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3권] 97회 - All gangs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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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토막 낸 듯 울창했던 시내 공원은 이제 사방이 탁 트인 폐허로 변해있었다. 파스낙은 뒤로 쓰러져서 기침을 터트렸다. 방금 칼에 베이면서 외투의 앞섶이 뜯어진 탓에 붉게 물든 셔츠가 보였다. 샤카자이아는 긴장을 놓지 않고 칼끝을 겨누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자리가 외쳤다. 방금 귓가에서 총성이 터지는 바람에 인상을 쓰고 한쪽 귀를 움켜쥐고 있었다.
“언니! 칼에서 손 떼요! 마법 도구는 주인을 알아봐요!”
샤카자이아는 쥐고 있는 칼에서 정전기가 이는 걸 느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아자리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손을 놓았다. 칼에서 전류가 눈에 보일 정도로 세차게 튀더니 저절로 움직여서 주인에게 돌아갔다. 파스낙은 누운 채로 오른팔만 들어서 그것을 잡았다.
“허. 허허.”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파스낙은 힘겹게 윗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에 박힌 화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뽑았다. 샤카자이아는 상대가 몸을 추스르기 전에 다가가려다 진이 빠져서 주저앉았다. 그녀를 지키러 레스하고 아자리가 왔다. 레스가 말했다.
“방금 났던 이상한 기운은 뭐야? 무슨 짓을 했어?!”
“우리가 아주 제대로 망했다는 의미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부축해준 것처럼 파스낙은 이상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에 분노나 조롱 같은 감정은 없었다. 표정은 허망하고 태도는 건조했다. 아자리가 앞장서서 지팡이로 그를 겨누며 쏘아붙였다.
“망한 건 너뿐이겠지! 무기 내려놓고 투항해 리차트라! 난 아직 싸울 수 있어!”
“아가씨들은 그렇지. 나도 일단은 그렇고.”
그가 목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여 관절 꺾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파스낙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쳐 발을 구르자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자리하고 샤카자이아는 거기에 밀리지 않고 자세를 지켰다. 여태껏 봐온 공격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악!”
두 여자는 레스의 비명을 듣고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대책 없이 땅을 굴렀던 레스는 자신의 오른팔을 움켜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파스낙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저 친구는 아니라고 하시네.”
파스낙의 상처에서 나오던 피는 멎어있었다. 그 찰나에 몸을 고친 것이다.
“비겁한 자식!”
아자리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공격하려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멈췄다. 여기서 공격을 주고받다가는 일행이 위험했다. 파스낙이 칼을 지팡이에 도로 꽂고 한쪽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난 집에 가서 목욕하고 자야겠다.”
파스낙의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그는 보란 듯이 일행들이 보는 방향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미끄러지듯이 날아갔다. 아자리는 쫓아가려고 주춤거리다가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렸다. 샤카자이아는 레스의 몸에 묶여있던 붕대를 다시 조여주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레스는 피가 섞인 위액을 한바탕 토했다. 그가 일행에게 뭐라 말하려다 통증 때문에 잇지 못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파스낙이 달아난 방향을 가리키자 두 사람은 의도를 이해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무시했다. 다시 지혈을 마친 샤카자이아가 레스를 등에 업다가 귀를 움찔거렸다.
“이런! 다시 몰려온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파스낙은 공원 벤치에 다리를 쫙 벌린 채 걸터앉아있었다. 주변에는 그가 불러온 아랫것들이 다시 모여서 분주히 뛰었다. 그가 자기 앞에 있는 우두머리 총잡이를 향해 불만 가득한 표정을 가식 없이 보여주었다.
“너희들의 충성심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구나. 누구는 활에 맞고 칼에 베이고 있는데.”
“휘말려서 죽기는 싫었습니다.”
우두머리 총잡이의 담백한 대답에 파스낙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자네의 그런 기회주의적인 면모 아주 좋아해. 이번에도 처리 못 하면 혼날 줄 알아.”
“압니다.”
“아 맞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먼저 나쁜 소식부터.”
파스낙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방금 잘려서 단면이 선명하고 피에 젖어 붉게 번들거렸다. 우두머리 총잡이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고 눈이 흔들렸다.
“몇이나 잃었습니까?”
“셋. 그중에 둘은 타티아나하고 레오포드. 나머지 하나는 여기 시장님.”
“레오포드하고 시장은 그저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심각하군요.”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목소리를 떨었다. 파스낙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혀를 삐쭉 내밀었다. 우두머리 총잡이가 물었다.
“좋은 소식은 뭡니까?”
“좋은 소식은 귀찮은 놈들이 줄었다는 거야. 정확히는 원상 복귀지만.”
“어떻게?”
“바퀴벌레들을 쫓아온 추격대는 여태껏 타티아나 때문에 난리를 치고 있었어. 하지만 이제 타티아나는 안전해졌고 인질로 잡았었던 마법사도 마찬가지야. 추격대는 할 일로 돌아가겠지.”
저편에서 싸우는 소리가 이쪽까지 들려왔다. 파스낙은 부하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오히려 어색했다. 귀를 기울이는 그를 향해 우두머리 총잡이가 말했다.
“완벽하게 포위했습니다.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절대 못 뚫을 겁니다.”
레스 일행이 있는 방향을 향해 파스낙은 증오와 동정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 사람이 엄지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거리였으나 무슨 일이 나고 있는지는 확실히 보였다. 레스 일행은 엄폐물에 숨어서 계속 농성하고 있었다. 갱단원들은 쉬지 않고 총알을 쏘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갔다.
“그 갖은 고생을 하고도 이뤄낸 결실이라고는 남 좋은 일밖에 없군. 네 저번 모험 같지 않아? 데스페라도.”
파스낙이 자기한테만 들릴만한 크기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난데없이 저쪽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두 남자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우두머리 총잡이가 말했다.
“이 폭약 소리는 왠지 익숙한데.”
파스낙이 손을 보이자 우두머리 총잡이가 주머니에서 접이식 망원경을 꺼내서 쥐여주었다. 망원경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는 파스낙이 눈을 까뒤집으며 하늘을 향해 뇌까렸다.
“아나 진짜.”
◆
레스가 아자리에게 물었다.
“방금 뭐였어?”
“뭐라고요?”
아자리가 자신의 반대쪽 귀를 그에게 향하고 되물었다. 레스는 다시 말했다.
“아까 터진 거 뭐였냐고. 네가 한 거야?”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또 다른 폭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터졌다. 그들을 포위하러 왔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기척도 났다. 대체 뭔 일인가 싶어서 샤카자이아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바깥으로 꺼내고 보았다.
체격이 훤칠한 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치수를 딱 맞춘 트렌치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깊게 눌러 썼다. 손에는 총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총구가 있을 곳에 원통이 달려있었다. 얼굴은 스카프를 둘러서 안 보였다. 한술 더 떠 오밤중인데도 선글라스까지 써서 눈을 가렸다. 하지만 남자의 걸음은 막힘이 없었다. 어둠 따위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 오고 있는데 뭐지?”
레스가 말했다.
“어떻게 이상한데?”
샤카자이아는 다시 봤다. 남자의 걸음은 여전히 규칙적이다.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와 주변의 땅에 박히는 와중에 그러고 있으니 심히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총알을 피하겠다는 생각도 없어 보였고 무기를 다루는 동작에는 살기가 없었다. 그냥 막대기를 잡고 휘두르듯 이상하게 생긴 소총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탄이 날아가서 터지자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놈들은 메아리가 칠 정도로 시원하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녀는 자기가 본 걸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자기 표정을 보여주는 게 최선이었다. 총소리가 나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완전히 가라앉았다. 다 도망쳤거나 싸울 의지를 잃은 거리라. 분명 자기들한테는 좋은 일이었는데 레스 일행은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마침내 남자는 일행들이 숨어있는 흙더미까지 왔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샤카자이아부터 훑어보는 거였다. 스카프하고 선글라스 때문에 표정과 눈빛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음흉해 보이진 않았다. 남자가 웃음을 짧게 흘리며 말했다.
“와. 정말 자기 엄마를 쏙 닮았네.”
아자리는 스카프 너머로 뭉개진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차장님?”
남자가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인사하자 하얀색 머리카락과 빨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차장이 말을 걸었다.
“레오가 날 불렀어.”
그리고 따라오라 손짓했다. 한순간 일행들은 눈빛만 주고받으며 어쩔 줄을 몰랐으나 어차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샤카자이아는 레스를 어깨에 짊어졌고 아자리는 쪼르르 달려 나왔다. 차장은 의장대가 행사에서나 할 법한 각 잡힌 제식 동작으로 몸을 돌리고 저벅저벅 걸었다. 아자리가 그에게 바로 붙어서 물었다.
“당신 대체 누구예요?”
그가 주머니에서 굵직한 유탄을 꺼내서 유탄 발사기의 총구에 집어넣었다. 궁금한 게 가득했던 아자리는 그 유탄이 홀쭉한 트렌치코트의 주머니에 들어있을 크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차장이 자기 앞만 보면서 아자리의 물음에 답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내 이름을 알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 실존적인 실체가 궁금하다는 것인가?”
“그건 저도 모르는데요.”
아자리는 나름대로 자신이 능변가라고 생각했으나 이런 경우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차장은 묵묵히 자신이 걷는 속도를 유지했고 그들은 따라갔다.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 때 차장이 알아서 자신의 말을 이었다.
“토마스 T 캘러헬. 친구들은 탐이라고 불러. 톰이라고도 부르고. 캘러헬이라고도 부르고. T.T 캘러헬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 난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샤카자이아한테 업혀있는 레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반응했다.
“탐 캘러헬...? 그 핑커튼의 4인방?”
“우린 그 호칭 싫어해.”
◆
피카니 일행은 빨리 걷고 있었다.
“그 이상한 양반이 캘러헬이었다고? 그게 말이 돼?!”
바로 옆에 있는 톤토가 피카니에게 물었다.
“왜 말이 안 돼?”
“내 일행에는 와일드번치였던 사람도 있었고 핑커튼도 있었어! 하지만 그때 아무도 못 알아봤다고! 게다가 어떤 얼간이가 그런 식으로 은둔하는데? 노면 전차의 차장이라니 맙소사.”
레오포드는 눈 하나 껌뻑 안 했다.
“하루 만에 사람을 서른 가까이 죽이고 여장까지 하고 다니는 양반이 이해 못 한다면 아무도 이해 못 하겠지.”
늑대는 위엄찬 표정을 굳게 지키며 앞장서고 있었다. 피카니가 끓어오르는 속을 짓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 진지합니다.”
“납득가는 대답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캘러헬은 자기 얼굴을 거의 항상 감추고 다녀. 봤으니 알겠지만 워낙 눈에 띄는 녀석이니까.”
톤토가 끼어들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여차하면 사람들의 인식 바깥에서 움직일 수가 있거든.”
피카니는 그게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사람들의 인식을 속일 수 있다고. 마법사들이 모습을 감추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눈으로는 보이되 수상하다는 걸 눈치 못 채게 만드는 거지.”
늑대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벗을 바라보았다. 레오포드도 멈추고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길어지니까 거기까지만 해둬. 자네 지금 총알은 얼마나 있나?”
“별로 없습니다만.”
피카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늑대가 울부짖었다. 묘하게 곱고도 높은 음색으로 길게 이어지는 늑대의 울음이 달밤이 내리는 도시에 역설적인 조화를 이뤘다. 그리고 당연한 소리지만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만큼 우렁찼다. 피카니는 순간 늑대하고 레오포드 중 누구의 멱살을 잡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방으로부터 인기척과 말발굽이 땅을 때리는 소리가 그들을 순식간에 죄어왔다.
“달려!”
레오포드가 굵게 신호하자 일행은 늑대를 쫓아 죽어라 뛰었다. 피카니는 뒤따라 오는 놈들을 향해 제대로 겨냥도 안 하고 쏘면서 욕지거리를 뱉었다.
“염병! 염병! 염병!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톤토는 아무 불만 없이 육상선수처럼 양손을 곧게 세우고 멋들어지게 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쫓기다가 갑자기 레오포드가 저 앞을 말없이 가리켰다. 저 앞에 말을 타고 있는 경찰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흥분해있던 피카니가 그쪽으로 총을 겨누려 하자 레오포드가 그걸 막아섰다.
“또 뭐?!”
“보지만 말고 관찰을 해.”
영문 모를 소리를 듣는 건 이젠 싫증이 났다. 피카니는 잇몸이 보일 정도로 치가 떨리려 했다. 이런 와중에 뒤에서는 사람들이 쫓아왔고 앞에서는 경찰이 레버 액션 라이플을 한 손으로 꺼내고 있었다. 곧 피카니는 그 모습이 꽤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하딘이 그들에게 외쳤다.
“머리 숙여!”
그가 말의 속력을 줄이고 소총을 양손으로 쥐었다. 하딘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붙이고 레버를 연달아 움직였다. 거의 기관총에 맞먹는 연사속도로 소총이 불을 뿜자 추격자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몸을 숨겼다. 하딘은 일행 바로 앞에 서자마자 피카니에게 무언가를 휙 넘겼다.
“분실물 받아 이 애물단지야.”
피카니의 자동권총이 꽂혀 있는 벨트였다. 예비 탄창도 거기에 있었는데 3개였다. 그는 바로 자동권총을 뽑아서 한 손만으로 슬라이드를 움직여 약실에 총알이 있는지 봤다. 피카니가 춤동작처럼 가장 가까워 보이는 놈을 향해 순식간에 겨눠서 쏘자 상대의 한쪽 어깨가 폭발했다.
“어후!”
그 광경을 보고 톤토가 질색을 했다. 싸움이 나는 와중에도 늑대는 계속 코를 킁킁거리고 귀를 기울였다. 레오포드는 늑대의 몸에 손을 대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다는 듯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그가 외쳤다.
“9시 방향! 서둘러!”
일행들이 다시 달리기도 전에 하딘은 공장 기계 같은 손놀림으로 장전을 마쳤다. 하딘은 일행들을 앞서지는 않을 속력으로 말을 몰면서 그들을 엄호했다. 도로와 도로를 건너고 모퉁이를 꺾었다. 어떻게 알고 쫓아오는 건지 적이 또 나타났는데 피카니는 자동권총을 쥐지 않은 손으로 리볼버를 들고 겨누다가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뺐다. 상대도 그러했다.
“진짜 더러운 하루야.”
카르델은 그렇게 말하고 아비투스와 함께 일행들이 자신들에게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