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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화 〉[3권] 113회 - 대단원 (113/188)



〈 113화 〉[3권] 113회 - 대단원



“아뇨, 딱히 고문 같은 거 안 했어요. 타협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그 남자가  머리에 손만 대고 나서는 상황이 끝나버렸죠.”

“손?”

계속 걸어가면서 들려준 단테의 말을 듣고 레스는 다시 물었다.

“당하는 순간 밀주에 젖은 대마초 연기를 빤 것처럼 정신이 날아가는데. 눈이 떠지니 고향에 있는 집이랑 가족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데요. 며칠을 꿈속에 갇힌 기분이었는데 실제로는 10분 지났었죠.”


터덜터덜 팔을 흔들면서 레스는 걸었다.


“아자리도 비슷한 거에 당하는 걸 봤어. 들은 말로는 당하는 동안 체감되는 시간이 실재하고 다르게 느껴진다더라고.”

“전 그런 사람은 쳐다만 봐도 몸이 굳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맞서는지 모르겠어요.”


둘은 침묵이 두려워서 계속 입을 놀렸다.


“샤키는 원채 기질이 용감하고. 아자리는 짊어진 게 많고. 나는 글쎄, 그냥 너희들이 좋아. 다 같이 좋은 결말을 봤으면 좋겠어.”


“좋은 결말이라.”

단테는 소총을 고쳐매고 추위에 몸을 한  떨었다.


“한참 뒤의 일을 미리 걱정하는  싫지만 우린 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요? 전쟁이 일찍 끝나든 나중에 끝나든 둘 다 평범한 세상 아닐까요? 무의미한 일을 한다는 불안은 안 드나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난 여러분하고 장사치로서 계약했어요.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지금은 그것만 생각합니다. 세상의 법칙이란 너무 모호해서 고민이 될 때는 자기가 만든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저만의 종교적 상징 같은 거죠.”

“맹세는 상징이 아니라 수단이야. 사람이 무엇이든 되는 수단. 그리고 중요한 건 수단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향하느냐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우리는 방향이 같아서 함께 하고 있어. 맹세를 지키는 한 의미 없는 일은 없을 거야.”


어색한 침묵이 한 차례 지나갔다. 말을 잃은 얼굴로 단테는 멍하니 상대를 바라만 보았다. 레스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창피해하는 말투로 말했다.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아직도 이럴 여유가 있는  참 좋네.”


“나야 언제나 여유가 넘치는….”

갑자기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 때문에 그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그들은 걸어가는 내내 저 앞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나 뭔가 터지는 소리 따위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나 이번 것은 느낌이 달라서 걸음이 멎었다. 주변에 놓인 쓰레기통과 유리창들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호두껍데기가 벗겨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이내 땅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소음과 함께 땅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서 있는 자리에서 물러난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말았다. 레스는 앞쪽으로, 뒤따라 가던 단테는 뒤쪽으로.  지반이 무너졌다.


“뭐?!”

몸이 움푹 가라앉는 감각이 들자마자 레스는 다시 몸을 앞으로 던졌다. 뇌수를 뒤흔드는 지진에 땅이 쪼개지고  위에 있던 건물들은 무너져갔다. 레스는 머리를 감싸고 쏟아지는 파편을 피했다. 뒤를 돌아보니 단테는 반쯤 기울어진 땅의 위로 달려가고 있었다. 긴 소나기 탓에 찰흙처럼 변한 땅은 순식간에 무너져 단테는 간신히 가장자리에 매달렸다.

“거기로 갈게! 조금만 더 버텨!”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아직도 천지가 흔들리고 있어서 눈앞이 깜깜했다. 땅이 지하에 나 있는 배수로를 따라서 무너졌는데 그곳이 하필 레스와 단테 사이였다. 그는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다가 발밑에 금이 가는  보고 반사적으로 다시 물러나고 말았다.

“아 제길! 단테!”

단테는 민첩하게 움직여서 위로 올라갔다. 싸움꾼이 아니어서 그렇지 단테도 잦은 야외생활로 운동신경은 제법 있는 편이었다. 어쨌든 레스는 겨우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테가 이쪽을 향해 외쳤다.

“거기 괜찮아요?!”
“그래!”

“먼저 가요!  다른 길을 찾아볼 테니!”


지금 일어난 지진은 절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었다. 무조건 서둘러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레스는 저쪽을 향해 손짓을 한번 보내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간다.”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파스낙은 자기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뽑고 링거대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쳤다. 그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땅에 균열이 일자 파스낙을 둘러쌌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점점 심해지는 진동이 그들의 시야를 흔들었다. 타티아나가 자기 뒤에 있는 남자들에게 외쳤다.


“당신들은 대위님을 챙겨! 어서!”


피카니가 대꾸했다.

“갑자기 왜 우리한테 명령이야?!”


“너흰 여기 있어 봐야 쓸모없어! 어서 빠져!”

아비투스는 입술을 꾹 닫고 피카니의 어깨를 잡아서 끌었다. 꼭두각시의 손에 쥐어있던 지팡이와 칼이 진짜 주인에게 스스로 움직여서 돌아왔다. 샤카자이아가 아자리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그게…”


머릿속이 새하얘진 아자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파스낙이 링거대의 부품을 분리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도망쳐도 상관없다. 나도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될지 예상이 안 되거든.”

파스낙은 자기 발밑이 무너지자 살짝 위로 날아올랐다. 타티아나가 이성을 잃은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정신 나간 거야?!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왜냐면 내가  받았으니까.”


“지금까지 쌓아 올린  어쩌고?”

“다른 데 가서 또 시작해야지.”

샤카자이아가 다시 아자리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겠어?”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아자리는 지팡이를 고쳐잡고 무릎을 굽혀 한 손을 땅에 대었다. 땅 위에 번져가는 균열이 메꿔지고 무너졌던 부분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진은 멈추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 벌이에 불과하다는  그녀는 바로 이해했다. 샤카자이아는 활을 내려두고 토마호크와 단도를 양손에 들었다.

“당장 땅이 무너져도 네가 당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한결같은 상대의 모습에 파스낙은 혀를 내둘렀다.


“그럼 이번 기회에  번 해볼까.”

타티아나가  말을 듣고 눈을 찡그렸다.

“뭘?”

“살면서 한 번쯤은 전형적인 대사를 해보고 싶었지.”

파스낙은 팔을 옆으로 들어서 방금 분리한 링거대의 철봉을 수직으로 들었다. 지팡이와 칼이 철봉으로 날아가더니 경쾌한 금속음을 내며 서로 맞물렸다. 철봉과 지팡이가 이어져서 사람 키만  높이로 이어졌고 칼은 손잡이가 수평으로 끼워져서 낫으로 변했다. 파스낙은 낫을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민첩하게 휘둘러 자루가 등에 닿도록 고쳐잡았다.

“내 진정한 힘을 보여주마.”


그의 온몸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눈에서는 반딧불 같은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끊이질 않는 지진 때문에 레스는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든 모험을 해야 했다. 뛰어넘기에는 너무 넓은 균열 때문에 갈 곳이 끊어지자 그는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있는 건물 옥상들을 통해서 어떻게든 나아갈  있어 보였다. 싸구려 목조 건물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수 있었으나 그는 피로와 흥분 덕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물에 젖은 터번이 무겁고 불편했다. 레스는 벗어서 주머니에 넣고 젖은 지붕을 조심히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갈 곳이 없어졌다.

“이러다 끝이 없겠어.”


망연한 마음으로 이제는 어쩔지 머리를 짜내고 있는데 지나온 방향으로부터 하늘에서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날아다니는 마법사. 윤곽을 보니  알아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레스는 자기 앞으로 내려앉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톤토는 얼굴에 칠해져 있던 분장을 깔끔하게 지우고 옷도 깔끔하게 정장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따로 지팡이는 들고 있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손짓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소식은 연락망을 통해 한참 전에 듣고 출발했다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늦었군.”


말투도 전에 만났을 때하곤 딴판으로 기인 같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 때문에요….”


바로 뒤에서 루나 센델자레가 걸터앉은 지팡이에 내려오면서 옷자락을 추슬렀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튀어 보였다. 레스는 그녀의 시들한 안색을 보고 반사적으로 괜찮냐고 물으려 했는데 톤토가 손바닥을 들어 올려서 그의 말문을 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파악이 되나? 이 지진이 왜 일어났는지?”

“몰라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지금 싱크홀이 진행 중이야. 당연히 리차트라가 범인이지. 지진으로 끝날  아니라 도시 구획이 통째로 무너질 거야. 연쇄작용이 도시 전체로 퍼질지도 몰라.”


“뭐?”


레스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했다. 루나가 이어서 설명을 보충했다.

“저희를 일일이 상대해주느니 도시째로 묻어버리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거 같아요.”


그 지나치게 간단한 발상에 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회오리치는 혼란을 한차례 견뎌내고 그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톤토가 대답했다.

“지금 싱크홀은  근방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차례대로 일어나고 있어. 원이 완벽하게 그려지는 순간 훅 법칙(hook law)에 따라 지반이 약해지고 먼로 효과(munroe effect)로 파괴력이 집중되지. 나하고 센델자레 양이 그렇게 되는 것만은 막아볼 생각이야.”

“파스낙을 쓰러트리면 막을 수 있을까요?”


“놈이 한 짓은 첫 번째 도미노를 건드린 것뿐이야. 이제 녀석과 싸움의 승패 자체는 의미가 없어. 자네의 의지는 높이 사겠지만 그냥 사람이 할 일은 이제 없네.”


레스는 그걸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돌아가란 말입니까.”


그가 억양 없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루나가 말했다.

“제 눈에 당신의 몸속이 보여요. 포션을 마셨군요. 이제 약효가 떨어지지 않았나요?”

반박하지 못하는 레스에게 그녀는 재차 말했다.


“나머지는 마법사의 몫이에요. 총잡이들은 충분히 싸웠어요.”


“파스낙은 어떻게 상대하려고요?”


톤토는 덤덤히 읊었다.

“그것도 우리 몫이지.”


“당신들은 학자잖아요. 싸움꾼이 아니라.”

“알무하리분 레이수 알와히다인 알아디힌 유콰티룬 피 사핫 알마에라카(전사만이 전장에서 싸우는 것은 아니다). 자네도 알지?”

레스는 눈을 부릅떴다.


“전 동의 안 합니다.”

“시간을 너무 썼군. 이제 가지.”


톤토가 등을 돌리자 루나는 기운 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레스는 입을 열었다. 왜 말이 나오질 않았는지 자신도 몰랐다. 톤토와 루나도 왜 자신들의 몸이 굳었는지 자신들도 이유를 몰랐다. 잠깐의 공백 뒤에 루나가 손을 들어 올리면서 빗방울을 손으로 받았다. 빗물들이 녹은 유리처럼 선명하게 형태를 보이며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뭐지?”


톤토는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어.”


살면서 갖은 일을 겪어본 레스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이 나갔다. 꿈보다도 현실감이 안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소리를 포함해서 모든 존재가 느려졌다. 소음들은 들어본 적 없는 메아리였고 바람이 흐르지 않는데도 바람이 느껴졌고 걸으면 헤엄치는 것 같았다.

“라카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루나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아직도 싸우고 있군요.”







파스낙은 낫을 어깨에 걸치면서 저 위로 별처럼 명멸하는 빛을 바라보았다.

“기어코 이 도시에서 제일 강한 존재가 나섰군. 죽일 수도 없고 죽이지도 못하는 고대 종족. 기껏 하는 거라고는 시간 벌기가 끝이라니.”

아자리는 쓰러졌다. 샤카자이아는 쓰러졌다. 타티아나는 쓰러졌다. 쓰러진 자들을 향해 팔을 벌리며 그가 말했다.


“난 주인공들을 함정에 넣어두고 안심할 정도로 전형적이지는 않아. 일어나!”


그가 거꾸로 쥔 낫으로 땅을 긁듯이 휘두르려 하자 샤카자이아는 아자리를 데리고 급히 굴렀다. 직후 둘이 있던 자리에 부채꼴로 날카로운 충격파가 날아와 땅에 상처를 내었다.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숨이 너무 차올라 기침이 났다.

타티아나도 체력의 한계에 부딪힌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엄연히 몇 시간 전에는 병상에 누워있던 몸이다. 아주 천천히 내려오는 빗물을 거슬러 몸을 일으키면서 타티아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권총하고 칼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였다.


파스낙의 눈에서는 전구의 필라멘트 같은 녹색 안광이 뿜어져 나왔고 몸 주변에는 방전이 일어나는 전지처럼 이따금 불꽃이 반짝였다. 그는 진작 고장 나야 할 기계장치의 폭주를 연상시켰다.

“대체 어떻게?”


타티아나도 자기가 무엇을 기대하고 꺼낸 질문인지 몰랐다. 파스낙은 신경질적으로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팔을 늘어트렸다.


“넌 내가 이러는 거 본 적 없었지. 나도 오랜만이라 죽을 맛이야.”

“지금까지 힘을 아끼면서 싸웠다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난 항상 진심으로 싸웠다. 너희들처럼 뒷일 생각하지 않고 달려들 이유가 없었을 뿐이지. 하지만 보다시피 이제 걱정할 뒷일은 없다고. 다 끝났어.”

그는 온몸을 떨면서 괴이쩍은 기합을 지르다가 낫을 양손으로 쥐고 번쩍 뛰어올랐다. 땅에 낫이 꽂히자 그곳을 중심으로 면도날 같은 서릿발이 프랙털 형상을 이루며 폭발적으로 뻗어 나갔다. 급격한 온도 변화로 공기 중의 수분들이 얼어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불었다. 타티아나는 반사적으로 뛰어서 피하려다가 뒤늦게 폭발한 얼음 파편에 맞고 땅을 굴렀다. 그녀를 쫓아서 리차트라는 계속 낫질을 했다. 공격마다 바람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 도시는 이제 질렸어! 충성을 모르는 부하들한테도 질렸어! 너는 물론이고 곰팡이처럼 죽질 않는 저놈의 패거리들한테도 질렸어! 살려서 이용할 계획이고 뭐고 더는 필요 없다고!”

“말이 너무 많아!”

토마호크와 단도를 들고 기습해온 샤카자이아 덕분에 타티아나는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파스낙과 샤카자이아는 합을 주고받다가 서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맹수처럼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샤카자이아가 낫자루에 걸어둔 토마호크를 잡아당겼다. 파스낙은 일부러 무기에서 손을 놓았다. 샤카자이아가 반동으로 휘청이자 그는 양손을 부딪쳐 손뼉을 쳤다. 머리에 송곳을 쑤시는 것 같은 증폭된 손뼉 소리를 듣고 샤카자이아는 귀를 틀어막다가 이내 그가 쏜 충격파에 맞아서 날아갔다. 이어서 타티아나도 그의 손끝에서 나타난 가느다란 벼락에 맞고 맥없이 쓰러졌다. 그녀는 거기에 반응할 기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파스낙이 손을 뻗자 무기가 그에게 저절로 날아왔다. 힘겹게 권총을 꺼내서 자신을 향해 겨누는 아자리에게 그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레스 알 하자르는 뭐 하고 있어? 솔직히 처음부터 폭탄을 터트리지 않고 굳이 뜸을 들인 건 그 자식 때문이었거든. 여기 있는 놈들은 예상대로 한 번씩 날 기습하러 왔는데 그놈은 나타나질 않네.”


아자리의 권총에서는 메마른 소리만 울렸다. 불발탄이었다. 파스낙이 자기 질문에 대답하듯이 다시 말했다.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다고? 진짜? 정말로 그냥 인간이었어? 뭐. 이제는 너희하고 너무 많이 싸워서 그놈 얼굴도 기억이  나는군.”

아자리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당신 그렇게 사람 얕잡아보는 버릇 안 고치면 비참한 최후를 못 피할걸.”

“네네. 그런데 나는 언젠가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너희는 이제  그렇게  거거든. 내가 당장 심장마비로 죽는다고 해도 저 위에 불빛이 꺼지면 너희는- 죽어! 지하로 추락해서!”

아자리는 총을 내려놓고 다시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눈은 달궈진 석탄처럼 타오르고 온몸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파스낙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게 뭔지는 알고 하는 거냐?”


마지막 기회. 주변의 차가운 습기를 날려버리는 화염이 그녀의 손끝과 지팡이로부터 태어나 몸을 부풀렸다.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불은 어둑한 날씨 속에서 순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온기가 파스낙의 얼굴에도 느껴졌다.


그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도발했다. 일격이니까 각오가 선다. 몽롱해진 정신 속에서 그렇게 읊조리며 화염의 창을 던졌다. 파스낙은 낫을 양손으로 풍차처럼 돌렸다. 화염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가 칼날 쪽으로 모여들었다. 타오르는 낫을 횃불처럼 높게 들어 올리며 파스낙이 말했다.

“방금 네가  건 공식적으로 ‘한계 해제’라고 부르는 거다. 생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아끼는 버릇이 있지. 일종의 안전장치야. 나조차도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마음대로는  해. 본능을 극복한다는 건 죽음을 대면하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지팡이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핵심은 본능을 극복하고 나서 풀려난 잠재력을 얼마나 다룰 수 있느냐인데. 교양 과목으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정도 기량으로는 어림도 없어. 결정적인 차이가 뭔지 알아?”


낫에 깃들은 화염이 고스란히 그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파스낙이 손을 번쩍 올렸다.

“넌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잖아!”

그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들려온 휘파람이 모든 마음을 뚫었다.




그는 목에 걸려있는 꿈 덫을 손에 들어서 바라보다가 말했다.

“길을 만들어주세요. 그럼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무모한 짓이야.”

톤토는 고개를 저었다. 레스는 단호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눈을 감고 톤토는 말했다.

“미안하네.”

“왜요? 전 이길 겁니다.”


루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길  없는 싸움이에요.”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흐르면 피해를 막을 기회도 사라집니다. 한시라도 빨리 각자 가장 잘하는 일을 해야만 해요.”

“그게 바다위윤의 신념인가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게?”


“맹세를 지키는 거죠. 다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있었다. 그가 입술에 손가락을 끼우고 불었던 휘파람이 아직도 메아리를 쳤다. 쓰러져 있던 타티아나도 그 소리를 듣고 의식을 차렸다. 타티아나가 레스를 보고는 눈을 찡그렸다.

“사쿠라비?”

파스낙은 코웃음을 한번치고 아자리에게 돌려주려고 했던 화염 덩어리를 그에게 보냈다. 빛살처럼 날아간 불의 창은 레스를 스쳐 지나갔다. 뒤쪽에 있는 건물에 불이 붙어서 아주 천천히 타올랐다. 불빛을 등지고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그는 다가왔다. 파스낙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이것 보게.”


파스낙이 빗맞힌 게 아니라 그가 몸을 틀어서 피한 거였다. 방금 그게 운으로 일어난 건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었던 건지 생각하는 사이에도 상대는 계속 걸어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파스낙은 제대로 자세를 다잡고 레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스.”


아자리가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 신음했다.

천천히 타오르는 화염과 서서히 떨어지는 빗물 속에 둘이 있었다. 진이 빠진 여자들은 이러한 거짓말 같은 현실 속에서 어떤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저절로 알았다. 그런데 태양은 언제 떠오르는 걸까. 새벽부터 일어난 파괴와 혼란은 집요할 정도로 흔적을 많이 남겼다. 근방에 살아있는 거라고는 전혀 없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물에 젖은 폰초 망토는 철갑처럼 두껍고 무거웠다. 레스는 지쳐있었다. 수중 아닌 수중 속에서 진행되는 걸음이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파스낙은 기다렸고 이제 그는 그곳에 있었다. 익숙한 거리감. 이유가 무엇인지 파스낙은 굳이 알아내려고 고민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로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냐며 경의를 표했을 텐데. 네가 그러니까 아무 느낌도 안 드는군.”


“나만 아픈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느 면으로는 내가 제일 심각하지. 난 이겨도 이긴 게 아니야.”


“원래 악당으로 산다고 사는 게 쉬워지진 않아.”

파스낙은 하마터면 웃을 뻔해서 어깨를 조금 들썩였다. 바로 정색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투를 바꿨다.

“이번에는 또 무슨 기가 막히는 재치를 부릴 생각이지? 특별한 총알이라도 가져왔나?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에 내 뒤통수를 칠 새로운 친구라도 사귀었나? 이제는 하도 많이 당해서 자제했으면 싶은데.”

“그냥 궁금증만 하나 해결할 거야.”

지금 순간을 음미하듯 시간을 들여서 뜸을 들이고 파스낙이 대꾸했다.


“좋아. 내가 양보해주지. 말해봐.”

“네가 말하길 총잡이가 마법사를 만나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었지.”


“뭐?”

레스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망토 자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오른손을 힘껏 쥐었다가 폈다. 오른발을 뒤로 옮기고 몸을 옆으로 돌린 다음 왼손은 허리 높이로 들어 올렸다. 마치 방패를  보병을 연상시키는 자세다. 파스낙은 지금 레스와 벌어져 있는 거리감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까닭을 알았다.

“사실인지 알아보자고.”

지켜보고 있던 타티아나는 어처구니를 잃었다. 파스낙은 자기가 지금 긴장을 한 건지 긴장이 풀린 건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마음을 읽어도 이미 레스의 정신은 무아지경에 빠져서 사막을 연상시키는 광경만 보였다.


“어째 분위기가 그렇게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는데. 진짜로?”

대답은 없다.


“오른손도 제대로 안 움직이잖아. 기다리기만 하면 공기도  죽일 수 있을 거 같은데.”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오직 호흡뿐이다.


“이제는  죽여야 할지 사랑해야 할지 헷갈리는군.”


따지고 보면 서로 죽여야만 하는 관계보다 더 강력한 연결고리가 어디 있을까. 어쨌든 파스낙은 먼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정직하게 누가 더 빠른지 승부를 겨루는 방법과 가만히 제풀에 지쳐서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방법 사이에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는 손가락으로 숫자만 셀 수 있어도 알  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은 자존심이 조금 상한다는  정도다.

‘방심하지 않았어. 나에게 약점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짧은 순간, 생각하는 시간. 그의 마음속에서 잡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총구에서 나온 불빛으로 세상의 음영이 뒤집혔다. 아주 굵게 총소리가  번 울렸다. 그가 온몸에 두른 방어막이 뚫리는 순간과 뚫리는 소리도 한 번이었고 쓰러지는 순간도 한 번이었다. 그리고 모두 같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아주 간단한 연쇄작용.

총을 들고 있는 레스의 오른손이 경련을 일으키다가 툭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끝으로 권총의 방아쇠울이 걸려서 아슬하게 대롱거리다가 물웅덩이로 떨어져 첨벙거렸다. 달궈진 총에서 증기로 만들어진 꽃이 피었다.

총구 화염치고는 너무 빛이 밝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파스낙은 자기 옆구리에 손가락이 3개는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났다는 걸 우연히 깨달았다. 방탄 외투도 뒤쪽까지 깔끔하게 뚫려있다. 아자리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니 있었고 타티아나는 경악했다.

“이거 피인가? 뭔가 이상한 이물질도 섞여 있군.”

자기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액체를 손끝으로 만져보고는 그가 피식거렸다. 레스는 힘겹게 왼손으로 뒤로 넘긴 망토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파스낙에게 다가갔다.


“총알이 너의 소장을 뚫었다. 출혈만 막는 응급처치로는 살 수 없어. 패혈증은 필연이지.”

“거참 재밌네.”

그의 머릿속에서 루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선택지는 두 개다. 남은 힘을 모아서 네 몸을 완전히 고치거나. 아니면 날 죽이거나. 우리 둘 다 살거나 같이 죽는 거다. 나는 종종 운명이라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던데 적어도 이 운명은 네가 직접 고를  있는 운명이 확실하다.”

총알에 맞은 곳이 아프기는 한데 일단 바닥에 누워있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파스낙은 정신이 나간 사람 특유의 힘없는 실소를 한참 흘렸다.


“너. 넌 진짜 죽는  무섭지가 않군? 두려움을 못 느끼는 건가? 책임감 때문인가?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들지?”


오른손의 경련이 멈추질 않는다. 그걸 억누르듯 다른 손으로 움켜쥐면서 레스는 말했다.

“나한테 그러한 종류의 용기는 없어. 죽는 것보다 무서운  많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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