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3권] 110회 - 암살자와 암살자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당장 죽거나 하진 않는 건가?“
라카키가 끄덕이자 두 여자는 카르델을 빗물이 안 닿는 처마 밑으로 대충 치워버리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들로서는 아까운 시간을 써가며 보살펴줄 의리는 없었다. 총성이 멎은 뒤로 공허한 대치가 계속 이어졌다. 일행은 고개만 살짝 내밀어 광장 한복판에 있는 피카니와 군인들을 보았다. 샤카자이아가 아자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겠나? 가서 도와줄까?”
아자리는 조금 생각하고 답했다.
“당장은 아니에요.”
“음.”
샤카자이아는 몸에 맨 활을 손으로 옮겼다. 그리고 화살집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서 살폈는데 촉에는 종잇조각이 묶여있었다.
아자리가 라카키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겠어요?”
아자리의 말이 끝나자 라카키는 눈을 감고 양손을 허공으로 뻗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두 여자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눈을 감은 채 라카키가 말했다.
“탐의 숨결이 약해.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손에 피가 많이 묻어있어… 나도 아는 사람들의 피야. 당장은 근처에 누군가가 붙어서 계속 돌봐주고 있어. 고양이 눈… 히콕이 여기 있었구나.”
샤카자이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자리가 물었다.
“레스는 어디에 있어요?”
라카키는 잠시 후에 눈을 감고 뜸을 들여서 대답했다.
“너무 멀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어. 토템 덕분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 알아.”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뭔가 이상해. 우리가 바깥으로 나온 그 짧은 사이에 이 난리가 미리 계획된 것처럼 연달아 터지고 있잖아. 이 모든 게 일종의 함정으로 느껴져.”
아자리가 속닥거렸다.
“숨겨둔 꿍꿍이는 다들 있겠죠. 우리도 그렇고요. 지금은 그걸 누가 먼저 쓰느냐가 문제지.”
샤카자이아가 걱정하는 목소리를 냈다.
“레스하고 단테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레스하고 단테에게 숨겨둔 꿍꿍이 따위는 없었다. 가진 건 보이는 게 전부였다.
“이젠 유령도 몰래 못 지나가겠는데.”
단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들이 숨어있는 골목 주변에는 경찰들이 길목마다 자리를 지켰고 대로변에는 경찰들이 축젯날에 시내 행진이라도 하다가 온 것처럼 우글거렸다. 단테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다시 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기발한 생각 안 떠올라요?”
“없어.”
레스는 바로 대답했다.
“그럼… 아무래도 기습 공격을 해야겠죠?
“필요 없어.”
그의 태도에는 듣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자신감이 아니라 이성이 없는 사람들 특유의 비틀린 현실감각이 느껴졌다. 레스는 다시 흘러나온 코피를 손등으로 훔쳐내고 일어났다.
“멈추지 마.”
그 말만 하고서 레스는 당당하게 대로변으로 나왔다. 당연히 저쪽도 이쪽을 보았다. 단테는 너무 놀라서 말릴 틈도 없었다.
“지금 미쳤어요?!”
“아인다마 라 야브퀴니 아흐드 픈 누크티이 아흐다나(지켜주는 이 없을 때 우리는 누구에겐가 죄를 짓는다).”
그는 듣는 척도 안 하고 혼잣말을 했다. 물론 단테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자기 들으라고 한 말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저 앞에 있는 무리를 상대로 어쩔 작정인지는 확실했다.
경찰들이 이쪽을 보자마자 움직이지 말라고 외치면서 손을 허리춤으로 옮겼다. 레스가 먼저 쐈다. 오른손 검지에 힘을 단단히 넣고 레버를 움직였다. 네 명의 경찰들은 손을 이쪽으로 뻗지도 못하고 낙마했다. 2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레스는 레버를 철컥 움직이고 걸어가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이 앤 후시나(우리 자신에게도).”
그의 비이성적인 호승심에 전염됐는지 단테는 이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둘은 계속 앞으로 향했다. 경찰들은 미친놈처럼 대놓고 다가오는 레스와 갑자기 쓰러진 동료들의 모습에 당황하면서 무기를 뽑았다.
“쿼틸, 레이삿 마스울랏 안 아이티엘리히(살해당한 자, 자기의 살해에 책임 없지 않으며).”
레스의 눈에는 떨어지는 빗줄기가 동그란 물방울로 보였다. 모든 소리는 메아리처럼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는 경찰들이 들고 있는 총의 방향을 보고 이쪽에는 총알이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알샥스 알마스우크, 웨레이스 에알라엣티크 와하타크(도둑맞은 자, 자신의 도둑맞음에 잘못 없지 않으며).”
탄창이 비어버릴 때까지 방아쇠와 레버를 움직였다. 총알들은 상대의 손이나 무기만 맞춰버리거나 고삐를 끊어버렸다. 이쪽에 맞서서 날라온 탄환들은 스치지도 않았다. 단테는 자신들 뒤로 사람이 나타나는 기척을 느끼고 외쳤다.
“뒤에!”
레스는 빈 소총을 버리고 빗물로 묵직해진 망토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팔을 힘껏 움직여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몸을 틀면서 허리춤에 대고 쏘았다. 칙칙한 회색 아침 속에 불꽃이 번쩍이고 축축한 바람 속에서 사람 하나가 다리를 부여잡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또 다른 방향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자 레스는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천체망원경처럼 낭비 없이 몸을 돌리고 권총을 허리에 그대로 댄 채 왼손으로 공이를 때렸다. 그걸 보고 다른 경찰들이 경악했다.
“방금 봤어?! 20m는 넘었는데 그걸 패닝으로 맞췄다고?!”
교본에 따르면 권총의 교전 거리는 15m를 넘기지 않는다. 그 이상 거리가 벌어지면 권총 자체의 한계 때문에 맞추기가 힘들다. 사격 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숙련자들은 200m 거리에 있는 표적을 권총으로 맞추기도 하지만 이때는 표적이 가만히 있는 데다가 총 자체도 시합을 위해서 개조한다. 권총은 어디까지나 가까이 있는 적을 상대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부무장이다. 그 외의 경우를 생각하는 건 실전의 영역이 아니라 망상이다.
레스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순찰조들이 그들 바로 옆에 있는 골목에서 나타났다. 레스는 권총을 양손으로 감싸서 눈높이로 들어 올리고 왼쪽 엄지로 공이를 계속 꺾었다. 권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궈진 하얀색 가스가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쓰러진 자들이 허공에 쏜 총알들이 유리창들을 깨트렸다. 레스는 경찰들을 보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알사알리히닌 라 임킨 안 야쿰누 아브리아민 아힐 아샤르라리(정의로운 자는 사악한 자의 행위에 전혀 결백할 수 없다).”
그는 빈 권총을 뒤에 있는 단테에게 손만 뻗어서 줬다. 두 남자는 대로변에 있던 10명이 넘는 경찰들을 지나가고 골목에 쓰러진 4명의 경찰을 지나가 다른 대로변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포위망은 더욱 좁혀왔다. 지원하러 온 다른 경찰들은 눈에 보이는 쓰러진 경찰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표정이 굳어졌다.
“어떻게 당한 거야? 상대는 몇 명이고?”
뒤늦게 온 사람들의 응급처치를 받으면서 누군가가 질문을 받고 더듬거렸다.
“하... 하나...”
레스와 단테의 뒤로 말을 탄 경찰들이 또 한 무리 나타났다. 레스는 주변을 살피다가 시선이 근처 건물 옥상에 놓인 물탱크에 멎었다. 그는 칼을 뽑는 것처럼 등에 멘 단발 소총을 거칠게 휘둘러서 순식간에 견착했다. 50구경 탄환이 물탱크를 지지하는 철골 구조물의 지지대를 뚫었다. 레스는 약실에서 탄피를 꺼내고 오른쪽 손가락 사이에 미리 끼워둔 다른 탄환을 재빨리 끼우고 쏘았다. 물탱크를 고정하던 철골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대로변으로 떨어졌다. 물탱크가 충격으로 터지면서 안에 들어있는 물이 파도를 치자 추격자들이 머뭇거렸다. 그 사이에 둘은 뛰었다.
단테는 장전을 마친 권총을 레스에게 전했다. 가는 곳마다 적이었다. 둘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공격을 피해 급한 대로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싸구려 옷을 걸친 마네킹이 곳곳에 서있는 옷가게였다. 단테가 레스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레스는 바깥을 살펴볼 뿐 답하지 않았다. 단테는 방해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레스는 물웅덩이들을 살폈다. 수면에는 건물 바로 옆에서 그들을 숨죽이고 기다리는 경찰들이 반사되어 있었다. 그는 권총을 양손으로 쥐고 손가락을 제외한 다른 몸을 벽돌처럼 굳혔다. 쐈다. 경찰 중 하나가 근처의 가로등에 튕겨 나온 탄환에 어깨를 꿰뚫리고 비명을 질렀다.
“뭐야?!”
다른 방향에서 공격받았다고 생각한 경찰들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레스가 양손에 권총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양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적들을 향해 번갈아서 춤동작처럼 몸을 돌리며 그는 쏘았다. 쓰러진 경찰들을 뒤로하고 둘은 다시 걸었다.
“알하티 아히야난 후 알샥스 알디히 야타하말 에입 알 아브리아디(죄인이란 때론 죄 없는 자의 짐을 지고 가는 자).”
다시 중얼거리면서 그는 총을 장전했다. 레스가 지금 쓰고 있는 권총은 중절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윙아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장전이 끝난 권총을 보면서 레스는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총을 대신 들어주고 있던 단테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냐.”
이제야 레스는 단테가 원래 알던 사람처럼 보였다. 여태껏 무언가에 홀렸다가 방금 깨어난 것 같았다. 레스는 괜히 두리번거리며 기침을 터트렸다. 둘은 달렸다. 가면서 레스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
◆
그들은 각자 방향을 맡아서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피카니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전쟁터에서 마법사하고 싸워본 적 있습니까?”
아비투스가 대답했다.
“여러 번.”
“그때는 어떻게 이겼습니까?”
하딘이 말을 받았다.
“다른 마법사들은 총알만 막다가 지쳐서 쓰러지거나, 저격에 맞거나, 어쩌다 방어를 푸는 사이에 총을 맞지.”
“그리 쉽게?”
하딘이 살짝 짜증 섞인 투로 대꾸했다.
“군종 마법사들은 일종의 전술 병기야. 포병하고 같은 취급이라고. 정예 마법사는 오히려 전쟁터에서 만날 일이 없어.”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대포나 폭탄이 똑똑해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파스낙이 마지막에 끼어들어서 덧붙였다. 이번에도 처음처럼 예고 없이 그들 바로 앞에서 그냥 나타났다. 피카니 일행은 이대로 쏴봤자 어차피 총알 낭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려보기만 하고 파스낙이 계속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전쟁은 사람과 자원을 소모하는 곳이지 카드처럼 좋은 패 만들어서 겨루는 게 아니거든.”
다른 곳에서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던 아자리 일행도 파스낙이 나타난 걸 느꼈다. 그들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샤카자이아는 일단 화살을 시위에 끼웠다. 시위에 건 화살을 미리 반쯤 당기면서 그녀가 아자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좀 더 기다려보죠.”
“그냥 공격하는 게 낫지 않을까?”
“너무 빨리 구해주면 나중에 곤란해져요. 우리가 저놈들한테.”
“흠.”
샤카자이아는 수긍하고 화살을 쥔 손에 힘을 뺐다. 애초에 피카니 일행 때문에 한 번 곤경에 처했던 처지다. 저들을 적극적으로 구해줄 마음은 그녀도 애초에 없었다. 날개를 접고 아자리의 어깨에 앉아있는 라카키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저기… 무리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언니하고 누나가 완전히 죽일 작정으로 싸우게 된다면….”
아자리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았다.
“규칙은 알고 있어요.”
“난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지켜주거나 돕기만 할 수 있어. 직접 싸우지는 못해. 그리고 내가 관여한 싸움에서 사람이 죽으면 난 여기서 사라지게 돼.”
“우린 그런 짓은...”
아자리는 자신들이 살인은 피하면서 싸운다고 말하려다가 바로 위선적인 말을 한다는 거북함이 들어 말을 삼켰다.
한편 피카니는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고 물어봤을 때 기다린다고 했었지?”
“그랬지.”
파스낙은 지팡이를 옆에 두고 삐딱하게 섰다. 칼은 칼집에 도로 꽂혀있다. 빗방울이 자동권총의 금속 몸통을 툭툭 때렸다.
“뭘 기다린다는 거야?”
파스낙은 실크 모자의 챙을 돌려서 고쳐잡다가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잡아당겨서 짰다.
“솔직히 말해서 난 너희들이 가장 마지막에 나타날 줄 알았어. 너희보다 더 위험한 놈들을 신경 쓰고 있었지. 과연 세상일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네.”
하딘이 말을 받았다.
“우리한테 제안할 거라도 있나?”
아무리 봐도 지금 파스낙의 행동은 전략적인 의미가 없었다.
“그게….”
그가 표정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질문에 대답하는 시늉을 하면서 파스낙은 자연스럽게 엄지로 칼의 손잡이를 위로 밀었다. 그가 치켜든 지팡이에서 살짝 드러난 칼날이 섬광을 뿜었을 때 피카니 일행도 동시에 쏘았다. 아비투스의 산탄총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자 파스낙은 잠깐 당황했다. 장전되어 있던 건 작열탄이었다. 불붙은 지르코늄과 알루미늄 혼합물이 방어막 위에서 지옥 불처럼 하얗게 타올랐다.
앞이 안 보이는 피카니 일행들은 일단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우 그들의 시력이 돌아올 때 파스낙도 금속 분말이 일으킨 섬광으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불길을 다른 곳으로 치워버렸다.
피카니는 자동권총을 양손으로 쥐고 연달아 쐈다. 45구경 ACP 탄환이 발사될 때마다 어깨가 앞뒤로 흔들리고 슬라이드에서 탄피가 튀어나왔다. 탄환들이 방어막의 같은 부분에 연달아 박히자 마침내 얼음 호수의 낚시터 같은 구멍이 나타났다.
“허.”
파스낙이 그냥 뱉었다.
하딘과 아비투스가 그곳을 노리고 쏘자 파스낙은 왼팔을 방패처럼 앞으로 들어 올렸다. 탄두들이 외투에 박혀서 뭉개질 때 그가 뒤로 주춤거렸고 작열탄의 화염이 옷에 옮겨붙었다. 아비투스가 산탄총의 총열을 꺾어서 탄피를 꺼내는 동안 하딘은 총알이 떨어진 레버 액션 소총을 놓고 리볼버를 뽑았다. 피카니는 반사적으로 탄입대에서 탄창을 새로 꺼내려다가 뒤늦게 다른 권총을 뽑았다.
파스낙은 서있는 자세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눈에서 녹색 안광이 번쩍이자 피카니 일행은 굳어버렸다. 몸이 굳은 건 아니었다. 무언가가 움직이지 않아서 당황하고 멈칫거린 건데 그들 자신의 몸은 정상이었다. 알고 보니 총 안쪽이 얼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스낙이 손가락을 퉁기자 그의 외투에 붙은 불이 꺼졌다.
“억지로 방아쇠를 당겨봤자 총만 망가질 거다.”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즉 쓰시지 그랬어.”
피카니는 초조함을 억누르고 권총을 거꾸로 돌려서 손도끼처럼 쥐었다. 아비투스는 개머리판을 휘두르려고 산탄총을 짧게 쥐었고 하딘은 바닥에 둔 자신의 소총을 흘겨보았다.
“해봤지. 그런데 빗속에 충분히 오래 있어야 먹히는군.”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모두 고스란히 보았다. 아비투스는 먼저 들소처럼 달려들었다가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혀서 하늘로 떠올랐다. 하딘은 최대한 빨리 소총을 도로 주워서 총알을 집어넣으려다가 가느다란 벼락에 맞고 뒤로 쓰러졌다. 하늘로 떠올랐던 아비투스는 땅으로 내동댕이쳐지고도 일어나려다가 위에서 내리쳐지는 충격을 맞고 완전히 실신했다.
피카니는 계속 달려들어서 거꾸로 쥔 권총을 도끼처럼 휘둘러댔다. 파스낙은 몸을 틀지도 않고 발동작만으로 모두 피했다. 상대가 포기 안 하고 계속 거리를 좁히려 들기에 그는 칼을 휘두르려고 자세를 새로 잡는 대신 손잡이로 피카니의 명치를 힘껏 찔렀다.
“컥….”
용사는 꼴사납게 땅을 굴렀다. 파스낙이 손목의 반동으로 칼을 우아하게 고쳐잡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나온 영화 재밌던데.”
“씨… 발….”
피카니는 분해하는 표정과 목소리를 내며 은근슬쩍 오른손으로 왼쪽 팔을 매만졌다. 파스낙이 칼을 어깨 위에 올리고 이쪽으로 다가오자 그는 왼쪽 팔에 힘을 주었다. 안전장치가 해제된 비밀 권총이 소매 속에서 튀어나와 파스낙의 발을 노렸다. 이내 가벼운 총성이 났다.
“똑같은 거에 당하기에는 내가 너무 힘든 하루를 보냈어.”
발사된 총알은 비밀 권총의 바로 코앞에 멈춰있었다. 턱 밑을 긁으면서 파스낙이 말했다. 피카니의 양팔이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혀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팔꿈치가 뒤로 꺾였다. 허공에 떠 있는 총알은 날벌레처럼 저절로 움직이더니 피카니의 가슴에 박혔다. 피카니는 입을 쩍 벌리고 소리 없이 온몸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자리가 샤카자이아의 뒤에서 재촉했다.
“언니.”
“알고 있어.”
이대로 냉정하게 보기만 할 수도 있었으나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결국 자신들의 본성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녀는 시위를 잡아당기고 저쪽을 노려보았다. 라카키가 뜬금없이 말했다.
“누구?”
“방금 뭐라고요?”
같은 순간 파스낙은 피카니를 향해 칼을 찌르고 있었다. 순간 샤카자이아는 자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순간 파스낙의 자세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들고 있는 칼이 돌벽에 박힌 것처럼 찌르는 자세가 중간에 멈춰있었다.
파스낙과 피카니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파스낙이 자기 앞에 있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나타났구나.”
여인의 검은색 머리카락은 종이처럼 윤기 없이 부스스했다. 속눈썹은 솔잎처럼 길었고 가늘게 찢어진 눈매에는 금빛 눈동자가 금화처럼 번뜩였다. 체구는 작고 가늘었으나 온몸에 대나무 같은 힘과 탄력이 흘렀다. 끝부분만 살짝 하얀 검은색 고양이 귀는 털이 빗물에 젖어서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여인은 검은색 삼베 옷으로 온몸을 싸매고 있었다. 발에는 부드러운 가죽신을 신었다.
칼날은 장갑을 낀 타티아나의 손바닥 사이에 비스듬한 각도로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파스낙의 눈에서 녹색 안광이 번쩍이자 기름 끓는 소리가 나면서 칼날에 전류가 흘렀다. 그래도 타티아나는 꿈쩍도 안 했다. 그녀는 오히려 칼날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파스낙은 상대의 앞발질에 무릎이 부서지기 직전에 다른 손으로 충격파를 쏘아 무작정 거리를 벌렸다. 코앞에서 충격파에 맞은 타티아나는 잠깐 뒤로 날려가다가 양팔을 크게 휘두르면서 몸을 돌리더니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무에서 떨어진 꽃봉오리가 바람을 타는 광경처럼 동작이 낭비 없이 우아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샤카자이아는 당기고 있던 활의 시위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대체 누구야…?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지?”
아자리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마법의 일종 같은데 내가 아는 것 중에 저런 건 없어요.”
파스낙은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피카니와 타티아나를 향해 칼을 겨누고 외쳤다.
“포르차 데르피 스포르티 칼레.”
칼끝에서 광선이 한줄기 뿜어졌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마다 수증기가 치솟았다. 타티아나의 코앞에서 은색 빛이 한 번 번쩍이더니 날아가던 광선이 양옆으로 쪼개졌다. 쪼개진 광선들이 닿은 곳은 순식간에 거무스름한 마른 땅으로 변해있었다.
그녀는 역수로 쥐어서 위로 휘두른 단도를 자기 몸쪽으로 당기고 고양이처럼 살짝 웅크렸다. 피카니가 뒤에서 불만을 터트렸다.
“무사했으면 처음부터 나서서 같이 싸웠어야지 왜 인제야…!”
“이제 너희들은 필요 없어.”
타티아나는 피카니의 관자놀이를 단도의 손잡이로 찍어서 기절시키고 뒤로 밀어트렸다. 파스낙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과 비웃음 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칼을 고쳐잡았다.
“나 보고 싶었어?”
그녀는 다른 손으로 나강 리볼버를 뽑고 이쪽을 째려보았다. 그 자리에서 타티아나는 잔상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유리 껍질처럼 남아있던 잔상은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떠다니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달음박질 같은 소음과 물 튀기는 소리, 도중에 엿보인 잔상들을 통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아주 빨리 움직였을 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을 뒤적거리던 아자리는 간신히 예전의 정보를 하나 떠올렸다.
“아… 그래! 축지법이다! 틀림없어!”
샤카자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뭔데?”
“오크들의 땅에서 전해 내려오는 무술 중 하나에요. 하지만 어떻게? 의화단 운동 이후로 무공은 명맥이 끊어졌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