말했다.

“아니. 파스낙을 죽이더라도 계약서를 찾지 못하면 우리한테 박힌 낙인은 사라지지 않아.”

“계약했다고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피카니가 눈썹을 내리깔며 인상을 썼다.

“계약서라니 맙소사. 그래서 루나님도 못 풀었군.”


톤토가 레오포드 대신 화제를 이었다.

“우리 부족은 가난해. 땅을 뺏긴 뒤로 도시에 남은 사람들은 보급품으로 풀칠하고 있지.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보급품이 오는 빈도가 점점 줄었다. 일해서 돈을 벌어도 사람들은 우리한테 제대로 된 물건을 팔아주질 않아. 다들 살기 어려운 건 이해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짐작 갔다.

“그리고 일당들에게 얼마 되지도 않는 보급까지 빼앗긴 건가.”

“맞서 싸운 사람도 있었지만 케모사베는 바로 투항했어.  뒤로는 핑커튼에 있는 케모사베의 친구들도 숨어지내고 있지. 반격할 기회만 노리면서.”


피카니의 표정이 굳어갔다. 저들에게 닥친 고난은 한 사람의 악행으로 생긴 게 아니었다. 궁극적인 원흉은 따로 있었고 피카니는 다름 아닌 자기가 그 원흉의 앞잡이임도 알았다. 떠오르는 말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지금은 닥친 일이 급했다.

그가 가라앉은 말투로 물었다.


“당신들 사정은 알았습니다. 그 계약서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레오포드가 대답했다.

“직접 보진 못했네만 파스낙이라면 항상 가지고 다닐 거 같네. 아무것도,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이 안심할 수 있는 장소는 달리 없지.”


납득가는 추론이었다. 그가 고개를  번 끄덕였다.

“불태우거나 찢으면 됩니까?”


“의미 없네. 거기에 마법을 없애는 마법을 써야 해.”

피카니는 필사적으로 전에 들었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지난 하루 동안 총에 맞을 뻔한 일은 셀 수가 없었고 진짜로 맞은 횟수도 제법 됐으니 과거의 기억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으나 간신히 그는 생각해냈다.

“겨우 생각났다…! 그 고양이 여자. 따로 대책수단을 갖고 파스낙한테 나왔다고 했었지. 혹시 아십니까?”

레오포드와 톤토는 들은 적도 없다는 얼굴이다. 피카니는 혀를 차고 근처에 굴러다니던 쓰레기를 걷어차서 애꿎은 화풀이를 했다.


“하긴. 그런  정말 있었다면 이럴 까닭이 없지.”

“그런데 정말 도와주러 가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톤토는 연방 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사람들이 깔려서 몰래 나가기란 불가능했고 그 반대 또한 그랬다. 피카니는 바로 답했다.

“어차피 우리가 해줄 것도 없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자네한테서 저들을 향한 가책이나 걱정이 안 느껴지는군.”

상대의 목소리에 비난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보다는 감탄에 가까웠다. 피카니도 불쾌한 느낌이 들기보다 자기가 왜 이러나 덩달아 궁금해졌다. 몇 호흡 만에 그는 결론을 냈다.


“저 녀석하고 하루만 같이 지내보세요. 적으로든, 친구로든. 그럼 압니다.”


“아니면 그저 자네가 냉정한 거겠지.”

몸이 아파서 감각이 둔해진 레오포드는 피카니가 적당히 얼버무렸다고 생각했으나 톤토는 진지한 대답임을 알고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올라간 놈들이 돌아오질 않는군요.”

파스낙이 깨작거리던 과자에 손을 놓고 우두머리 총잡이의 말에 대꾸했다.

“그럼 더 올려야지.”

그들은 건물 바로 앞에 있었다. 근처에 모여있던 부하들이 지시를 받고 건물로 들어갔다. 우두머리 총잡이가 다시 말했다.

“굳이 다크 엘프도 사로잡을 필요가 있습니까? 슈슈니는 제국도 피해갈 정도로 사납기로 유명합니다.”

“귀하신 그분이 나타날 때도 생각해야지. 인질은 많을수록 좋잖아. 게다가 저런 부류들은 자기 친구가 죽어버리면 굴복하느니 죽을 때까지 싸우거든. 죽이면 더 귀찮아져.”

우두머리 총잡이는 작게 끄덕였다.

“플러머는 죽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여태껏 놈이 하던 짓을 봐서는 기대하기 어렵겠지.”

“이상한 놈이었습니다. 쌍수로 우리 모두를 한 호흡에  맞췄지요. 대동맥을 다친 인원이 하나도 없더군요.”

말하면서 그는 다쳤던 손과 팔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동작이 더뎠으나 다 나아있었다. 파스낙은 자신들이 타고 왔던 자동차에 등을 기대고 건물의 꼭대기 쪽을 보았다.


“상영시간이 좀 더  영화를 골랐어야 하는 건데. 벌써  오붓한 대화 시간이 그립군.”


“용사 쪽은 정말 그대로 둬도 됩니까?”

“그래야 잔당들이 안심하고 여기로 오잖아.”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답했다.





샤카자이아가 날린 화살에 맞은 놈은 뒤로 자빠지면서 계단을 굴렀다. 자빠진 놈이 쥐고 있던 권총에서 눈먼 총알이 나왔는데  밑에서 뭔가 딱딱한 물건이 연달아 부딪치는 소리도 터졌다. 레스와 샤카자이아를 쫓던 패거리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급하게 웅크렸다. 그들 사이에서 고함이 튀어나왔다.

“병신아 함부로 쏘지 마! 사방이 콘크리트라서 총알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사람은 무작정 위로 향했다. 어디에서 멈출지 생각도 안 하고 움직였더니 결국 가장 높은 층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잠겨서 레스가 외쳤다.


“샤키 이것 좀 도와줘!”

샤카자이아가 발길질로 문고리를 부숴버리자 엄청난 강풍이 그들의 얼굴에 들이닥쳤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새까만 암흑과 별빛이었다. 두 사람은 넋이 나가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신선한 바깥바람을 멍하니 쬐다가 서둘러 나왔다.

“저걸 봐. 가로등 불빛이 진흙에 뿌린 모래알 같아.”

“한눈팔 때 아니다 레스! 이제 어쩌면 좋아?!”

“나도 몰라!”

두 사람이 나온 곳은 옥상도 아니었다. 그냥 건물 옆에 붙어있는 바닥이었다. 발아래를 보면 구멍 난 철판이 있었고 옆을 보면 밧줄 하나가 수평으로 덩그러니 걸려 있었는데 그게 안전줄이랍시고 있는 거였다. 두 사람도 여기까지 몰리고 나니 자기들이 처한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알았다.

“웃! 방금 바닥 움직이지 않았어?! 무섭긴 한데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런  아닐까?!”


샤카자이아도 발판이 흔들 다리처럼 덜컹거린 걸 느꼈다. 그들이 서있는 곳은 건물 최고층을 진작에 넘어간 상공 110M였다.  위에서는 가볍게 느껴지는 바람도 이만한 높이에서는 몇 배로 강력해진다.

“네가 이제야 맛이 갔구나.”

그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샤카자이아는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그가 겪은 고생들을 생각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으니. 레스는 높은 곳이 어지간히 무서웠는지 필사적으로 아래쪽을 안 보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샤카자이아는 근처에 굴러다니던 쇠파이프로 출구에 빗장을 걸고 다시 움직였다. 뒤에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계속 나는 거로 보아 어떻게든 시간은  모양이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뒤에서 잡아주려고 그녀는 레스를 따라갔다.


레스는 바람에 묻히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편은 안 보여?! 정말 미안한데 난 무서워서 땅을 못 보겠어!”

“내가 부엉이라도 되는  아는가! 이렇게 깜깜한데 어떻게 알아봐!”

여태껏 책임감으로 두려움을 잊고 있던 그녀도 허공을 걷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발걸음 하나마다 발판에 울리는 진동에 맞춰서 두 사람은 심장도 같이 뛰었다. 방금 불평하긴 했어도 샤카자이아는 부탁받은 대로 열심히 살폈다.

레스는 순간 발판이 끊어져서 생각이 멈춰버렸는데 바로 옆에 놓인 사다리를 보았다. 지금도 아주 높은데 사다리는 아주 길었다.


“사다리? 이게 왜 여기 있어?”

“당연히 올라가는 데 쓰라고 있겠지 바보야!”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라… 잊어버려. 될 대로 되라지.”


돌아갈 수 없으면 전진뿐. 그는 이를 악물고 거기에 발을 디뎠다.








같은 시각. 거리의 어둠 어딘가에서  남자가 턱 아래를 긁적이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 나돌아다니는 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태평히 무언가를 계속 기다렸다.

“퇴근한 직후라 졸리네.”


남자는 눈에  띄는 곳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보이지 않는 듯 지나치거나 무시하였다.

“때가 되면 할 일이 알아서 보일 거라더니. 아무 일도 없잖아.”

갑자기 그가 듣는 시늉을 하고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혼잣말보다는 누군가에게 거는 투였다. 남자는 다시 한번 자기한테만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파스낙을 이길 확률? 잘 쳐주면 절반.”

남자의 외투 안쪽 가슴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더니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야’라고 했다. 다시 따분한 시간으로 돌아오려는데 문득 위를 바라본 남자는 무언가를 찾았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접이식 망원경을 꺼내고 어둠에서 나오자 하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가 달빛에 나타났다. 꼭두각시 술사가 실을 잡아당기듯 침착하고 인간 같지 않은 몸짓으로 남자는 망원경을  단씩 펼쳤다.


“호오.”


망원경 안으로 사다리를 타는 레스와 샤카자이아의 모습이 들어오자 그가 잠꼬대 같은 소리를 냈다.








두 사람 머리 위로 큼지막한 제국 연방의 깃발이 펄럭였다. 이젠 발판도 없이 첨탑 같은 지붕 위에 올라가 깃발 대에 매달리는 신세다. 깃발 펄럭이는 소리도 시끄러웠다.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싸울 때는 자리가 높을수록 유리한 건 나도 알지만. 이건 좀 과하지 않아?”

“지금은 밝은 면만 생각해주라!”


그가 비명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을에 부는 밤바람은 세차고 차가웠다. 레스가 걸치고 있는 폰초 망토도 신나게 펄럭였는데 보기에는 근사했으나 본인은 그것 때문에 바람에 날려갈까 무서웠다.


바람의 포효가 귓가를 맴도는 와중에도 샤카자이아의 청력은 여전했다. 그녀가 아래쪽에서 나타난 인기척을 느끼고 몸에 매었던 활을 다시 쥐면서 외쳤다.

“물러나!  분명히 경고했다! 여기서 맞으면 떨어져 죽는다!”


뒤쫓아온 패거리들은 질서정연하게 일직선으로 사다리 앞에 줄을 섰다. 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고 그 광경은 밑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보고 있었다.


파스낙은 기가 찬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그가 자동차 안에서 신문지를 가져와서 깔때기 모양으로 둘둘 말았다. 몇 번 심호흡하고 그가 방금 만든 확성기를 입에 댔다.

[언제쯤 포기할 거냐?! 작작 하고 내려와! 내가 다 걱정스럽네!]


땅에서 여기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샤카자이아가 레스에게 물었다.


“혹시 저놈이?”

“그래. 맞아.”

여태껏 겁에 질려 있던 레스는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당장 시간은 제법 끌  있겠지만 누구나 보면 알다시피  사람은 안전하지 못했다. 참다못한 파스낙이 직접 나선다면 농성도 의미가 없다. 아자리가 때에 맞춰서 도우러 와주리란 보장은 없으니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필사적으로 생각을 쥐어짜다가 레스는 눈길이 깃발에 꽂혔다. 사다리 쪽을 계속 겨누고 있던 샤카자이아는 레스가 뜬금없이 깃발을 이쪽으로 내리기에 깜짝 놀랐다.


“지금 뭐 해?”


인류 제국 연방 깃발은 이불로 쓰면 열 명은 넘게 덮을 만큼 큼직했다. 레스는 매듭을 풀고 봉에서 깃발을 떼어냈다.

“내 생각이 맞았어. 비단으로 만들었군.”


“그게 지금 우리하고 무슨 상관인데?”

“샤키. 그거 알아?”


레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신도 자기가 하는 말이 무섭다는 듯이.

“낙하산은… 비단으로 만들어.”


화학합성 섬유가 개발되기 전에는 비단이 가장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섬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