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3권] 117회 - 불협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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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회색 도시 한복판에 검은 옷을 입은 두 마녀가 함께 노래했다. 수많은 소음이 섞인 가운데에도 마녀들의 합창은 어둠 속의 불꽃처럼 선명했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이모레 트란테! 파크샤 엔테크 파우!”
“이모레 트랏테! 팤샤 엔트레케 파!”
루나의 선창을 아자리는 메아리처럼 살짝 어수룩한 발음으로 쫓아갔다.
이해하지 못할 주문을 부르는 와중에 둘은 지금까지도 땅에도 부지런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두 마녀가 양손으로 지팡이의 위와 아래를 잡고 수평으로 치켜들자 땅에 그어둔 그림에서 빛이 솟아나 하늘을 향했다.
광선이 어둠을 할퀴고 습기 가득한 공기 속에서 살짝 난반사를 일으켰다. 솟아오른 광선들이 같은 높이에서 한 곳으로 모여들더니 환하게 터졌다. 수백 갈래로 쪼개진 광선들이 일행들 바로 위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 일대를 반구형으로 고루 감쌌다.
그때 느려졌던 시간이 돌아왔다. 천천히 내려왔던 빗방울이 다시 땅을 때리는데 루나와 아자리가 양팔을 활짝 펼치면서 청아하게 외쳤다.
“아다치아 그란데 페르라페 익사티오!”
소프라노처럼 갈라지지 않은 고음이 퍼지자 일대를 감싼 빛들이 빗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비는 땅으로 스며들었고 갈라진 대지의 틈새마다 광맥처럼 경외감을 일으키는 연한 푸른빛이 일었다. 태양이 없는 지금 이제는 하늘보다 땅이 더 밝았다.
이제 지진은 없다. 드디어 땅에는 바람과 물의 소리만 흘렀다. 두 마녀는 그제야 팔을 내리고 눈꺼풀도 내렸다. 레스가 아자리의 등을 보면서 물었다.
“너 괜찮아?”
“학교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살짝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아자리가 몽롱하게 대답했다. 그런 반응은 루나도 예상 못 했는지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며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샤카자이아가 발치에서 빛나고 있는 땅의 균열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이거… 용접된 건가?”
은은하게 빛나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받아내면서 타티아나가 말했다.
“지금 내리는 비에 전부 마법 부여를 걸어서 지진을 억누르다니. 이러고도 평범한 교수라고?”
타티아나와 루나는 지난밤에 같이 요양을 하면서 면식을 튼 적이 있다. 루나는 콜록콜록 연거푸 기침을 터트렸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한계 초월까지 쓸 생각이었다가 생각대로 안 돼서 망했다 싶었는데 어떻게든 되네? 다 죽어가는 마녀 둘이서 용케도….”
“나도 있어.”
라카키가 루나의 어깨에 올라탄 채 끼어들었다. 그 모습이 익숙한 레스 일행은 조용했고, 타티아나는 살짝 놀랬고, 루나는 기겁했다.
“꺅. 깜짝이야. 뭐야 이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벌레 쫓는 손짓으로 라카키를 내쳐버렸다. 잽싸게 피해서 날아간 라카키에게 루나는 바로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레스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일단은. 제일 심각했던 곳이 여기니까 다른 곳으로 대피해도 안심할 수 있어.”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고 그는 말했다.
“우린, 정말, 여기에는 다시 못 오겠다.”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 샤카자이아가 비난을 가득 담아서 대꾸했다. 조금 뒤늦게 아자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부터 어쩌죠?”
그들은 금방 어색하면서도 익숙해져 가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실신한 사람과 아주 작은 사람 빼고. 라카키가 어디에서 꺼낸 건지 모를 호루라기를 불더니 양손을 번쩍 들었다. 삑삑!
“싸움은 안 돼! 억지로 시작해도 서로 죽일 생각이 없는 싸움은 내가 끼어들 수 있거든!”
“그랬어요?”
레스가 의아해하는 투로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싸움을 막는 건 누군가를 해치는 게 아니니까! 여태껏 다들 싸울 수 있었던 건 서로 죽거나 죽일 각오로 벌인 거라서 못 끼어들었을 뿐! 나라고 좋아서 구경한 거 아니거든!”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다가 ‘서로’라는 대목에서 레스는 짐작이 갔다. 적정한 수준의 정당방위까지는 개입해도 타인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규약을 어기지 않지만 상호 간에 의사가 일치하는 거친 싸움을 막는 건 규약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여기서 제일 위엄있는 사람이 그렇게 장담했으니 그들로서는 아쉽지 않고 다행이었다.
두 일행은 라카키를 사이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루나였다.
“저희와 같이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죠?”
잠깐 뜸을 들였다가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뒤로 물러났다. 친구들의 뜻을 받아들이고 아자리가 그들을 대변했다.
“가야만 해요.”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면서도?”
“우린 허락받았기에 하는 게 아니에요. 해야만 해서 하는 거죠.”
말은 당차게 했으나 뒤에 있는 친구들은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은근슬쩍 옷깃을 잡아주거나 팔을 갖다 댔다.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타티아나가 의견을 냈다.
“거래하자. 파스낙을 우리한테 주고 너희들은 갈 길 가는 거지.”
샤카자이아가 말을 받았다.
“안 쫓아올 거라고 어떻게 보장하는데?”
“상식적으로 가능하겠냐. 더 나은 합의점이 없으면 이대로 사이좋게 폐렴이나 걸리시던가.”
노골적으로 짜증 내는 말투를 듣고 샤카자이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제 말이 맞아.”
레스는 손목만 들어서 상대를 삿대질한 채로 고개만 돌려 심통 난 샤카자이아를 달랬다. 아자리도 거기에는 별말 안 하고 끄덕였다. 아자리 일행이 뒤로 물러서자 타티아나가 성큼 다가와서 파스낙의 옷깃을 붙잡고 질질 끌어서 적당히 물러났다. 루나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얌전히 보고만 있었다. 어떠한 아쉬움인지는 남이 알 길은 없다.
마지막으로 레스는 타티아나를 바라보면서 자기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난 레스 알 하자르야.”
“그것 말고도 뒤에 더 붙는 게 있을 텐데?”
아자리하고 샤카자이아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낌새가 어째 또 뭘 감추고 다녔느냐고 힐난하는 분위기였다. 떫은 표정으로 레스가 조금 늦게 답했다.
“추방됐거든.”
“아.”
턱을 들어 올려서 묘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상대를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레모니 타티아나. 가운데 이름은 주치카. 네 이름은 기억하겠다.”
“그래. 루나 씨는 피카니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레스는 어쩔 수 없이 왼손으로 상대에게 작별하는 손짓을 하고 등을 돌렸다. 친구들이 그를 따라서 다 같이 몸을 돌리고 가던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 앞에는 카르델 캐시디 중사가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먼저 들고 있는 총을 하늘로 쳐들고 위협 사격을 했다. 군용 소총탄의 메마른 소리가 가라앉을 동안 그는 이쪽을 겨누면서 목소리가 닿을 만큼 다가왔다.
“가진 물건 전부 버리고 엎드려.”
샤카자이아가 활에 손을 대려 하자 아자리가 말렸다.
“먼저 공격하면 라카키 씨가 우릴 못 지켜요 언니.”
한편 라카키는 카르델을 알아보고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말 의외의 등장이네. 체포했을 때가 몇 년도였지?”
카르델이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면서 외쳤다.
“소위! 제압해!”
“하고 싶어도 못한다만.”
그녀는 눈짓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라카키가 팔짱을 끼면서 ‘엣헴’하고 거드름을 부렸다. 카르델은 소총의 견착을 유지한 채 이번에는 루나를 보았다.
“마법사님도 준비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루나가 얼버무리려는 걸 카르델은 날 선 목소리로 낚아챘다.
“페어리는 무조건 나중에 움직입니다! 기선을 잡으십시오 마법사님!”
일동은 허를 찔려서 순간 라카키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굳어버린 라카키의 모습을 보았고 상황은 다른 국면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싸움이 시작되던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로 그럴 의향을 갖고 싸울 생각은 없다시피 했고 무엇보다 라카키가 막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라카키라도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자체는 미리 막을 수가 없다. 카르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긴장을 풀었던 일동은 숨을 고르면서 서로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또 다른 결투의 시작이다. 더 빠른 쪽이 이길 것이다. 레스가 친구들에게 속삭였다.
“묶여있으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방금 총소리를 들었을 거야.”
“전 여기서 더 무리했다간 저번처럼 며칠 앓아눕기 직전이에요.”
아자리가 그렇게 말하자 샤카자이아가 조급하게 말했다.
“차라리 내가….”
“차라리 뭐?”
“난 그나마 집이 가깝잖아. 추장님이 날 진심으로 추방한 건 아니었던 거 나도 알아…. 너희들이 잡히는 거에 비하면 난 상황이 대수롭지도 않고.”
“아 닥쳐 두 번이나 구하러 가긴 싫으니까!”
평소답지 않게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레스는 쏘아붙였다. 레스하고 아자리 모두 제대로 싸울 처지가 아니니 수적으로 불리했다. 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표정을 짓다가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이 손을 들어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루나는 눈으로 보일 정도로 동요하면서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카르델이 그녀를 향해 재촉했다.
“마법사님! 저희의 목적을 잊으셨습니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의심이 든 카르델은 조급해졌다.
“지금 저들을 동정하는 겁니까!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루나는 등에 떠밀려서 엉거주춤 자세를 잡았다. 그 행동 하나로 그들은 대치의 종말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 갈등과 결단이 거의 같은 순간이 지나갔다. 루나가 지팡이를 한 손으로 쥐면서 외쳤다.
“냐후차테 레스라라피!”
외치는 방향이 샤카자이아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한 마음으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당황하는 사이 샤카자이아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녀는 레스의 폰초 망토의 자락을 아자리의 얼굴에 씌우고 다른 손으로 레스의 눈을 가렸다.
“리카인 익사티오 리브레!”
루나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 때문에 카르델은 눈가를 부여잡았다. 그가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져서!”
바로 옆에 있던 타티아나는 섬광이 뇌까지 파고들어서 놀라 주저앉았다. 일행은 상황을 파악하고 다 같이 외쳤다.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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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딘이 건조한 목소리로 카르델에게 물었다.
“마법사님의 실수는 고의적이었다고 너도 확신하나?”
“예.”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공책에 글자를 한 줄 더 추가했다. 피카니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타티아나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루나 교수가 뭐라고 외친 건지 톤토에게 물어봤는데 ‘눈을 가려라’라고 신호한 거라더군요.”
“물어봤다고? 자네 원래 엘프어 할 줄 알지 않았던가?”
“이쪽 지방 방언은 모릅니다. 하지만 루나 교수는 소수민족들의 문화에 박식하더군요.”
이번에는 피카니가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마법사님이 사쿠라비의 말로 레스에게 신호를 보냈어도, 당신이 대처할 수 있었겠어?”
“난 사쿠라비어도 할 줄 알아. 공작원이니까.”
그리고 루나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하딘은 그 사실까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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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델은 조준할 때 쓰던 오른쪽 눈을 감고 총몸을 잡는 손을 바꿔서 여태껏 감았던 왼쪽 눈으로 조준했다. 그걸 보고 샤카자이아가 활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에 카르델이 쏘았다. 탄환이 그녀의 종아리를 뚫었다. 그녀의 이름을 외치면서 감싸는 일행들의 모습을 카르델은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노리쇠를 당겨 다음 탄을 장전했다.
레스 일행에게 바로 라카키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쪽은 이제 문제가 안 되었다. 카르델은 다른 위협을 바라보았다.
“안 돼!”
루나는 그들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카르델은 진지하게 어느 쪽을 겨누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루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그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어나야 해! 어서!”
레스는 그녀의 손을 어깨에 올리고 악을 지르면서 일으켜주었다. 샤카자이아의 다리에 난 상처는 라카키가 치료해줬으나 다리는 아직도 놀라서 굳어있었다. 더 쥐어짤 것도 없는 체력으로 무리하던 레스는 부축하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고꾸라졌다. 아자리는 혼란에 빠져서 앞뒤를 번갈아 보았다. 어느새 타티아나도 머리를 흔들면서 다시 정신을 차리는 기색이었다.
“일 났다….”
피카니, 아비투스, 히콕으로 이루어진 일행이 눈에 보였다. 돌아온 일행들은 루나와 카르델 사이에 흐르는 심상찮은 기류를 느끼고 적잖게 당황했다.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히콕의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카르델은 이제 다 끝났다고 조금 긴장을 놓았다. 루나도 이제는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위험한 행동을 일으킬 여력은 없어 보였다. 모든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카르델은 뜬금없이 왜들 저러는지 몰랐는데 뒤늦게 그의 귓가에 이쪽으로 네발 달린 것들이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사람 몸집만 한 늑대가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니미…?!”
여태껏 계속 앞으로 신경을 쏟느라 이쪽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카르델은 놀란 건 물론이고 더불어 과거에 묻혀있던 아픈 기억까지 되살아났다. 늑대 바로 뒤에는 여우 수인이 말을 타고 뒤따라 오고 있었다.
“그오으으으! 웍! 웍! 웍!”
늑대는 카르델에게 달려들어서 그가 반사적으로 내민 소총을 앞발과 입으로 빼앗아버리고 그대로 들이박았다. 피카니가 권총을 꺼내서 저쪽을 향해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총알은 안 나갔다.
“하필 지금 불발이라고?!”
히콕이 말했다.
“그게 아냐. 라카키 선배님이 여기 있어서 그래.”
카르델은 자기 앞에서 험악한 얼굴로 울음을 짖는 늑대 때문에 오금이 얼어버렸다. 단테가 자신의 일행들에게 외쳤다.
“서둘러요! 어서!”
레스 일행은 나타난 희망에 다시 힘을 되찾고 일어났다. 시력을 되찾은 타티아나는 심호흡하면서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장 몸 상태가 좋았던 히콕이 순식간에 저쪽으로 박차고 달려갔다가 자기 앞에 나타난 요정에게 가로막혔다.
“삑!”
라카키는 교통업무를 맡은 사람처럼 수신호를 하면서 호루라기를 불었다. 허우적거리면서 힘겹게 움직이던 피카니는 점점 자신들에게서 멀어지는 레스 일행에게 조바심을 느끼다가 잊었던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황동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상자를 꺼냈다.
마침 고양이처럼 양손을 땅에 대고 축지법을 쓰려던 타티아나는 시야 한구석에서 피카니가 그걸 꺼내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잠깐만! 지금은 안 돼!”
싸우면서 죽기 직전까지 몰려도 내지른 적이 없는 귀 째지는 목소리였다. 바로 옆에서 같이 움직이고 있던 아비투스가 그 말을 듣고 피카니를 말리려 들었으나 이미 뚜껑은 열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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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딘의 탁자 위에 금속 상자가 놓여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특징도 없었다. 그가 검지 손톱으로 뚜껑을 가볍게 치자 틱! 하고 별 볼 일 없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뭐지?”
타티아나가 뚜껑을 열었다. 금속 상자에는 원반형 오르골이 장치되어 있었다. 따로 태엽은 감지 않고 뚜껑만 열었는데도 오르골은 알아서 움직였다.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곡이었다. 들리는 음은 모조리 불협화음뿐이고 오르골 특유의 공허한 느낌까지 겹쳐져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타티아나는 뚜껑을 닫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모든 종류의 마법을 방해하는 물건입니다. 마법이 곧 체질로 이어져 있는 마족한테도 효과가 있죠.”
“무슨 원리지?”
“마법을 쓸 때 언어와 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도 마법사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특별한 음계의 조합은 마법에 지대한 영향을 일으킨다는군요.”
“그럼 이 상자가 특별한 이유는 상자 자체가 아니라 이 안에 들어있는 음악이라는 거군.”
“예. 그런데 지금은 효과가 미미하군요. 그 난리를 겪으면서 파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굉장히 정교한 악보라서 음표 하나라도 손실되면 큰 변수가 됩니다.”
피카니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아비투스가 손을 들고 물었다.
“이게 그토록 아껴왔던 비장의 수단이라면 왜 파스낙과 만났을 때 바로 쓰지 않았습니까?”
타티아나는 오른팔에 두른 석고 붕대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잠깐 가려운 곳을 긁다가 설명했다.
“얻고 나서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꺼내도 괜찮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카르델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만사에 철저한 척하더니.”
“파스낙은 혼혈이야. 반은 인간이지.”
잠깐 뜸을 들이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게다가 나 같은 마계 출신의 공작원은 다양한 상황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 이 오르골이 움직이면 나라도 축지법이나 경공술 같은 무공은 쓸 수 없어도 몸 자체는 멀쩡히 움직여. 파스낙처럼 오랜 세월을 암흑가에 몸을 담은 놈이라면 나보다 더할지 어떻게 알겠냐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무공이라는 거 대체 무슨 기술이야?”
“입 닥쳐 카르델. 이야기가 샌다.”
하딘은 타티아나에게 하던 것부터 계속하라고 손짓했다.