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3권] 103회 - 비슷한 처지
하딘이 대뜸 피카니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우리한테 털어놓을 비밀이 많아 보이더군.”
“무슨 소립니까.”
“아자리아 전하와 대면했다. 그분 덕에 그나마 이 난장판이 수습됐지. 사실대로 말해.”
피카니는 눈을 살짝 부라렸다.
“저한테서 뭘 의심하시는 겁니까.”
카르델이 말했다.
“셀 수가 없다 애물단지야.”
피카니를 바라보는 하딘이 눈에 살기가 담겼다.
“왜 그 사고뭉치들이 너한테 너그럽게 굴어줬을까? 유쾌한 놈들이라서?”
“설명하려면 길어집니다.”
피카니는 여장했던 게 떠올라 표정을 찌푸렸다. 당연히 하딘과 카르델은 심기가 거슬렸다. 카르델이 화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돌보느라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야영할 때 네가 전갈이나 뱀한테 물리지는 않을까 나하고 아비투스가 번갈아 가면서 지켜보고 있던 거 알아?! 무슨 생각으로 뛰쳐나간 거야. 무슨 생각을 했냐고!”
“마법사님이 납치당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하딘도 기세에 맞춰서 언성을 높였다.
“마법사님은 우리 모두 다 구하고 싶었어. 상의했으면 계획을 짰을 거다. 네가 말도 없이 독단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세상의 균형이 바뀔 수도 있었어.”
“일일이 뒷일 따져가면서 움직일 때가 아니었습니다.”
“뒷일이 걱정 안 된다면 놈들하고 네가 무슨 관계로 엮였는지도 말할 수 있겠군.”
피카니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 상관이 아니야. 나도 당신 부하가 아니고.”
하딘이 뚜벅뚜벅 다가와서 피카니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나무 벽에 귀를 바짝 붙이고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단테는 거기까지는 들을 수 없었다. 건물 안의 사람들이 갈 길 따라 헤어지자 단테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조각상처럼 가만히 있는 늑대를 껴안으니 따끈했다. 그리고 덕분에 단테는 크게 외롭지 않았다. 그는 늑대와 함께 하품을 크게 뱉었다.
“승자는 누가 되고. 추락할 자는 누구인가….”
불어온 바람에는 뜬금없이 습기가 느껴졌다.
◆
샤카자이아는 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으나 캘러헬이 모아둔 총들이 전부 최신형이라는 건 알아보았다. 권총, 산탄총, 소총에 이르기까지 온갖 총이 종류별로 벽에 걸려있었다. 캘러헬은 레스의 벨트에 총알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가 샤카자이아에게 물었다.
“너는 총 안 쓰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전사한테 빌려서 써본 적 있는데 한 발 쏘고 기절할 뻔했습니다.”
“코앞에서 나는 총소리는 체감되는 성량이 다르지.”
“그런 걸 견디고 쓰는 전사들도 많지만 전 아닙니다. 활이 더 좋아요.”
“총은 많은데 활은 없네.”
캘러헬은 레스의 벨트와 권총에 총알을 꽉 채워주고 샤카자이아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서로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됐다고? 진짜?”
그녀도 막상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보니 기분이 묘했다.
“저도 신기해요. 하지만 이제 친구들이 없는 여행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뭐, 알고 지낸 시간이 인간관계의 전부는 아니지. 모르는 사람이 은인이 되기도 하고, 친가족이 보증을 서달라고 찾아오기도 하니까.”
“보증이 뭐예요?”
라카키가 갑자기 캘러헬의 어깨 뒤에서 떠오르고는 푯말을 번쩍 들었다. 샤카자이아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저 글자는 몰라요.”
캘러헬이 라카키를 자기 머리 위로 앉히고 손끝으로 날개를 쓰다듬어줬다.
“‘해선 안 되는 거’라고 적혀있어. 너한테 공용어 가르쳐 준 사람이 글자는 안 알려줬니?”
“추장님이 가르쳐주셨는데 제가 도중에 때려치웠어요. 공부는 질색이라….”
그가 껄껄 웃었다.
“그래도 너 정도면 잘하는 편이야. 네 엄마는 아는 말이 ‘싫다’랑 ‘좋다’ 밖에 없었으니까.”
샤카자이아의 눈이 크게 떠지고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몸을 내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건… 의외네요. 언제나 강한 모습만 보이셨는데. 다른 추억은 없나요? 알고 싶어요.”
캘러헬은 총을 여러 자루 꺼내서 어깨에 짊어지고 샤카자이아와 함께 창고를 나왔다. 아자리는 레스가 있는 소파 바로 옆에 모포를 깔고 담요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반만 잠이 들었는지 아자리의 눈이 계속 껌벅 감겼다가 깜빡 떠졌다. 아마 레스를 옆에서 계속 지켜봐 주다가 곯아떨어진 거리라. 레스한테는 아직도 마늘 냄새가 풀풀 났다. 둘은 아자리를 잠자리에 고이 눕혀주고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말을 나눴다.
“아이스크림 먹어본 적 있니?”
“들어만 봤습니다.”
“나하고 레오가 핑커튼에 들어가기도 전에 있던 일이야. 어느 날 레오가 네 어머니를 소개해줬지. 날 보고는 대뜸 ‘윈디고’라고 부르더라고. 날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어.”
샤카자이아는 면목 없다는 듯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튼, 난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을 대접해줬어. 산딸기 맛이던가. 아이스크림은 마음에 들었는지 몇 숟갈 만에 눈을 반짝이면서 경계를 풀더라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요?”
“네 어머니는 유당이 몸에 안 맞는 체질이었어. 그런데 잔뜩 퍼먹었거든. 배탈이 심하게 나서 며칠을 우리 집에서 죽만 먹으면서 지냈지. 뭐, 결과적으로 친해질 수는 있었다.”
그녀는 먼 곳을 보는 눈짓을 했다.
“엄마가 아파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요.”
“인생을 통틀어서 만난 사람 중에서도 마토아카는 손꼽히게 강했지. 사냥꾼이 갖춰야 할 인내심, 전사가 갖춰야 할 이타심, 어머니가 갖춰야 할 강인함. 레오하고 나는 네 어머니를 좋은 친구로 여겼다. 결혼했을 때는 너희 마을까지 가서 축하해줬지. 하지만 우리가 핑커튼이 된 이후로 우리는 일에 치여 살았고, 마토아카는 가정이 생겼다. 여태껏 만나온 다른 친구들처럼 소원해지리라 생각했어.”
잠깐 뜸을 들이고 그가 이어서 말했다.
“너도 어머니에게는 복잡한 마음이 들겠지. 그래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네 어머니를 부디 용서해줬으면 한다. 내가 알던 마토아카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어. 사정이 있을 거야.”
침울한 얼굴로 그녀가 답했다.
“진실이 실망스러워도요?”
“뻔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가족은 숭고한 거다. 레오의 가족들은 제국과의 전쟁으로 죽었고 나는 변이 됐을 때 기억을 잃으면서 출신을 잊어버렸다. 단서를 쫓아 되짚어갔더니 가족들은 나보다 먼저 늙어서 죽었지. 적어도 시도라도 해보렴. 희망이 남아있을 때.”
샤카자이아는 숨을 삼키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끄덕였다. 캘러헬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계로 향하고 있지?”
“어떻게 아셨죠?”
“나도 마족들의 땅은 한 번밖에 가본 적 없어. 그래도 라프라스 가문은 알아. 마계의 왕족이 제국군한테 쫓기고 있다면 무슨 사정인지는 대충 알만하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아무것도.”
그는 덤덤히 말했다.
“내 말은. 이번 싸움에서는 날 동료로 생각해도 되지만 마지막까지 내게 기대지는 말아라. 핑커튼의 탐정은 어디까지나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이야. 우리는 중립을 지켜야만 해. 너희를 끝까지 감싸주기는 어려워.”
“이미 충분히 많이 베풀어주셨어요.”
샤카자이아는 캘러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하고 조언 감사합니다. 라카키 씨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안 피곤해?”
“꺅!”
라카키가 말을 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어깨까지 들썩였다. 캘러헬이 어느 틈에 자기 어깨로 자리를 바꾼 라카키를 엄지로 가리켰다.
“네 엄마도 똑같이 당했어.”
그 순간 라카키는 정색했다. 돌변한 분위기를 따라서 덩달아 캘러헬과 샤카자이아도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마치 마음의 준비를 마친 사람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지진이 은신처를 흔들었다. 구석에 놓았던 그릇과 식기들이 덜덜 떨렸고 아자리와 레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레스는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쓰려다가 왼손으로 허리를 더듬었다. 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뭐였지?”
라카키가 여태껏 들은 적 없는 진지한 투로 말했다.
“방금 건 자연적인 게 아니었어.”
모두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이젠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잠이 안 와?”
아무도 없는 곳에 멍하니 벽에 기대어 있던 피카니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가 소리 없이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 피카니는 경계하고 목소리를 잔뜩 깔아서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비투스나 카르델이 당신을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타티아나는 검지를 위로 쳐들고는 피카니를 똑바로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던 피카니는 대체 그 손짓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손가락을 계속 노려보던 피카니가 눈을 한 번 감고 뜨는 순간 타티아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음?”
“뭘 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건 나야. 무슨 생각으로 제국이 당신을 여기로 보냈지?”
타티아나는 피카니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는 몸을 삐딱하게 돌려서 한쪽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 마법사였나? 파스낙하고 비슷한?”
방금 타티아나가 보여준 것은 몸놀림이 빠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물리현상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몸짓 없이 입만 움직였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녀의 눈매는 조각칼로 파낸 거 같았다.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리고 지금 내가 묻고 있잖아.”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어쩌면 우리끼리 공감하는 바가 있을 거 같거든. 소속하고 있는 곳에서 달아나고 싶은 거지? 얼굴에 다 적혀있어.”
타티아나의 목소리는 사람들 앞에서 딱딱하게 말했을 때와는 딴판으로 지금은 여성스러운 음색과 울림이 가득했다. 생긴 대로 사람 말을 배운 고양이 같았다. 고양이다운 부분은 눈하고 뾰족하게 난 귀밖에 없었지만. 문득 피카니는 타티아나한테 사람 귀도 달려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마주 보는 대화. 대위님하고 그 부하들은 내가 대하기에는 불편해. 그나마 당신이… 뭐라고 표현하지. 단어가 안 떠오르네.”
“만만해 보인다고?”
타티아나는 표정 없이 어깨를 살짝 올리고 내렸다.
“거의. 어쨌든 싸움이 나면 등을 맞댈 사람이 필요하잖아. 때가 되면 군인들은 우리가 싸우지 못하게 뒷전으로 빼버릴 테니 그나마 서로 뜻이 맞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셈이지.”
소극적인 몸짓과 진지한 표정과는 반대로 목소리는 아양을 떠는 거 같았다. 말하는 본인이 의도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듣고 있는 피카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 정도로 파스낙을 증오하는 건가? 기껏 살아난 자기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
“내가 끝내야만 해. 날 믿어줄지는 당신 마음이야. 하지만 내게는 이런 말을 나눌 사람이 당신밖에 없거든.”
피카니 앞으로 그녀가 겉옷 안쪽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꺼내서 보였다. 활짝 펼친 손 위로 작고 동그란 금속 상자가 드러났다. 황동색이었다.
“그게 뭐지?”
“창과 활 때문에 방패를 만들고. 성을 뚫기 위해 대포가 만들어지고. 총알을 막기 위해 방탄복이 생겼지. 특별한 능력을 갖춘 자들에게 대항하는 수단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꾸준히 연구됐어.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적극적으로 개발한 건 인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고.”
“수요가 공급을 만드니까.”
타티아나는 금속 상자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방금 내가 보여준 건 그중에서도 정점에 속한 물건이야. 마법사와 마족의 악몽이지. 오래전에 마왕이 이것의 설계도를 기록에서 없애버리고 만들 수 있는 장인들까지 처형하면서까지 누출되는 걸 막으려 했지.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나는 이걸 손에 넣었고. 이것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숨기면서 도망쳤지. 너무 필사적으로 숨기는 바람에 써야 할 기회를 놓친 게 문제지만.”
“그 비장의 수단을 왜 굳이 나한테 보여주는 건데? 하딘 대위한테 알려주지 않고?”
“나도 당신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아. 당신들이 나한테 대하는 것처럼. 대위님이라면 내게서 이걸 빼앗아버리고 날 뒷전으로 두겠지. 그건 용납 못 해. 하지만 당신은 특별한 존재잖아. 나하고 그나마 신세가 비슷하지.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알아둘 사람이 최소한 나 이외에도 누군가는 있어야 하니까.”
피카니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래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내가 그걸 너한테서 빼앗아버린다면?”
“너한테는 불가능해.”
그가 무심한 투로 말했다.
“돌아가. 당신 찾는다고 그 친구들 안달이 났을 테니.”
타티아나는 신발의 굽을 바닥에 비비적거렸다. 그리고 눈 껌뻑할 사이에 코앞에서 사라졌다. 새로 생긴 발자국은 천의 주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