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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화 〉[3권] 104회 - 딸기 오믈렛 (104/188)



〈 104화 〉[3권] 104회 - 딸기 오믈렛



전구가 계속 껌뻑거리면서 탁탁 튀는 소리가 났다. 실내는 컴컴해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아자리는 자신의 고깔모자를 접어서 허리에 차는 작은 가방에 넣었다. 그녀가 두르는 케이프 망토에는 후드가 새로 꿰매져 있었다. 후드를 쓰면서 아자리는 샤카자이아를 바라봤다.

샤카자이아가 직접 재단해서 입고 다녔던 가죽 재킷은 거친 싸움을 겪은 탓에 너덜거렸다. 그래서 캘러헬이 자신의 옷을 줬다. 구리제 지퍼까지 달린 현대식 가죽 재킷이었다. 샤카자이아는 쇠고리를 잡아당겨서 앞섶을 잠그는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지퍼를 올렸다가 내렸다. 목에는 원주민들의 전통 문양이  놓인 갈색 스카프를 둘렀다.

레스는 아직도 신음 섞인 날숨만 뱉고 있었다. 캘러헬은 그가 누워있는 소파 등받이에 손을 얹고  있다. 캘러헬이 두 여자를 향해 양손의 엄지를 척 세웠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옷걸이지.”

아자리가 말했다.


“혹시 마담 윈프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아시나요?”

“마담? 아, 케이트를 말하는 거군. 본명은 케이트 와르네야.”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그분한테 저희 친구도 있습니다. 서둘러서 만나야 해요.”

“난 싸움에서 진 이후로 계속 은둔하느라 케이트와는 만나질 못했어. 몇 시간 전에 레오를  것도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야. 최종 집결지까지 상의할 여유는 없었지.”

“사소한 단서라도 좋아요. 한시가 급합니다.”


소파에 누워있던 레스가 낮은 비명을 지르며 힘겹게 윗몸을 들어 올렸다.

“가만히 기다리는  어때? 저쪽에는 레오포드 씨하고 슌카와칸이 있잖아. 우리가 어디에 있든 찾아올 수 있겠지. 게다가 이 은신처도 알고 있을 거고.”

아자리가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레스. 레오포드 씨를 데리고 갔던  누구였죠?”

“아 빌어먹을. 그랬었지.”

피카니의 얼굴을 떠올리고 레스는 바로 인상을 썼다. 가만히 앉아서 저쪽 일행을 기다린다는  동시에 여정의 끝을 의미했다. 그들의 적은 파스낙만이 아니었다.

“지금쯤 다른 일행하고도 재회했겠죠. 놈들은 우리와 같이 파스낙을 상대하느니 저희만 붙잡을 거예요. 군인들로서는 그게 현실적이죠. 피카니는 원래 그런 놈이고.”

캘러헬이 엄지와 검지, 중지를 펼쳐서 손목을 휘휘 흔들었다.

“여기 도망자 친구들, 저쪽의 추격자 친구들. 그리고 파스낙. 총잡이 이론이 생각나는군. 누가 누굴 먼저 쏴야 하는가. 승자는 누구고 추락할 자는 누구인가.”

샤카자이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쪽에서 저쪽 일행을 기습할 생각은 없습니다. 서로 싸웠다가는 파스낙이 이기니까요.”

아자리가 중얼거렸다.

“그 사실은 저쪽도 알고 있겠죠. 아는 거랑 하는 거는 별개지만… 어쨌든 찾아야 해요. 저희가 여행할  필요한 물건도 단테가 맡고 있어요. 언니의 활도 저쪽에 있고요.”

캘러헬이 목을 가다듬고 검지를 위로 펼쳤다.


“곧 해가 뜰 텐데? 그리고 이젠 갱단 대신에 경찰들이 사방에 깔릴 거고. 특히 샤키는 연방 보안관을 반쯤 죽여놨다며?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용모인데 들키지 않을 자신 있겠니?”


두 여자는  말이 없었다. 샤카자이아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든  눈동자만 밑으로 내렸다. 그때 레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라카키 씨는 어디 갔죠.”

주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레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무언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캘러헬이 그를 향해 능청스럽게 양 엄지를  세우고 검지를 펼쳤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깐.”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캘러헬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나서는 걸 보고 일행은 크게 긴장하진 않았다.  손님이 라카키와 함께 돌아왔다. 수염이 덥수룩한 난쟁이였다. 그의 머리에 라카키가 앉아있었다. 제페토는 일행들에게 멋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 안녕. 이렇게 다시  줄은 몰랐네.”


아자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캘러헬 씨하고 아는 사이셨나요?”

“알다마다. 여길 시공해준 게 나야.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 있는 핑커튼의 은신처도 내가 관리해준 적이 있지. 캘러헬이 여기에 있는 줄은 나도 방금 알았지만. 도움을 받으려고  번 찾아왔는데 안에 있냐고 소리를 질러도 대답이 없었거든.”


캘러헬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휘파람 부는 시늉을 했다.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멀리서 오셨나요?”


“아니. 내 공방이 바로 근처야. 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급하게 달아났구나?”

레스가 꿍얼거렸다.

“예. 광란의 질주였죠.”

“온 도시가 너희 때문에 난리다. 물론 난 너희 편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참고로 부탁받은 마차는 아직 만드는 중이야. 아무리 서둘러도 완성하려면 하루는 더 걸려.”

레스는 영혼이 나간 얼굴로 씁쓸하게 말했다.

“그건 저희도 이미 포기하고 있었어요.”


라카키가 두 여자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캘러헬이 레스의 이마를 눌러서 다시 소파에 눕히고 말했다.

“아씨들은 라카키하고 제페토를 따라가.”


아자리는 살짝 놀랐다.


“지금 당장?”

캘러헬은 소파 위에 올려놓은 팔꿈치를 접어서 턱 끝을 손끝으로 스스로 잡아당겼다. 한시가 급하다고 한 건 아자리와 샤카자이아였다. 둘은 바깥쪽과 레스를 번갈아 보다가 결심했다. 둘은 레스에게 다가갔다. 아자리가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자장가를 부르듯 소곤거렸다.


“푹 쉬어요. 나머지는 저희한테 맡기고.”

샤카자이아는 목걸이를 가져와서는 레스의 목에 걸어줬다. 레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뭔지 보니 손바닥만 한 크기의 꿈 덫이었다. 원형 테두리는 톱니바퀴였고 가운데 빈 곳에는 검은색 실이 거미줄 무늬로 짜여있었다. 그녀가 레스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말했다.

“내가 직접 만들었다.  머리카락과 아자리의 머리카락으로 엮었지. 생긴  투박해도 널 지켜줄 토템이 되어줄 거다.”

레스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이렇게 좋은 선물은 처음 받아봐. 고마워. 너희들도 조심하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눈빛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바깥으로 나서는 일행을 향해 캘러헬이 손짓과 함께 작별 인사를 고했다.


“All hail the outlaws(무법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은신처를 나왔다.











단테는 번데기처럼 담요를 온몸에 칭칭 감고 자고 있었다. 피카니가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가고는 부드럽게 흔들어서 깨웠다. 잠에서 깬 단테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잠이 싹 달아나는 소리였다. 단테는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고 일어났다.


“예?”

“저희가 회의하는 동안에 엿들었던 거 다 압니다.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고 있겠죠.”


자신의 속을 떠보려는 속셈인가 싶었으나 감춰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단테는 바로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는 답했다.


“예. 들었습니다. 파스낙이 치외법권에 있다면서요.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도시 어느 곳이든 싱크홀로 무너트릴 가능성이 있고.”

피카니는 침착하게 조곤조곤 말했다.


“우리가 이미 저지른 위법 행위가 수두룩하지만, 대사관을 공격하는  완전히 논외에요. 이제 해도 뜰 테니 기습할 수도 없어요. 여기에 앉아서 농성할 수도 없죠. 무책임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제 우리가 의지할 변수라고는 레스와 그 친구들뿐이에요.”

단테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탁탁 때렸다.

“저희더러 도와달라고요? 힘을 모을 때라는 건 아는데 당신들은 샤키를 납치했어요. 그런데도 레스 일행은 이미 당신들 친구를 구해줬고요. 너무 뻔뻔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직접 애원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이러고 있다는  몰라요. 저희 목숨을 포함해서 온 도시의 운명이 걸린 일입니다. 얘기라도 들어주세요.”

계속 감정적으로 나서 봐야 도움 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단테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마뜩잖았으나 자기 목숨은 물론 친구들의 목숨까지 관련된 중대사였으니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이 차분해지는 모습을 보고 피카니가 설명했다.

“이제 도시 곳곳에 경찰들이 깔릴 겁니다. 부패한 경찰은 물론 정상적인 경찰도 포함해서요. 지난밤에는 리차트라가 압력을 넣어서 경찰력을 쫓아내는 정도로 무마시켰지만 이제는 해가 떴으니 상황이 달라요. 레스하고 친구들은 물론 저희까지 수배령이 걸렸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놈들한테 찍히지 않은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캘러헬의 은신처를 알려줄 테니 레스 일행을 만나세요. 그리고 상황을 전해줘요. 우리가 힘을 합쳐야만 승산이 생깁니다. 실제로도 레스 일행은 파스낙을 두 번이나 이겼으니까요.”

“여러분들도 충분히 강할 텐데요.”


“지금이 그런 거 따질 땝니까!  못 믿는 거 압니다. 그래도 이게 유일한 길이에요!”

자신을 속이려는 거라고 단테는 계속 의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검토해봐도 피카니가 말해준 사실에 가짜는 없었다. 단테는 턱에 힘을 꽉 주고 입을 다물면서 고민하다가 뱉는 투로 그에게 말했다.


“할 일을 주시죠.”

피카니가 미리 준비해둔 쪽지를 리볼버와 함께 단테에게 건넸다. 쪽지에는 두 가지 주소가 적혀 있었다. 단테는 일단 내용을 확실하게 암기해두고 쪽지를 접어서 품에 넣었다. 단테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피카니에게 받은 호신용 권총도 품에 집어넣고 걸음을 서둘렀다.








키르기스탄 대사관에는 빈방이 아주 많았다. 소냐의 방은 1층에 있었다. 늦게 잠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벽 내내 총성과 지진 같은 소음이 끊이질 않아 소냐는 잠을 설쳐야 했다. 몸은 피곤한데 잠에는  수 없는 불편한 상태로 계속 침대에 뭉그적거렸다. 그러다가 자기 방 바로 옆에 있는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소냐는 일어났다.

그녀는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눈을 비비면서 복도를 걸었다. 부엌의 불이 켜져 있었고 인기척도 났다. 소냐는 그쪽으로 갔다가 화들짝 놀랬다.


“꺄악! 주인님?!”

“앗. 미안해. 나 때문에 깼니?”


파스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목욕가운 차림이었다. 팔에는 포도당 수액과 연결된 링거 바늘이 꽂혀 있다. 눈은 움푹 꺼졌고, 얼굴은 핼쑥해졌고, 안색은 창백했다.


“무… 무슨 일 있었나요? 나쁜 일이라도 당하셨나요?”


소냐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파스낙은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우유병을 잔에 기울였다.

“별 건 아냐. 그냥… 카드 게임을 격렬하게 했거든. 정말 격렬한 게임이었지.”


소냐는 멍하니 있다가 공손하게 물었다.


“뭔가 시킬 일은 없으시나요?”

“어… 오믈렛 좀 만들어주겠니. 출출하구나.”

“스위트로 할까요? 평소 먹던 대로?”

오믈렛은 만들기 간단한 만큼 종류도 다양해서 디저트 용도로 과일 등을 첨가해서 달게 만들 수도 있다. 파스낙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냐는 냉장고에서 달걀과 딸기를 꺼내고 요리를 시작했다. 깬 달걀을 그릇에 담고 거품기로 섞으면서 소냐가 물었다.

“카드 게임은 이기셨나요?”


식탁 의자에 앉아서 손바닥에 턱을 괴고 있던 파스낙은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탐색전에서만 자잘하게 이기고 중요한 순간에는 졌어. 두 번이나 졌지.”

“안타깝네요.”

소냐는 살짝 달군 프라이팬에 풀어둔 달걀을 둘렀다. 달걀이 푹신한 식감을 내도록 조금만 익히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팬을 움직였다. 그녀는 반숙으로 익은 오믈렛 위에 썰어둔 딸기를 올리고 고운 설탕을 보기 좋게 뿌렸다. 완성된 요리는 접시에 담겨서 파스낙의 앞에 놓였다.

“본 에페띠(맛있게 드세요).”


그는 손짓으로 감사를 표하고 요리를 한 조각 떠서 먹었다. 파스낙은 표정이 녹아내렸다.

“후아…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구나.”

소냐는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곁에 꼿꼿이  있었다. 떠나도록 허락을 받거나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작정 같았다. 마침 외로웠던 파스낙은 먹다가 자기도 모르게 넋두리를 읊었다.


“판돈도 내가 훨씬 많았고. 분명 질 수가 없는 카드였는데도 졌단다. 처음에는 블러핑에 당했고, 그다음에는 정신을 차리고 나니 판돈을 털렸어.”

“카드 게임은 판돈이 가장 많은 사람부터 공격당해요. 협공에 당하지는 않았나요?”

오믈렛을 씹으면서 뜸을 들이고 그가 말했다.

“맞아. 몰매를 맞았지.”

“밑천이 두둑하고 패가 아무리 좋아도 그럼 불리하죠.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는걸요.”

“흠.”

“세상만사가 다 그렇죠. 아무리 강해도 뭉치지 않으면 한계가 분명하니까요.”


소냐는 곧바로 자기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앗… 그…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게임에 져서 속이 상하셨을 텐데.”

“아냐 아냐. 진   탓인데 뭘. 네가 정곡을 찌르는구나.”


파스낙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소냐는 접시를 치우고 바로 설거지를 했다. 접시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속에서 소냐가 그에게 물었다.


“타티아나 언니에게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요?”


“아, 타티아나는 괜찮을 거야. 다만 돌아올 날은 요원하구나. 많이 보고 싶니?”

“네… 그리워요. 정말 멋지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파스낙은 잠깐  말을 고르느라 많이 고민했다.


“나도 그렇단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나는 전화벨 소리가 부엌에까지 울렸다. 파스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네가 사는 아파트로 가서 쉬렴. 새벽에 나는 소란을 들었으니 알겠지만 도시가 난장판이니까 경찰 아저씨들 말 잘 듣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필요한 돈은 내 방에서 원하는 만큼 가져가.”

파스낙은 소냐가 자신에게 말을 걸 틈도 주지 않고 부엌을 떠났다. 포도당 수액이 걸려있는 거치대를 질질 끌면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에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잠시 후에 그가 말했다.


“뭐?”







아자리가 주문을 속삭이자 지팡이 끝에 하얀 불빛이 켜졌다. 그들은 축축한 하수도에 있었다. 제페토가 하얀 불빛 아래로 청사진을 펼쳐서 한 곳을 쿡 찍었다.


“우리는 여기에 있어. 내가 안내해줄 곳도 여기까지고. 캘러헬이 우리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라고 일렀거든. 나도 이제 바쁠 거야.”


아자리가 말했다.


“당신 저번에 처음 만났을 때는 던전 같은 건 안 만든다고 했잖아요? 하수도하고 공방 지하를 언제 연결해놨어요?”


“아주 오래전에. 우리 공방 사람들도 하청받아서 시공한 하수도니까 기왕 하는 김에 슬쩍…. 구멍이 있으면 더 뚫는 게 남자 본능이거든.”


아자리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스윽 훑었다.

“역시 공공시설은 함부로 민영화하면 안 되는군요.”

“실로 그렇지.”

제페토가 청사진을 접어서 아자리한테 건네려 하자 라카키가 사이에 끼어들어서 막았다.

“불필요. 내가 있으면 길을 잃을 일 없음.”

희한하게도 라카키의 목소리는 하수도 안에서도 메아리가 치지 않고 또렷했다.


“그랬었지. 하도 오랜만이라 까먹었네.”

“오늘 비가 와. 빠를수록 좋아.”

샤카자이아가 라카키에게 물었다.

“비가 온다고요?”


“한동안 내리지 않았으니까 오늘 쏟아져. 늦으면 수량이 불어서 돌아올 때 하수도를 못 써.”


제페토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을 보이며 작별을 고했다. 아자리하고 샤카자이아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최대한 감사를 담아서 말했다. 아자리가 먼저 말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무탈하셔야 해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페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희는 영웅이야! 반드시 이겨서 나쁜 놈들 흠씬 패줘야 한다!”


그들은 서로  길을 갔다. 두 여자는 라카키를 따랐다. 하수도는 곰팡이랑 물이끼 냄새만  났을 뿐 크게 지독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아자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라카키가 말했다.


“하수도는 분뇨가 흐르는 곳과 빗물이 흐르는 곳으로 나뉘어 있어. 더러운 쪽은 방류되고 그나마 깨끗한 쪽은 하수처리장에서 정화되어 수도시설로 옮겨져.”

“라카키 씨하고 제페토 씨가 아니었으면 큰일 났겠네요. 그런데 더러운 쪽은 방류된다고요?”

“자본주의 사회.”

라카키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얼굴을 찌푸리고 계속 걸었다. 가다가 심심해진 샤카자이아가 입을 열었다.


“문명인은 우리 같은 미개인보다 청결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면서 라카키가 몸을 돌리고 말했다.


“브레너의 빗자루. 사람들은 골칫거리를 양탄자 밑에 빗자루로 밀어 넣어. 문제는 뒤로 미뤄. 사람들은 양탄자 밑의 요정들이 골칫거리를 알아서 처리한다고 믿어.”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으나 무슨 맥락으로 꺼낸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둘의 표정을 보고 라카키는 자신의 턱에 손을 대면서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말투를 미안해하는 투로 바꿨다.


“실수. 방금 했던 말은 이쪽 차원에 없는 거였어.”


둘은 캐묻지 않고 그러려니 흘려 넘겼다. 하수도를 지나는 건 따분한 일이었다. 볼만한  전혀 없었고 답답했다. 특별한 일이라고는 도중에 토끼만큼 살이 찐 쥐를 보고 샤카자이아가 질색한 게 전부였다.


“으엑!”


“와우. 도시 물을 먹어서 그런지 난민촌에 살던 애들보다 우람하네.”


아자리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다시 묵묵히 라카키를 따라가다가 아자리는 궁금한 게 생겼다.

“저 라라키 씨?”


“응.”


“지금 와서 묻는 것도 웃긴 일인데 저쪽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가는 거 맞죠?”


“바로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어.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계속 다가갈 뿐.”

샤카자이아가 말을 받았다.

“그럼 같은 방식으로 누구든 찾아낼 수 있나요?”

“아무에게나  수는 없어. 찾는 대상이 내가 친구로 인정한 사람이어야 해. 그것도 아니라면 매개체가 필요해. 친구를 찾으러 가는 길이고 당신들도 있으니까 확실하게 찾아갈 수 있어.”


샤카자이아는 라카키를 대할 때마다 항상 처음 봤을 때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못하는 티를 났다. 원주민들의 종교관에서 페어리들은 신앙의 대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래도 당장 필요한 대화는 자기가 주도해야겠다고 아자리는 판단했다.

“그럼 매개체만 있으면 라카키 씨가 누구든 추적할  있나요?”


라카키가 갑자기 자기 머리 위로 빨간색 글씨가 적힌 푯말을 들어 올렸다.


[네거티브]

“친분이 없는 사람을 추적하는 건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 그래서  슌카와칸처럼 아무나 쫓아갈 수는 없어”

가는 길에 창살로 막힌 곳이 있어서 샤카자이아가 간단하게 창살 하나를 뜯어내고 지나갈 곳을 만들었다. 몸이 점점 곰팡내로 찌들어가니 두 여자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 라카키가 두 사람 머리 위에서 8자로 날면서 날개를 털어 반짝거리는 가루를 뿌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의 몸에서 세탁물이 햇볕에서 마를 때 생기는 시원한 내음이 났다. 샤카자이아가 자기 몸에 붙은 반짝이들을 보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의 축복이다. 여행을 떠나길 잘했어. 고향 사람들은  이야기를 못 믿겠지.”

“그냥 탈취만  건데.”

라카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물기에 반사된 창백한 불빛과 그들의 그림자가 음침한 연극을 그렸다. 걸음마다 물이 첨벙거렸다.

샤카자이아가 화두를 던졌다.

“캘러헬 씨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미리 내다봤던 걸까?”


“정황을 보면, 네. 제페토 씨가 우연히 은신처 근처에 있었을 리가 없어요. 우리랑 저쪽하고 연이 있다는 건 캘러헬 씨도 몰랐겠지만.”

“레스랑 닮았어. 겉은 이상해도 속에는 깊은 생각이 있지.”

“그런데 레스는 미리 내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부류잖아요.”


지나간 순간들을 떠올리고 샤카자이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어쨌든 그쪽에는 캘러헬 씨가 있으니 다행이에요. 단테한테 나쁜 일 없으면 좋겠는데.”









단테는 머리에 포대 자루를 뒤집어쓴  끌려가고 있었다. 입에도 재갈이 물려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는 인기척에는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를 끌고 가던 자들이 단테의 머리에서 포대 자루를 벗겼다. 그들은 어느 골목에 있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나란히  있다. 하늘은 진한 보랏빛에서 연한 군청색으로 바뀌는 중이다. 곧 해가 뜨리라. 무릎을 꿇은 단테는 밑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옷 속에서 얼어버릴 듯이 차가운 이슬을 느꼈다.


등불을 들고 나란히 서있는 행렬의 끝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실크 모자의 그림자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저벅저벅 그에게 다가왔다. 단테는 본능적으로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몸속에서 날뛰는 공포를 억눌러봐야 튀어 오르는 고무공을 억지로 누르는 꼴이었다. 파스낙은 그대로 고개를 숙이면 단테와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오고는 그림자만큼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그들은 단테의 재갈을 벗기지 않았다. 이쪽을 보지도 않고 묵묵히 사주경계를 유지했다.

몸이 덜덜 떨리던 단테는 재갈 너머로 뭐라 계속 웅얼거렸다.


“쉬.”

파스낙은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대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단테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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