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3권] 109회 -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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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콕은 맥심 건에서 손을 놓고 처마 밑에 누워있는 캘러헬에게 달려갔다.
“어르신! 어르신! 제 말 들립니까?!”
캘러헬은 숨도 제대로 못 쉬어서 입가에 입김도 거의 안 났다. 숨어있는 카르델은 조준경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피를 흘리기도 하는구나.”
하딘이 소총을 어깨에 올리고 말했다.
“토마스 캘러헬은 외모가 젊다고 들었는데 상태가 왜 저러지?”
지금 캘러헬은 풍화된 중년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히콕은 심폐소생술을 해주면서 대답했다.
“안단시움에 당했어. 가진 힘만큼 당했을 때 받는 반작용도 심해지니까. 나나 다른 형제들이라면 힘을 잃고 보통 사람만큼 약해지는 게 끝이지만 그랜드마스터는 그렇지가 않아.”
피카니는 권총의 탄창을 바꾸고 모자를 고쳐잡았다. 모자에 고인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전차에서 캘러헬을 알아보고도 말을 안 했지?”
“그랜드마스터를 방해하지 않는 게 우리들의 철칙이야.”
피카니는 혀를 찼다.
“그놈이고 이놈이고 개똥철학이야.”
“하지만 넌 그 개똥철학 덕에 살았잖아.”
그들 앞에서 사람이 아지랑이처럼 나타났다. 파스낙 리차트라가 벽에 기대어 서서 다리를 꼬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났는지 안색이 맑았다. 하딘은 바로 쐈다. 파스낙은 자기 앞에 멈춰선 빗물과 총알들을 손톱 때 치우듯 검지 끝으로 튕겼다. 그가 넌지시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나와떼?”
피카니는 속으로 뜨끔거리면서 자동권총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대구경 탄환이 방어막에 금을 냈다. 파스낙은 그 권총을 흥미롭다는 눈으로 보았다. 효과가 있었다. 피카니와 하딘이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파스낙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뭐야!”
맥심 건을 맡고 있던 아비투스가 낮게 외쳤다. 하딘은 히콕을 향해서 말했다.
“그 안단시움이라는 거 지금 갖고 있나?”
“아니. 그 슈슈니를 생포할 때 마지막 남은 걸 썼어.”
피카니는 빗속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정수리까지 소름이 올랐다. 일단 부상자 근처에서 싸우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쓰러진 사람들의 피로 흥건해진 광장으로 나섰다. 손으로는 상대가 어디서 나타나든 바로 조준을 옮길 수 있도록 양 손가락이 겹쳐지도록 권총을 감싸서 몸에 바짝 대고 옆으로 살짝 기울인 다음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하딘은 피카니의 사각을 봐주면서 같이 움직였다. 하딘이 외쳤다.
“언제부터 숨어서 보고 있었나 리차트라!”
“댁이 바퀴벌레들을 쫓아온 친구들의 대장이군. 성함이?”
목소리가 메아리를 쳐서 어디서부터 들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딘은 다시 외쳤다.
“네 부하는 이제 없다! 너 혼자다!”
“드디어 혼자가 된 거지. 댁도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내 심정을 알 거야.”
피카니가 하딘에게만 들릴 크기로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우리 속을 떠보는 거 같아.”
히콕은 캘러헬을 건물 안으로 데려가고 얌전히 상황을 보았다. 아비투스하고 카르델도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어두고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피카니가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파스낙! 도시는 포위됐다! 자폭이라도 할 거냐?!”
“기다려야지.”
파스낙은 덤덤히 답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피카니는 뇌까리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종탑 쪽에서 울린 굵은 총성과 함께 광장 한복판에 무언가가 맞닿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조준을 옮긴 카르델은 그곳의 빗줄기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도 카르델의 저격이 신호가 됐다. 기관총을 짊어지고 자리를 바꾼 아비투스도 바로 설치해서 그쪽으로 쏘았다. 집중포화를 받은 파스낙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쪽엔 눈길을 주지 않고 종탑만 보고 있었다. 파스낙이 악단 지휘자처럼 지팡이를 쥐지 않은 쪽으로 손목을 가볍게 돌리자 보호막에 박혀있던 탄환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종탑을 향해서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고는 쏘는 시늉을 했다. 납덩어리와 충격파가 빗속에 투명한 굴을 뚫어버리면서 종탑으로 날아가자 이내 종탑은 허리에 구멍이 뚫려서 스스로 무너졌다. 종이 땅으로 떨어지면서 낸 굉음이 광장의 피 웅덩이에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파스낙은 손가락 총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쪽을 보고 실실 웃었다. 피카니와 하딘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했다. 당장 쏴봤자 어차피 막아낼 터다. 그들은 계속 겨누기만 했다. 파스낙도 가만히 서서 그들과 같이 인형처럼 비를 맞았다.
저 영원히 이어질 거 같은 대치를 자기가 끊을 수 있을지 카르델은 확신이 안 들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조준경의 십자선을 상대의 머리에 놓는다. 그리고 곁눈질로 풍향계를 흘겨보면서 조준을 조절했다. 갑자기 그는 손이 멎는다. 풍향계의 움직임이 혼탁했다. 난류가 불었다. 약실에 들어있는 건 방탄복에 대비한 텅스텐 심이 박힌 철갑탄이었다. 총알은 무겁고 폭우까지 내렸다. 방아쇠를 당기는 찰나에 끼어든 변수 때문에 오차가 몇 cm 이상 벌어질 수 있다.
심호흡하면서 그는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이 한발로 끝나지 않으면 저쪽이 이쪽으로 어떻게 반격할까? 애초에 가능한 건가? 이쪽으로 시선이 끌린다면 다른 동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지? 저 녀석한테 체력이 얼마나 남아있지? 뭐하러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지? 5초가량 되는 시간 동안 카르델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머릿속 사정일 뿐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서서히 당겼다. 그때 카르델은 조준경 속에서 파스낙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이상하다. 그 망설임으로 마지막 순간에 카르델은 숨을 들이쉬었다. 몸이 들썩이면서 총도 흔들렸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카르델은 자기가 상대의 계략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신기루…!”
탄환이 하딘의 모자에 구멍을 뚫고 어느 건물 벽에 박혔다. 피보라는 일어나지 않았다. 파스낙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쳇’하고 혀를 찼다. 하딘이 휘청거리자 피카니는 여태껏 세워둔 수 싸움은 잊어버리고 쏴 갈겼다.
그의 눈에서 녹색 빛이 번쩍였다. 파스낙은 막지 않고 피했다. 그는 썰매를 타듯 지팡이를 방향타처럼 움직여서 가볍게 미끄러졌다. 어느새 발밑에는 거울처럼 매끈한 빙판이 얼어 있었다. 아비투스도 기관총으로 쏘고 있었으나 상대가 너무 빨라서 조준이 쫓아갈 수가 없었다. 파스낙은 스케이트 동작처럼 몸을 옆으로 한 바퀴 돌면서 역수로 쥔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의 궤적에 있던 수분들이 면도날 같은 얼음으로 변해서 피카니에게 쏟아졌다. 피카니는 총에 집어넣으려던 탄창을 놓쳤다.
“윽!”
그즈음에 카르델은 노리쇠를 당기고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파스낙은 자기 뒤에 있는 자동차 한 대를 염력으로 자기 쪽으로 끌어오고는 가볍게 펄쩍 뛰어서 그 뒤로 넘어가서 숨었다. 카르델은 제압사격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쏘았다. 피카니는 손등에 박혀있는 얼음 조각을 이빨로 뽑고 겨우 장전했다. 마지막 탄창이었다. 아비투스는 상대가 사선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서둘러 40kg에 가까운 기관총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정신을 차린 하딘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훑어내고 허리춤에서 수류탄을 들었다. 피카니도 거기에 맞춰서 같이 수류탄을 들고 핀을 뽑았다. 하딘은 그걸 힘껏 걷어차서 자동차 아래쪽으로 보내버렸고 피카니는 위로 힘껏 던졌다. 위로 날아간 수류탄은 하딘이 소총으로 쏴서 터트렸다.
파스낙은 위쪽에서 쏟아진 파편들을 보호막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땅에 지팡이를 찍어서 구멍을 내고는 굴러들어온 수류탄을 골프 하듯 쳐내서 집어넣었다. 그 자리에서 내장까지 울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지진이 일어나고 흙더미가 솟았다. 파스낙은 자기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을 무시하고 지팡이를 비틀어 칼을 뽑았다. 그의 외투가 한 번 들썩였다.
칼을 수직으로 내리치자 자동차가 깨끗하게 동강이 났다. 그는 단면에서 연료 탱크만 골라서 염력으로 끄집어냈다. 카르델은 소총에 클립을 집어넣고 다시 저쪽을 겨누다가 연료 탱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걸 보았다.
“이런 씹...”
파스낙이 겨눈 칼끝에서 가느다란 벼락이 하나 튀어나와 연료 탱크를 터트렸다. 카르델은 자리 잡고 있던 지붕에서 미리 걸어둔 밧줄을 붙잡고 내려가려다가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뒤이어 불붙은 휘발유가 천벌처럼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맥심 건을 들고 다시 자리를 바꾼 아비투스가 파스낙을 향해 쏘았다. 그의 발밑으로 탄피가 산을 쌓았다. 장전을 마친 피카니와 하딘은 그 덕에 겨우 측면을 노릴 여유가 생겼다. 파스낙은 잠깐 몸을 움츠리다가 칼을 거꾸로 쥐고 땅에 찍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물웅덩이가 증발해서 짙은 수증기로 변했다.
“망할!”
아비투스는 연막 때문에 쏘는 걸 멈췄다. 피카니와 하딘은 바로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둘은 서둘러 연막에서 빠져 나왔다. 하딘이 외쳤다.
“오리온! 기관총 버려!”
맥심 건에 파스낙의 칼이 날아와 박혔다. 칼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맥심 건의 물탱크가 폭발했다. 아비투스는 펄펄 끓는 물을 뒤집어쓰고 몸을 굴렀다. 피카니와 하딘이 바로 나타나는 바람에 파스낙은 자신의 칼만 도로 가져가고 몸을 피했다.
피카니와 하딘은 아비투스에게 다가가 상태를 보았다. 그는 인상만 조금 쓰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딘이 물었다.
“괜찮나?”
“비가 와서 물이 크게 뜨겁진 않았습니다. 저보다는 대위님이 더 걱정입니다.”
하딘의 이마에서는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손수건으로 동여맸다. 그 위로 다시 모자를 쓰고 그가 말했다.
“난 끄떡없어.”
피카니가 주변을 살피면서 말했다.
“카르델은 어떻게 됐지?”
객관적으로 보자면 애매한 상태였다. 카르델은 일단 숨은 붙어 있었다. 철벅거리는 진흙 위로 떨어졌으니 망정이지 도심지의 시멘트로 포장된 땅에 떨어졌으면 온몸의 뼈가 부서졌을 것이다. 그는 뇌진탕으로 앞이 안 보이고 귀가 먹은 와중에도 불붙은 휘발유가 묻은 외투를 간신히 치웠다. 감각 대부분은 마비되었고 성한 곳은 떨어지는 빗방울도 송곳으로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감흥 없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한순간에 온몸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진짜 죽음의 징조인가 싶어서 카르델은 덜컥 겁이 났는데 정말로 몸이 나아져 있었다. 아직 이곳저곳 삐걱거렸으나 일단 몸은 움직였다.
“끼으으으으으으으으...”
괴이쩍은 기합을 내면서 카르델은 몸을 일으켰다. 뭔지는 몰라도 나쁜 징조는 아닌 거 같다. 고개를 쳐드는 순간 그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사람과 마주쳤다. 누에나방처럼 흰 날개가 달렸고 전구처럼 온몸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라카키가 말없이 손을 들어서 그에게 인사했다.
샤카자이아가 뒤늦게 나타났다. 쉬지 않고 라카키를 쫓아오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녀는 카르델을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였더라? 전에 본 거 같은데 기억은 안 나네.”
카르델은 샤카자이아의 등장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흐엑! 흐에에아악! 으에에에엑!”
그는 방금까지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못할 기세로 경기를 일으키며 바퀴벌레처럼 손발을 움직여서 물러났다. 이내 카르델은 과호흡으로 정신을 잃었다. 나중에 나타난 아자리가 그걸 보고는 물었다.
“왜 저래요?”
라카키는 말없이 떫은 표정만 보여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