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3권] 111회 - 무슨 일이 생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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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을 쫓아오던 자들이 등을 보이자 레스는 소총의 가늠자에서 눈을 떼고 지켜보았다. 눈으로도 귀로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권총에 총알을 넣고 있던 단테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휴! 드디어 포기했네!”
레스는 김이 나는 달궈진 소총을 등에 멘 총집에 도로 넣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괜찮아?”
“멀쩡하죠. 쉬지 않고 장전하느라 손이 반쯤 익어버렸지만. 몇 명을 상대한 건지 모르겠네요.”
단테는 권총을 건네주고 손가락을 빗물로 식혔다. 그때 레스의 코에서 또 피가 흘러나왔다. 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저기… 잠깐 쉴까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코밑을 손으로 닦으면서 그가 힘없이 대답했다.
“천천히 걸으면 돼. 아직 괜찮아….”
“무리하면 안 돼요. 진짜 중요한 순간에 뻗어버리면 이도 저도 아니니까. 그거 무겁죠? 내가 맡을게요.”
단테는 단발 소총을 건네받고 손에 들었다. 둘은 움직였다. 자신들이 도시 어느 곳에 있는지는 몰랐으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았다. 먼 곳에서 나는 소란이 여기까지 비바람을 타고 들렸다. 걷다가 잠시 후에 여태껏 들어본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총성이 들렸다. 레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기관총 소리잖아?”
“맥심 건이다! 설마 제국군 사람들이 벌써 알고 여기 왔나?”
단테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레스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걔들이 맥심 건을 갖고 있어?”
“그것 때문에 한 갱단을 털어버렸대요.”
레스는 한쪽 뺨을 굳히며 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장판이네.”
“그리고 저희 쪽은 방금 경찰들을 털었죠. 아무튼, 이제야 좀 실감이 나네요.”
“뭐가?”
둘은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쪽이 마왕을 생포했을 때의 이야기 말이에요. 둘이서 친위대를 전부 상대하면서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서요. 솔직히 말해서 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현실성이 너무 없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어떤 형태로든 항상 예상을 뛰어넘죠. 고작 며칠 알고 지낸 저도 당신에 대해서 이만큼 알게 됐는데 피카니는 무슨 생각으로 배신을 했을까요?”
레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생각하고 말했다.
“그놈하고 나 사이의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놨어.”
“화 안 나요?”
단테는 바로 후회했다. 레스가 가다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쓰고 있는 터번을 벗은 다음 빗물에 젖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계속 긁으면서 그가 말했다.
“더 중요한 게 너무 많아.”
화난 기운 없이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단테는 한숨이 더 깊어졌다,
“가자.”
터번의 물기를 짜고 다시 쓰면서 그가 말했다.
갈 길이 멀었다. 싸울 때 정신이 없어서 엉뚱한 방향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걸음도 느렸다. 싸움이 끝나자 지친 몸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레스가 기침하는 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이대로 가다간 도중에 쓰러질 게 분명해서 단테는 지쳐버린 레스를 이끌고 건물로 데려갔다. 그는 싸구려 식당의 열쇠 구멍을 머리핀으로 따고 조용히 들어갔다.
“잠깐 몸 좀 덥히고 갑시다.”
“하지만 갈 길이….”
“겨우 몇 분이에요. 그거라도 하느냐 안 하느냐 차이는 엄청나게 커요.”
단테는 가게 안에 있는 난로 안에 성냥을 던지고 입김을 불었다. 레스는 쇠처럼 무거워진 젖은 망토를 벗고 난로 앞에 쪼그려서 자신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몸을 떨었으나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통증을 참는 얼굴이었다.
“또 손이 말썽이에요?”
“무리해서 그런가 봐. 잠깐만 쉬면 돼.”
“서두르다가 친구들 짐이 되는 건 더 몹쓸 짓이죠.”
단테는 레스가 가부좌를 틀고 쉬는 동안 먹을 걸 찾아내고 돈을 바 위에 두었다. 레스는 그가 가져온 귀리 비스킷을 같이 먹었다. 생각해보니 억지로 먹었던 생마늘 말고는 지금 뱃속에 든 게 없었다. 씹으면서 그가 물었다.
“왜 계속 함께 해주는지 알아도 될까? 도중에 빠질 수도 있었잖아.”
“솔직히 말해서 지난밤에 전 여러분과 다시 만나서 기뻤어요. 대뜸 용사가 같이 있질 않나, 다친 사람이 실려 오질 않나. 많이 놀랐지만 역시 그래야 저희답죠.”
단테는 난로 위에 체리 브랜디가 담긴 유리병을 올렸다.
“그때 제 몫을 받고 헤어졌을 때 전혀 기쁘지가 않았어요. 저 때문에 잡혀간 샤키한테 미안하기도 했고 여러분 같은 사람은 평생에 두 번 만날 일이 없으니까요. 지난 시간 동안 전… 정말 살아있다는 게 뭔지 느낀 거 같아요. 생존하는 걸 뛰어넘는 그 무언가 말이에요.”
레스는 씹으면서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원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으면 다들 느껴.”
“우린 다 극복했잖아요. 제가 느꼈던 기쁨은 당신을 보고 얻은 거예요. 당신만 모르는 사실인데 당신이 저희 일행의 중심이에요.”
“나?”
단테는 데워진 체리 브랜디를 잔에 살짝 담아서 레스에게 건넸다. 따듯한 술에서는 단맛이 진하게 났다. 레스는 평소 술을 즐기지 않았으나 그것 덕에 몸이 녹고 힘이 났다. 난로에 장작을 하나 넣고 단테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대의를 추구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총이 없거나 총알이 떨어졌다고 싸움을 피하거나 포기하지도 않고요. 더는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도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죠. 우리 모두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 눈이 먼 나방처럼 덩달아서 끝까지 따라가게 되고요. 그게 당신의 진정한 힘 같아요. 저희 모두 당신을 보고 있으면 당신처럼 되고 싶어지거든요. 정말이지, 전 그저 길 안내만 해줬는데도 같이 여행을 하면서 당신만큼 좋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어요.”
레스는 머금던 술을 삼키고 어색하게 말했다.
“그거…. 다행이네.”
레스는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단테가 먼저 일어나서 손을 잡아줬다.
“난 당신들한테 걸었어요.”
그 말을 듣고 망토를 걸치면서 레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단테는 기다렸다.
“앞으로도 우리와 같이 해주겠다면.”
레스는 벨트에서 오른쪽에 찼던 권총집을 풀고 단테에게 내밀었다.
“이건 계약금이자 담보야.”
총집에 들어있는 건 레스의 원래 권총이었다. 단테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뭣…! 무슨 짓이에요?! 전 이런 거 못 받아요!”
그는 가져가라고 재촉하듯 총을 흔들었다.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던 분명 난 뒤처지게 돼. 맹세해줘. 기회가 생기면 무슨 일이 생겨도 멈추지 않겠다고.”
“대체 무슨 소리를, 아.”
그는 말뜻을 깨달았다. 레스는 억눌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아자리하고 샤키는 절대 내 말대로 안 할 거야.”
단테는 입술을 깨물면서 권총을 받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멈추지 마.”
그리고 둘은 바깥으로 나왔다.
◆
한편 히콕은 어깨가 빠질 정도로 캘러헬의 가슴을 압박하느라 바빴다. 그가 입은 셔츠의 양쪽 소매는 찢어서 붕대로 쓰느라 민소매가 되어있었다. 아직도 맥박이 너무 느렸다. 한순간만 방심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자신의 손에 붙어있었다.
아비투스는 가장 먼저 의식을 회복하고 저 앞을 보았다. 광장에는 칼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와 마법에서 나온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파스낙과 타티아나의 싸움은 상대보다 더 빨리 움직여서 측면을 잡고 공격하기를 반복하는 과거의 해상전을 연상시켰다.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한쪽도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아까 있던 장소하고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나 서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파스낙은 칼을 역수로 쥐고 몸을 돌려 타티아나의 단도를 막고 어깨 힘으로 버텼다. 금속끼리 마찰하는 귀 찢어지는 소리 속에서 둘은 교착했다.
“네가 뛰쳐나간 뒤로 소냐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타티아나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그 애를 고아로 만든 건 결국 너잖아!”
“책임지겠다고 해놓고선 말이 많아!”
그녀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소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먹여주고 재워줬다!”
파스낙은 온몸으로 외쳤다. 그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에 맞고 타티아나는 뒤로 날려갔다. 파스낙은 타타이나를 염력으로 붙잡고는 위로 던져 올렸다. 그리고 양팔을 들어 올려 칼집과 칼을 소리가 나게 부딪혀서 교차시켰다. 땅이 갈라지더니 상어의 입처럼 변해서 솟아올라 그녀를 삼키려 했다.
곤두박질치고 있던 타티아나는 허공을 박찼다. 타티아나는 몇 번 더 허공을 박차는 동안 잠깐 깃털처럼 천천히 떨어졌다. 그때 한쪽 정강이를 다른 쪽 무릎 뒤에 붙여서 중심을 잡고 권총을 뽑아서 쏘았다. 파스낙이 주춤거리는 사이 그녀는 낙법을 하면서 땅에 발을 붙였다. 우유색 입김을 토하면서 헐떡이는 상대를 보고 리차트라는 갈아엎어진 땅 위를 걸어 다가갔다. 그의 발이 가는 곳만 땅이 움직여서 바닥으로 변했다.
권총에는 이제 총알이 없었다. 나강 리볼버는 장전 과정이 번거로워서 장전할 여유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총집에 도로 집어넣고 한쪽 다리와 양팔을 앞으로 내밀면서 엉거주춤 서있는 기묘한 자세를 잡았다. 보기에는 이상했으나 그녀의 몸은 뿌리가 박힌 듯 흔들리지 않았다.
아비투스는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맨몸으로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하딘을 어깨에 올리고 피카니의 멱살을 붙잡고 질질 끌어서 일단 대피했다.
파스낙은 칼 손잡이 끝부분을 잡고 땅에 질질 끌었다. 타티아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한 점을 느꼈다.
‘왜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지?’
일부러 힘이 빠질 때를 노려서 최대한 늦게 나타났는데도 파스낙의 입가에는 김 한번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파스낙은 체력이 좋은 부류가 아니었다.
‘내가 못 본 사이에 열심히 운동했나?’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왼팔을 수직으로 세우고 앞발을 내렸다. 왼팔에 오른쪽 팔을 겹쳐서 역수로 쥔 단도의 끝을 앞으로 향한 다음 몸을 옆으로 살짝 틀었다. 파스낙이 다시 왼팔을 뻗어서 충격파를 쏘아내자 그녀는 한발 앞서 허공을 베어내고 하체를 단단히 굳혔다. 충격파는 주변에 물보라를 일으켰을 뿐이다. 다시 팔을 교차시키면서 그녀가 말했다.
“우리의 칼은 같은 장인의 작품이라는 걸 너도 알 텐데. 마법은 내게 닿지 않아.”
파스낙은 염력으로 어딘가에 떨어트렸던 자신의 칼집을 도로 가져왔다.
“넌 이기든 지든 밝은 미래가 없어. 쓸모가 없어지면 인간 놈들은 널 바로 버릴걸?”
“첩보국이 우리한테 의뢰한 건 단순한 요충지 건설이었어. 학살이 아니라!”
칼집을 어깨에 걸치면서 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마계는 망했어. 왕당파와 반란파 중에서 편을 고르는 건 의미가 없다고. 난 그저 썩어빠진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평안히 살고 싶을 뿐이야.”
타티아나는 파스낙을 향해 칼을 겨누면서 다가갔다.
“처음 만났을 때 죽여야 했는데!”
파스낙도 칼을 고쳐잡고 다가왔다.
“위선자. 지금 와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아?!”
타티아나는 파스낙이 휘두른 공격을 틀어서 피하고 그의 칼에 단도를 갈고리처럼 걸어서 억눌렀다. 그녀의 단도가 칼을 가는 숫돌 같은 소리를 내며 장검의 표면을 따라 파스낙에게 날아갔다. 늑골 사이를 뚫고 폐에 박혔어야 할 단도는 그의 외투를 찌르자마자 무언가에 박혔다. 그녀는 감촉으로 얼음이라는 걸 알았다.
지금 칼을 휘두르기에는 너무 가깝다. 파스낙은 손에서 무기를 놓고 타티아나의 옷깃을 붙잡아 둘러메치려고 했다. 타티아나는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허공을 걷어차서 몸을 거꾸로 꼿꼿하게 세웠다. 그녀는 반동을 이용해서 원래 위치로 돌아오자마자 상대의 소맷귀를 붙잡고 허벅지와 허리에 발을 걸어 매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압력을 못 이기고 자세가 흐트러졌겠지만 파스낙의 몸에서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얼음에 박혀 있던 단도를 다시 잡는 순간 파스낙의 눈에서 녹색 안광이 번뜩였다. 타티아나는 염력에 몸이 밀려나자 원 모양으로 땅을 디디다가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손을 앞으로 뻗어 순식간에 자세를 다잡았다. 파스낙이 자신의 지팡이와 칼을 잡고 땅에 찍자 땅이 마름쇠를 뿌린 듯 사방에 가시가 솟아났다. 타티아나는 살짝 뛰어서 허공에 섰다.
파스낙은 주변의 잡다한 파편들을 한꺼번에 염력으로 띄우고 상대에게 쏟아부었다. 타티아나는 빛살 같은 동작으로 피하고 막아내다가 땅에 발을 디디고 재빨리 움직일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바로 눈가를 찡그리며 몸을 감싸고 평범한 걸음으로 무작정 물러났다.
“그래. 습관대로 여기서 축지법을 썼다면 발목 아래가 전부 갈려 나갔을 거다.”
다시 여유를 되찾은 파스낙이 거만하게 말했다. 둘은 거리가 상당히 벌어졌다. 파스낙의 눈에 녹색 빛이 번쩍이자 장검에 물방울이 모여들었다. 그가 양손으로 칼을 쥐고 횡으로 크게 베는 자세를 취하자 타티아나는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그가 거칠게 기합을 외치며 칼을 휘두르자 궤적을 따라 5마이크론 두께의 투명한 칼날이 퍼져갔다. 다이아몬드도 찰흙처럼 잘라버릴 초고압의 수류(水流)가 공중제비를 돌고 있는 타티아나의 앞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녀가 허공에 착지하는 순간 등 뒤에서 굉음이 났다.
파편 세례 때문에 타티아나는 커다란 건물 근처까지 몰려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건물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파스낙이 오만상을 쓰면서 양손을 뻗었다가 끌어당기는 시늉을 하자 가로로 동강 난 건물의 윗부분이 땅 울리는 소리를 내며 타티아나를 향해 기울기 시작했다.
옆으로 달려서 피할 규모가 아닌 데다가 축지법도 쓸 수 없다. 그녀는 건물로 뛰어올랐다. 벽을 밟고 수직으로 달렸다. 건물의 기울기가 달라져서 타티아나는 바로 앞에 보이는 창문을 깨고 들어가 앞으로 계속 달렸다. 건물 내부는 천장과 바닥이 벽이 되고 벽이 바닥으로 변하고 있었다. 건물은 지진을 일으키며 뭉개졌다. 곧 새로운 옥상이 된 반대편 외벽이 깔끔하게 잘리더니 타티아나가 그곳을 뚫고 나왔다.
그녀는 이마에 맺힌 땀과 빗물을 소매로 닦고 상대를 째려보았다. 당장은 파스낙도 숨을 돌리는 듯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는데 여전히 지칠 기미가 안 보였다. 어째서?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슬슬 감춰둔 마지막 수단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게 통할만큼 녀석이 충분히 약해졌어야 할 텐데.
파스낙이 두둥실 떠올라 그녀하고 같은 눈높이에 섰다. 그리고 화살이 날아왔다. 파스낙은 반사적으로 화살을 붙잡았다가 촉에 묘하게 생긴 종이가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종이가 섬광을 일으키며 폭발하자 그의 눈앞이 표백됐다.
“아나 진짜!”
파스낙이 욕을 뱉으면서 방어막을 펼치고 수비자세를 취했다. 타티아나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장궁에 다른 화살을 걸고 있는 다크 엘프와 고깔모자를 쓴 여자아이를 보았다.
“재들은 또 누구래?”
그녀는 잠깐 상황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자리는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고 주문을 외쳤다. 지팡이 끝에서 하얀색 빛 덩어리가 튀어나오더니 먹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아자리가 샤카자이아에게 외쳤다.
“큰 거 한방으로 끝낼 거예요! 몰아붙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