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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3권] 114회 - 커튼콜 (114/188)



〈 114화 〉[3권] 114회 - 커튼콜

“두려움이 비결이라? 심오하군.”

파스낙이 기침을 터트리자 묽은 피가 입가를 타고 귀밑으로 흘렀다. 그리고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긴 싸움의 종지부가 찍히고 승자에게 남은 건 고통이었다. 해방된  쓰러진 사람뿐. 레스가 잔뜩 쉰 목소리로 재촉했다.

“기다리고 있다.”

“뭘?”


“아까 말했잖아.”

“집어치워. 나한테는 어느 쪽이든 똑같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의식이 혼탁했던 레스는 뒤늦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상대가 딱히 몰래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기로 번뜩이는 눈을 보자마자 바로 의도를 눈치챘다. 안광이 마치 주조소에서 방금 나온 금화 같았다. 그가 말했다.

“그만둬. 이미 끝난 싸움이야.”

“비켜.”


타티아나는 허리를 굽혀 방금 레스가 떨어트린 권총을 주웠다. 그걸로 위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타티아나는 이상한 점을 느끼고 멈칫거렸다. 총이 가볍다. 약실을 열어보니 총알은 없고 탄피만 있었다. 탄피들은 아직 따듯했다. 게다가 총도 망가져서 부품들끼리 제대로 맞물리질 않았다. 영문을 몰라서 혼란에 빠진 그녀는 플레멘 반응이 일어난 고양이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스낙이 몸을 질질 끌어서 근처의 경사진 돌무더기에 몸을 누이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소냐를 챙겨줘. 널 걱정하더라고….”


그녀가 놀랐다. 복수의 불길에 찬물이 끼얹긴 모양이니 레스는 한숨 돌리고 친구들을 찾았다. 아자리는 샤카자이아를 흔들어서 깨우는 중이었다. 그가 친구들에게 돌아갔을 때 아자리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고깔모자의 물을 쥐어짜고 품에 넣었다. 그리고 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 싸울 때마다 지네요. 가관이죠?”


“너희들이 나 대신 져준 거야. 늦어서 미안해.”


풀이 죽은 아자리를 녹여주듯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아자리와 함께 샤카자이아를 일으켜주었다. 어지간히도 탈진해 있었는지 화살촉처럼 예리했던 눈매가 지금은  맞은 잎사귀 같았다. 그녀의 너덜거리는 가죽 재킷을 보고 레스는 상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바로 상상이 갔다. 샤카자이아는 레스를 보자마자 냅다 그에게 뛰어들어 껴안았다. 처음에는 진정시키려다가 결국 레스도 억눌렀던 마음이 밀려 나왔다. 일행은 결국에 다 같이 부둥켜안고 자신들의 온기를 되찾았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떠오르려던 레스를 위해 친구들은 깜빡하고 그의 다친 팔을 쓸어내렸다.


“우푸웁!”

“미 미미미 미안해!”


샤카자이아는 손끝을 입가에 모으면서 화들짝 떨어졌다. 감상에 젖을 시간은 충분했던  같으니 아자리는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상황을 정리했다.

“혹시 단테는 만났나요?”


“그는 괜찮아. 사정이 생겨서 도중에 갈라졌어.”

아자리가 그의 손을 보고는 앙칼지게 외쳤다.


“세상에 퉁퉁 부은 거 봐.  이렇게 무모한 짓만 골라서 해요?!”

할 말이 없는지라 레스는 떫은 표정만 지었다.  사이 샤카자이아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일행에게 일렀다.

“저건 어떻게 하지?”


파스낙은 눈을 감고 누워만 있었다. 가슴은 위아래로 바삐 움직이고 하얀 입김은 거의 투명했다. 악인에게 걸맞지 않은 평온이었다. 타티아나는 숯이 된 묘목처럼 곁에 우두커니 서서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행은 쉬이 건드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자리가 작게 말했다.


“한때 같이했다가 사연이 있어서 갈라졌나 봐요. 당신이랑 피카니처럼요.”


“난 이제부터 무조건 고양이 말고 개를 고를 거야.”


샤카자이아가 부루퉁한 투로 앳된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일어났다. 신음을 흘리며 아픈 곳을 주무르고는 말했다.

“대화 좀 해야겠어.”


“어느 쪽이랑?”


샤카자이아가 말을 받았다.

“양쪽 다.”


“말이 통할 거 같지는 않은데.”


“시도는 해야지.”

시간의 흐름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정지했던 빗방울들이 이제는 눈송이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위를 바라보니 회색 하늘 한복판에 떠 있는 별빛은 꺼져가는 촛불을 연상시켰다. 고개를 다시 내리자 레스는 타티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먼저 말했다.

“당신하고 싸울 생각 없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다가 예고 없이 뱉었다.

“어떻게  거지?”


“뭘?”


타티아나가 아까 레스가 썼던 권총의 방아쇠울에 검지를 걸고 자기 앞에 흔들었다. 그냥 망가진 평범한 권총이었다. 그가 평소에 쓰던 권총은 손잡이가 부서져서 단테가 맡고 있었다.

“총성은  번이었어. 총알도 그냥 총알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못 알아볼 수가 없지. 대체 너 정체가 뭐야?”


“시간 없으니까 나중에.”

사실은 당장 여기서 떠나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타티아나가 날숨을 길게 쉬고 권총을 대충 저쪽으로 던졌다.

“마무리하고 싶다면 양보하지. 저놈을 이긴  너니까. 정보를 캘 거라면 헛수고다.”


“다 쓰고 돌려줄게.”

레스는 분위기를 거스르고 일부러 농을 쳤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아니꼬워하는 눈짓을 하다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획 돌렸다.

“좋을 대로 하던지.”

타티아나가 발끝으로 몸을 돌리고 저벅저벅 소리가 나게 자리를 떠났다. 동작이 어찌나 절도가 넘쳤는지 레스는 그림 액자가 움직인  알았다. 그녀는 무심히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레스의 친구들 근처로 발이 멎었다.


“크르르르르.”


샤카자이아가 이쪽을 향해서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치 보여서 슬금슬금 옆으로 갔다가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온 다음 삼베옷의 소맷자락에 손을 집어넣고 팔짱을 하면서 저쪽을 구경하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레스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상대에게 가까이 붙었다.

“왜 치료를  하지? 저 아가씨는  포기했어. 증오를 내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중에 끼어들지는 않을 거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죽어.”


파스낙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주변이 온통 붉었다. 호흡이 탁해져서 많이 걸걸해진 목소리로 그가 느릿하게 답했다.

“어제부터 내가 몇 번이나 몸을 고쳤다고 생각해? 마법이 몇 번이나 내 몸을 들락거렸을 거 같아? 편법에는 대가가 따르지. 네 오른손도 이제 마법으로는 못 고치는 것처럼.”


그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너희는 정말로 끈질겼지. 뭐, 이걸로  불살의 맹세도 끝이군. 다음에는 그보단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

그는 목으로 웃어서 상대를 조롱했다.


“죽느냐 사느냐가 걸렸는데 웃음이 나와?”


“그렇게 검은 모자는 쓰러지고 하얀 모자는 지평선으로 사라집니다…  가라 총잡이.”


망연해진 레스는 얼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타티아나는 표정 없이 낮게 코웃음을 쳤고 아자리는 그를 향해 위로를 보냈다.

“괜찮아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아무도 뭐라고 안 해요.”


고민할 시간이 없었기에 레스는 바로 결심을 굳히고 품에서 터번을 꺼냈다. 파스낙은 레스가 자신의 허리에 천을 감는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레스는 매듭을 감으려다가 오른손이 말을 듣질 않아 입으로 물어서 지혈대를 조였다. 그가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으아아아압!”


레스는 기합을 지르며 상대를 한 손으로 붙잡고 둘러업었다. 다들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는 와중에 샤카자이아가 반사적으로 나서려다가 타티아나가 팔을 뻗어 그걸 가로막았다.

“내버려 둬. 어디까지 저러나 한번 봐야겠어.”

“이 자식이!”

샤카자이아가 홧김에 손을 휘두르려다 상황을 파악하고 멈췄다. 샤카자이아가 보기에도 레스의 행동은 이해가  됐다. 와중에 레스는 부지런히 걸었다. 당연히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비척거렸다. 업혀있는 파스낙이 물었다.

“손 더럽히는 게 그 정도로 싫으냐? 맹세가 그렇게 중요해?”

“맹세는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네가 죽으면 같이 싸운 내 친구들도 살인자가 된다고!”


그의 친구들은 물론 여태껏 그를 향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타티아나까지  말을 듣고 얼이 나갔다. 이제 레스는 열 번째 걸음을 디뎠다.


“직접 말하기도 뭐한데 나도 내가 죽어 마땅한 걸 안다만.”

“죄는 생명으로 갚는 거다! 죽음에는 가치가 없어!”


파스낙은 이제 참을  없었다. 그는 시원하게 웃었다. 쥐어짜던 힘이 바닥난 레스와 함께 땅을 구르면서도 폭소를 멈추지 않았다.


“와 하하하하하! 오랫동안 참 많이도 죽였고 죽을 뻔했지. 그중에 너하고 조금이라도 닮았던 놈은 하나도 없었어! 미친놈은 널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하하하! 콜록.”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레스에게 다가갔다. 홀몸인 파스낙은 그걸 보며 새삼스레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제대로 얘기를 나누자고. 네가 제안을 받는다면 말이지.”

레스가 친구들의 부축을 받고 다시 일어났다.


“제안?”

“지금 이곳은 오붓하게 말을 나눌 곳이 못 돼. 내 마지막 초대장이다. 가까이 와봐.”


말하면서 그는 자기 이마를 손끝으로 두드리고는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자리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심층 세계로 들어가는 게 위험하다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레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샤카자이아는 그를 걱정했다. 하지만 무엇이 근본적으로 모두를 위한 길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다녀와. 널 믿어.”


한편 타티아나는 먼저 저쪽으로 가서 상대를 도발하고 있었다.

“나하고 대화해 리차트라. 하고 싶었던 말이라면 나도 많아.”


그는 히죽거리기만 했다. 뒤에 다가온 레스가 타티아나의 어깨를 옆으로 밀고는 파스낙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걸 자신의 머리로 옮기는 걸 보고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이 바보가! 그만둬!”

레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다른 꿈들이 그렇듯 그는 자연스럽게 모든 현상을 받아들였다. 햇살은 손길처럼 은은했고 서늘한 바람은 꽃향기를 실어날랐다. 나무에는 가지마다 꽃들이 아우러져 있는데 레스는 꽃에 대해선  몰랐어도 계절이 봄이라는 건 알았다. 아주 아름다운 분홍색이었다. 그는 와본 적 없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천의 산책로에 있었고 파스낙은 저 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목조 다리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따듯한 날씨에 어울리는 소매가 짧은 상의와 움직이기 편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레스가 그에게 다가가자 파스낙이 근처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보여?”

“알록달록해서 보기 좋군. 저런 건 처음 봐.”

파스낙은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물고기 밥을 손에 들고 넓게 뿌렸다. 수면에 건식 사료들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 뒤에 물고기들이 펄떡거려서 물이 두 남자한테까지 튀었다.

“코이라는 품종이야. 야생에 방류하면 길이가 1m를 넘기고 어항 속에서 태어나면 공간이 허용된 만큼만 커지지.”

“먹어본  있어?”

“아. 다양하게 요리할  있어. 맛은 괜찮은데 관상용 품종이라서 먹으려고 키우는 사람은 드물어. 사실 저 알록달록한 색도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이 주는 먹이 때문에 생긴 거야. 사람의 손길을 떠나면 순식간에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돌아가지.”

“우리한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돼?”


“필요한 만큼 충분히.”

상대가 물고기 밥을 내밀자 레스는 일단 받아서 들었다.

“오래전부터 시간이 남으면 이곳을 즐겨 찾았지. 그런데 매번 이것들하고 만날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들더라고. 난 저 물고기들이 물살을 따라서 헤엄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다들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만 물살을 거스르고 있더라고. 난 이것들이 먹이를 받아먹는 거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리라 추측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레스는 파스낙과 물고기 밥을 번갈아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물고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 굳이 의견을 말하자면 그냥 여기가 태어난 곳이라서 사는 걸 수도 있지. 고향이니까.”

그는 물고기 밥을  조각 입에 넣고 씹다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뱉지는 않았다. 파스낙은 팔꿈치를 난간에 대고 옆으로 기댔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어느 쪽이든 역설적이야. 이 물고기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물살을 거스를 거야. 자연의 섭리에 저항하는 셈이지. 그리고 사람의 손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테지. 물고기니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른 곳으로 헤엄쳐서 떠날 수도 있는데. 말해봐 유목민.  물고기들은 생존을 위해 섭리를 극복한 걸까. 아니면 사육된 걸까?”


“그건 답이 안 나오는 문제잖아.”

“그래서 역설이지. 그런데 타티아나한테 같은 질문을 해봤는데 ‘맛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라고 하더군. 정확한 진실이지. 잡아먹는 쪽에서 먹히는 것들의 입장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 물고기들이 갑자기 진화해서 우리보다 우월한 힘을 갖추지만 않는다면야.”


반박할 말이 없지는 않았으나 말하는 의도를 알기에 레스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게 침략자들의 마음이야. 구성을 이루는 개인이 아무리 선해도 모이면 결국 괴물이 되지. 생각을 해보라고. 지난 100년 동안 문명 세계는 전례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 자동화된 생산, 기관총, 질소 비료, 무선 통신, 거의 정확해진 세계 지도, 분명 10년 안에는 남극점과 북극점도 정복되겠지. 그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거 같아?”


물고기 밥을 뿌리면서 레스는 대답했다.

“글쎄, 난 학교를 가본 적이 없어서 무식하거든….”


“잔인함이야. 물론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잔인했지만 과거에는 능력이 욕망을 따라가지 못했어.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국가들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잔인해져도 되는 세상을 만들었고  결과가 지금이지. 정말 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나?”


“글쎄.”


레스는 물고기 밥을 손에서 털어내고 등을 난간에 기대었다.


“대답을 피하는군. 네 일당이 여행하는 이유를 말해봐. 이건 대답하기 쉬울 거야.”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면서 말했다.

“전쟁이 계속되지 않도록 아자리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것. 아자리하고 샤키는 그 와중에 자기 가족의 행방을 찾는 중이고. 될 수 있으면 샤키의 부족이 이주할 곳도 알아봐야지.”

“그건 네 친구의 목적이지. 네 목적은 뭔데?”


손가락이 멈췄다. 파스낙이 집요하게 되물었다.

“레스 알 하자르는 어쩌다 고향으로부터 여기까지 왔고 어디로 향하는 거지? 심문하는 게 아니라 정말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그래.”

레스는 한쪽 뺨을 깨물면서 날숨을 길게 내었다.


“내 사연은 어제 영화관에서 충분히 말하지 않았던가.”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했고, 전쟁을 끝내서 고립된 부족을 구한다. 그랬었지. 하지만 왜? 넌 그냥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얼버무렸어. 하지만 네 입으로 말했다시피 맹세는 어디까지나 수단이야.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맹세인지는 말한 적 없어.”

그는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좋아.”

미간을 꼬집고 레스는 눈을 질끈 감다가 부릅떴다.

“솔직해지겠어.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할게. 추방된 뒤로 마음속에 영원히 묻어두려고 했는데 여기는 현실 세계가 아니니까 예외로 해도 되겠지.”

파스낙이 엄지를  올리면서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내가 원하는  아주 많아. 그중에서도 가장 욕망하는 걸 고르자면 추방당해야만 했던 나의 죄를 사면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다 말하면 지나치게 길어지니까 술탄이 나한테 화가 단단히 났다고만 알아둬.”

상대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사쿠라비의 왕이…. 너한테? 지금 마계, 인간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중립국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을 다 적으로 두고 있다는 거냐? 취미야?”


“사실상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확률은 없어. 유일한 방법은 술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만한 업적을 이루어 명예를 회복하는 거였지. 추방당하고 방랑자가 된 나는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했고 그 해답을 전쟁에서 찾았어. 용사가 되는  좋은 생각으로 느껴지더군.”

파스낙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리고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사기꾼한테 노잣돈을 다 털리고 말았지. 눈치가 있다면 이쯤에서 누가 등장할지 짐작이 갈 거야.”

“흠.”

“생각해보니 피카니하고 겪었던 우여곡절은 생략해도 되겠군. 결과가 어떤지는 너도 이미 아니까. 만약 용사가 되지 못한다면 차선책을 보안관으로 정했어. 총잡이로 살고 싶었고 명예로운 삶도 원했으니까. 그럼 고향의 아름다운 사막을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었을 거야. 내 스승 또한 보안관이었으니 전부터 동경하고 있었거든.”

“잠깐만.”

파스낙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고 흐름을 끊었다.

“넌 일생 대부분을 부족에서 보냈잖아. 그런데 스승이 보안관이라고? 유목민한테 무슨 보안관이 있어?”

“없지. 스승님이 우리 부족에 귀의하고서는 자기 마음대로 자청한 거야.”

“이야기가 딴 길로 세는  알지만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그 양반은 예니체리였어. 술탄의 친위대이자 사쿠라비의 최정예 전사. 족장은 스승님을 상대해주기 귀찮아서 그냥 보안관으로 임명해줬고 실제로도 자기 몫은 잘 했지. 어느 부모 없는 놈을 죽도록 부려 먹었으니까. 하던 얘기로 넘어가도 될까?”


“그래.”


잠깐 여유를 갖고 레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뭐 보안관이 되겠다는 꿈도 이젠 글러 먹었군.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은 그래.”


“훨씬 더 쉬운 삶을 고르고 싶지는 않았나?”

“그게 뭔데?”


“자신을 위한  말이야. 네가 목표로 했던 용사와 보안관 모두 헌신하는 삶이잖아. 실력은 있으니까 하다못해 현상금 사냥꾼이라도 됐으면 좋았을 거 아냐. 그냥 마음이 고결해서 그렇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돼. 네가 지금 여행을 하는 동기 중 하나는 피카니한테 배신 받은 걸 앙갚음 하겠다는 거였는데 실제로는 사실상 용서해준 거나 마찬가지고. 그건 고결한 게 아니야. 머리가 이상한 거지.”

“맹세가 우선이야. 아직 피카니한테 바달을 맹세할 만큼 크게 화는  났어.”


“또 시작이군. 그놈의 맹세.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그 대답을 위해 레스는 마침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기억을 들추고 말았다. 아무리 힘든 싸움을 겪더라도 보인  없었던 슬픔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이 땅, 아니면 저 땅 어딘가에 마녀가 하나 있다. 그녀가 부탁했어.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어딘가에 총잡이도 살아 있지. 그가 내게 가르쳤어. 포기하면 끝이라고. 언젠가 나는 마녀와 총잡이를 다시 만나겠지. 어쩌면 빨리. 어쩌면 나중에. 어쩌면 살아서. 어쩌면 죽어서. 다시 만나면 그들은 어땠느냐고 물을 거고. 하지만… 나는 포기하고 싶어. 자주.”

“마녀와 총잡이.”

파스낙은 그 단어들의 나열이 주문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견디려고 농담을 입에 달아야 할 만큼 괴롭지. 현실이 그러니까. 네가 했던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어. 시선이 다소 한쪽으로 쏠리긴 했어도.”

레스는 양손을 움직여서 저울질하는 시늉으로 의도를 표현했다.

“쏠렸다고?”

“너도 분명 수렁에 빠져본 적이 있겠지. 사람의 존재라는 게 얼마나 덧없는지도 알고 있을 거고. 사실은 모두가 알아.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알아. 언젠가 죽는 존재들이 창조한  모든 진지한 가치들도 마찬가지고. 아자리가 내게 말하더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신이 없다고. 그저 우리뿐이지. 비슷한 생각 해봤어?”


“진지하게 대답하자면 신에 버금가는 존재는 최소한 과거에 분명히 있었어. 물론 말하는 바는 알아. 신은 신뢰할 대상이 못되지.”

그들은 숨을 고르며 한참 침묵을 지켰다. 생각이 통하고 있는  서로 느꼈다. 레스는 무생물처럼 건조한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종종 신의 흔적을 일부나마 찾을 수 있기는 해. 음계의 화음, 생태계의 균형, 별들의 움직임과 수학적 법칙 같은 거.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신이 만든 세상은 지금도 사람이 만든 세상한테 잡아 먹히는 중이니까. 기계의 진보는 신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지. 사람은 본성대로 살 거고  틀은 깨지지 않아. 현실의 틈바구니에 운명이 있을 곳은 전혀 없어.”

“...”

“진짜 무서운 점은 세상을 이해하는  불가능하다는 거야. 우리는  물고기들의 생각도 절대 알 수 없어. 알아도 어쩔 수 없기에 무시하는 게 고작이지. 그런데 어느 날….”


“흐름을 끊어서 미안한데 아까 피카니한테 크게 화가 안 났다는 말을 아직 이해 못 했어. 네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그놈이 빼앗았는데 화가  났다고?”

“뭐. 그것보다 심한 경험을 한 이후로 어지간한 일로는  인내심이 터지지 않더라고.”

레스는 반사적으로 심각한 표정에서 평소의 한가한 인상으로 돌아왔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들어줬는데도 여전히 네 머리가 이상하다는 확신만 강해지는군.”

다시 이야기를 이으려다가 레스는 입만 뻥긋거리고 무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어느  갑자기 운명을 느꼈지.”

“됐어! 그만!”


파스낙이 자기 머리를 쥐어짜면서 뇌까렸다.


“내가 졌다! 그만! 내가 졌어! 포기하겠다! 네가 이겼어! 도저히 네 이야기를 다 들어줄 엄두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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