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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화 〉[3권] 112회 - 전형적인 (112/188)



〈 112화 〉[3권] 112회 - 전형적인

화살을 쏜 샤카자이아는 다른 화살을 미리 여럿 쥐고 달려들었다. 마찬가지로 화살에는 종이쪽지가 묶여있었다. 시력이 돌아온 파스낙이 손을 이쪽으로 들어 올리려 하자 그녀는 잔상이 남을 정도로 재빠르게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잡아당겼다. 같은 순간에 화살과 벼락 줄기가 맞부딪혀 광장 한복판에 커다란 불똥이 천둥을 일으키며 튀었다.


난투가 다른 국면으로 들어가는 동안 라카키는 히콕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라카키가 눈을 부릅뜨고 쓰러진 캘러헬의 가슴 위에 올라와서 날개를 부르르 떨며 집중했다. 히콕이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캘러헬의 얼굴에 혈색이 점점 돌아왔다. 그가 흐리멍덩하게 눈을 뜨자 라카키가 외쳤다.


“왜 그런 거야! 이번에는 정말 죽을 뻔했잖아!”


빗소리가 굵다. 캘러헬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손으로 끝내야만 했어. 네가 내 곁에 없을 때 해야만 했어.”


히콕이 말했다.

“하필 스승님을 잘 아는 놈들을 상대로 무리해야 했습니까?”

“나 말고 누가 하겠느냐….”

다른 곳에서는 기절했던 피카니가 정신을 차렸다. 얼얼한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그가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피카니는 그날 맞았던 정수리가 욱신거리던 참이었다.


“그 망할 년 처음 봤을 때부터 관상이 마음에 안 들었어.”


총을 들고 망을 보고 있던 아비투스가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총알은 뽑아놨습니다.”


피카니는 대충 여며져 있던 옷깃을 다시 풀고 노획해서 입은 방탄복을 보았다. 살짝 패인 자국만 있다. 가장 약하다는 22구경 탄환도 장애물이 없다면 사람의  속으로 20cm까지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비단을 겹쳐서 만든 방탄조끼는 3mm의 두께로도 여덟 걸음 앞에서 리볼버로 쏜 총알을 시연 중에 모두 막아냈다고 한다.


그의 팔은 아까 탈골만 됐을 뿐 뼈는 괜찮았다. 꺾였던 팔꿈치는 이미 아비투스가 접골해둔 상태다. 일단 손도 움직여지기는 했으나 통증 때문에 총을 다루기는 무리였다. 피카니는 다시 모자를 쓰고 상대에게 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위님은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고. 카르델은 안 보이고. 그리고….”


갑자기 바로 머리 위에서 굵은 천둥이 울리자  남자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렸다. 석유를 뿌린 양털처럼 두툼한 구름 속에서 번개들이 치어 떼처럼 들끓었다. 아무리 날씨라는 게 변덕스럽게 바뀔  있다지만 저건 누구에게도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자리는 양손으로 지팡이를 집고 계속 중얼중얼했다.


“Надзьміце яго, полымя. Раскол яго, спусташэнне. Усё - ад пылу да пылу.”


샤카자이아는 때가 됐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화살집에서 끝이 갈라져 있는 금속 화살촉이 달리고 겉에 구리선이 감겨 있는 화살을 꺼냈다. 파스낙은 화살의 모양이 묘하게 익숙해 보였다. 이내 그것이 피뢰침이라는  깨달았다.

아자리가 외쳤다.

“지금!”

샤카자이아는 활과 화살을 들고 높은 곳으로 향했다. 파스낙이 저쪽을 향해 칼을 겨누는 순간 타티아나가 그를 향해 장전을 마친 권총을 들고 쏘았다. 그 사이 샤카자이아는 건물로 뛰어올라 손가락이 떨어질 정도로 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기고 하늘을 향해 놓았다. 의식을 앞둔 제사장이 차례를 치르듯이.

“리카인 막시움 악세파 익사티오.”


아자리의 목소리가 멎자마자 벼락이 화살을 향해 떨어졌다. 한순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앞이 표백되고 천둥이 고막을 흔들었다. 이제 벼락은 잔상만 남기고 사라져야 했으나 그것은 지금 유리구슬에 들어간 것처럼 공중에서 원형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파스낙은 그걸 피하려다가 체념하고 양손으로  칼을 들어 올려 상단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들 머리 위에서 떠다니고 있는 번개 구슬은 태양처럼 쉬지 않고 꿈틀거렸다. 주변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칠판에 그려진 분필 그림처럼 그곳에 존재만 했을 뿐.

빛의 물살이 파스낙에게 쏟아졌다. 다들 넋을 잃은 사이에 갑자기 발밑에서부터 울린 진동이 바람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깨닫는 게 고작이었다.

파스낙은 끝없이 밀려오는 빛의 물살과 계속 힘겨루기를 했다. 섬광 때문에 하얗게 변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 허리가 빠질 정도로 버텼다. 칼날에 갈라진 벼락은 사방으로 튀어나가 입자로 변해서 민들레 씨처럼 흩날렸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속에서 파스낙은 손아귀 속에서 칼손잡이에 균열이 가는 걸 느꼈다.


빛의 물살이 끊어졌다. 아자리의 손짓을 따라 피뢰침 화살이 그녀에게 왔다. 주변에 흩날리던 빛의 입자들도 그쪽으로 모여들었다. 진이 빠진 파스낙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자리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고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화살을 중심으로 다시 뭉쳐진 힘들이 한 조각의 하얀색 막대로 빚어졌다. 이쪽을 노려보는 상대를 향해 아자리가 읊조렸다.


“뽑아라.”

아자리는 지팡이를 지휘봉처럼 기울였다. 화살이 다른 여인의 손에서 다시 발사되자 파스낙도 칼을 휘둘렀다.  번째로 겪는지 모를 느려진 시간 속에서 화살은 칼날을 스쳐 지나가 목표에 꽂혔다.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파스낙은 한참을 뒤로 날아가 물웅덩이에 처박혔다.

아자리, 샤카자이아, 아비투스, 피카니, 타티아나. 모두 생각하는 법을 까먹은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다. 비의 추위조차 다시 느끼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아비투스하고 피카니가 모습을 드러내고 파스낙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타티아나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파스낙을 향해 증오 섞인 시선을 계속 보내다가 그녀는 권총을 들어 올렸다. 아자리가 서둘러 외쳤다.


“죽이면 안 돼! 물어볼 게 있어!”

피카니도 같은 생각이었다.


“녀석한테 캐내야 할  많아. 총 집어넣어.”

타티아나는 눈동자만 움직여서 듣는 시늉을 하고는 쏴버렸다. 총알이 어디에 박혔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는 공이와 방아쇠를 계속 움직였다. 총알이 바닥날 때까지 행동을 반복하고 나서야 권총은 총집으로 돌아갔다. 총성이 가라앉았고 피카니는 뒤늦게 충격에서 빠져나왔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타티아나는 자기 일행은 무시하고 아자리와 샤카자이아에게 관심을 돌렸다. 샤카자이아는 아직 시위에 화살을 걸어둔 채였다.


“유사레 카 페이와호. 다랴가 베잇챠?”


샤카자이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티아나가 다시 말했다.


“카레 왓차 네이 컨저바 오. 데르코?”

“헷갈리니까 공용어로 말해다오.”


타티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쪽은 마계 출신이 아니군?”

“보다시피.”


“뭐… 방금은 도와준 건 고마운데 누구냐고 물었던 거야.”

“넌 금발 머리의 동료인가.”
타티아나와 피카니는 인상을 구겼다. 아비투스가 다들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일단 사태부터 수습합시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피카니는 숨을 고르고 아자리를 향해 물었다.

“레스는 어디 있습니까?”


아자리는 대답하지 않고 굳은 표정만 지켰다. 타티아나는 피카니의 말투를 듣고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쪽은 이쪽과 같은 편이 아닌데 왜 피카니가 상대에게 높임말을 썼는지 이해가  갔다.

“잠깐… 저거.”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타티아나는 뭔가 깨닫고 피카니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고 그걸로 타티아나는 확신했다.

아자리는 분을 눌러 담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저 녀석한테서 나온 자료들을 저희에게도 보여줘요. 그리고 신변 보장도. 저희 일행은 그럴 자격이 있잖아요.”

아비투스는 피카니는 곤란해하는 얼굴이다. 서로의 생각이 어떤지 깨닫기에는 잠깐의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아자리가 한숨을 쉬자 입김이 하얗게 올랐다.

“딱히 기대는 안 했지만요.”

그녀가 지팡이를 고쳐 쥐려고 하자 아비투스는 바로 총을 버리고 필사적인 목소리로 청했다.


“부탁드립니다. 더 나은 방법이 많지 않습니까! 그저 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이 복잡하다는 거 충분히 아시지 않습니까. 무기를 내려주십시오.”


진심이 가득한 태도에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도 표정이 살짝 변하기는 했다. 아자리가 조금 누그러진 투로 대답했다.


“당신 좋은 사람이네요. 하지만 저희는 시간이 없어요.”

피카니가 말했다.


“하지만 전하…”


“거기까지 해. 질질 끌리잖아.”


타티아나가 도중에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아자리 일행 쪽으로 성큼 다가오고 자기 일행에게는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손목을 돌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궂은일은 내가 맡겠어. 보아하니 나하고도 관계없는 일은 아닌 거 같고.”


아자리가 침을 삼키고 바짝 긴장하는 순간 샤카자아이아가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타티아나는 무기들이 달린 벨트를 풀어서 내려놓고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샤카자이아도 자신의 장비들을 몸에서 풀고 앞으로 나섰다. 지금 상황에서 활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아자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언니.”


“방금 쓴 마법 때문에 남은 체력도 얼마 없잖아. 어차피 저쪽에서 제대로 싸울 사람도  고양이 하나뿐이다.”


타티아나는 품에서 금속 상자를 꺼내 피카니 쪽으로 던졌다. 그는 받으면서 놀랐다.


“뭐 하는 거야?”

“필요해지면 뚜껑을 열어. 용도는 알고 있겠지.”

아비투스가 말했다.

“소위. 당신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어.”

“걸리적거리니까 물러나.”

“경은 이걸 보고만 있을 겁니까?”

피카니는 눈앞이 깜깜했다.


“막아야  명분은 둘째 쳐도 우리가 저걸 막을 능력이 되나?”


두 남자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에 샤카자이아를 상대로 맨손으로 싸웠다가 처참하게 졌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두 여자는 자세를 잡고 마주 섰다. 타티아나는 손날을 세워서 앞에 두고 보폭을 원형으로 움직였다.


“고용됐나? 왜 황무지의 원주민이 마계의 귀족하고 같이 다니지?”

샤카자이아는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박차고 나간 그녀 주변으로 물보라가 일었다. 타티아나는 손바닥을 펼쳐서 상대의 주먹을 감싸고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상대의 균형이 틀어진 틈을 노려 전신의 힘으로 받아쳐 견뎠다. 주위 사람들은 샤카자이아의 주먹이 정면에서 잡힌 모습을 보고 턱이 빠질 정도로 경악했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칠 때 힘만 쓰는 게 아니라 근육의 이완과 탄성 그리고 무게 중심 조절이 핵심이다. 맨손 싸움은 물론 무기를 이용한 싸움에도 통용된다. 그리고 주먹질은 어깨와 허리를 축으로 움직이는 물리현상이기에 방향이 쉽게 틀어진다. 막대기를 양손으로 아무리 힘껏 잡아도 가벼운 충격에 쉽게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타티아나의 몸은 손끝부터 골반까지 전신이 완전히 연결되어 통제되고 있었다. 공격이 날아오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조금도 팔이 몸 안으로 무너지거나 어깨가 움츠러들지 않았다. 방금 그녀가 한 것은 중국무술에서 ‘화경’이라고 부르는 기술로 이 기법을 핵심으로 두는 유파가 태극권이다.

샤카자이아는 다른 손을 뻗어서 상대의 멱살을 붙잡으려다가 그쪽 팔도 붙잡혔다. 타티아나는 손끝에 단단히 힘을 넣었다.


아무리 힘을 짜내서 빠져나오려 해도 샤카자이아는 움직이지 못했다. 타티아나의 힘이 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몸이 작동되는 구조 때문이다. 평범한 여자의 악력만으로도 이두박근의 힘줄을 제압하면 팔을 움직이는 근육이 제구실을 못 하게 된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내 기대가 너무 컸나.”


“!!!”


샤카자이아는 격분해서 눈매를 조각칼처럼 치켜세웠다. 동요하는 틈을 노려서 타티아나는 샤카자이아의 발목을 자신의 발꿈치로 찍고 손을 풀면서 순식간에 다시 발목을 돌려찼다. 발끝을 허공으로 날리면서 뒤로 자빠진 샤카자이아를 향해 그녀가 다시 말했다.


“너에게는 형(形)이 없다. 품위가 없는 힘은 반주가 없는 춤사위일 뿐.”

“히야케(닥쳐)!”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다리를 휘두르면서 샤카자이아는 일어났다. 잔상만 남은 타티아나가 있던 자리로 주먹이 꽂히자 물보라가 폭탄 터진 것처럼 튀어 올랐다. 원래 있던 곳에서 지금 타티아나가 물러난 곳까지  박자 늦게 긴 발걸음이 일직선으로 나타났다.

피카니는 빗물이 눈에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보았다.


“맨몸으로 저 괴물을 상대하는  가능하다고?”
아자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 기다려요!”

타티아나가 내려다보는 눈으로 샤카자이아에게 물었다.

“동료가 저렇게 말하는데 그쪽 생각은?”

“나 아직 안 졌어 아자리!”

귀가 얼얼할 정도로 우렁찬 그녀의 함성에 아자리는 겁먹고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재차 말했다.


“싸움이 문제가 아니라 저것  보라고요! 시체에서 피가 안 나오잖아!”


다들 그 말을 듣고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확인사살을 당했던 리차트라의 시신은 지금쯤 주변에 피바다를 만들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아비투스는 일단 서둘러서 아까 내려놓은 자신의 산탄총을 들었고 주먹을 맞댔던 두 여자도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신들의 장비를 챙기러 물러났다.


붉은색 안광을 내뿜으면서 시신을 자세히 살펴본 아자리가 얼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꼭두각시야.”

나머지 사람들 모두 대체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아비투스가 말했다.

“뭐라고?”

“파스낙은 아직 살아있어요. 저건 원격으로 조종한 거예요.”


피카니가 말했다.

“여태껏 꼭두각시를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다들 설명을 기다리는 동안 아자리가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말했다.


“앞뒤가 맞기는 해. 파스낙이 여태껏 어떻게 싸웠죠? 당신들과 싸울 때부터 저희와 싸울 때까지 파스낙은 힘을 최대한 알뜰하게 썼어요. 그 녀석 실력이라면 방금 제가  것에 뒤처지지 않는 기술도 충분히 쓸 수 있는데.”

아비투스는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일류 마법사인데도 우리를 상대로 너무 봐주면서 싸운다는 느낌은 들긴 했어. 소위가 나타났을 때에서야  실력을 서서히 드러냈고.”


재정비를 마친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결론이 뭐지? 우리 모두 헛수고했다는 건가?”

“먼 곳에 있지는 않을 거예요. 자기가 직접 쓰는 마법 장비도 여기에 있는 데다가 체력 소모 문제는 실력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지금 어떻게든 추적을 해볼 테니….”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집중하던 아자리는 말 끝나기 무섭게 바로 표정이 풀어졌다. 고개를 돌리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해서 그녀가 외쳤다.


“어이.”

“들켰네.”


가까운 곳에서 파스낙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은 채였다. 사람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저쪽을 주시했다. 팔의 상태가 나쁜 피카니까지 총을 들었다. 아자리가 지팡이로 쓰러져 있는 꼭두각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체력은 배로 소모되는 데다가 직접 싸우는 것보다 효율도 떨어지는데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했지? 우리끼리 서로 싸울 때를 노릴 생각이었어?”

“그 바퀴벌레는 어디 갔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물론 피카니와 아비투스도 단어를 듣자마자 단박에 누구를 말하는 건지 감을 잡았고 타티아나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보아하니 진짜로 여기에 없는  같군.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봐.”

“다 끝났어 리차트라. 체크메이트라고!”


깊은 한숨 소리 끝에 파스낙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 모습은 여러모로 가관이었다. 파스낙은 팔에는 링거의 주삿바늘이 꽂혀서 푸른색 액체가 매달려있는 링거 운반대에 연결되어 있었다. 모자도 없이 여태껏 맨몸으로 비를 맞느라 머리카락은 해초처럼 얼굴에 달라붙었고 입술도 보랏빛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지난밤 샤카자이아에게 베인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꼭두각시가 나타났을 때와는 완전히 대칭되는 몰골이었다.  칠만큼 짙게  기미 속에 풀어진 눈동자에는 아무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의 삶을 포기한 사람이나 이미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아자리는 링거 운반대에 매달려있는 액체를 보고 경악했다.

“포션을 정맥에 직접 투여하다니!?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그는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뒤로 쭉 넘겼다.


“당뇨도 앓고 있는데  정도쯤이야.”

타티아나가 끼어들었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이제라도 생각을 바꾸고 죗값을 뉘우칠 계획이야?”

“글쎄. 아쉬운 거라고는 재밌는 구경을 놓친 거뿐인걸. 진정한 캣파이트를 볼 기회였는데.”

재밌는 농담 아니냐는 듯 그가 넉살 좋게 양손을 보였다. 침묵만 있었고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고 재차 확신했지. 넌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어.”

“누구도 자기 본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어.”

“장담하건대 넌 절대 자유로운 삶에 적응하지 못할 거야.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 영영 못 배우겠지. 얌전히 내 밑에서 시키는 거나 하면서 살았으면 됐을 것을.”


피카니가 말했다.


“소위는 죽음을 각오했을 때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타티아나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계속 듣고만 있던 샤카자이아는 참지 못하고 화살을 걸어둔 시위를 당기면서 외쳤다.


“항복하든가 다시 싸우든가  중에 하나만 해라!”


아자리도 모자를 고쳐잡고 그 기세에 거들었다.

“그래! 말이 많으면 전형적인 악역 밖에 안 된다고 친구 없는 놈아!”

파스낙은 한쪽 입가를 내리면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구차하게 변명하긴 뭐한데 나도 친구 있어. 마왕 밑에 있던 요원이 나 하나는 아니었거든. 사이는 별로지만. 사이가 나쁜 친구도 일단은 친구지.”


흥분이 가라앉은 아자리는 이제야 미심쩍은 낌새를 느꼈다. 그녀는 게슴츠레 노려봤다.

“뭘 기다리는 거야?”


“확실히 이대로 정직하게 너희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아무리 나라도 많이 힘들겠지.  말대로 체크메이트가 맞아. 그런데 체크메이트를 벗어나는 방법이 뭔지 알아?”


“그냥 말해.”

“판을 뒤집으면 돼.”


별 대단한 여운도 안 남았다. 샤카자이아는 그대로 다리를 향해 화살을 쏘아버렸다. 자기 발치에서 허공에 멈춰버린 화살을 손으로 들고 철학적인 논조로 그가 말했다.

“뭐가 모자라서 내가 계속 실점을 했는지 고민해봤는데. 내 결론은 절박함이야. 뒷일 가리지 않고 모든 판돈을 밀어 넣는 기개가 내게 모자랐던 거겠지.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발밑에서부터 진동이 울렸다. 사람들은 너무 미세해서 눈치채지 못했고 그다음 진동은 다른 일에 신경이 쏠려있는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 파스낙이 일부러 말을 끄는 동안 세 번째 진동이 선명하게 그들의 온몸으로 전해졌다.

“내 계산에 따르면 앞으로 45초. 아니 20초 안에 일어날 일은  죽여도 멈추지 못한다는 거지. 그러니 내가 비록 전형적인 악역이라도 계획을 읊다가 쓰러질 일은 없어.”


타티아나와 그 뒤에 있는 일행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영문을 모르는 아자리가 외쳤다.


“무슨 짓을  거야?!”

“네가 연쇄붕괴를 막지 않으면 여기 인구가 퍼센트 단위로 감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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