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3권] 94회 - 얼음과 벼락
아자리 일행은 거점으로 정한 골목에서 막 나온 참이었다. 그녀는 다시 왔던 길로 달려가서 윈프리와 단테에게 갔다. 두 사람도 표정이 질려있었다. 아자리가 외쳤다.
“레스하고 언니가 어디로 간 거죠?”
윈프리가 다시 지도를 펼치고 말했다.
“저 방향이라면 시내 공원이 있어. 인공호수로 떨어지려나 보군.”
단테가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우리하고 더 멀어지네요?”
침묵이 주변을 훑었다. 아자리는 얼굴을 감싸 쥐고 알아듣지 못할 신음을 낮게 질렀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결심했다. 그녀는 마차로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레스의 권총과 소총이 몸에 둘려 있었다.
아자리를 따라서 돌아온 남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얼어버렸다. 그녀는 접어둔 고깔모자를 쓰고는 지팡이 가운데에 평소 두르는 케이프 망토를 감아서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카르델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말렸다.
“안돼! 안돼! 안돼!”
아자리는 무시하고 다리 사이에 지팡이를 끼웠다. 단테도 허겁지겁 말했다.
“나는 법 모른다면서?!”
“기합이면 되요 기합! 마침 하늘도 맑아져서 보름달이 밝네요.”
히콕이 하늘을 흘깃 보고는 중얼거렸다.
“과연. 마법사와 마족의 시간이군. 하지만 마력이 강해진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데.”
아자리는 그 말도 무시하고 심호흡을 했다. 곧 소리 없이 그녀 주변에만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듯 옷자락과 모자가 위쪽으로 너울거렸다. 아자리는 자기가 몇 뼘 위로 허공에 떠 오르자 다리를 엇갈리고 무릎을 접었다. 아비투스가 양손으로 손짓을 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다급한 건 알지만 이럴 때일수록 차근하게….”
“왜. 말 안 들으면 쏘기라도 할 거야?”
아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곧 그녀는 용수철 튕기듯 하늘로 솟구쳐 사라졌다. 쇳소리 섞인 비명을 꼬리에 달면서. 아자리가 수평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그들 눈에 아른거렸다.
◆
두 사람에게는 떨어지는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지만 실은 20초도 되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평평한 어둠이 엄청난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레스는 까먹었던 게 떠올랐다.
“샤키!”
“왜에에에?!”
“나 수영 못해!”
그의 고향은 사막이다.
“야 이 화상아!”
샤카자이아가 상황도 잊고 그를 바라보며 뭐라 외치려 할 때 그들은 호수에 처박혔다. 그 순간 물은 부드럽지 않았고 모래주머니처럼 단단했다. 물보라 속에서도 그녀는 침착하게 팔에 묶었던 밧줄을 단도로 잘라냈지만 레스는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달빛이 실처럼 내리는 차가운 물 속을 헤엄쳐 샤카자이아는 레스를 붙잡았다. 겨우 둘은 수면으로 솟아올랐다.
“푸하!”
“푸하압!”
둘은 물 위로 머리를 꺼내고 헐떡이다가 간신히 뭍에 닿았다. 하늘에서 물속으로, 이제야 땅으로. 둘은 아직도 뇌수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샤카자이아가 땅에 손을 짚고 신음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네가 나서서 잡혀! 네가 우리를 구하러 오는 것보다는 나랑 아자리가 널 구하러 가는 게 낫겠지! 살아있어?”
“낙엽을 삼킨 거 같아….”
기운을 바로 되찾은 그녀와는 달리 레스는 탈진해서 몸을 제대로 못 가눴다. 마셨던 호숫물을 토하느라 바빴다. 방금 상처가 더 벌어졌는지 옷에 난 핏자국도 더 번져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서 등을 토닥이며 토하는 걸 도와주고 있는데 주변에서 심상찮은 낌새가 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눈에 안 띌 수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기야! 놈들이 호숫가에 있다!”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샤카자이아는 얼음처럼 식었던 몸에 심장이 다시 뛰었다. 그를 가까운 어둠 속으로 숨기고 속삭였다.
“힘들겠지만 조용히 있어야 해.”
수많은 기척이 모든 감각을 통해 샤카자이아에게 전해졌다. 그녀는 활을 쥐고 표범처럼 나무 위로 소리 없이 뛰어올랐다.
공원 다른 편에서는 파스낙이 외투 자락을 휘날리며 날았다. 피로에 찌든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바퀴벌레 같은 자식.”
두 사람이 있을 법한 곳에서 그는 계속 하늘을 맴돌았다. 들리는 소리로 보아 제대로 찾아오기는 한 거 같았다.
“씨발 어디서 쏜 거야?!”
“뒤! 뒤에!”
“아까는 앞에 있다며! 아악! 내 팔!”
공원 어딘가의 가로등 전구가 깨지고 일대가 암흑에 빠지자 또 다른 희생자의 비명이 퍼졌다. 파스낙은 지팡이를 옆에 끼고 한숨을 쉬며 거만히 손뼉을 쳤다.
“엘프는 숲에서 쉰 명 몫을 한다지. 사라진 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검지와 엄지를 붙여서 고리를 만들고 한쪽 눈에 대었다. 그러자 어둠을 뚫고 사람 형상을 한 불빛이 그의 눈으로 보였다. 몸에 박힌 화살을 뽑으려고 애쓰는 불빛도 있었고 서로 등을 붙인 채 떨고 있는 불빛도 있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누가 레스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 유성처럼 움직이는 불빛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어이쿠.”
파스낙은 자신한테 날아오는 화살을 붙잡았다. 날아온 곳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그는 상대하고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았다. 그가 쥐고 있는 화살에 입김을 한 번 불어넣고 숲 어딘가에 다트처럼 던지자 샤카자이아 바로 앞에 날아와 박혔다. 당연히 그녀는 숨어있던 곳에서 빠져 나왔는데 화살이 등 뒤에서 섬광을 내며 터졌다.
“꺗!”
폭발 자체는 별거 없었으나 소리가 엄청났다. 밝은 귀가 독이 되어 샤카자이아는 혼절해버렸다. 그 모습을 차분하게 확인하고 파스낙은 손을 쳐들었다.
“귀찮게 시리… 응?”
결정타를 날리려던 파스낙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에서 나타난 기척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보인 것은 그에게 낯익으면서도 기묘한 것이었다. 지팡이를 타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녀. 파스낙은 공격받는 건 익숙했으나 시속 90km로 달려드는 사람에겐 적응해본 적이 없었다.
“우갸악!”
그녀가 냅다 들이박는 순간 아자리는 이상한 목소리로 단발마를 냈다. 둘은 공중을 허우적거렸다. 균형을 먼저 되찾은 건 파스낙이었다. 그는 재빨리 위로 오르고 허공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궤적으로부터 조그마한 불덩어리가 수백 마리의 반딧불처럼 잘게 쪼개져 아자리에게 쏟아졌다. 그녀가 지팡이에 몸을 바짝 붙이고 속력을 올려서 공격을 피하자 호수 위에 물보라와 증기가 간헐천처럼 솟아올랐다. 그가 인상을 구기면서 소리 질렀다.
“또 알아서 행차하셨군! 저놈 따라서 똑같이 멍청해지셨나!”
어디 질세라 아자리도 위를 보면서 받아쳤다.
“2회전이다! 덤벼!”
아자리는 선회비행으로 원을 그렸다. 방금 생긴 물안개를 가르며 아자리는 나는 높이를 최대한 줄여 수면에 바짝 대었다. 풍압으로 호수 위에 흰색 줄이 그어졌다. 그쪽을 향해 공격을 날리려던 파스낙은 다시 날라온 화살을 피하느라 집중이 흐트러졌다.
샤카자이아는 혀를 차고 자리를 피했다.
“원래 쓰는 활이었다면 맞았는데!”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지만 파스낙을 짧은 활로 맞히기에는 확실히 너무 멀었다. 아자리가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에 그녀는 레스에게 돌아갔다. 가는 길에 나타나는 적이 있으면 보이는 대로 쏴버리면서 계속 달렸다. 그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레스는 잘 숨어있었다. 다시 만나자마자 그가 물었다.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나는 거야?”
“아자리가 파스낙하고 싸우고 있다.”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겹쳤네.”
호숫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그쪽을 바라본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보고 혼이 나갔다.
아자리가 호수 위에 그린 나선을 따라 소용돌이가 일었다. 회오리바람은 호수를 뒤집어버릴 기세로 물을 말아 올렸고 수분들은 고스란히 우박과 눈으로 변했다. 가히 거꾸로 내리는 눈보라였다. 급격한 기온 변화 때문에 대기가 숫돌에 갈리는 쇠처럼 귀 찢어지는 소리로 땅을 흔들고 호숫가의 식물들은 서리에 덮이자마자 폭발했다.
“스누피 레르카 그란데 익사티오!”
그녀의 지휘를 따르듯 폭풍이 자신의 기세를 키웠다. 폭풍 속의 얼음 조각이 달빛을 흩뿌려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겐 거대한 은색 기둥으로 보였다. 파스낙은 온몸에 방어막을 두르고 맞서다가 조금씩 힘이 부치는 걸 느꼈다. 방어막에 부딪힌 우박이 부서지는 소리를 반주 삼아 그가 중얼거렸다.
“끝장을 보고 싶으시다.”
폭풍 너머로 이건 어떠냐고 말하는 듯한 아자리의 살기 서린 눈빛이 보였다. 파스낙은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관절 꺾는 소리를 냈다.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그가 주먹을 위로 힘껏 쳐들면서 나지막이 외쳤다.
“포르차 데르피 스포르티 칼레.”
빛. 화염이 아니라 빛. 파스낙이 쳐든 주먹을 내려찍자 순간 주변 일대가 밤에서 낮으로 변했다. 폭풍이 너무 빨리 증발해서 진공이 일어나 아무 소리도 안 났다. 폭압에 밀려난 수증기가 숲을 흔들고 호수는 물 높이가 낮아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물기 가득한 폭풍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
“뭐… 뭐가 일어난 거야?!”
샤카자이아는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아자리는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어도 안개가 너무 진해서 바로 앞도 제대로 안 보였다.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서로 마주 보다가 곧 자신들의 생각이 같다는 걸 깨달았다. 둘은 호숫가로 향했다. 샤카자이아의 부축을 받고 열심히 움직이면서 레스가 말했다.
“만월이 뜨는 날 특정한 시간에는 마법과 마족들이 강해져. 그래서 저 난장판이 난 거고.”
“내가 마족인데 그걸 모르겠어? 조금 놀랐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자리를 위해 할 게 있을지 모르겠어.”
자신감이 사라진 샤카자이아를 향해 레스는 단칼에 대꾸했다.
“어차피 저놈한테서 못 도망쳐.”
“그럴 생각도 없고.”
샤카자이아는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고 굳게 말했다. 파스낙이 불러온 아랫것들은 두 사람을 쫓아오지 않았다. 다들 이 미친 곳에서 멀어지려고 바빴다.
파스낙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물안개 때문에 잘 안 보였다. 가만히 방심하고 있는 척 시늉을 해주니 아니나 다를까 안개 속에 숨어있던 아자리가 그를 향해 불덩어리를 날렸다. 파스낙은 발도해서 불덩어리를 베어버리고 아래쪽으로 향했다.
아자리는 박쥐처럼 낮게 날아 숲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를 따돌리려 했다. 파스낙은 굳이 숲속까지 따라가지 않고 아자리보다는 높이 날아서 쫓았다. 그의 칼끝에서 벼락들이 소나기처럼 아자리에게 쏟아졌다. 그녀는 숲을 방패로 삼고 속도를 높였다. 벼락 줄기에 맞은 나무들이 천둥소리를 내며 하얀 불꽃과 함께 숯으로 변했다. 벼락은 수분이 많은 나무에 잘 떨어진다.
계속 쫓고 쫓겼다. 두 마법사가 날아다니는 곳마다 벼락과 불덩어리가 어둠에 자수를 새겼다. 하지만 견제를 주고받을 뿐이라 승부가 날 기미가 안 보였다. 지겨워진 파스낙은 쫓는 걸 그만두고 허공에 멈췄다.
“포르차 데르피...”
주문을 다 외우기 전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붙잡고 밑으로 끌어 내렸다. 아자리는 땅에 두 다리를 대고 지팡이를 앞으로 뻗어 염력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파스낙이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치자 아자리는 그것까지 통째로 붙잡아서 땅으로 매쳤다. 발사된 포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땅을 울렸다.
아자리는 숨을 한 번 돌린 다음 앞을 보았고 파스낙은 거기에 오뚝이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몸에는 흙 하나 안 묻었다. 그녀는 한 손에 든 지팡이를 봉처럼 휘둘러 고쳐잡고 앞으로 향했다. 상대도 그랬다.
결투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